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 9:1)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
(슥 9:2) 그 접경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에도 임하리니
그들이 매우 지혜로움이니라
(슥 9: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았도다
(슥 9:4)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
(슥 9:5)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어질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주민이 없을 것이며
(슥 9:6)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주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슥 9:7) 그의 입에서 그의 피를, 그의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하리니 그들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슥 9:8)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대적자들의 심판과 구원(슥 9:1-8)”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1-8: “그의 입에서 그의 피를, 그의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하리니
그들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9장부터는 새로운 말씀으로써 미래를 내다보는 종말론적인 예언의 말씀이 전개 됩니다. 본문
말씀은 수리아, 베니게와 블레셋의 심판에 관한 예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다메섹에 머물렀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봤다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의 말씀은 사람의 눈이 여호와를 본다는 의미로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전체 문맥으로 볼 때, 8절에서와 같이 여호와의 눈으로 온 세계를 보고 계신다고 이해할 때, 본문의
해석이 순조로워집니다. 그만큼 원문 텍스트를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전체 문장의 흐름을 따라가기로 합니다. 우선 이 세 지명의 땅들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축복의 땅 즉, 가나안 땅으로 12지파에 분배된 땅입니다. 그러나 수리아 지역과 일부 베니게 지역은 실제적으로 소유된 적이 없는 땅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지역을 차례로 머물면서 심판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의미로서는 원래 이스라엘 땅의 회복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호와의
말씀이 지나가는 곳마다 의로운 심판이 시행되고 있다는 정황입니다.
먼저는 북쪽에 있는 하드락과 다메섹 그리고 하맛과 시돈 등을 심판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이스라엘에게만 유효한 것은 아닙니다. 이방들에게도 똑같이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본문 말씀은 심판이 먼저 이 세 나라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 나라에 머문다 하였습니다. 즉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심판이 있겠다는 순서인데, 이러한 현상은 어디까지나
먼 미래에 있을 역사적인 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게 되면 먼저 그 마음에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주일에
교회를 가야 하나, 친지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나? 갈등하게
됩니다. 남들 다 헌금하는데, 나도 이유 없이 헌금해야 하나
그냥 넘어가야 하나 망설이게 됩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해오던 세상습관과 익숙한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환자가 치료받기 위한 과정입니다. 수술과 같습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암 덩어리를 떼내야 합니다. 거기에는 심한 고통이 따를 수 있고 어려운 과정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하드락과 다메섹 하맛과 두로 그리고 시돈에도 여호와의 말씀이 전파될 것입니다. 그리고 위와 같은 현상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특히 두로와 시돈의
경우에는 지혜가 넘쳤고 굳건한 요새를 가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은을 티끌 같이, 금을 진흙 같이 쌓을 만큼 재물이 풍성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역사적으로는 알렉산더 대왕이 침입하기 이전의 발전된 두로의 모습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방 즉, 헬라의 힘으로 그들을 멸망시킨다는 말씀이 전혀 없으므로 여호와께서 직접 오셔서
이 일들을 행하신다고 해야 타당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곳에 머물렀다(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눈이 그들의 행위를 친히 보았으므로 심판이 임하였습니다. 유다가
포로로 잡혀가고 없었던 시기에 두로와 시돈은 해양제국으로 가장 왕성한 때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의 침공 이후 세계의 강국으로 등장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2차 대전 전후까지만 해도 지금의 베이루트(레바논)로 대표되는 이곳은 매우 아름다운 국제도시로서 휴양지로서 그
명성이 자자했고, 금융의 허브 역할을 톡톡히 했었지만, 현재는
수십 년간의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암흑과 같은 도시로 변해버렸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직접 심판의 손을 드셨던 것입니다.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슥 9:4)”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점은 잠시 후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남은 블레셋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북방 민족들의 멸망의 소문은
남쪽에 있는 블레셋의 간장이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겁에 질렸고 안절부절못하였습니다.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는 임금이 끊어질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주민이 없을
것이며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주하리라” 블레셋은
하나의 독립국가가 아니라 다섯 도시가 연방형태로 결집된 국가였습니다. 각 성읍들은 강력해서 이스라엘이
건재할 동안에도(다윗과 솔로몬 시대) 세력이 약화되었을 뿐
완전히 이스라엘에게 소속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위협하여 어려움이 가중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 가운에 머무는 순간부터, 그 블레셋이 무서워
떨며 전전긍긍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팔레스틴의 상황을 살펴보면 스가랴 선지자의 오늘 말씀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레바논 민병대 중에 기독교를 믿는 그룹이 강력하다고
들었습니다. 유대인은 예수를 믿지 않지만, 팔레스틴 즉, 블레셋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들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면 과장된 주장인가요? 물론 이 지역의 현상을 꿰 맞춰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지만, 이방 민족이 그것도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였던 그들이 오히려 여호와의 말씀 앞에 순종하게 되는 현상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수리아, 베니게 그리고 두로와 시돈, 블레셋까지
그들은 중동의 화약고라고 할 만치, 수십 년간 전쟁의 화염 속에 불안한 상태를 유지해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국지전은 매일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심판 속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선포되고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지혜, 요새(군사력), 재물 등을 믿고 교만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똑같이 지혜를 자랑하며
권세와 권력으로 약한 자를 압제하며 자기 유익을 위해 마음껏 권세를 휘두릅니다. 돈 앞에서는 무너지지
않는 자들이 없다는 신조로 똘똘 뭉쳐 있는 자들입니다. 곧 지방 선거철이 다가옵니다. 수 천 수만 수 억의 돈다발들이 또 권력을 쫓아 날아다닐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자가 있나요? 금품이 차단된 선거, 깨끗한
선거를 치르겠다고 후보자들이 다짐들 하지만, 유권자들이 그것을 원하니 이미 물 건너간 다짐들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미국처럼 누가 돈을 많이 모아서 표를 사느냐와 같은 제도로 전환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튼 내년 상반기는 대부분 서민들과는 상관없겠지만 돈 풍년 한번 맞이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이런 두로와 시돈을 정복하여 바다에 쳐넣겠다고 하셨습니다. 보기에는
재력, 권력, 지혜(대학간판
등)이 세상을 지배할 것 같으나, 반드시 바다에 쳐넣겠고
불로 살라버리겠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단순하게 믿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으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살기로 그분 앞에서 맹세한 자들입니다. 이점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악습과 하나님께 반하는 제도는 철저히 부셔버리고 불살라버리시겠지만,
이러한 심판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들이 여호와 앞에 돌아오는 길목이기도 합니다. 심판의
자리에 천국(구원)의 이정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을 향한 심판은 심판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통한 구원 즉, 유다의 한 지파로 편입시키는 놀라운 일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스가랴 시대에 이와 같은 이방인의 편입에 관한 예언은 유대인들에게는 파격적이었습니다. 아마도 무슨 뜻인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타당성을
여부스 족속이 이스라엘의 일부로 편입되었던 과거의 사건으로 설명하셨습니다(삼하 5:6-9 참조).
이스라엘을 대적한 자들도 여호와께서는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일단 여호와의 집에 들어온 이방인들은 진을 쳐서 적군을 막고 왕래하지 못하게 하시며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근처에도
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시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복된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바로 옛적에 하나님을 적대했던 자들입니다. 우리의 세상 것들인
권세, 재물, 지혜 등을 내려놓게 하기 위해 고통을 주시고
파산을 당하게 하시며 슬픔과 좌절을 체험토록 하셨습니다. 아직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그 여운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고달픈 것입니다.
여호와 눈이 우리의 대적들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더
이상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유다의 70년
포로 생활은 그 주변의 대적자들이 여호와께 심판 당했던 고통과는 비교될 수 없으리만큼 미약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상대적으로 미약했을지라도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좌절과 고난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백성이 당하는 심판은 죽어버리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살려내기 위한 통과의례와 같은 것입니다.
그 은혜와 축복이 적들에게도 개방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혜택자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재력, 권력, 학력, 지혜로 세상을 살아볼 생각을 접읍시다. 오로지 여화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런 것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세워가는 일에 도구로 재료로 사용될 수
있게 그 사용권한을 하나님께 넘기도록 합시다. 그것만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증거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주님 재림 후 심판을 면할 증명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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