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본관 정선, 1906~1962)은 우리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보호하였던 인물이었으며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음악, 회화, 연극 등
당대 일류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문화의 안목을 키웠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는 수많은 문화재들이 해외로 밀반출 되는 시절이었고 간송은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자 1932년 인사동의 고서점 한남서림을 인수하여 10만석의 가산을 모두 탕진한다는
비방을 들을 정도의 노력으로 훈민정음 원본 등 우리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를 지켜냈으며
간송의 소장품에는 외와, 도자, 금속 공예, 불교 조작, 전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들이
포함되어 있고 지금까지 우리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수집한 문화재의 체계적 보존을 위하여 성북동 소재 우리나라 최초 시립 박물관인 보화각(전형필의
스승 오세창이 건립)에 보관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가 사망한 후인 1966년(전형필 1962년도 사망) 간송미술관으로 개칭.
간송 전형필의 최대 업적은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의 확보라고 할수 있다.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 있던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많은 골동품과 고서화가 일본으로 밀반출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우리 문화재가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는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전형필은 ‘한남서림’이라는 고서점을 인수한다. 전형필은 민족문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문화의 결정체인 미술품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스승인 오세창을 따라다니며 문화재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거간꾼과 수장가를 찾아다니며 문화재를 구입하였고, 국내 문화재가 일본의 수장가들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몇 배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미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 중에서도 되찾아 와야 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서면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했다.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1938년 개인박물관인 보화각을 세웠다. 간송미술관의 전신으로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 이라는 의미다. 한남서림으로 들어오는 책 중 진서나 희귀본이 있으면 학자들과 함께 살핀 후, 그 가치가 확인되면 보화각에 설치한 ‘간송문고’로 옮겼다. 당시 동국정운,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등 소중한 자료들이 이곳에 모아졌다. 3. 훈민정음을 만나다 1943년 6월. 한남서림에 앉아있던 간송의 눈에 빠른 걸음으로 서점 앞을 지나는 고서중개인이 보였다. 인사를 나누며 무슨 일이냐 물으니 경상북도 안동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타났는데, 책 주인이 1000원을 부르기에 돈을 구하러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당시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때는 일본이 한글 사용을 철저히 금하고 있던 시기. 만약 이 책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조선총독부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 할 것이 뻔했다. 한 해 전인 1942년 조선어학회 사전이 터져 한글한자들이 모두 잡혀 들어가고, 한글 탄압정책을 펴던 어려운 상황이었다. 책 주인이 불렀다는 돈 천원은 당시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 간송은 중개인에게 즉시 1만1천원을 건네며 책 주인에게 만원을 전하고 천원은 수고비로 받으라 말했다.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전형필의 손에 훈민정음 원본이 들어오게 되었다. 4. 훈민정음을 지켜내다 보물에 해당하는 귀중본을 손에 넣었지만 그는 훈민정음이 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친다. 그리고 1945년 광복 후에야 세상에 공개했다. 하지만 또 다시 위기가 닥쳤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전형필은 애써 모아둔 문화재들을 그대로 두고 피난을 가야 했다. 서둘러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훈민정음은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챙겨갔다. 혼란스러운 피난길에서도 훈민정음을 지키기 위한 그의 노력은 극진했다.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낮에는 품고 다니고 밤에는 베개 삼아 베고 자며 한 순간도 몸에서 떼어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속에서도 지켜낸 훈민정음 해례본은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된다. 그리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손에 흘러들어가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한 우리의 문화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부은 간송. 개인의 안위보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자 했던 그의 집념과 의지 덕분에 훈민정음 해례본은 지금까지 전해져 우리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높이고 있다.
골동품 앞에서 계신 간송 전형필 선생님 모습
도봉구 방학동 전형필 가옥 담장
좌: 전형필 묘, 우: 전형필의 養父의 묘
하필이면 오는날이 장날이라고 월요일 휴관일이라네요.
허탈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군요!
첫댓글 간송 선생의 사진은 처음으로 자세히 보았습니다.
정말 후덕하게 생기셨네요. 그 분의 생애에 머리가
절로 숙여집니다.
아쉽지만, 어쩌겠어 임대장 얼굴이라도 봤으면 됬지
잘 다녀 오셨습니다 다음에는....
참말로 부지런히 생활하시네
농담한마디 할까요
"발발이 임대장"
이런 휼륭한 분들이 계서서 나라를 지킬수 있지요. 다음에 BMW에서 가시면 어떨까요?
BMW에서 갈만 한 곳입니다. 우선 중학교1학년 가을 소풍 갔던 우이동 손병희 묘, 연산군 묘, 정의공주(세종대왕 딸) 묘, 함석헌 기념관, 목철수의 사천 睦씨 선형묘 그리고 전형필 가옥 등 사적 유적지가 몰려 있어요.
@물길(임경남) 아 ~ 정말 BMW에서 갈만 한 곳이네요.
목철수교수도 꼭 같이 가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