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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말씀 주일과 성서주간
매일 한두 구절이라도… 성경 가까이 하기를 강조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9월 30일 자의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제정했다. 이로써 교회는 지난 2020년부터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지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서에서 이날을 ‘하느님 말씀의 거행과 성찰과 전파를 위하여 봉헌하는 날’로 선언하고 하느님 백성이 ‘성경을 더욱더 경건하고 친숙하게 대할 수 있기를’ 요청했다.
1월 22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맞아 그 취지와 배경을 되새겨본다. 아울러 한국교회에서 지난 1985년 공표한 ‘성서주간’은 어떤 의미인지 함께 살펴본다.
말씀이 삶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기를
“우리 내면에 하느님 말씀을 위한 자리를 마련합시다! 매일 성경의 한두 구절을 읽읍시다, 복음서부터 시작합시다. 집에 있는 작은 책상 위에 성경을 펼쳐 놓읍시다. 가방이나 주머니에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스마트폰 앱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매일 성경에서 영감을 얻읍시다. 우리의 어둠을 밝히시고 큰 사랑으로 우리 삶을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는 것을 발견합시다,”
지난 2020년 1월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제1회 하느님의 말씀 주일 미사 강론에서는 이날이 지닌 취지와 의미가 잘 설명된다.
하느님 말씀인 성경은 교황청 새복음화촉진평의회 전 의장 리노 피지켈라 대주교 말처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먼지가 많이 쌓인 책’이기도 하다.
이런 현실에서 교황은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과 신자 공동체와 성경이 이루는 관계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 정체성의 본질”이라며, 말씀이 주는 중요성을 역설하며 신앙인들에게 성경을 가까이할 것을 촉구한다. 교서에 따르면 하느님 말씀 주일의 기본 취지는 ‘전례주년의 주일 가운데 하루를 하느님 말씀에 특별한 방식으로 봉헌함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위하여 당신 말씀의 보고를 열어 주시는지 교회가 새롭게 체험하자’는 것이다.
앞서 2016년 교황은 교서 「자비와 비참」에서 ‘주일 가운데 하루를 정해 그 주일을 온전히 하느님 말씀에 바쳐 주님과 주님 백성이 나누는 끊임없는 대화에서 샘솟는 마르지 않는 부요를 이해하는 날이 되기를’ 요청한 바 있다. 신자들이 하루를 특별히 봉헌하며 말씀에 심취할 필요성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말씀의 풍요로운 체험이 사랑의 태도와 구체적인 활동을 이끌기 때문이다.
이날은 특별히 ‘교회 일치’와 관련된다. 성경은 듣는 이들에게 참되고 굳건한 일치에 이르는 길을 가리켜 주기 때문이다. 연중 제3주일, 즉 해마다 유다인들과 맺는 유대를 강화하고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치주간’(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 회심 축일인 1월 25일까지)과 하느님의 말씀 주일 시기가 맞닿는 것은 단순한 시기상 우연이 아닌 이런 배경에서다.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장엄한 날로 지낼 고유한 방법으로는 성찬례 거행에서 성경 봉정을 함으로써 하느님 말씀의 규범적 가치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권장된다. 또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 말씀의 선포를 강조하고, 강론에서도 말씀에 마땅히 드려야 하는 공경을 부각하는 것 등이 권해진다.
본당 주임 사제들은 날마다 성경을 읽으면서 성찰하고 기도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성경 전체 또는 성경의 여러 책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는 방법도 찾을 수 있다. 성체분배자 등 말씀의 진정한 선포자 육성을 위한 신자 교육도 언급된다.
수원교구 복음화국장 이승환(루카) 신부는 “최근 한국교회에서 성경을 학문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해지면서 말씀을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이려는 경향도 늘어가고 있다”며 “하느님의 말씀 주일은 신자들이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여 자주 읽고 묵상하며 하느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운데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고자 다짐해 보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경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
한국교회에서 지내는 성서주간은 1985년 5월 주교회의 춘계 총회를 통해 결정됐다. ‘모든 신자가 성경을 가까이하는 기회를 많이 가지고, 성경과 적극적으로 친숙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정 배경이다. 아울러 모든 신자가 성경을 생활의 지침으로 삼는 계기를 만들고자 하는 바람이 담겼다.
이 지침을 토대로 주교회의 성서위원회는 1985년 10월 ‘성서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라는 제목의 제1회 성서주간 담화문을 발표하고 기도문도 배포했다. 담화에서는 ‘매일의 식사가 육신 생명을 지탱시키듯이 매일의 성서 봉독이 영신 생명을 지탱시킬 것’이라며 날마다 성경을 가까이할 것이 강조됐다. 당시 성서위원회 위원장 고(故) 김남수(안젤로) 주교는 담화를 통해 “성경에서 신자 생활이 흘러나와야 하며, 많이 아는 것보다 한 가지라도 실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성서주간은 왜 전례주년을 마감하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주간에 지낼까. 이는 교회 안에서 1년 동안 선포된 구원 말씀을 되새기고 감사드리며 새로이 시작되는 전례주년에도 변함없이 매일의 양식으로 성경을 받아들이자는 각오를 새롭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올해로 39회를 맞는 성서주간은 한국교회에 성경 공부를 가장 보편적인 신자 재교육 방편으로 정착시키는 중요한 동기가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례와 미사의 영성 (40) 성체를 쪼갬
미사 때 평화의 인사 후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제단 위 사제의 행동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때 사제는 작고 낮은 목소리로 기도하면서 성체를 쪼갭니다. 그리고 쪼갠 성체 조각 일부를 성혈이 담긴 성작에 넣습니다. (아~ 그렇게 하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구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느님의 어린양’을 열심히 노래하시느라 미처 사제의 행동을 못 보실 수도 있답니다.) 이렇게 사제는 성체 조각을 성혈이 담긴 성작에 넣고 깊은 절을 한 다음, 성반 위에 성체를 받쳐 들어 올리고 (또는 성작 위에 성체를 받쳐 들어 올리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말합니다. 자, 그런데 사제는 왜 성체를 쪼개어 그 조각을 성혈이 담긴 성작에 넣을까요?
무엇보다 사제는 성체 조각을 성혈이 담긴 성작에 넣으면서 이렇게 조용히 기도합니다. “여기 하나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이를 받아 모시는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하소서.” 즉, 이제 영성체를 통해 우리가 받아 모실 성체와 성혈이 우리 구원을 위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해달라는 기원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 우리 또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을 바치는 것이죠. 그래서 쪼개진 성체가 성혈과 다시 합쳐지는 것은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의 몸과 피의 일치, 곧 살아 계시고 영광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를 표시”(미사경본 총지침 83항)하며, 파스카 신비 안에서의 일치를 표현하게 됩니다.
사실 빵을 쪼개어 나누는 예식은 사도 시대 교회에서도 중요한 예식이었습니다. 빵을 나누는 것은 무엇보다 공동체의 일치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며, 한 식탁 안에서 빵을 나눠 먹으면 모두가 한 형제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의 빵을 쪼개어 나눔은 무엇보다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찬례를 ‘미사’라 부르기 전에는 ‘빵 나눔’(Fractio panis)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8~9세기경부터 성찬례를 위한 작은 빵이 등장하면서 빵을 떼어 나눌 필요는 사실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미사에 참례하는 모든 이가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고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빵을 쪼개고 그 조각을 성혈이 담긴 성작에 넣는 것입니다.
이처럼 빵을 나누는 예식은 이제 곧 행할 영성체를 통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모든 이가 한 몸을 이룬다(1코린 10,17 참조)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가 성체를 쪼개어 나누고, 그 조각을 성혈이 담긴 성작에 넣는 것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이가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고 그분과 한 몸을 이루게 된다는 놀라운 사랑의 신비를….
[전례력 돋보기] 낯설었던 2011년 1월 6일의 주님 공현 대축일
이탈리아에 유학을 가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성탄 방학이었다. 커피 한 잔 주문하는 것도 속으로 몇 번을 되뇌이고 용기를 내어 겨우 말하던 시절, 한없이 움츠러들던 일상을 뒤로하고 독일 뮌헨의 한인 본당에서 교구 선배 신부님들과 함께 오랜만에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다시 로마 공항에 내린 날은 방학의 마지막날인 2011년 1월 6일 이른 아침이 었다. 공항에서 다시 어학 공부를 하던 빼루지아(Perugia)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더구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긴 한데 그걸 알 길이 없어 애꿎은 버스 시간표만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 그렇게 1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지나가던 아주머니의 친절 덕분에 의문이 풀렸다. “오늘은 1월 6일, 에피파니아(주님 공현 대축일)야. 공휴일 버스 시간표를 봐야지!” 이탈리아의 대중교통은 주일과 공휴일에는 평일보다 기차나 버스의 배차 간격이 늘어난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1월 6일이 공휴일이었다니. 처음 공휴일로 보내는 주님 공현 대축일이 참 낯설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이 왜 공휴일일까? 공휴일로 지낼 만큼 그날이 중요한가?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이 축일을 1월 2일 과 8일 사이의 주일로 옮겨 지내며 신자들이 많이 참례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늘 옮겨 지내다 보니 1월 6일이라는 본래의 날짜를 잊어버리고 지내왔던 것이다.
‘에피파니아(Epiphania)’란 말은 ‘밝게 드러남, 나타남’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이 축제를 하느님의 아드님의 탄생이 동방 박사들로 대표되는 모든 인류에게 공적으로 드러나셨다는 뜻의 공현(公現))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이미 성탄 대축일을 지내면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했는데 왜 주님 공현 축제를 따로 지내는 것일까? 성탄만으로는 부족한 것이었을까?
12월 25일 성탄절이 350년경 로마에서 먼저 확립된 축제였다면,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은 그보다 앞서 동방의 여러 도시에서 예수님의 신성이 이 세상에 나타나심을 알리는 다양한 주제들, 즉 예수님의 탄생과 동방 박사의 경배, 예수님의 세례, 카나의 첫 기적 등을 함께 기념하는 날이었다. 이후 로마의 성탄 축일이 동방 지역으로 전파되고, 동방의 공현 축일이 로마에 전해지면서 두 축일을 함께 지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두 성탄 축제가 함께 존재하는 모습은 동서방 교회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온 전례의 역사를 잘 나타낸다고 하겠다.
한편 로마에서는 성 대 레오 교황(재위 440-461)의 강론을 통해 동방에서 기념하던 1월 6일의 다양한 주제 중 동방 박사의 경배를 통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모든 민족에게 널리 알려진 사건을 중점적으로 기념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 전례는 주님의 공현을 알리는 다른 사건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특별히 주님 공현 대축일과 그 이후 평일의 시간전례에서는 예수님의 세례와 카나에서 첫 기적을 이루신 사건을 자주 언급한다. 대표적으로 주님 공현 대축일 제2 저녁기도의 성모의 노래 후렴은 이날을 이렇게 소개한다.: “오늘 세 가지 기적으로 이날을 기념하였도다. 별이 박사들을 구유에로 인도하였고, 혼인 잔치에서 물이 술로 변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도다.” 또한 이 사건들은 주님 공현 대축일 이후 바로 이어서 오는 주일, 곧 주님 세례 축일과 연중 제2주일(다해)의 복음 내용으로 읽도록 배치되면서 전례력 안에서 주님 공현의 신비를 순차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동방 박사의 경배 뿐 아니라 다양한 하느님의 아드님을 드러내는 ‘에피파니아’의 표징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는 다음과 같은 답을 준다. “우리를 위해 탄생하시기를 원하셨던 그분은 우리가 당신에 대해 모르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공현 후 월요일 독서 기도 제2독서)
여전히 유럽의 1월 6일이 공휴일임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연약한 아기의 모습을 택하시고, 이방인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고, 세례의 물에 먼저 잠기시고, 그리고 장차 흘리실 피의 상징인 포도주를 내어 주신 분의 따뜻한 사랑을 이제는 낯설게 느끼지 않고 늘 기억하기를 다짐해 본다.
전례와 미사의 영성 (39) 평화의 인사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있다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사는 처음 만나는 사람의 경우에는 서로를 소개하고, 원래 아는 사람의 경우에는 서로 안부를 물음으로써 유대감을 이루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사의 의미는 사실 가만히 보면 단순한 안부 나눔이 아닙니다. 한 존재와 또 다른 한 존재, 그리고 한 사람의 지난 삶의 역사가 또 한 사람의 삶의 역사를 만나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입니다. ‘나’와 ‘너’를 떠나 ‘우리’가 되는 순간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매 미사 때 평화의 인사를 서로 나눕니다. 그런데 미사 때 이 인사는 왜 하는 것일까요? 사실 미사를 시작하면서 바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특히 주일 미사 같은 경우는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신자들도 있으니 미사를 시작하면서 먼저 반갑게 인사 나누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미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영성체 전에 평화의 인사를 서로 나눌까요?
미사 때 신자들이 서로 나누는 평화의 인사는 로마서(16,16)에 나오는 “거룩한 입맞춤”이나 베드로 I서(5,14)에 나오는 “사랑의 입맞춤”이란 의미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사실 이 평화의 인사는 화해와 일치의 의미로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특히 영성체를 통해 성체를 모시며 그리스도와 일치하기에 앞서, 먼저 신자들이 서로 화해하고 일치함으로써 주님을 모실 준비를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러한 평화의 인사를 예물 봉헌 전에 실시하였습니다. 이는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과 화해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마태 5,23-24 참조). 이런 측면에서 예루살렘의 치릴로(315-387) 성인은 평화의 인사를 화해의 표시라고 하였습니다. 서로 간에 다툼과 갈등이 있다면 이 평화의 인사를 통해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다 이 예식은 7세기경부터 영성체 전으로 그 순서가 옮겨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화해와 평화를 통한 서로 간의 일치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지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부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영성체 전에 이런 평화의 인사를 서로 나누도록 한 것입니다. 신자들 간의 일치를 넘어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평화의 인사는 궁극적으로 ‘신앙인 공동체의 일치’를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향한 예식이 됩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인사는 단순히 주위 사람들과 가볍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나누는 시간이 아닙니다. 신앙인 공동체 안에서 평화를 나누고 기원하는 기도이자 서로를 향한 축복입니다. 더 나아가 천상 예루살렘에서 누릴 종말론적인 완전한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고 일치하여 걸어가야 하는 신앙 공동체의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알기 쉬운 전례 상식] 적어도 미사 15분 전에
“(버스, 기차, 비행기 등) 탑승객은 출발 15분 전에 대기하여 주십시오.” 이는 여행객들에게 매우 익숙한 표현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마침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의 마음속에 시간 의식을 심어 주셨다. 하느님의 영원한 시간(카이로스, kairos)과 구분되는 피조물에게 주어진 시간(크로노스, kronos)에 대한 성찰은 구약 성경의 코헬렛에 잘 드러나 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코헬 3,1-11ㄴ).
일 년과 한 달 그리고 하루, 시기와 계절에 따라 다양한 일상생활이 전개된다. 극장에서 합창단 공연이나 영화 상영, 또는 국경일의 공적 행사나 외국 출장이나 여행이 있다면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기쁜 마음으로 기다린다. 공적 행사나 업무가 이미 시작되었거나 교통수단이 떠난 뒤에 도착한다면 뒤늦게 가슴을 두드리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지나간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도 없으니 말이다. 공적 행사나 업무가 있다면 지체하지 말고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지정된 장소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공적 예배인 미사는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비체인 교회의 거룩한 행위’이다. “전례 행위는 사적 행위가 아니라 ‘일치의 성사’인 교회, 곧 주교 아래 질서 있게 모인 거룩한 백성인 교회의 예식 거행”(「전례 헌장」 26항)이므로 신자들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완전하게 참여해야 한다. 여행이나 특별한 행사에 미리 참여하는 것처럼 신자들은 정해진 시간보다 적어도 15분 전에 와서 앞자리부터 앉아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그동안 생각과 말과 행위로 하느님과 이웃과 자신에게 잘못한 일을 반성하고 성찰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뒤늦게 온 신자들 때문에 다른 신자들이 영적 분심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한때 엄한 신부님들이 미사 시작과 함께 성당 현관문을 잠가놓기도 했었다는 사실을 요즘 신자들은 알기나 할까.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33. 미사 해설 - 말씀 전례 (9) 말씀 전례 중 강론 (1)
복음 봉독 후, 사제의 강론이 이어집니다. 미사 전례는 모든 부분이 매끄럽게 연결되어 미사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이 편안하고 우리가 사는 시대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하며, 나아가 하느님을 흠숭하고 자신의 성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강론 역시, 미사에 참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삶의 방향에 있어서 주님께서 일러 주시는 부분으로 걷도록 도와주는 예식이기도 합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65항은 강론에 대한 지침을 전해 줍니다.
“강론은 전례의 한 부분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찌우는 데 반드시 필요하므로 크게 권장된다. 강론은 그날 봉독한 성경의 내용 또는 그날 미사의 통상문이나 고유 전례문에 대한 설명이어야 한다. 강론을 할 때는 거행하는 신비나 듣는 사람들의 특수한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에서는 강론에 대해서 다섯 가지 특징을 제시합니다.
성서적이고,
전례적이며,
복음선포적이고,
대화적이며,
예언적이다.
이는 강론을 준비하는 사제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미사에 참석한 교우들 역시 이와 같은 관점으로 강론을 이해해야 합니다. 강론은 성경을 해석하거나, 복음을 풀이하고 선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또한 전례에 대한 의미를 해설하거나, 공동체의 대화 시간이며, 시대의 예언자적 역할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인적인 의견을 강론 시간을 통해 전달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인간적인 판단으로 강론을 평가하거나, 나아가 전례에 대해 평가를 한다는 점은 “강론”이 지닌 목적에 그릇된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어서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66항을 살펴봅시다.
“… 주일과 의무 축일에 교우들이 참여하는 모든 미사에서는 강론을 해야 하며, 중대한 사유 없이 생략할 수 없다. 다른 날에도, 특히 대림, 사순, 부활 시기의 평일, 그리고 많은 교우들이 성당에 모이는 축일이나 특별한 기회에는 강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강론 다음에는 알맞게 짧은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지침에 의하면, 주일과 의무 축일의 강론은 생략할 수 없고, 다른 날에도 강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전합니다. 또한 강론 이후에 짧은 침묵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하느님 백성 각자가 말씀을 묵상하도록 인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전례적 요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도 “강론”에 대한 설명이 계속됩니다. [2023년 1월 15일(가해) 연중 제2주일 대전주보 4면,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사목국 차장)]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34. 미사 해설 - 말씀 전례 (10) 말씀 전례 중 강론 (2)
미사의 목적은 하느님 백성들이 함께 모여 하느님을 흠숭하고, 나아가 하느님 백성들이 성화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목적은 특별히 미사 중, 강론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65항에서 강론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살찌우는 데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하는데, 이를 통해 강론의 중요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어느 한 사람의 연설문이 아닌, 전례 안에서의 중요한 예식으로써 강론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강론에 대한 유의사항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합니다.
첫째, 강론은 원칙적으로 주례 사제가 해야 합니다.
“강론은 원칙적으로 주례 사제가 한다. 공동 집전 사제 가운데 한 사람이나 필요한 경우 부제에게 맡길 수도 있지만, 평신도에게는 결코 맡길 수 없다. 신자에게 강론을 하도록 허락하였다는 관행은 버려야 하며, 관례의 힘을 빌리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미사 중에 평신도에게 설교를 금지하는 것은 신학생이나 신학을 전공하는 학생, 또는 이른바 ‘사목 협조자’의 임무를 맡은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어떤 다른 부류의 평신도나 단체, 공동체, 협회라 할지라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66항; 구원의 성사 65, 66항).”
위 지침에 따르면, 거룩한 미사 거행 중에 하는 강론은 주례 사제 또는 공동 집전 사제 가운데 한 사람이나 부제가 해야 합니다. 하지만 신자에게 강론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평신도 주일 때 사목회장이 강론을 대신하거나, 주일학교 미사 중에 교리교사들이 강론을 하는 모습들은 이러한 전례 지침에 어긋나는 행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 강론에 대한 인간적인 판단은 전례 정신에 어긋납니다.
종종 교우분들께서 어느 사제의 강론을 평가하거나, 강론을 통해서 사제의 자질을 평가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전례의 정신에 어긋납니다. 강론은 자의적인 판단이 아닌 하느님 말씀을 통해 경청하고, 하느님 말씀을 통해 판단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전례의 예식이 인간적인 판단에 맡겨질 경우, 하느님의 말씀이 배제되고, 이성적인 판단을 중심으로 강론을 바라보게 되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강론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함께 나누는 시간입니다. 곧, 전례 안의 또 다른 예식임을 의식해야 합니다. 말씀이 육화되어 우리의 일상 안에 다가오는 “말씀의 성변화”가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마련해주어야 하고, 강론 후에는 참석한 모든 이들이 침묵을 통해, 마음속에 자리한 하느님의 말씀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되새기며, 강론 시간을 보낸다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성경구절은 현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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