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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69년생인데 우리 교회는 좀 69년생이 좀 많아요. 원래 좀 그렇긴 하더라고요. 대부분 교회를 보면 그래서 이제 우리 연세 있으신 어르신들도 저에게 늘 잘해주기도 하지만 또 69년생들이 생각보다 잘 하고 이렇게 해요. 이분들이 가끔 인사를 조금 이렇게 제가 얼굴을 좀 뜨겁게 하셔가지고 제가 당황스러울 때가 되게 많은데 그 인사를 오늘 함께 해보겠습니다. 어떻게 인사하시는지 이렇게 인사하더라고요. 저를 보면 막 이렇게 하시고 막 이렇게 하시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옆 사람은 성도들과 함께 인사 나누겠습니다.
인사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70 목장이 만들어졌어요. 어르신들 남성 어르신들 어제 이렇게 나들이를 다녀왔어요. 근데 보니까 회원들 중에 또 많은 부분을 책임지셔서 다녀오시기도 하고 또 자녀들이 맛있는 음식 봉다리 봉투도 준비해서 비닐봉투 담아서 주기도 하고 너무 재미있게 이렇게 다녀오셨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도 우리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서로 같이 인사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제 꿈과 비전을 성도들과 많이 공유한 것 같지는 않아요. 전혀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러분의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그렇게 빈번하게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건 잘못된 거예요. 그 자가 하나님이 주신 그 비전을 끊임없이 성도들에게 공유하고 나눈 일들이 있어야 되는데 제가 그런 일들에는 조금 게으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조금 자주 이렇게 나누려고 해요.
특별히 최근에 저희 교회에 새로 오신 성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한 번 더 제가 가진 비전이자 또 우리 교회의 비전 안에 숨어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눈치를 챘는지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제 목회의 중심에는 예배가 있어요. 예배를 잘 드리는 것 이게 제 목회의 중심이에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저는 항상 1시간 전에 분당에 와서 물론 부역자나 담당자들이 다 살피지만 미리 상황을 다 살피고 준비해 놓고 그래서 우리 교회는 안내자들도 오히려 저보다 더 일찍 오시죠. 오셔서 미리 준비하고 다 예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배경에는 이제 제 목회에 대한 가치관이 담겨져 있는 거죠. 예배가 교회의 중심이다. 예배가 성도들의 삶의 중심이다. 저는 예배를 잘 드려야 성도가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고 이길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가정의 흥망성쇠는 예배와 예배에 달려 있고, 개인의 흥망성쇠도 예배에 달려 있고, 교회의 흥망성쇠도 예배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온전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도 믿어요.
그러니까 예배는 성도의 영적인 척도이자 그리고 예배는 교회의 영적인 척도예요. 교회가 얼마나 예배를 잘 드리느냐 말이 좀 애매하지만 잘 드리느냐가 그 교회가 영적으로 얼마나 성숙한가를 증명하기도 하고 그것이 척도가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성도가 얼마나 예배의 진심이냐가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배를 잘 드린다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해요.
여러분 우리는 뭔가를 새로 만들기보다는 누려도 충분한 사람이에요. 이미 하나님께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이 충분하기 때문에 우리가 굳이 뭔가를 만들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만 가지고도 우리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을 우리에게 누리게 하는 것이 예배인 거예요. 그래서 예배를 잘 드려야 예배를 온전하게 드려야 예배를 하나 기쁘시게 드릴 수 있어야 하나님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것들을 그 교회와 성도들에게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에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가장 근원적인 문제에는 예배가 있을까요?
예배를 잘 못 드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예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부유한데 나는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잘 드린다는 것은 예배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게 되면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과 능력을 예배와 그 백성들 가운데 마음껏 나타내셔요.
원래 한 해에 목표가 나는 예배자입니다. 이 목표를 가지고 1년간 사역을 하고 이제 예비 학교도 진행하고 어떤 올 한 해 동안 예배의 많은 변화들 형식의 변화도 변화이긴 하잖아요.
이 변화들을 통해서 우리 교회가 좀 더 예배에 집중하고 예배를 통해 누리는 은혜들을 더 많이 얻고자 합니다.
교회의 규모나 교회가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교회가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하냐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선교를 이만큼 했어요. 우리 교회가 구제를 이만큼 했어요 라고 선전하는 것 물론 좋은 일이죠. 그러나 정말 더 중요한 것은 그 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선교하고 구제하는 성도들이 온전한 예배자냐는 거예요.
여러분 선교를 잘 하려면 예배자의 자세로 해야 돼요 아니면 사기꾼 돼요 구제를 잘하려면 예배자의 자세로 구제를 해야 돼요. 아니면 난봉꾼이 돼요. 그래서 선교의 현장에는 사기꾼도 많고 부재의 현장에 남봉꾼도 많아요.
왜요?
예배자가 되는 일들을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오랫동안 예배를 드렸어요. 누차 이야기하면 저는 모태 신앙입니다. 그래서 정말 수없이 예배를 드렸어요. 새벽 기도도 학생 때부터 다녔으니까 더 많이 드렸을 거고 수요 예배도 학생 때 다녔어요. 그래서 더 많이 드렸어요. 정말 목사님 자녀들 빼고는 그 자녀들은 어쩔 수 없이 엄마 품에 새벽도 가고 했으니까 그런 목회자 자녀들 빼고는 정말 가장 많이 예배를 드리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저는 이미 예배의 전문가가 되어 있어야 돼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죠. 얼마나 많은 예배를 저와 함께 드렸어요 그럼 여러분은 이미 예배에 있어서는 탁월함이 있어야 돼요. 과연 우리가 그러냐는 거예요. 전문가는커녕 초보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수천 번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 이미 전문가여야 돼요. 그런데 누가 봐도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에요. 예배드리는 모습도 아마추어에 가깝고 가깝습니다.
왜 이럴까요?
왜 이렇게 수없이 반복한 예배의 모습이 왜 이럴까요?
그 원인을 한번 고민해 봤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요즘 헬스를 합니다. 제 몸에서 헬스의 흔적을 찾으려고는 하지 마세요. 열심히 하지만 흔적은 나타나지 않아요. 헬스에서 근육을 크게 하는 방법이 있어요. 음식 특히 단백질을 많이 먹고 고정적으로 운동을 하면 이게 몸이 좋아져요. 그런데 정말 오랫동안 헬스웨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차이가 없는 분들이 있어요
왜 그럴까요?
왜 그렇게 오랫동안 헬스장을 다녔는데 운동 처음 할 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그럴까요?
대표적인 이유는 항상 둘 수 있을 만큼 들기에 편한 무게만 들어서 그래요. 근육에 무리가 되지 않도록 운동을 한 거죠. 근육이 좀 힘들지 않도록 힘들만 만큼 하면 작은 무게를 들고 그렇게 해서 근육이 자랄 기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것처럼 근육이 언제 커지냐 하면 우리가 횟수나 무게를 많게 해서요. 근육에 통증이 오고 통증이 오고 난 후에 쉴 때 그래서 근육이 이렇게 자라요. 그러니까 운동을 할 때는 반드시 중간에 씌워줘야 돼요.
그러니까 일주일에 7일 계속 근육 운동을 하는 것보다는 씌워줘야 되고 근육 운동 중간중간에도 씌워줘야 이게 근육이 자라고 크게 됩니다. 그러니까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돼요. 횟수를 많이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이 한 번 두 번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힘들지 않게 편안하게 고통이 없이 운동을 하면 좋은 몸, 건강한 몸 그리고 헬스를 꿈꾸는 사람들이 가지고 싶은 그 몸은 결과적으로 가질 수 없어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최대치의 예배를 드리는 횟수가 늘어나야 예배자로서의 나의 모습이 점점 나아져요. 늘 똑같은 모습에 더 이상의 헌신과 결단과 노력이 없는 예배는 그냥 우리를 습관화 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예배의 그 어떤 자극도 받지 못하게 해요. 어떻게 보면 예배를 오래 드렸다는 것은 위험이기도 해요.
군에 있을 때 이제 형제들이 훈련을 좀 길게 나가거나 전방에 GOP 투입돼 있다가 이제 헤바로 와서 본 교회 예배에 동참할 때가 있어요. 근데 이 친구들이 막 울어요. 울면서 예배를 해요. 왜냐하면 예배를 제때 못 드렸거든요. 기타 반주자도 없어요. 그런데 연대교회나 여단 교회에 오면 피아노도 있고 드럼도 있고 다 세팅이 돼서 하니까 너무 행복해서 막 울면서 예배하는 형제들을 봤습니다.
여러분 아무런 자격 없는 은혜도 없는 회개도 없는 예배를 반복한다고 해서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예배할 때마다 더 나은 예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예배, 하나님이 응답하신 예배를 갈망하면서 예배하고 그것을 경험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 예배 때 어떤 자극이 있나요? 예배 때 말씀을 통해 자기의 죄가 보이는 경험도 있어야 하고요. 은혜 중에 기도 중에 자기의 미래를 보는 시간도 있어야 하고요. 말씀을 통해서 막힌 인생의 길이 열리는 경험도 예배에 있어야 돼요.
여러분 실제로 이 모든 것들은 예배에 있는 것들이에요. 근데 내가 너무 일상적으로 예배하다 보니까 아무런 자극 없이 도전 없이 변화 없이 예배하다 보니까 이 예배에서 있어야 될 것들을 경험하지 못한 채 예배를 지나가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 변화가 있는 경험을 예배를 통해서 하려면 예배가 바뀌어져야 됩니다.
지난 오후 예배 때 예배에 대한 이제 어원을 좀 이렇게 살펴봤어요. 영어로 예배가 월십이에요. 이건 합성어인데 월스라는 가치를 의미하는 단어에 신분이라는 의미하는 단어가 합쳐져서 월십이 됐어요. 이 단어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면 이렇게 돼요. 최고의 가치에 합당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예배다.
그러니까 최고의 가치이신 하나님께 그 가치에 맞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예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잖아요. 그 존재에 맞는 태도와 삶을 취해서 예배하는 것이 참 예배라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우리는 예배라는 행위를 반복해서 했지만 정말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그런 고백과 행위가 우리 가운데 수 없을 수도 있어요. 그게 없는 예배를 반복했기 때문에 예배는 힘들고 지겹고 어려운 곳이 점점 되고 있는 거죠. 최고의 가치이신 하나님께 하나님의 신분에 합당하게 섬기기 위해서 필요한 대가를 기꺼이 치르는 것이 예배인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가치에 합당한 태도를 취한다는 건 그 가치에게 어떤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인 거예요. 그 대가를 치르면서 예배를 드리라는 거예요.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신 예배가 되려면 하나님을 높이는 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대가를 기꺼이 치러야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의 가치에 맞게 고백하고 그렇게 인정하는 데 필요한 모든 대가를 기꺼이 치러야 우리가 정말 경험하고 싶어 하는 그 예배를 우리가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는 두 가지 요소가 있어요. 하나는 고백과 그리고 헌신이라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있어요. 근데 한국교회는 어디에 너무 치우쳐 있냐 하면 고백에만 너무 치우쳐져 있어요. 그래서 뭐가 없어요? 결단과 헌신이 없는 거죠. 행위와 결단과 헌신이 없어요. 구약의 제사는 고백과 함께 반드시 헌신이 동반돼야 돼요.
지금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백과 함께 반드시 대가를 치르는 헌신이 동반되어야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우리가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정말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삶의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예배하고 있습니까?
그럼 우리 예배자의 우리의 자세와 태도에서 바뀌어야 될 게 한두 가지가 아닐걸요. 만약에 정말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을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으로 인정하고 나의 구주로 인정하고 나를 지으신 자로 인정하고 하나님과 비교할 분이 없다고 믿고 확신하는 모습으로 예배한다면 우리의 삶에 바뀌어야 될 부분이 한두 가지일까요?
예배의 모습 가운데 바뀌어야 할 것이 한두 가지일까요?
그게 바뀌어질 때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우리가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기 위해 예배드림에 방해되는 것을 기꺼이 버려야 돼요. 그러니까 버림으로 대가를 치르는 거죠. 버림으로. 그래서 예배의 가치를 알고 예배를 온전히 드리기 위해서 필요 없는 것들을 버려요.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자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것의 대가를 치르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지를 알아요.
정말 예배를 가치 있게 여긴다면 여러분 예배 방해하는 것들을 기꺼이 버리는 결단과 헌신이 있어야 돼요. 그런 것 없이 하나님이 기뻐한 예배를 드릴 수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변화 없는 예배로 수십 년째 예배만 하고 결국 이 땅의 삶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혹 여러분은 고백으로만 예배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예배해 놓은 고백 외에 하나님의 가치를 하나님의 신분을 하나님의 위대함을 정확하게 인정하는 헌신과 결단도 늘 함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고백이 진짜면 삶이 따라와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이 참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위한 삶도 따라오게 돼요. 그래서 이 예배에 방해되는 것들을 기꺼이 버리는 결단을 하는 거죠.
여러분 돌아보면 우리는 못 버렸죠. 그래서 항상 예배가 2순위고 3순위였어요. 예배가 정말 1순위로 올라가지 않으면 올라갈 때까지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드리고 싶어 예배를 못 드린 채 그냥 반복되게 그렇고 그런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이 없으면 예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없다는 의미인 거예요. 영과 진로를 예배하라는 의미가 어떤 거냐 하면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예배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완벽하게 인정하면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거죠. 내 안에 세상을 품고 내 안에 세상의 가치관을 품고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그래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내가 중심에 하나님을 품고 있다는 의미인 거예요. 내가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의미예요.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찬양할 수 없어요. 예배할 때 여러분의 중심이 하나님이 계신가요? 예배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붙잡고 경고하게 붙잡고 계신가요?
붙들려 있는가?
여러분의 영혼과 삶이 내 삶과 내 영혼이 하나님께 붙잡혀 있지 않으면 우리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어요. 그리고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고 싶은 것들을 못 누린다는 의미도 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보면 얼마나 속이 상할까요?
예배를 통해 누리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거예요. 근데 우리는 항상 그것을 못 누린 채 그냥 예배라는 행위만 하고 이렇게 돌아가는 거죠. 그래서 예배에 대한 갈망도 없고 예배가 어떤 것인지도 잘 알지 못한 채 늘 반복된 예배만 드리고 이 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안에 하나님이 계셔야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태도를 취해요. 내 안에 세상이 있으면 세상에 대한 합당한 태도를 취하더라고요. 내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를 취하고 예배할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삶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예배자로서의 자세가 변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중심에 세상에 있으면 예배자로서의 나는 바뀌지 않는 거예요.
우리의 중심에 나 자신이 있으면 예배자로서의 나는 바뀌지 않는 거예요. 나의 중심에 사상이 있으면 예배자로서의 나는 바뀌지 않아요.
여러분 이 부분은 좀 여러분이 잘 들었으면 좋겠어요. 요즘 제가 되게 무서워하는 것이 있어요. 그러니까 기독교와 배치되는 사상을 주장하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성도들이 생각보다는 많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어떤 직업을 가져서 그냥 그 단체에 소속됐어요?
어쩔 수 없이 근데 그 단체를 움직이는 중심 사상들은 대부분 기독교와 배치되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자의적으로 소속된 것도 아니에요. 회사를 다니다 보니까 공동체에 있다 보니까 그냥 소속이 됐어요. 문제는 처음에는 그렇지 않다가 이 단체들이 점점 하나님과 배치되는 사상을 자기 단체로 이렇게 가져와요. 왜냐하면 단체를 운영할 때는 핵심 이데아가 있어야 되거든요.
핵심 가치가 있어야 돼요. 그걸 가지고 와요. 그래서 처음에는 전혀 몰랐다가 나중에 보니까 자기가 속해 있는 그 단체들이 중심에는 하나님을 배척하는 기독교 사상을 대체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단체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문제는 이럴 경우에 이럴 경우에 우리의 예배가 방해된다는 거예요.
왜요?
그 사장은 말씀과도 배치가 되고요. 그 사상들은 하나님을 최고로 인정하는 데도 방해가 되고요. 그 사상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도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와 배치되는 사상이나 문화들을 정말 조심하고 주의해야 돼요.
요즘 문화적인 접근을 교회가 많이 하죠. 또 그게 맞기도 하고 근데 문제는 그 문화 안에 기독교와 배치되는 사상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직장을 다니는 것 이게 뭐 잘못이에요?
당연히 직장 다녀야죠. 사업 당연히 사업하셔야죠. 문화 활동 당연히 우리가 문화 활동을 즐기고 누려야죠. 취미 생활 마찬가지예요. 취미생활 저도 해요. 그게 뭐가 문제가 되겠어요? 당연히 해야 돼요.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나를 하나님을 내 삶에 중심에 두는 것에 방해를 한다면 경계하고 조심해야 된다는 거예요. 어쩌면 지금 저나 여러분 모두 이런 것들로 인해서 하나님을 나의 삶의 중심에 온전히 두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연 중에 접한 기독교와 대척점에 있는 사상들, 문화들, 그런 가치관들로 인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중심에 두고 예배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을 차지하려고 하려면 기꺼이 우리는 버려야 되는 거죠. 방해하는 것들을 버려거나 멀리해야만 하나님을 내 중심에 두고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세운 원칙을 따르고 하나님이 세운 법칙을 따르는 것이 예배예요. 하나님이 나의 중심에 모시지 않으면 중심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법칙과 원칙을 따르지 않아요.
여러분 우리는 어떤가요?
세상의 원칙과 법칙이 하나님의 원칙과 법칙을 앞서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내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온전히 계시지 못하는 거죠. 이런 상태로 드리는 예배는 늘 혼선이 있어요. 말씀의 은혜를 받았는데 삶으로 살려고 하니 힘은 들고 혼란스럽기도 하고, 안 좋은 말로 헷갈리기도 하고,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중심에 두고 예배를 드려야 세상에서 혼돈되지 않는 삶을 살아요.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오랫동안 드리지만 그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건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예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중심에 둔 삶은 달라요. 그 모습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경배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라는 말에 다른 표현은 하나님이 전부가 되게 하라는 거죠. 그러니까 예배 때 하나님의 전부가 되는 시간이 있으면 그때 기적도 일어나고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도 임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을 듣거나 기도를 하거나 찬양하는 이 순간순간 하나님이 전부가 되는 순간이 있어야 돼요. 가장 좋은 건 예배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전부이면 최고이지만 우리가 그렇게 집중력이 탁월하진 않아요. 그래서 예배 중간중간 예배 요소 가운데 하나님이 전부인 시간들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려면 대가를 치르고 집중해야 되고요. 하나님의 중심에 두고 예배해야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 30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오.
이게 어떤 의미냐 하면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의미인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전부가 되게 하라는 거죠. 저는 우리 예배가 변화되기를 달라지기를 정말 간절히 원해요.
저는 만약에 그런 일들이 이 재단에 반복되어 수없이 일어난다면 제 개인적으로는 전도도 필요 없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가 모두 기대하는 거니까 우리가 소망하고 기대하는 그 예배는 그 예배는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이 중심이 될 때 드릴 수 있는 예배인 거예요.
내 중심에 하나님이 있을 때 지금 여러분이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가요?
중심에 계신 하나님으로 우리가 예배해야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예배가 전부인가요? 모든 삶이 여기에 집중돼 있나요?
주중에 어떤 모임을 하다가 이게 예배에 방해될 것 같아 나 이거는 멈춰야 돼 멈추고 주변에 어떤 일을 하다가 이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는 일이야라고 멈추고 그 대가를 치러보셨나요?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 뭔가를 결단해 보셨나요?
만약에 여러분과 제가 그런 일들이 경험한다면 우리 예배는 달라질 거예요. 예배를 통해 누림도 달라질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그다음부터 더 나은 더 좋은 더 영광스러운 예배를 갈망하면서 그 예배에 온통 모든 걸 투자하려고 할 겁니다. 목장 교회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예배 때마다 하나님이 전부가 되는 시간이 많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누리게 하신 천국의 것들을 누려지는 재단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예배에 대한 결단과 헌신이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 예배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셔요.
저는 여전히 믿어요. 예배 한 번 잘 드리는 곳으로 인생 바꿀 수 있다. 예배 한 번 잘 드리는 것으로 내 인생의 길이 열릴 수 있다. 저는 예배를 믿어요. 왜요?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이시니까. 예배란 도구를 믿는 게 아니라 그 예배를 받으시고 주관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 모든 사실을 다 믿어요. 여러분의 삶의 예배가 이런 가치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 예배가 그렇게 들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 많은 찬양 사역자들이 세워지고, 더 많은 예배를 위해 준비해서 기도하는 분들이 세워지고, 더 많은 공간들을 꼼꼼히 살피며 뭔가 주님께 부족할까를 늘 살피는 이 예배자들이 많아져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소유한 모든 것들을 누리게 하는 예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