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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04.20. ~ 1873.01.09
“어디선가, 헤겔은
세계사적으로 몹시 중요한 사건과 인물은 두 번씩 나타난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덧붙였어야 한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에는 희극으로 나타난다고.
” 카를 마르크스가
나폴레옹의 이름으로 프랑스의 두 번째 황제가 된
루이 나폴레옹, 나폴레옹 3세를 다룬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의 첫머리에서 남긴 말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가장 태어나지 말기를 바랬던 정권의 탄생 앞에서
실망과 분노를 담아 썼던 이 책이 나온지 17년이 지난
1869년에 재판을 찍으면서, 그 서문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마침내 황제의 망토가 보나파르트의 어깨에 걸쳐지는 순간,
나폴레옹(나폴레옹 1세)의 동상은
방돔 기념주 꼭대기에서 떨어져 산산이 부서질 거라고,
나는 이 책의 마지막에 썼었다. 그것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1. 프랑스의 혼돈과 ‘나폴레옹 향수’
코르시카에서 온 풍운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워털루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난 직후인
1810년대만 해도 프랑스 내부에서조차 그에 대한 반감과 피로감이 심했다.
끝이 없는 전쟁에 끌려가 죽은 국민이 백만이 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상 최초로 프랑스가 세계를 호령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으며,
이 보기 드문 인물에 대한 애착도 있었다.
그리고 6년 뒤 그가 세인트 헬레나에서 쓸쓸히 숨졌다는 소식을 듣자,
많은 프랑스인들이 진심으로 눈물을 흘렸다.
“나폴레옹 향수”는
나폴레옹 몰락 후 복원된 부르봉 왕실의 루이 18세와 샤를 10세가
무능과 탄압의 정치를 계속하면서 더욱 짙어졌다.
나폴레옹은 독재자였지만,
‘혁명의 아들’임을 내세우며 국민의 대행자로서 통치한다는 명분을 세웠고
[나폴레옹 법전] 등에서 민권의 신장을 보장했기에
옛 왕실보다 더 진보적이었다고 추억되었다.
뮈세, 스탕달 등 낭만파 작가들은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그리는 글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레미제라블]의 빅토르 위고도
1822년에는 나폴레옹을 비난하는 작품을 썼으나,
5년 만인 1827년에는 [방돔 기념주에 바친다]는 시에서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기념하여 세운 방돔 기념주와 그 주인공을 노래했다.
결국 1830년 7월,
“7월 혁명”으로 복고왕정은 무너졌으며
루이 필리프가 ‘프랑스 시민의 왕’이라는 호칭을 내세우며 새로운 왕이 되었다.
혁명 이전의 구체제를 복원한다는 비인 체제의 서슬이
아직 시퍼럴 때였으므로
부르봉 왕실의 피를 받은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세우되,
자유와 민권을 대폭 강화한 입헌군주체제로 혁명의 요구에 부응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7월 왕정”은
사상 최악의 금권주의 정권, 오직 가진 자들만을 위한 정권이라는 악평을 받는다.
본격적인 산업화 때문에 증가하는 빈부격차와
많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정권은 모르쇠로 일관했고,
결국 18년 만에 “2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필리프가 쫓겨나고
프랑스는 두 번째의 공화정 시대를 맞이한다.
그래도 진보와 보수, 부르주아, 노동자, 농민의 이해관계가 서로 엇갈리고 부딪침으로써
정국은 늘 불안했다. 그런 불안을 놓치지 않은 사람이 바로 루이 나폴레옹이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아들 라이히시타트 공,
‘나폴레옹 2세’를 이어 3세라고 불리지만 나폴레옹의 직계는 아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첫 번째 부인이던 조세핀의 딸
(나폴레옹과 결혼하기 전의 남편에게서 얻은) 오르탕스와
나폴레옹의 동생인 루이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탄생했으며
2세보다 세 살이 많았다.
이처럼 나폴레옹과 직접적 피붙이는 아니고,
외모도 나폴레옹과 달랐으며,
심지어 그가 루이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라는 소문까지 있었으므로
그는 평생 '엉터리 나폴레옹'이라는 빈정거림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거꾸로
자신이야말로 나폴레옹 다음으로 유럽의 패권자 지위에 올랐어야 할 사람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본래 아이를 못 낳던 조세핀이 대신 후계자를 보기 위해 주선한 것이
루이와 오르탕스의 결혼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경우에도 형인
나폴레옹 루이(Napoléon Louis Bonaparte, 1804~1831)에게 먼저 그런 자격이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덕분에 네덜란드 왕위에 앉아 있던 루이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일곱 살 때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부모와 함께 네덜란드에서 스위스로 망명해 거기서 자랐다.
나폴레옹 2세가
어머니 마리 루이즈 덕분에 오스트리아의 비호를 받으며 안락하게 지냈던 반면,
3세의 가족은 프랑스에서나 다른 유럽에서나 위험한 존재로 찍혀
어딜 가든 찬밥 대접을 받았다.
그런 현실이 힘들었던지, 청년기의 그는 형과 함께 이탈리아로 가서
그곳의 공화파 혁명세력인 카르보나리 당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1831년, 오스트리아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형 나폴레옹 루이가 죽었으며
프랑스로 돌아온 루이 나폴레옹은 곧바로 영국으로 추방당했다.
그는 이듬해에 2세인 라이히시타트 공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보잘것없는 24세의 망명자에 불과했지만,
아마 이 때 이렇게 다짐했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위대한 이름을 이어받을 사람은 이제 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는 점점 고조되어가던 나폴레옹 향수를 더욱 부추기고자
‘나폴레옹 정신’을 분석하고 선전하는 여러 글을 써서 발표해 나갔다.
1839년의 [나폴레옹 사상]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민주 공화국의 가장 큰 약점인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보완하기 위해 (…)
세습 왕조의 수립은 필수불가결하다 (…)
그 왕조는 민주주의를 단련시켜 강하고 오래 갈 수 있도록 키운다.”
초창기의 민주정부는 파벌 및 계급 사이의 대립과 대중의 봉기라는 위험에
계속해서 시달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강력하면서도 국민에 충성하는 권력이 나타나 대립을 중재하고
질서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곧 정치현실로 만들어낼 ‘보나파르티즘’의 핵심 명제였다.
그는 이런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지름길을 가려고 했다. 1830년에 몰래 귀국하여 스트라스부르의 병사들을 선동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폴레옹만한 카리스마가 없었다. 병사들은 그에게 호응하는 대신 체포하려 했으며, 그는 스위스로 달아났다. 그는 1840년에 다시 쿠데타를 시도했고, 또 실패하여,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탈옥했다.
하지만 보나파르티즘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루이 나폴레옹은 심각해지는 민생고와 계급 대립을 해결할 사람은 자신뿐이라며, 쿠데타 실패 후로는 특히 서민과 빈곤층에게 파고들었다. 1842년의 [사탕무 문제의 분석]에서는 외국 농산물에 맞서 국내 영세농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844년의 [빈곤타파론]에서는 노동자들을 연합체로 결속시키고 그들에게 미개간지를 주어 경작하게 함으로써 노동계급의 고질적인 빈곤을 해결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는 생 시몽 등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대중에 영합하는 면도 없지 않았으나, 강력한 정부가 사회를 장악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일관되었다.
그리하여 2월 혁명 후 치러진 총선거와 보궐선거에서 ‘보나파르티스트’는 대약진했고, 루이 나폴레옹 자신은 외국에 망명 중이었음에도 여러 지역에서 1위 득표자가 되었다. 기성 정치인을 불신했던 노동자와 농민은 나폴레옹의 이름과 루이 나폴레옹의 정책안에 기대를 걸었고, 자본가들도 잘못하면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설지 모른다는 공포감에서 보나파르트를 밀었던 것이다. 루이 나폴레옹은 여세를 몰아 그해 12월에 치러진 프랑스 사상 첫 대통령 선거에서 무려 75퍼센트의 득표로 압승했다.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당시 프랑스 헌법에는 외국 국적을 가진 적이 있는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고, 루이 나폴레옹은 영국과 스위스 국적을 가졌던 적이 있었음에도 그런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주어졌겠지만.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덕분에 네덜란드 왕위에 앉아 있던 루이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일곱 살 때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부모와 함께 네덜란드에서 스위스로 망명해 거기서 자랐다. 나폴레옹 2세가 어머니 마리 루이즈 덕분에 오스트리아의 비호를 받으며 안락하게 지냈던 반면, 3세의 가족은 프랑스에서나 다른 유럽에서나 위험한 존재로 찍혀 어딜 가든 찬밥 대접을 받았다. 그런 현실이 힘들었던지, 청년기의 그는 형과 함께 이탈리아로 가서 그곳의 공화파 혁명세력인 카르보나리 당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1831년, 오스트리아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형 나폴레옹 루이가 죽었으며 프랑스로 돌아온 루이 나폴레옹은 곧바로 영국으로 추방당했다. 그는 이듬해에 2세인 라이히시타트 공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보잘것없는 24세의 망명자에 불과했지만, 아마 이 때 이렇게 다짐했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위대한 이름을 이어받을 사람은 이제 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는 점점 고조되어가던 나폴레옹 향수를 더욱 부추기고자 ‘나폴레옹 정신’을 분석하고 선전하는 여러 글을 써서 발표해 나갔다. 1839년의 [나폴레옹 사상]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민주 공화국의 가장 큰 약점인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보완하기 위해 (…) 세습 왕조의 수립은 필수불가결하다 (…) 그 왕조는 민주주의를 단련시켜 강하고 오래 갈 수 있도록 키운다.” 초창기의 민주정부는 파벌 및 계급 사이의 대립과 대중의 봉기라는 위험에 계속해서 시달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강력하면서도 국민에 충성하는 권력이 나타나 대립을 중재하고 질서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곧 정치현실로 만들어낼 ‘보나파르티즘’의 핵심 명제였다.
그는 이런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지름길을 가려고 했다. 1830년에 몰래 귀국하여 스트라스부르의 병사들을 선동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폴레옹만한 카리스마가 없었다. 병사들은 그에게 호응하는 대신 체포하려 했으며, 그는 스위스로 달아났다. 그는 1840년에 다시 쿠데타를 시도했고, 또 실패하여,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탈옥했다.
하지만 보나파르티즘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루이 나폴레옹은 심각해지는 민생고와 계급 대립을 해결할 사람은 자신뿐이라며, 쿠데타 실패 후로는 특히 서민과 빈곤층에게 파고들었다. 1842년의 [사탕무 문제의 분석]에서는 외국 농산물에 맞서 국내 영세농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844년의 [빈곤타파론]에서는 노동자들을 연합체로 결속시키고 그들에게 미개간지를 주어 경작하게 함으로써 노동계급의 고질적인 빈곤을 해결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는 생 시몽 등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대중에 영합하는 면도 없지 않았으나, 강력한 정부가 사회를 장악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일관되었다.
그리하여 2월 혁명 후 치러진 총선거와 보궐선거에서 ‘보나파르티스트’는 대약진했고, 루이 나폴레옹 자신은 외국에 망명 중이었음에도 여러 지역에서 1위 득표자가 되었다. 기성 정치인을 불신했던 노동자와 농민은 나폴레옹의 이름과 루이 나폴레옹의 정책안에 기대를 걸었고, 자본가들도 잘못하면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설지 모른다는 공포감에서 보나파르트를 밀었던 것이다. 루이 나폴레옹은 여세를 몰아 그해 12월에 치러진 프랑스 사상 첫 대통령 선거에서 무려 75퍼센트의 득표로 압승했다.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당시 프랑스 헌법에는 외국 국적을 가진 적이 있는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고, 루이 나폴레옹은 영국과 스위스 국적을 가졌던 적이 있었음에도 그런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프랑스 제2공화정의 대통령은 권력이 막강했다. 행정부를 이끌 권한과 외교, 국방 관련 대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루이 나폴레옹은 그 이상을 원했다. 헌법을 어기고 대통령이 된 그는 반년 뒤에는 대외침략을 금지한 헌법 조항을 무시하고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에 반대하는 야당의 시위는 무력 진압되었으며, 진보적, 공화주의적 사상을 가진 교사들을 학교에서 내쫓는 법률과 반정부시위 경력자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법률,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 등이 의회 다수파였던 극우 성향의 질서당과의 협조로(루이 나폴레옹 자신은 ‘국부’를 자처하며 어느 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잇달아 제정되었다.
세 차례의 혁명으로 어렵게 쟁취된 자유와 민주주의는 이렇게, 영웅의 후광을 업고 권좌에 오른 자의 손으로, 덧없이 소멸되어갔다. 그는 1851년 12월 2일, 나폴레옹(1세)이 대관식을 가졌던 날이자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했던 날에 최후의 일격을 감행했다. 헌법상 누구도 해산시킬 수 없던 의회를 강제 해산하고, 헌법 개정을 국민투표에 붙인 것이다. 이 쿠데타의 결과 일단 10년 임기의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된 루이 나폴레옹은 1852년 11월 21일에 다시 국민투표를 실시해 제정의 부활을 승인받은 다음, 쿠데타 1주년이던 12월 2일에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프랑스 제2공화정이 끝장나고, 제2제정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어느 계층보다도 농민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권력을 잡았으나, 황제가 된 뒤로는 약속했던 국내농업의 보호 대신 무역장벽 철폐를, 국유지의 공동경작지를 통한 영세 농민과 노동자의 보호 대신 적극적인 산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1860년에는 영국과 통상조약을 맺으며 처음으로 ‘최혜국 대우’ 조항을 신설하여 현대의 자유무역협정의 원형을 만들었고, 산업 인프라 건설에 애써서 1850년대에만 기존의 전국 철도망이 삼천 킬로미터에서 만 육천 킬로미터로 다섯 배 이상 늘렸다.
해외에서도 레셉스를 앞세워 수에즈 운하를 건설했다. 이는 프랑스의 부국강병을 꾀한 뜻도 있었지만, 계급을 초월하여 군림한다던 그가 점점 자본가-부르주아의 지지에 기대려 했다는 뜻도 있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1860년대 들어 ‘자유의 제국’을 표방, 언론과 출판의 자유 등을 점차 허용하고, 부르주아가 장악하고 있던 의회에 권한을 일부 되돌려줌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려 했다.
그런 방침은 ‘화려함’과 ‘상업성’을 한꺼번에 추구하는 기획으로도 반영되었다. 황제는 지저분한 집들과 복잡한 골목길이 뒤엉켜 있던 파리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깔끔한 건물과 반듯하고 넓은 도로망을 가진 현대의 파리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1855년과 1867년에는 그 파리에서 만국박람회를 개최하여 프랑스의 ‘발전상’을 세계에 과시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만국박람회는 상업문화의 진흥을 촉진하는 의미가 있었고, 파리 시가지 정비는 시위대가 골목길로 도망치고 바리케이드를 치며 투쟁할 여지를 없애는 한편 파리 중심가에 흩어져 살던 빈민, 노동자들을 외곽의 공장 지대로 내몰고는 그곳에서 중심가의 화려함과는 대조적인 암울한 노동과 생활을 해나가도록 하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자산계급에게 편향된 정책으로는 빈부격차 증대와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는 대중의 불만이 점차 고조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터,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방식을 본받아 그런 불만을 해소하고자 했다. 바로 해외에서 찬란한 군사적 업적을 거둠으로써, ‘프랑스의 영광’에 취한 대중이 현실에서의 소외를 잊게끔 한다는 것이었다.
평생 영국과 싸웠던 나폴레옹 1세와는 달리, 3세는 대체로 영국과 같은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크림전쟁, 제2차 아편전쟁, 영국-페르시아 전쟁 등). 또 유럽 본토보다는 주로 해외에서 영토와 영향력 확장을 노렸다. 그러나 이탈리아에 개입하고, 독일을 분열시키며, 유럽의 연방화를 노린다는 1세의 방침은 본받았는데, 그 때문에 점차 유럽에서 고립되는 길로 가게 된다.
크림전쟁은 러시아의 팽창을 막는다는 점에서 투르크, 오스트리아와 영국에게는 중대한 문제였지만 프랑스로서는 그다지 중대한 국익이 걸려 있지 않았는데, 나폴레옹 3세는 투르크 제국 내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종주권’과 예루살렘 성지관할권을 놓고 러시아 차르와 겨루었으며 따라서 적극적으로 크림전쟁에 뛰어들었다. 1856년의 파리 조약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영토 등의 확실한 대가는 챙기지 못했으나 오랜만에 프랑스의 힘을 과시하고, 나폴레옹 전쟁 당시 한편이었던 영국,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갈라놓을 수가 있었다.
1857년의 또 다른 파리 조약은 영국과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을 중재한 결과였으며, 1858년부터는 프랑스 선교사를 박해했다는 빌미로 베트남과 전쟁을 시작해서 1862년에는 베트남 남부(코친차이나)를 할양받고 이듬해에는 캄보디아를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화는 제2차 아편전쟁에 개입한 대가로 1860년에 중국 남단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인정받으면서 가속화된다. 나폴레옹 3세는 1866년에는 프랑스 선교사 살해를 빌미로 조선에도 싸움을 걸었는데, 이것이 병인양요다. 이듬해에는 일본에도 병력을 파견했다.
나폴레옹 3세는 아메리카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남북전쟁 도중의 미국과 멕시코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특히 멕시코에 대해서는 1861년에 들어선 베니토 후아레스의 반지주, 반교회 정책이 대내외적으로 마찰을 빚자 채무 불이행을 빌미로 군사개입에 들어갔다. 이 모험은 1862년 푸에블라 전투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겪는 등 순탄치 않았으나, 1863년에 멕시코의 수도를 점령하고는 예의 국민투표를 거쳐 군주정을 수립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을 초빙하여 새로운 멕시코 황제로 앉혔다.
그러나 ‘보나파르티즘의 신대륙 수출’이라 할 만한 이 기획은 6년 만에 처절한 실패로 끝났다. 후아레스가 이끄는 저항세력은 갈수록 세력을 확대했고, 남북전쟁을 끝낸 미국도 먼로주의에 근거하여 아메리카에서 유럽 세력을 축출하고자 했으며, 유럽 본토에서 프로이센이 무섭게 팽창하면서 더 이상 꼭두각시 제국을 운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막시밀리안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1867년에 파견 병력을 모두 철수시킨 나폴레옹 3세는 현지에 남은 막시밀리안이 저항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쁜 소식은 이탈리아에서도 들려왔다. 가톨릭의 보호자를 자처한 그는 대통령 시절이던 1849년에 무력으로 교황령을 복원해 주었으며 따라서 젊은 시절 가입했던 카르보나리 당을 계승한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과 적이 되었으나, 크림전쟁 후로는 피에몬테가 주도하는 반오스트리아 운동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오스트리아, 교황, 부르봉가 등에 의해 분할 지배되고 있던 이탈리아에 개입하여 프랑스의 세력 범위를 늘리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1858년에는 피에몬테의 카부르와 플롱비에르에서 반오스트리아 비밀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피에몬테와 손을 잡고 오스트리아와 싸운 다음, 대가로 사보이와 니스를 챙겼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에몬테와 상의 없이 오스트리아와 강화함으로써 이탈리아에서 반감을 사는 한편,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통일의 길을 열어 줌으로써 국내에서 비판을 받았다. 이웃에 강력한 통일국가가 생겨나는 것은 누가 봐도 프랑스의 국익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나폴레옹 3세는 뒤늦게 피에몬테를 견제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채였다.
이렇게 유럽 여러 나라와 돌아가며 한 차례 이상 적대하면서 ‘기회주의적 패권주의자’라는 인상을 깊게 심고 만 나폴레옹 3세는 국내적으로도 무리한 해외 사업이 빚은 대규모 적자를 참아줄 만한 실질적 성과가 미흡하다는 불만 여론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게 흔들리던 나폴레옹 3세에게 치명타를 안긴 쪽은 프로이센이었다.
독일이 통일된다면 이탈리아 통일 이상으로 프랑스에는 위협이 될 터였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패권을 두고 격돌할 때 오스트리아가 이기리라 짐작하고 프로이센의 중립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전세가 프로이센의 일방적 우세로 흐르자 뒤늦게 중립의 대가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요구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이 이를 묵살한 채 승리하자 남부 독일 공국들이 프로이센에게 붙는 일을 암암리에 방해했다. 그러자 독일 통일의 최대 걸림돌이 프랑스라고 여긴 프로이센은 전쟁을 준비했으며, 주변 국가들의 지지를 모색했다. 이탈리아는 본래 친프랑스여야 했는데, 나폴레옹 3세가 교황령 유지를 고집하며 통일의 완성을 방해해온 최근의 일 때문에 프로이센 편이 되었다. 영국은 오랫동안 프랑스와 좋은 관계였으나, 나폴레옹 3세가 벨기에를 점령하려 했음을 알고 팔짱을 껴 버렸다.
일촉즉발 상태였던 양국관계는 1868년에 새 스페인 군주로 프로이센 왕실의 레오폴트가 물망에 오르자 프랑스가 강력히 항의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사실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가 독단적으로 레오폴트를 포기시키면서 불은 꺼질 뻔 했으나, 수상인 비스마르크가 농간을 부림으로써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양국의 국력은 기본적으로 프랑스가 훨씬 앞섰다. 그러나 근대 전쟁사에서 이토록 한쪽은 철저히 준비하여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반대쪽은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엉성한 준비와 무질서한 기동으로 대응한 예는 없었다. 탄약이 전혀 없는 부대에 폭파 명령이 내려오고, 병력 수송선이 실어 나를 병력을 내버려두고 출발하는 식이었다. 나폴레옹 3세의 지리멸렬한 진두지휘도 혼란을 가중시켰다. 최소의 전력을 최대한 잘 운용하여 승리하곤 했던 나폴레옹 1세가 이를 보았다면 기가 막혔으리라.
전쟁은 시작되고 한 달이 조금 넘은 1870년 9월 2일, 스당에서 사로잡힌 나폴레옹 3세가 항복함으로써 사실상 끝났다(이를 받아들일 수 없던 프랑스 국민들이 제정을 뒤엎고 의용군으로 항전했으나, 결국 넉 달 만에 무릎을 꿇었다). 프로이센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통일 독일제국을 공식 출범시켰고, 전쟁의 대가로 알사스-로렌을 받아냈다.
성난 국민의 손으로 폐위된 루이 나폴레옹은 6개월 동안 독일의 포로로 지내다가, 영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는 지독한 회한과 번민 속에서 숨졌다고 한다. 나폴레옹 1세나 3세가 내세웠던 ‘초계급적인 국민의 영웅’이라는 이미지는 이후로도 프랑스 국민의 뇌리에 남아서, 19세기 말의 블랑제나 20세기의 드골 등이 그 이미지를 이용하고는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피를 이은 사람들이 주목받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루이 나폴레옹이 워낙 큰 실망을 주었으므로, 한때는 나폴레옹 1세에 대해서도 악감정이 들끓어, 마르크스의 예언대로 방돔 기념주의 나폴레옹 상이 파괴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망명한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의 가장 큰 치욕은 워털루 전투의 패배도 아니고,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일도 아니다. 어릿광대가 그의 이름을 빌려 권좌에 오른 일이다’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신화가 되어버린 인물을 이어받는 사람은, 그 유산이 축복일 뿐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실수가 그 신화에 대한 봉인이 되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 황규진, '인물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