30년 전에 누군가가 평했듯이 그녀는 정적(靜的)이며, 정적(情的)이고, 정적(精的)인 배우였다.
고운 자태에 살포시 내려앉은 학 같은 목덜미에서부터 맵시 있는 한복의 선을 닮은 몸놀림까지.
결코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진정성이 빛나는 두 눈.
관객은 누이처럼 어머니처럼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의 ‘차마 접근하기 어려운 단아한 신비’는, 독수공방과 이루어질 듯 말 듯한 성적 판타지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그녀를 놓았다. 이 ‘아슬아슬함’은 전근대적·유교적 가치관과 근대적 가치관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빚어진 심리적 억압에 갇혀 있는 슬픈 여성의 자화상과 아찔한 남성 판타지의 타협점이었다. 그러나 그 성애(性愛)는 1970년대 토속 에로물들이 여배우의 육체를 다루는 방식보다 훨씬 우아하고 아름답다는 점에서 최은희는 운이 좋은 편이다. 한국영화의 최대 전성기를 구가하고 한국영화사상 가장 훌륭한 감독과 함께하는 겹경사를 누리는 와중에, 그녀는 섬세하고 절도 있으며 한없이 깊은 정적인 연기의 예증(例證)으로 영화사를 장식한다.
놀라운 점은 그녀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나 ‘벙어리 삼룡이’의 한국적 여인상에만 안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시체애호 취미마저 엿보여 변칙적 욕망의 도가니라 불러도 좋을 영화 ‘다정불심’을 보자.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을 연상케 하는 이 사극에서 그녀는 공민왕을 유혹해 파멸에 이르게 하는 팜 파탈적 평민여성과 헌신적인 아내 노국공주의 1인2역을 맡아 열연했다. ‘지옥화’에서는 놀랄 만한 관능성과 치열한 생존본능을 지닌 창녀 역을 너끈히 소화하기도 했다.
배우 최은희의 면모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쌀’이나 ‘촌색씨’에서는 자연의 모습을 닮은 건강한 또순이로, ‘젊은 그들’에서는 남장미인으로, ‘어느 여대생의 고백’에서는 법과대학에 다니는 엘리트 여대생으로 분한다. 북한에서 만들어진 ‘소금’이나 ‘탈출기’ 등에서는 가난에도 굴하지 않는 무산계급의 어머니로 변신을 거듭한다. 그녀의 연기는 모양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각으로 이루어진 다면체였다.
최은희의 이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기록은 그녀가 충무로에서 매우 희귀한 ‘여성 감독’이었다는 점이다. 1965년 그녀는 한국영화 사상 여자로는 세 번째로 메가폰을 잡는다. 데뷔작인 ‘민며느리’와 1967년작 ‘공주님의 짝사랑’, 1972년작 ‘총각선생’을 거쳐, 북한에서는 ‘약속’이라는 작품을 연출했다. 그녀 자신은 “신필름에 감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쑥스럽게 웃지만 남편이자 동료인 신상옥은 그녀의 영화에 대해 “카메라도 좋고 포인트도 좋다”고 평한다.
평론가 변인식의 말을 빌리자면, 최은희는 조미령, 노경희, 이민자, 윤인자, 문정숙, 도금봉, 김지미에 이르는 이른바 ‘비로드 시대의 여배우’ 중 하나다. 이는 아마도 1960년대라는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거친 일단의 여배우를 수식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녀는 ‘아리랑’의 신일선, 한은진, 김소영, 김선재의 바통을 잇는 ‘완숙하고 신비로운 조선여인상’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여배우이기도 하다.
최은희의 영광과 도전 뒤에는 당대의 거장, 신상옥 감독이 있다. 어쩌면 두 사람은 누가 누구에게 공(功)을 돌리기 어려운, 흡사 암수동체 같은 동업자이자 친구이며 동지였을 것이다. 이미 남편이 있는 몸으로 세상의 비난을 무릅쓰고 결합을 택한 여배우와 당대의 감독은 영화라는 고리만으로 버티며 50년의 세월을 넘었다.
황무지에서의 새 출발
이 인터뷰는 납북된 비운의 여배우나 신상옥 감독의 아내가 아닌 ‘연기자 최은희’의 삶과 영화를 회고하기 위해 기획됐다. 인터뷰가 그녀의 집 거실에서 이루어진 덕분에 필자는 신상옥 감독과도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 누가 누구랄 것 없이 서로를 닮아 미움과 앙금마저도 이지러지고 녹아버린 전형적인 노부부였다. 필자가 가지고 간 ‘여성영화인사전’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고, 숱한 포즈를 취했을 텐데도 카메라기자 앞에서 어색하다고 미소 짓는 그녀는 얼마나 다정다감한 여성이던지. 결코 할머니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 이 아름다운 여배우에게선 여전한 ‘소녀’의 향기가 잔잔하게 묻어났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세요?
“우리가 (북한에서) 돌아오니 예전에 갖고 있던 재산은 건물 하나 안 남은 상태였어요. 그런데 마침 안양시에서 ‘안양을 다시 영화인의 도시로 만들고 싶다’고 해서 재작년 가을에 전시회를 했어요. 아파트 사잇길을 ‘신필름로’라고 명명까지 해가면서. 그래서 우리는 ‘이왕이면 영화학교를 하자’고 제안했죠. 36년 전에 우리가 세웠던 ‘신필름 부설 안양영화예술학교’의 맥을 잇고 싶었던 거죠. 커리큘럼이나 과정을 전문대 기준으로 만들어서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어요. 당분간은 어떻게든 학교를 성장시키는 게 가장 큰 목표예요.”
-신상옥 감독은 ‘신필름’을 다시 운영하는 거죠?
“작품이 많이 나오지 않으니까 운영이라고 하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다시 시작하려니까 어려움이 많아요. 지금 준비하고 계신 것도 언제 시작할 수 있을지 확언할 수 없는 상태거든요. 신 감독이 벌써 20년 넘게 칭기즈칸을 그린 영화를 만들고 싶어해요. 워낙 대작이다 보니 제작비가 많이 들어서 늦어졌지만 요즘에는 한국영화도 제작비를 충분히 투입하니까 시도할 만 하죠. 영화계가 무척 달라졌어요. 예전에 1000만 관객을 어디 상상이나 했겠어요. 세월이 바뀌고 환경이 좋아지는 만큼 영화도 달라져야죠. 16mm 카메라로 촬영하던 우리 젊었을 때랑은 많이 다르니까요.”
(계속)
-어린 시절 얘기부터 해보겠습니다. 예전에 한 인터뷰를 찾아보니 부친이 중앙전화국 직원이었고 2남3녀 중 셋째 딸이더군요. 부모님이 많이 예뻐하셨을 텐데 배우를 한다는 말에 반대하지는 않으시던가요.
“반대가 심했죠. 그래서 데뷔가 늦었어요. 학교를 다니는 중에 자꾸 배우가 되겠다고 하니까 완강히 반대하셨거든요. 그러지 않았으면 조금 더 일찍 시작할 수 있었겠죠. 다행히 연극에 데뷔하자마자 주연을 맡기도 하고 운이 좋았어요. 해방되지 않았다면 아마 일본에 건너가 배우생활을 했을 거예요. 일본에서 영화를 하자는 권고도 많이 받았지요. 다행히 곧 광복이 돼서 우리나라에서 영화일을 하게 됐죠.”
-어릴 때는 키가 유별나게 크고 남자아이 이상으로 활발해서 ‘오빠’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더군요(웃음).
“무용이나 음악,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공부는 원래 싫어하다 보니 잘하지도 못했고, 주로 그림을 그리든가 책을 보든가 하면서 시간을 보냈죠. 어머니는 늘 ‘차라리 살림을 하라’고 꾸중하셨어요. ‘오빠’라는 별명은 성격이 적극적이어서 붙여진 거였어요. 스크린 속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죠. 학교 다닐 때는 리더가 돼서 아이들을 이끌었거든요.
그러다 데뷔하고 나서 180도 바뀌었어요. 처음 극단에 들어갔는데 선배들이 이름을 물으면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니까요(웃음). 운 좋게도 첫무대부터 비중 있는 조연급 역할이 주어졌죠. 이후에도 죽 그렇게 연기를 했어요. 지금처럼 영화학교나 연극학교가 있던 시절이 아니니까 극단에서 연구생으로 있었죠. 그 때가 열일곱 살이었어요.”
연극은 친정, 영화는 시집
-극단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동창생한테 끌려가다시피 갔어요. 솔직히 나는 연극이나 영화 한 편 제대로 본 적도 없었어요. 우연히 친구 손에 끌려가서 본 영화가 문예봉씨가 주연한 ‘임자 없는 나룻배’였는데, 거기 보니 등장인물이 모두 이세상 사람 같지 않고 선녀 같았어요. 그래서 ‘나도 저렇게 돼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죠. 그때는 배우를 천시하던 시절이어서 여배우가 무척이나 귀했어요. 강홍식 선생이라고 배우 강효실씨 부친, 그러니까 최민수의 외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유명하셨는데, 그 분이 일부러 분장을 하고 여자 역할을 하셨을 정도니까요.
여러 가지로 어려웠지만 배우가 된다는 일념으로 무대에 올랐어요. 그렇게 연극을 먼저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본 선배들이 영화를 하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했죠. 그래서 처음 했던 영화가 1947년작 ‘새로운 맹서’예요. 해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죠. 그 무렵 ‘토월회’가 재조직되어 스카라극장에서 ‘40년’이라는 연극을 공연했는데 그 작품에 저는 중국 옷을 입은 장님 소녀 역할로 잠깐 출연했어요. 공연이 끝나고 동양극장에서 다른 작품을 하는데 복혜숙 선생이랑 최운봉 선생이 찾아오셨더라고요. ‘이번에 새로 영화 들어가는데 하겠느냐’는 거였죠.
그때만해도 내가 철이 없고 콧대가 높아 ‘무슨 역할인데요?’하고 되물었어요. 가져오신 대본을 봤더니 주연에다 어촌처녀 역할이니까 나에게 딱 맞거든요. 그래서 하겠다고 했죠. 그 작품이 바로 ‘새로운 맹서’로 영화 데뷔작이에요. 그 다음에 ‘밤의 태양’ ‘마음의 고향’으로 이어졌죠.”
-영화판이라는 데가 어떻던가요, 어린 나이에. 20세 전후가 아니었나 싶은데.
“나한테 연극은 친정 같고 영화는 시집 같아요. 연극무대는 앙상블을 위해 전체단원이 한데 모여 집체적으로 생활하잖아요. 연습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러다보니 서로 친해져서 가족 같은 분위기가 되는데,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찍을 때만 잠깐 모였다가 헤어지면 그뿐이고, 그러니 정이 안 갔죠. 영화를 하는 동안에도 틈만 나면 친정집 가는 기분으로 연극하러 갔어요. 오죽하면 신 감독이 배우극장이라는 극단을 따로 만들었겠어요.
‘새로운 맹서’를 만든 신경균 감독은 일본에서 공부하신 분이었어요. 나 나름대로는 연극에서 주연도 했으니까 연기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는데, 사실 좌절을 많이 했죠(웃음). 연극에서는 동작이나 대사가 커야 감동이 전달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잖아요. 무대에서 하던 대로 하니까 감독님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딱 자르는 거예요.
그때까지 클로즈업이 뭐고 바스트가 뭔지도 모르고 있었으니 할말 다했죠. 선배들이 일일이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시커먼 기계가 앞에 딱 들이닥치니까 주눅이 들죠. 제약이 어찌나 많은지 정이 안 붙더라고요. 감독한테 야단을 맞고는 서럽고 속이 상해서 막 울었어요. 연기를 못한다면 오히려 나을 텐데 나름대로 감정을 잡아서 하는 데도 오버액션이라고 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무척이나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아요.”
-데뷔작품은 반응이 좋은 편이었나요.
“그때는 35mm 영화를 찍는 것만으로도 긍지를 갖던 시절이고 영화가 많이 안 나오던 때여서 반응이 좋았죠. 영화계에서는 신인이 하나 나왔다고 했고요.”
(계속)
결혼하자마자 후회
①1959년작 ‘동심초’ ②1961년작 ‘성춘향’
-그 직후에 그 영화의 촬영감독과 첫 번째 결혼을 하셨죠.
“연극계에서도 프로포즈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결혼할 마음이 없었는데, 그 무렵 조미령이 제작자와 결혼을 한 거예요. 비슷한 나이의 동료가 갑자기 시집을 가버리니까 어린 마음에 ‘나는 이러다가 결혼을 못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죠. 그 시절에는 스무 살만 돼도 노처녀라고 다들 걱정하곤 했으니까요. 하지만 예전부터 연기자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첫 영화를 찍을 때 출연자 중에 처녀가 나 하나였는데 두 사람이 프로포즈를 했어요. 나와 결혼하게 된 김학성씨는 촬영기사였죠. 갑자기 다방에 데려가길래 영화에 관해서 뭘 좀 가르쳐주려나 싶어 쫓아갔더니 갑자기 자신의 불행한 개인사를 쭉 늘어놓는 거예요. 게다가 그 누님도 그 영화에 같이 출연하셨는데, 둘이 잘 어울린다는 둥 옆에서 분위기를 이끄는 거예요. 결국 얼떨결에 결혼을 하게 됐죠. 지금 생각하면 엄청나게 순진했어요.
집에서도 반대가 대단했거든요. 나이도 열두 살이나 차이 나고. 속으로는 ‘어쨌든 배우는 아니잖아, 기술이 있으니까 밥 굶기지는 않을 테고’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결혼하자마자 후회가 막심했죠. 지극히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니까 정나미가 떨어졌죠. 친정에 가서 어머니한테 하소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6·25 전쟁을 맞게 됐어요.”
-6·25때 고생을 심하게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난도 못 가고 인민군 점령하의 서울에 남았다가 경비대 협주단 단원으로 끌려갔죠. 연극계, 영화계, 무용계의 이름깨나 알려진 이 가운데 피난 못간 이는 모두 왔더군요. 한동안 200여명이 명동성당에 갇혀 꼼짝없이 숙식을 했죠.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직전 인민군에게 끌려 북으로 올라갔어요. 김동원씨와 주증녀씨는 개성을 거쳐 이북으로 가고, 나와 김승호씨는 청량리쪽으로 해서 이북으로 올라갔는데, 공습이 계속되니까 밤에만 걷고 낮에는 민가에서 잤어요. 그렇게 걷고 걸어 어느 틈에 38선까지 넘었는데 그 와중에 김승호씨가 도망쳤죠. 그렇게 누군가가 도망가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어찌나 겁을 주는지…. 결국은 저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망쳤어요. 우리집에서는 내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 무렵 김학성씨는 군 소속 뉴스 카메라맨으로 일했어요. 나는 최전방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고 있는데 무심하게도 소식 한 장이 없는 거예요. 인편을 통하면 방법이 없는 게 아니었거든요. 정말 매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사람과는 평생을 같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거죠.”
신상옥과의 만남
1964년작 ‘벙어리 삼룡이’
-그러다가 신상옥 감독을 만난 거군요. 첫 만남을 기억하세요?
“동료배우 황남씨가 영화를 함께 하자고 제안해 왔어요. 내가 출연하고 있던 연극 ‘춘향전’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거였죠. 중국집에서 만나 식사를 하면서 감독을 소개하는데 바로 신 감독이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언젠가 어디서 본 듯했어요.
전에 내가 대구에서 연극할 때 키 큰 사람이 기둥에 기대어 서서 앉지도 않고 연극을 관람하는 거예요.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중에도 자꾸 눈에 띄었죠. 다음날 보면 또 와서 서 있고. 그 사람이 바로 신 감독이었던 거죠. 내가 연극하는 걸 쭉 지켜봤더라고요. 자기가 영화에 쓸 배우를 물색해온 거였어요.
한참 집안일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 무렵에 사육신 이야기를 다룬 윤백남씨의 연극 ‘야화’에 출연했는데, 체력이 많이 소진되는 역할이었어요. 마침내 공연을 하다가 무대에서 쓰러졌죠. 그걸 객석에서 구경하던 이 양반이 뛰어들어와서는 나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갔어요. 나중에 정신차려 보니까 선배 언니가 ‘신 감독이 너 업고 병원에 데리고 왔다’고 말해주더군요. 이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백마 탄 왕자가 구원하러 왔다’고 농담하곤 했죠(웃음). 나중에 보니까, 이 사람이 내가 한 연극을 안 본 게 없어요. ‘맹진사댁 경사’며 유치진 선생의 ‘왜 싸워’며. 나만 몰랐던 거예요. 그렇게 해서 만났죠.”
-신 감독은 아직 총각이었고.
“총각이었지, 법적으로는.” (웃음)
-무슨 영화 같은 스토리인데요. 그러고 나서 신 감독과 작업해보니 어떻던가요. 다른 감독과는 많이 다르던가요.
“맨 먼저 ‘코리아’라는 다큐멘터리를 했고 그 다음에 극영화 ‘꿈’을 찍었는데, 신 감독은 배우를 참 편하게 해주는 감독이에요. 다른 배우들도 그렇게 느낄 거예요. 일단 배우한테 맡기는 스타일이죠. 시켜보고 거기서 좋은 점만 골라 자기가 화폭에 담아요. 어떤 감독은 이만큼 봐라, 눈을 삼각형으로 굴려라 하며 세세하게 지시하곤 하는데, 나는 솔직히 그런 스타일 별로였거든. 감정만 제대로 나오면 되지 눈알을 어떻게 돌리든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신 감독은 그런 점에서 참 편했죠.
이후로 ‘무영탑’ ‘젊은 그들’ ‘지옥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으로 이어졌죠. 초기에는 흥행이 부진하다가 ‘어느 여대생의 고백’부터 성공해서 쭉 괜찮았어요. 처음에는 주먹밥 싸 가지고 삼륜차 타고 다니면서 촬영을 했어요.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 돈으로 찍었지 남의 돈으로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거든요. 의상도 모두 집에서 만들고. 심지어는 집에 있는 자개장까지 들고 나가 소품으로 썼어요. 그러다 보니 집에는 뭐든 들여놓고 살지를 않았어요. 갖다 놓으면 뭘 해요, 금세 안양촬영소 소품실에 가 있을 텐데. 아무리 못 가져가게 해봐야 내가 일 나간 다음에 조연출들이 와서 다 집어가곤 했죠.”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