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지 못하는 짐승은 날개를 먹지 못한다
깃털이 수북하게 뜯겨 있는 한쪽에 날개를 벌리고 누워 있는 산비둘기 한 마리, 방금 잡아먹혔는지 몸통은 떨어져 나가고 날개만 남았다
날개를 벌린 채 날카로운 이빨에 몸통을 뜯어 먹히면서도, 날지 못하는 짐승은 날개를 먹지 못한다고 호탕하게 웃었을 것이다
시대와 말 걸기, 혹은 불화하기
―마티스와 불멸의 색채 화가들
한 사내가 한 시대를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가 보았던 풍경이며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 아무것도 들지 않고 그냥 빈손으로 그가 보았던 시대로 걸어 나왔다
그가 이미 나가버린 빈자리를 보면서 시대는 불화하기 시작했고 잘난 사람들의 시대가 끝나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가면이 벗겨질 것을 두려워했다
웃는 사람들은 그 앞에 설 수 없었고 고단한 자들만 마음의 옷을 벗으며 그 앞에 나타나 곤히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는 그런 자들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시대가 조심조심 갈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저녁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오려고 할 때 그는 그가 보았던 풍경이며 사람들을 위로하고 용서하며 다시 시대 속으로 돌려보내곤 했다
4월
찬란했던 꽃잎들 위로 생을 포기한 비가 떨어진다 차갑게 내리꽂는 직선의 슬픔이, 한 철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꽃불로 번져가는 꽃잎들 위에 시간보다 빠른 속도로 충돌할 때, 꽃들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잉태한다 그 얇은 꽃잎들이 견디다 못해 눈물도 없는 하강의 길을 택한 것은,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던 하늘이 자신의 화려했던 심장에 차가운 비수를 꽂았기 때문이다 꽃잎들이 사라지면, 어린 가지들은 배부른 식사를 마음껏 할 것이다
민달팽이
1
집 없는 달팽이,
몸집이 크고 길다
집을 벗어버려
잡혀가지도 않는다
달팽이가 신기해도
동그란 집이 없으면 관심 밖,
집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에게는
달팽이집이 달팽이였던 것이다
집을 나선 적도 없고
돌아갈 집도 필요 없는
달팽이 한 마리,
집이 없어 홀가분한지
배밀이로 가는 걸음
바람처럼 가볍다
2
여든이 넘어서도
목수로 일하는 아버지
잘 마른 나무 위를
온몸으로 기어 다니며
자르고 깎아 만든 목조 건물 속,
한 마리 달팽이가 되어간다
자신의 분비물로 만든 탑을
들락날락,
뼈 묻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침마다 이슬 찾아 나선다
마디 하나 없는 몸에
투명한 집 한 채,
무척추동물이 평생 걸려 세운
무덤이다
3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나의 집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집에 맞춰 살아간다는
깨달음 하나 배우자마자
내 눈을 스치고 가는 바람의
거대한 몸집
보이지 않는 꽁무니를 따라
땅끝까지 기어가면
달팽이관 그 속에
달팽이자리 별들이 살고 있다
향나무 탁본
회초릿감을 찾다가
폭설에 꺾인
향나무 가지를 보았다
쓸 만한 것을 떼어내
잔가지를 다듬는데
찐득하게 엉겨 붙는 먹물
향나무가 다급하게 갈겨쓴 탓에
손바닥이 아렸다
반쯤 마른 껍질을 벗기니
하얀 속살 여기저기
자잘한 옹이가 박혀 있다
나이테를 따라
수없이 되뇌었을 말들의 마침표
뼈를 깎듯 수련한
문장이 매끄러웠다
허공을 가르는 회초리 소리
향나무 바람체를 받아쓰는 종아리
연한 살결 위에
연분홍 일필휘지가 선명하다
울며 글을 읽은 아이
마음속에서
울창하게 뻗어가는
향나무
한 그루
붉게 물든 나무는
가지를 꺾지 않는다
―『바람의 구문론』, 푸른사상, 2015.
첫댓글 뼈를 깎듯 수련한 문장이...매끄럽다~~글치요^^*
글게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