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업자 10만원 받아내려 빚독촉…우유값 없는 주부는 식료품 훔치고
# 상품 배송업자인 A씨는 최근 법원에 민사독촉 신청서를 냈다. 10만원을 받아내기 위해서다. 재판은 기간이 오래 걸리지만 민사독촉 신청을 이용하면 비교적 빨리 법원의 지급명령을 받아낼 수 있다. 그는 지난해 착불요금으로 상품을 배달했다가 돈을 받질 못했다. "당장 가진 돈이 없으니 계좌로 넣어주겠다"던 고객은 반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그로선 가뜩이나 일거리가 없는데 10만원도 포기할 수 없다.
# "남편이 회사에서 잘려 당장 아이 둘을 먹일 우유 값도 없어요." 30대 전업주부 B씨는 지난 1월 서울중앙지법 즉결심판 법정에 섰다. B씨는 연방 눈물을 훔치며 선처를 호소했다. 그는 서울 양재동 한 대형마트에서 카트에 물건을 실어 훔치려다 직원에게 붙잡혔다. 카트에 담긴 물품은 아기 옷과 분유, 식료품 등 10만원어치도 안 됐다. 법원은 그의 딱한 사정을 고려해 선고유예를 내렸다.
실업자 400만명 시대, 법정에도 경기 불황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빚을 제때 못 받은 사람들이 내는 민사독촉 신청과 경범죄를 처리하는 즉결심판이 크게 늘었다. 사건마다 경제난에 허덕이는 서민의 고달픈 삶이 그대로 배어 있다.
4일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법원이 접수한 민사독촉 사건은 모두 51만4321건이다. 1, 2분기 각각 12만3668건, 12만2374건이었지만 세계적으로 금융위기가 몰아닥치면서 3분기 13만1905건, 4분기 13만6374건으로 늘었다.
민사독촉은 비교적 소액의 빚을 신속하게 받아내기 위한 것이다. 민사독촉이 늘어난 건 그만큼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이 증가했다는 뜻이다. 신청자는 주로 대부업체나 카드회사 등이다.
법원 직원들은 쏟아지는 독촉사건에 눈코 뜰 새 없다고 하소연한다. 서울중앙지법은 올들어서만 지난달까지 2만2752건의 독촉 사건을 접수했다. 이를 담당하는 직원은 20여명. 거의 매일 밤샘 작업을 하다시피 하고 있다.
법원 관계자는 "서류 접수 후 10일 안에 지급명령이 결정되는데, 돈을 갚지 않는 사람들은 주거지도 일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80%가량이 서류를 보내도 되돌아온다"면서 "주소를 수정하는 보정명령을 거쳐야 하므로 더욱 힘들다"고 토로했다.
즉결심판에 넘겨지는 서민형 범죄도 크게 늘었다. 2007년 3만7524건이던 것이 지난해 4만4215건으로 급증했다.
20만원 이하 벌금형이나 구류 등에 처해질 만한 생계형 절도, 무임승차, 무전취식, 도박, 광고물 무단부착, 도로교통법 범칙금 미납 등이 대부분이다.
즉결심판 법정에선 법관이나 피고인 모두 표정이 어둡다. 생활고에 내몰려 어쩔 수 없이 법정에 선 서민들의 사연은 딱하기만 하다. 워낙 형량이 낮아 더 깎아줄 수도 없는 판사들 마음도 아프다. 서울중앙지법 민사단독 한 판사는 "즉결심판을 하루 4∼5건 했는데 요즘엔 20∼30건 처리할 때도 있다"며 "전과 없는 피고인들이 먹고살려다가 법정에 선 모습에 인간적으로 애처로운 마음이 들 때가 많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