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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공동의 증언을 위한 에큐메니칼 선교 과제들
제 9 차 포르토 알레그레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는 “에큐메니칼 대화”의 시간을 통해 종교문화 영역, 교회와 에큐메니칼 운동 영역, 지정학적 국제정치 영역, 사회경제 영역에서 상호 연관된 22가지의 선교적 과제들에 대해 논의하면서, 교회들이 급변하는 오늘의 상황에 응답하기 위해 어떻게 자신들의 선교구조와 공동의 증언과 행동의 내용을 재구성할 것인가를 모색했다. 이는 교회들이 전 피조 세계의 치유와 화해와 변혁과 변형을 위해 이 세상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변혁적 은총의 선교에 동역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성찰이었다.
오늘 우리는 변화된 종교문화적 지형 속에 살아가고 있다. 교회들의 선교는 다른 종교들의 신앙과 이데올로기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그들과의 상관성 속에서 교회들의 선교의 신학적 기초와 내용을 재구성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 단일문화지향적 세계화가 진행되는 다른 한편에서, 많은 지역의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종교와 문화의 다양성을 경험하며 살아야 하는 도전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더욱이 종교문화적 다양성이 생명의 풍성함을 위한 조화가 아니라 생명을 파괴하는 갈등으로 표출되고 있는 상황들 속에서 치유와 화해의 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교회공동체들의 선교의 진정성은 증명되어야 한다.
또한 가부장적 시대문화가 생명평등의 가치에 기초한 여성문화의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교회들은 남녀가 함께하는 선교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여성들의 삶과 행동 양식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진정한 남녀의 파트너 십은 정의와 사랑을 이루기 위한 의사결정 과정과 그 실천에 참여하는 기회의 나눔을 통해서도 강화되어야 한다. 또한 오늘 인간의 성에 대한 담론과 문화가 개방되고 성행위를 통해 전달되는 질병들, 특히 HIV와 AIDS에 의해 가속화 되는 생명파괴의 현실에 직면하여, 교회들은 동성애를 포함한 인간의 성에 대한 신학적 교회적 윤리적 입장을 생명의 관점에서 재정리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물인 인간의 성을 표현하는 다양한 행위들에 대한 교회들의 서로 다른 입장들이 일치를 저해하는 상황 속에서, 교회들은 인간의 몸과 영혼, 세상과 교회의 상관성을 통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편 교회들은 새로운 정보매체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양식 전반과 문화지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양식의 표현과 행동양식의 변화에 대해 비판적으로 숙고해야 한다. 정보와 매체의 권력화가 인간들의 삶에 불평등과 지배적 조작을 가속화하고 있는 사이버 세계에서 교회들은 복음적 의사소통을 위해 선교의 내용을 재구성해야 한다. 돈과 권력에 기초한 세계화의 가치가 장애인들을 비롯한 ‘약자’들의 사회적 진화로부터의 도퇴를 부추기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 교회들은 장애인들을 비롯한 모든 약자들을 위한 포괄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장애인들을 향한 자선의 해석학은 그들을 한 공동체의 지체들로서 인정하고 강화하는 상호의존성의 해석학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장애인들 속에서 더욱 온전하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제약됨 없는 하나님의 형상에 기초한 치유의 신학이 발전되어야 한다.
오늘 교회들 사이의 관계와 에큐메니칼 운동이 위기적 지형변화에 직면해 있다. 공동의 이해와 일치를 향한 에큐메니칼 여정을 통해 포괄적이며 광의적인 에큐메니즘의 실천이 모색되는 한편, 전통적 교파중심 교회들 사이에 자기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신앙 재 고백 과정들이 채택되고 있다. 서로 다른 역사적 신학적 배경을 가진 교회들 사이에 가시적 일치를 이루기 위한 대화의 노력을 지속하는 한편, 종교적 다양성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들이 일치에 미치는 영향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기구적 지평 밖에 있는 교회들과의 에큐메니칼 관계 형성은 피할 수 없는 신학적 실천 명령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교회들은 기존의 기구들 중심의 에큐메니칼 운동 구조를 하나의 포괄적 지구포럼으로 전환하는 모색을 시도해야 한다.
한편 교회들의 선교의 본질인 디아코니아 사역의 재구성을 요청하는 도전이 특수사역을 담당하는 교회개발기구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지구적 지역적 상관성을 가지고 세계경제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국가별 대륙별 정부 기구들과 교회 및 사회운동단체들 사이의 관계 지형에 변화가 생겼고, 이로 인해 에큐메니칼 자원을 나누는 전통적 방식도 도전을 받고 있다. 이제 지역교회들의 디아코니아 사역은 세계화에 편승한 지구적 지역적 특수사역기구들과의 경쟁적 관계 속에서, 교회들이 지닌 개발에 관한 전문성 결여와 세계화에 대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비판적 인식이 초래하는 의도적 배제를 극복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디아코니아 선교사역의 지속을 위해 과연 교회들의 협의체에서 특수사역기구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에큐메니칼 구조로 전환해야 하는지 숙고해야 한다.
오늘 에큐메니칼 운동은 전환의 극점에 서서 기억과 경험들, 새로운 요구들, 포괄적이며 광의적인 에큐메니즘에 대한 비전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며 에큐메니칼 운동의 재구성 과정을 수립해야 한다. 특히 오늘과 내일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원동력인 젊은 세대들의 참여를 극대화하므로 지속 가능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냉전시대 해체 이후 세계화의 물결과 함께 세계의 지정학적 역학 관계는 ‘제국’의 단일지배 형태로 재구성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보여준 제국의 힘이 유일무이한 권력의 상징으로 각인되면서, 교회들과 지배권력 사이에 유지해야 할 예언자적 관계를 시험하고 있다. 가난한 자, 수난 당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당파적 선택은 정의와 평화에 기초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서 추구하는 교회들의 예언자적 선교의 기초이다.
오늘 변화하는 지정학적 역학관계 속에서 제국과 그들의 힘과 논리를 뒷받침하는 많은 국제기구들과 국가권력들을 향해 교회들은 과연 예언자적인가? 교회들은 정의와 진리의 길을 걸으며 수난의 열정을 가지고 불의에 의해 고통 당하는 생명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가? 교회들은 불의한 지배권력과 맘몬의 세력으로부터 인간들의 생명과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 카이로스적 결단의 순간들을 살아가는가? 교회들은 지구생명공동체의 평화와 인간들의 삶의 안전에 대한 새로운 위협들에 응답하는 순교적 증언을 위해 자신들의 성채에서 나와 성문 밖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교회들은 자국과 자교회의 이해관계의 제반 범주들을 넘어서서, 구조적으로 열악한 삶의 조건들 속에서 불가피하게 새 길을 찾아 온 이민자들과 기꺼이 자신들의 삶과 자원을 함께 나누므로, 세계화의 물결로 인해 뿌리 뽑힌 나그네들의 모습으로 교회들을 찾아 오시는 하나님을 영접하며, 그들을 위한 공동체적 희망의 증표가 되고 있는가? 교회들은 국가사회의 공적 생활과 정치적 영역에서 자신들을 사적 영역으로 후퇴시키는 애매모호함을 벗어나, 신앙과 진리와 억압받는 자들의 입장에서 교회와 정치 경제 권력 사이에 변혁적 윤리적 관계를 정립하고 있는가? 오늘 교회들은 지정학적 권력관계 속에서 교회들을 향해 제기되는 이 같은 도전적 질문들에 대해 책임적으로 응답하고 행동하므로 은총으로 변혁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
오늘 교회들은 세계화로 인해 야기되는 지구적 지역적 사회경제 상황의 변화에 대해 가난한 자들과 주변화된 사람들을 위한 정의와 사랑의 입장에 서서 응답해야 한다. 가난은 부의 생산과 나눔의 과정에서 약자들의 기본 필요를 부정하고 불평등과 불의를 재생산해내는 모순된 정치경제 구조의 결과물로, 만물의 생명의 풍성함을 위해 오신 하나님의 은총의 임재를 부정하는 실체이다. 오늘 교회들은 자신들이 부와 가난을 생산, 재생산하는 제반 과정들과 구조들과 맺고 있는 상관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가난의 퇴치를 명목으로 하는 개발에 힘쓰기 보다는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부의 나눔을 먼저 실천해야 한다.
한편 HIV와 AIDS를 비롯한 각종 전염병에 의해 인류의 건강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오늘 교회들은 하나님의 치유와 변혁의 능력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교회들은 의학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부정의와 불평등 때문에 가난한 자들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현실과 그들에 대한 교회들의 배타적 태도로 인해 야기되는 주변화 현상을 직시하면서, 자신들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치유와 변혁의 공동체가 되도록 갱신해야 한다.
또한 오늘 교회들은 유전공학을 비롯한 새로운 생명과학 기술의 발전이 창조와 생명의 윤리를 거슬러, 하나님이 창조 하신 인간과 자연생명의 신성함과 존엄성에 도전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자연이 인간의 어떤 자의적 목적을 위해서도 희생물로 폐기될 수 없음을 증언해야 한다.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그 자연을 대상화한 인간들의 상처와 고통, 그로 인한 근본적인 자연생명의 파괴현상을 목도하면서, 교회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 안에서 공존하는 지구생명공동체의 분리할 수 없는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자연생명의 보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원주민들, 생명농업실천가들, 환경운동가들과 연대하여 지구자원 돌보기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교회들은 오늘 모든 인간들이 그들의 종교와 인종과 국적과 피부색과 신념과 성에 관계 없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성상들 (living icons of God)이라는 신앙고백에 기초하여, 인간사회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인종차별주의라는 사회적 조작 행위가 형성해 가는 편견과 불평등과 폭력적 갈등과 죽음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들은 먼저 자신들 속에 있는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주의로부터 해방된 평등한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오늘 교회들은 교회들의 안과 밖에서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자행되고 있는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가부장적 통제와 폭력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며, 자신들의 공동체가 여성과 어린이 들을 위한 생명의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신학적 목회실천적 변화와 갱신을 이루어야 한다.
“에큐메니칼 대화”는 교회들의 실수와 무능, 그 안에 있는 불일치와 죄성을 함께 인정해야 하는 아픔을 동반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의 부름에 대한 교회들의 헌신을 갱신하는 새로운 계약의 장이 되었다. (계속)
2.5 생명 위한 만남과 협상의 공간 “무티라오”: 만물의 생명의 풍성함을 위해 경계를 넘어가는 삶
제 9차 WCC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는 348개 회원교회 691명의 대표를 중심으로 축소된 공식 의사결정 과정을 진행해 나가는 한편, 270 여 개의 에큐메니칼 과제를 다룬 “무티라오”를 통해 약 4,000명을 참여시키므로, 총회의 프로그램의 다양성과 영적 생활의 풍성함을 강화하였다.
“무티라오”는 토착민 언어에 뿌리를 둔 브라질어로, “공동의 목적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만남의 장소와 기회”를 의미한다. “무티라오”는 모든 공동체의 목적인 만물의 생명의 풍성함을 위해 자신들의 시간과 노동과 소유를 나누며 구체적인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 만남과 협상과 협동의 시공이다.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는 “무티라오”라는 시공을 통해, 오이쿠메네의 삶의 현장에서 제기되는 생명과 관련된 구체적이고 다양한 과제들을 은총과 변혁의 빛에서 성찰하고, 상호연관된 삶과 참여를 격려하면서, 공동의 증언을 모색하고 지도력을 강화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무티라오”는 다양한 형태의 워크숍, 세미나, 문화공연, 전시회 등을 통해 진행되었고, “무티라오”에서 논의된 새로운 제안과 방향성은 전체회의에 최대한 반영되었다.
“무티라오”는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비안에 지역적 초점을 맞추므로 지역상황화에 충실을 기하는 한편, 청년들에게 세대의 초점을 맞추므로 “청년 총회”의 성격을 구체화하였다. “무티라오”가 총회에 다양성과 깊이와 넓이를 더하는 시공이었지만, 사실은 총회의 모든 시간과 공간들이 생명을 위한 만남과 협상의 시공, 즉 “무티라오”라고 할 수 있다.
세계교회는 “무티라오”에서 해방과 변혁을 모색하는 저항적 대안문화 전시와 공연을 통해 인도의 2억 6천명 불가촉 천민계급 달릿의 해방을 위해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지향하는 달릿 해방운동가들, 브라질의 아프리카 ‘노예’들의 후손인 아프로 브라질리언들, 아프리카 노예 상황에서 탈출하여 형성한 공동체들인 퀼롬보스, 평화와 정의를 갈망하는 팔레스타인 청년들, 쓰나미 이후 문화제국주의적 국제지원에 고통 당하는 스리랑카인들, 내전의 폐허에서 평화를 외치는 보츠와나 어린이들, 청년폭력 극복과 세상의 평화를 위한 청년의 변혁을 외치는 중앙아메리카와 쿡 아일랜드 청년들을 만났다.
또한 “무티라오”는 피난민 수용소와 보호소에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유와 기본권마저 부인 당한 채 살아가는 8 백만 명에 이르는 어린이와 여성과 남성 피난민들, 정체성의 갈등과 가난 속에서 민주화된 시민사회를 위해 투쟁하는 아프리카인들과 디아스포라들, 가난과 식민의 역사를 변혁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토착민들, 서 파푸아 인도네시아에서 인권폭력에 희생당하는 토착민들, 유럽의 고용 정책이 지닌 제도화된 인종차별주의와 투쟁하는 흑인 청년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억압 속에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 구조적 폭력과 배제에 희생당하는 장애인들, 특히 여성장애인들, 독일 월드컵대회를 앞두고 다국적 기업들이 스포츠에 미치는 악영향 속에서 축구공을 생산하는 하청기업 노동자들, 삶과 생명의 존엄을 위해 투쟁하는 쓰레기 수거인 들이 생명을 갈구하고 협상하는 현장으로 세계교회를 안내했다.
한편, “무티라오”를 통해 세계교회는 제국이 어떻게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계의 분열을 가져왔는지, 왜 종교간 대화가 전통적 패러다임을 넘어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실천적 연대로 나가야 하는지, 제국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인종적, 신분 계급적, 성적 부정의, 토착민 소수자에 대한 부정의, 여성 폭력과 청년들의 폭력문제들에 직면해서 왜 우리 자신들의 신앙과 영성을 갱신하고 탈 식민화와 변혁을 이루어 내는 변혁적 정치문화적 행동을 실천해야 하는지, 북반부의 나라들과 개발기구들, 세계금융기구들이 남반부에 지우는 경제적 부채와 사회적 생태적 손상이 어떤 상관이 있는지, 왜 우리가 이 세상의 자원이 모든 이들에게 충분하게 나뉘어 지도록 생태적 윤리적 삶을 살고 정의로운 무역을 실시해야 하는지, 이를 위해 교회의 지구적 네트워크와 신학적 인적 자원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왜 지구적 차원의 자원 사용의 우선순위가 군사적 소비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필요여야 하는지, 왜 교회의 디아코니아 사역이 시혜가 아닌 예언자적 디아코니아로 변화되어야 하는지, 변혁적 정의를 실천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 관계 속에서 어떻게 도덕적 책임적 윤리적 경제투자를 하므로 평화를 이루는 일에 공헌할 것인지, HIV/AIDS를 살아가는 사람들(PLWHA)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그들을 공동체의 일부로 포용하기 위한 교회의 상황적 신학적 성찰이 왜 그들을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인정하는 신학적 인식의 전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지, 그래서 결국 비인간화, 반 생명화된 상황에서 만물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회변혁을 위한 복음의 명령이 왜 우리를 총체적 회심의 자리로 초대하는지를 깨달았다.
한편, “무티라오”는 평화건설의 구체적인 길이 무엇인지를 세계교회 앞에 펼쳐 보였다. 구약 성서의 다윗의 가계와 우리들의 삶 속에 있는 폭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비폭력과 평화를 만드는 개인적 경험과 보다 조직적인 기술과 방안에 대해 서로 배웠다. 정치적 범죄적 정의의 관점에서만 규정되던 폭력을 공적 건강의 관점에서 정의하고 극복하는 방안들을 연구했다.
또한, 세계의 도시들에 평화를 건설하기 위한 지구적 에큐메니칼 네트워크가 제안한 평화계획에 대해 논의하였다. 교회공동체가 교회와 사회에서 여성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변혁의 도구로 갱신되고 강화되도록 하기 위해서 몸의 신학과 새로운 남성성에 대해 연구하였고, 가정폭력과 성에 기초한 폭력을 공론화하도록 노력하였다. 폭력적 갈등 상황 후에 새로운 전환을 시도하는 사회가 지닌 교육과 건강과 농업과 탈 식민지화의 과제 등에 대해 국제적 연대가 지닌 경험이 무엇인지, 과거와 화해하고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교회의 역할과 선교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모색하기도 했다.
“무티라오”는 결국 고난 속에서 투쟁하는 사람들 속에 있는 변혁에 대한 희망의 복음을 세계교회를 향해 증언하였다. 세계교회는 새로운 중앙아메리카의 건설을 가능하게 하는 재구성의 신학과 희망의 신학이 무엇이며, 카리비안 나라들의 신학과 인권과 정의에 대한 문화적 접근 방식, 즉 시를 통한 주제 인식, 칼립소 형태의 예술을 통한 성찰, 고전음악 홀과 대성당의 뒷마당에서 진화한 스틸 밴드운동을 통해 전개되는 거리의 사람들의 희망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들었다.
그리고, 세계교회는 “무티라오”를 통해 신 자유주의 세계화가 에큐메니칼운동과 교회에 던지는 도전들을 극복하고 생명을 섬기는 경제의 세계화, 즉 사람들과 지구생명공동체에 관심하는 대안적 세계화를 위해 투쟁하는 남반부의 여성들과 운동가들, 제도화된 본문들과 일상의 삶의 이야기들을 해체하고 탈 식민지 신학의 재구성을 통해 권력구조를 파헤치므로 제반 관계의 변혁을 도모하는 현장의 신학자들, 각종 재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고 자신들의 고통 당하는 현실과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 총체적 변혁을 이루어나가는 사람들의 고난과 희망을 보았다.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에서 펼쳐진 “무티라오”는 오이쿠메네의 다양한 삶의 현장의 축소판이요, 우리들의 삶의 현장이 바로 만물의 생명의 풍성함을 위하여 만나고 협상하고 협동하는 선교의 현장인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의 실체의 심연이고 정점이며 무한확장이다. 따라서, 생명을 위한 만남과 협상의 시공은 우리들의 인식과 경험과 신념의 한계와 경계들을 넘어갈 것을 요청한다. 오늘 우리는 생명 죽임의 난장인 세계화의 상황에서 생이라는 “무티라오”에 초대를 받아, 생명을 섬기는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을 재구성하기 위한 만남과 협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생명은 하나님의 은총이요, 생명을 위한 변혁은 하나님의 은총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한 영적 성사이므로, 우리는 오늘 “하나님, 당신의 은총 안에서, 세상을 변혁시켜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행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계속)
3. 제 10 차 한국 부산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 대한 전망
3.1 치유와 화해의 사역을 통한 생명평화선교
이와 같은 20세기 세계교회사의 에큐메니칼 선교에 대한 통전적 지향의 큰 흐름의 뒤안길에는 전 세계적 차원의 냉전이 드리운 갈등의 그림자도 상존하고 있다. 경제적 남북 갈등과 이데올로기적 동서 갈등이 혼재한 가운데 신앙과 신학의 이데올로기화는 선교를 좌우로 양극화하고 교조화하였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냉전시대가 해체되고 세계화로 가는 과정에서 세계교회는 ‘문명 간의 충돌’로 대변되는 새로운 정치적 종교적 냉전으로 인한 아픔과 분열을 경험하고 있다. 오늘 이 같은 변화의 궤적의 중심에 하나님과 세상을 향한 책임적 존재로서 치유와 화해의 사역을 통한 평화선교에 힘써 온 세계교회협의회가 자리잡고 있다.
최근 세계교회협의회 제 10 차 총회가 한국에 유치된 것을 계기로 한국교회 안에 깊이 내재되어 있던 냉전적 신학의 매카시즘이 다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고신(경향)측에서는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의 한국(부산) 유치를 반대하며 세계교회협의회를 종교다원주의와 선교무용론을 주장하는 정치투쟁집단으로 매도하는 광고를 조선일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기독교 신학과 교회의 선교는 새로운 경향에 반응하면서 복음이 지닌 시대적 타당성을 입증하므로 역사적 종교로써 이 시대의 구원과 해방의 필요에 응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 1960년 대 이후 세계가 직면한 상황을 역사적 종말론적 구원사적 입장에서 바라보며 세계교회협의회는 인류사회의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공헌들을 했다. 동서냉전이 가열되던 시대에 인류평화를 위해 동서 간 대화의 장을 마련하였고 기독교인들의 일치를 위한 기도주간에 현장의 과제들을 담아내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회복하기 위해 남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인종차별철폐운동을, 라틴아메리카와 인도차이나와 한국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정의와 평화와 창조”(Justice, Peace, Creation)를 위한 선교운동으로 통합되었고 “폭력극복10년 운동”(Decade to Overcome Violence)으로 결실을 맺었다. 한편 교회들 간의 교리적 냉전을 극복하고 윤리적 성례전적 일치를 위한 신학적 공감대 형성을 위하여 “세례와 성찬과 목회” (Baptism, Eucharist, Ministry, 1982)라는 중요한 문서를 발표했다.
또한 세계교회협의회는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평화는 없고 종교 간의 대화 없이 종교 간의 평화는 없다는 신념 아래 종교들 간의 냉전을 불식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종교가 되도록 폭넓은 대화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은 종교가 지닌 사회적 윤리적 역사적 치원에 대한 응답으로 신학적으로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기독교 선교의 사회윤리적 정치적 진정성은 역사적 종교들 사이의 평화적 공존을 통해 확보되어야 한다. 따라서 종교 간의 대화운동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류의 평화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해석학적 관점 중에 하나인 종교다원주의를 선전하는 것이 아니다.
3.2 에큐메니칼한 지역교회에 대한 비전
세계교회협의회는 세계교회들 사이의 일치와 공동의 증언과 기독교봉사를 위해 로마 카톨릭 교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들을 포괄하는 가장 확대된 에큐메니칼 기구이다. 현재 110 여 개 국가와 지역, 5억 6천만 이상의 세계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349 개의 다양한 신앙전통의 회원 교단을 가지고 있으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와도 거의 모든 프로그램 분야에서 대화와 협력을 지속하고 있다. 1948년 암스테르담 창립총회에 참가한 147 개의 회원교단들 대부분이 유럽과 북미교회들을 대표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의 회원교단들이 다른 지역에 소속되어 있다. 세계교회의 축이 서구에서 비서구로 중심 이동을 하면서 기독교의 세계화를 이룬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지구생명공동체의 평화를 지향하는 광의 에큐메니즘을 위한 특별한 형태의 다국적 다문화적 다종교적 협력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세계교회협의회가 주도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가장 핵심적 관심은 성직자와 평신도, 남성과 여성과 청년, 소수자 들을 포괄하는 선교공동체로써의 지역교회가 각자의 영역과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성만찬적 존재로 자신을 성장시키며 치유와 화해의 복음사역에 헌신하게 하는데 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교회들의 친교공동체로써 성경에 기록한 바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고 하나의 믿음과 하나의 성례전적 친교 안에서 가시적 일치를 이루며 선교와 전도를 위한 공동의 증언에 힘쓰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공동의 소명에 응답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지향하는 에큐메니칼한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하나의 믿음을 바탕으로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하나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적으로 증거하는 교회인 동시에 요17:21과 엡1:10의 비전, 즉 교회의 일치와 갱신이라는 성례전적 비전과 인류공동체의 치유와 구원과 해방이라는 화해의 삶에 대한 비전을 신학적으로 실천적으로 통전하고 심화하는 교회이다.
3.3 다양성 속의 일치를 통한 공동의 증언
세계교회협의회는 비회원 교회들을 포괄하는 세계교회들 사이에 다양성 속의 일치(Unity in Diversity)를 형성하기 위한 협의회적 과정을 모색하고 매개하는 협의체이다. 교회들 간의 대화, 협력, 공동의 증언은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 분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고 그 분은 나뉘어져 있지 않다는 고백이 일치를 향한 출발점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것은 특정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보다 본질적이며 포괄적이다. 따라서 상대방 교회 안에 참된 교회의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에 대해 서로 다른 상황에서 주 예수그리스도로부터 함께 배워 나가며 이 땅 위에서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전인적 관계를 맺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역사적 교회적 해석학적 표현의 다양성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육신적 은총의 신비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진리가 성육신 하여 자신의 존재를 표현해야 할 상황과 문화에 대한 해석학적 상대성을 인정하므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지닌 다양한 차원들 속에서 구원의 은총이 지닌 역사적 신비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의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도모하며 일치의 진정성을 선교로 표현한다. 선교의 진정성은 일치에 의해 보증되어야 하며 일치의 진정성은 선교에 의해 보증되어야 한다. 공동의 증언을 위하여 교회를 분열시키는 요인들보다는 일치하게 만드는 특성들을 발견하고 서로를 구분 짓는 장애물들보다는 공유하고 있는 것과 함께 노력할 수 있는 것들을 먼저 강조해야 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화해할 수 없는 차이점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초대의 언어로 진리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3.4 한국교회의 일치와 선교를 위한 협의회적 과정
기독교 역사의 전 과정을 협의회적 소통의 과정으로 이해하면서 한국교회 안에도 진정한 의미의 협의회적 과정을 수립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행하는 진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실천들 사이에 공감대를 넓혀가기 위한 공 교회들 간의 협의회적 대화의 과정에 냉전적 자세를 버리고 참여하므로 성령 안에서 상호변혁을 경험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성장과 분열을 동시에 야기한 초기 선교사들의 경쟁적 교파주의 이식, 선교지역분할정책과 한국의 지역주의와의 부정적 연계, 삼자정책과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논리와 개 교회중심주의의 연계, 신학적 이데올로기적 양극화, 신학적 순수성의 보수로 표방된 교권주의자들의 권력투쟁 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한국교회가 먼저 갱신되고 개혁되어야 한다.
또한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열의 행위, 즉 다른 교회의 교리, 신조, 행위들을 이해하기 위한 대화의 노력 없이 비난하고 풍자하는 태도나 자신의 교회와 신앙고백만이 '참'교회요, '참'믿음이며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교회의 세례를 무효화하고 재 세례를 받도록 권유하는 행위 등은 중단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성취된 ‘값비싼’ 코이노니아(costly koinonia)를 토대로 전 세계 기독교인들을 향한 일치에의 부름은 복음 안에 명시되어 있다. 우리들이 서로 치유하고 화해하여 일치하지 않으면 복음의 메시지는 그 효력을 잃는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현재의 분열은 선교에 대한 공동의 소명을 온전히 성취하는데 있어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제 10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를 전후한 시기를 한국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도모하기 위한 치유와 화해의 기간으로 정하고 이를 위한 협의회적 과정을 마련해야 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권 문제가 분열의 표면적 이유가 되었던 역사적 경험과 세계교회협의회를 용공좌경으로 매도했던 냉전시대의 교조적 인식과 세계평화를 위한 세계교회협의회의 종교 간 대화운동을 선교무용론과 종교다원주의로 이해하는 신학적 편견이 여전히 한국교회 내부에 갈등구조로 남아 분열을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문화적 신학적 다양성을 지닐 수 밖에 없는 세계의 지역교회들 간의 협의체로써 세계교회협의회는 위에서 서술한 바대로 성경의 진리에 토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과 성만찬적 선교적 교회론과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공동의 이해와 비전을 가지고 치유와 화해의 복음사역에 참여하기 위한 교회들 간의 협의회적 일치의 여정에 헌신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지난 세기들의 서구기독교 역사와 선교가 지닌 제국주의적 성격과 내용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가운데 타 종교와 타 문화에 대한 서구기독교의 배타적이고 지배적인 신학과 태도에 대해 비판하고 포괄적으로 대화와 자기 비움의 선교를 주장한 것은 성경적으로 시대적으로 올바른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일치를 위한 변화의 여정에서 기독교 선교에 대한 종교다원주의적 해석을 하나의 관점으로 논의되도록 관용하므로 해석학적 다양성을 유지한 것은 사실이나 협의체로써의 세계교회협의회가 종교다원주의나 이에 따른 선교무용론을 신학적 지침으로 채택하고 회원 교회들에게 전파한 적은 결코 없다.
이번 제 10차 부산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를 통하여 한국교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학적 교회적 해석학적 진리 주창자 들이 신학적 오만과 편견을 버리고 냉전과 교조를 넘어 대화와 소통과 공존의 자리로 나가는 신앙의 성숙함을 발휘하기 바란다. 이 길만이 전(全)교회가 전(全)복음을 전(全)세계에 증거하는 지상명령의 수행에 역사적 진일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교회협의회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공동의 소명에 응답하기 위한 협의회적 일치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동반자이다. (계속)
4. 21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성
4.1 생명과 희망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순례적 선교의 영성
선교는 생명과 희망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다시 그 분에게로 돌아가는 구도와 순례의 여정 속에 형성되는 자기정체성의 전인적 표현이다. 따라서 선교는 구도의 길 위에 선 순례자의 삶처럼 절망과 죽임의 자리에서 빛처럼 향기처럼 생명과 희망의 하나님을 증언하는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요, 자기 비움에 근거한 상호의존성을 토대로 자발적 가난과 단순한 삶을 실천하는 순교적 증언이다.
중단 없는 자기 비움의 길을 걸어 죽은 자 같으나 진리 안에서 진정으로 산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과 삶을 나선적 상관성을 지닌 해석학적 실천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절망과 죽임의 세력이 그어놓은 모든 단절의 경계를 넘어 생명과 희망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사랑과 정의로 증언하는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절망과 죽임의 경계들이 만들어 놓은 소외와 허무의 시공들 사이를 희망의 다리로 이어가는 진리의 소통과정이며, 부서지고 상처 난 관계들을 꿰매어 생명의 망을 짜는 치유와 화해의 과정이다.
오늘의 인류는 성장의 한계와 상호의존성의 생명원리를 무시한 채 진보와 성장이라는 우상의 신화를 믿으며 무한성장과 적자생존과 세계화의 지배원리가 여지없이 관통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보와 성장의 목표를 쟁취한 승자는 치열하게 부각되지만 상호의존적 삶의 과정에 진정한 생명력과 의미를 부여한 권력 없는 자들의 삶의 기억들은 쓰라린 패배의 흔적으로 무의미화될 뿐이다.
생의 무수한 과정들이 길 위의 존재들에게 부여하는 다양한 한계의 국면들을 통해 초월이라는 성찰과 각성의 계기를 매개해내지 못한 채 인류는 너무나 쉽게 승자와 패자의 갈림길에, 오만과 굴욕의 길 위에 서고 만다. 오늘 인류는 생명세계의 상호의존성의 망이 근본에서부터 파괴되고 있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와 희망 안에 기뻐하라”는 복음의 근원적 부름에 무감각하다. 경제적 자본의 우상의 노예가 된 인류는 인간이 경험하는 한계를 자기 비움을 통한 초월로, 은총과 신비의 문을 여는 영적 계기로 승화시키지 못한 채 자기소외의 깊은 늪, 즉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생명과 희망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생명적 소유적 자본의 우상 앞에 절하며 ‘진보’와 ‘성장’의 제단 앞에 자신을 제물로 드린 이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변혁에의 새로운 희망을 창조해 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한계를 초월로 매개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생의 의미지평을 여는 영적 상호변혁적 순례의 길을 믿음으로 떠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정의로운 상호의존적 생명의 망을 회복하고 그 안에서 만물의 생명을 풍성케 하는 생명살림에 대한 희망을 믿음으로 간직하고 그 믿음을 위해 죽어야 한다.
이것은 절망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치는 사람들의 충동적 삶을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의 상호의존적 생명관계 속에서 성찰하며 참여하는 삶으로 바꾸어 내는 공동체적 갱신의 과정이요, 인류가 자연과 더불어 정의로운 생명관계를 복원케 하는 치유와 화해의 과정이며, 생명과 희망의 원천이신 하나님에게로 복귀하는 구원과 해방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땅에 현존하는 동시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순례의 과정이다.
오늘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은 오늘 나는 무엇을 위해 죽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만 그 답을 얻을 수 있는 순례적이며 선교적인 질문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은 무엇을 위해 죽고 있는가?
4.2 자기 비움의 에큐메니칼 운동: A Kenotic Ecumenical Movement
지난 수년간 세계교회의 기구중심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보여준 모습은 ‘참담할’ 정도로 깊이에서부터의 갱신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 모든 지역의 선교주체인 지역교회들이 제공하는 선교적 토대와 세계와 대륙과 각 나라의 지역교회 네트워크의 협의회적 과정을 거쳐 진행되어야 할 에큐메니칼 운동이 기구화, 정치화, 권력화의 내리막길을 걸으며 교권과 내부 인사들 사이의 헤게모니 각축장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특별히 세계교회협의회,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등의 총무 인선과정들 속에서 인간의 탐욕이 교회가 가야 할 그리스도의 길을 막아 선 모습을 보였다. 신식민지와 세계화 유형의 파트너 십을 기반으로 하는 유럽과 북미교회들과 ‘식민지형’ 신흥 선교국가인 한국교회의 ‘헤게모니’ 쟁탈이 겉으로 표방한 노선은 서로 다르나 선거를 진행하는 막후의 내용은 서로 매우 유사한 ‘힘’의 대결을 보였다.
언제부터인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내면의 깊은 곳을 맘몬의 힘이 침식하고 지배하는 것을 본다. 사회개발원조기구들의 지원과 전략에 의해 재편되고 있는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은 오히려 교회의 성만찬적 선교적 본질을 변질시키고 있다. 오이쿠메네라는 생명의 정원의 복원을 위한 생태적 경제적 정의평화운동은 세계화의 자본논리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사회개발원조기구들의 ‘지속 가능한’ 패러다임 안에 편입되고 세계교회의 협의회적 과정은 교회 내부의 ‘외교적’ 처세와 과제에 집중되어 가므로 오고 계신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으로서의 교회의 선교적 예언자적 본질은 퇴색되어 가고 있다.
아시아기독교협의회의 경우 지역의 에큐메니칼 운동성이 내부에 형성된 소수의 헤게모니집단들 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로 환원되어 그 생명력이 극도로 쇠잔해진 것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선임하는 과정이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의 생명력을 복원하는 운동성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고 의사결정과정에 있는 자들의 관료적 사고와 교파적 개인적 유익에 함몰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공’을 위한 운동적 사고의 자리를 ‘사’를 위한 교파적 관료적 실리적 자리쟁탈이 대체해 버렸고 그 과정에 맘몬의 힘에 편승한 헤게모니적 사고가 작동하고 있다.
오늘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위기는 사실상 지역교회의 위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힘’의 논리가 운동의 질서를 재편하고 ‘자리’가 운동을 대신하는 위기가 지역교회협의회들과 지역교회들의 정치 안에 그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공’을 위한 ‘사’의 자기 비움의 영성을 토대로 진행되어야 할 에큐메니칼 운동이 ‘사’의 유익을 위한 각축장으로 변모해 버렸고 여기에 맘몬의 힘이 준동하고 있다.
재정의 위기를 겪고 있는 에큐메니칼 기구 들을 자원의 나눔을 통해 견인해 갈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세계선교협의회(CWM)은 새로운 지도력의 확보와 시대적 상황에 응답하는 선교신학과 전략을 모색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와 개혁주의 에큐메니칼 협의회(REC)는 진보와 보수라는 태생적 다름을 넘어서 가시적 일치를 위한 기구통합을 확정 짓고 세계개혁교회공동체(World Communion of Reformed Churches)로 거듭났다. 독일서남지역교회선교협의회(EMS)는 오랜 변화의 노력 끝에 회원과 파트너 사이의 차등을 없애고 하나의 선교협의회로 재편되므로 과거 영국 중심의 CWM, 독일 중심의 UEM, 스위스 중심의 Mission 21, 프랑스 중심의 CEVA와 같은 유형의 선교협의회로 거듭났다. 선교신학과 체제의 변화를 매개하는 과정의 뒤안길에는 중심교회들의 쇠퇴와 재정의 약화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역사적 시사점이 크다.
세계선교현장에서 진행되는 선교사운동과 지역의 에큐메니칼운동 역시 선교협의회 구조로 통합되어야 한다. 특히 한국교회의 선교사운동이 지니는 시대착오적 일방통행은 선교현지의 지역교회들을 혼란케 하고 일치를 저해하므로 그 선교의 진정성을 의심받고 있다. 21세기 한국교회의 선교사운동은 현지 지역교회들과의 선교협의회구조로의 전환을 통해 그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 특별히 한국에 유치된 제 13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를 계기로 한국교회의 선교사운동과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통전을 모색하는 과정을 수립하기 바라고 이 과정에서 한국과 아시아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복원을 꿈꿀 수 있어야 한다.
에큐메니칼 영성의 꽃은 시작도 끝도 자기 비움의 실천적 영성이다. 자리다툼과 주도권 싸움에 매몰되어 자기변혁을 위한 신학적 영적 성찰을 중단한 에큐메니칼 운동 기구들을 바라 보면서, 그리고 WCC 총회 개최 준비를 두고 한국 내 교단들과 에큐메니칼 인사들 사이에 준비과정에 대한 주도권 문제로 마음 고생들을 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 비움의 영성에 의해 새롭게 갱신될 에큐메니칼 운동의 여정이 매우 길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제도권의 밤이 깊으면 깊을 수록 운동의 새벽은 가까이 오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케노틱 에큐메니칼 운동을 꿈꿀 시간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