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 시 모음 2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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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슴이 기억하는 향기
이명희
누가 알까 건조한 하루는 꿈도
그리움도 사치라고 그 환한 봄날이
다 가도록 아무것도 담지 못해
말라 가는 가슴을
허망하게 시드는 꽃눈을 뜨고도
보지 못했다 바쁜 듯 떠밀린 듯
끝없이 파도치는 일상 그저 산다는
건 오로지 견디는 것이었다
어느 날 무심코 눈에 밟힌 푸르디
푸른 신록 도시의 후미진 담벼락에
비스듬히 핀 넝쿨장미 안개 속 안개
같은 마음 낮은 곳으로 스미게 한다
삶의 고통이 날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세월 스스로 그 고통을
붙잡고 있었음을 왜 몰랐을까
가슴 속 반란 긴 여운 봄날 벚꽃 지듯
못 견디게 견디는 줄기마다 초록빛
그리움이 움을 틔우고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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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간격
이명희
존재와
존재사이
배려하는 마음속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긍정과 부정 속의
사랑과 그리움의 틈
물무늬로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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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갈 길은 먼데
이명희
누군가 두고 간 슬픔
바람 끝 아프게 쏟아지는
엷은 햇살 속에
고요를 뒤집으며 파묻히고 있다
떠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
무너지듯 주저앉은 가슴앓이
어디서부터 어긋난 마음길일까?
물음표를 지운
헐거워진 마음으로
서로에게 맑아지고 싶은
갈 길은 먼데 땅거미가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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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갈망
이명희
꽃향기
자오록한
햇살 좋은
봄날엔
호명(呼名)하면 대답할까
오래 잊은 그 이름
바람 끝
날아든 불씨
먼 기억 빗장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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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겨울 묵시록
이명희
조금 더 넓어지기 위한
비움의 시간 속에서
아뜩한 시간을 밟고 가는 쓸쓸함
더 다가설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계절의 끝자락에서
마냥 침몰해 가는 나의 저녁
침묵으로 꽁꽁 묶여
눈물로도 건널 수 없어
내게 엎드려 있는 등 시린 아픔
길 끝에 이르러서야 더 이상의 슬픔은
욕심이라고 심장은 북을 친다
함께 할 수는 있어도 하나가 될 수 없어
마음 가득 사랑을 품고도 홀로 가는 길
사뭇 쌓인 긍정이란 이름으로 몸을 풀어
어깨 위에 촉촉이 내리는 안개 속에서
외로워서 행복하다고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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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꽃잎 편지
이명희
하늘은 맑고 푸르러 한없이 깊습니다
그 곳의 봄은 어떠하신지요?
이곳은 그 해 봄 날 무성했던 꽃들
천지 사방에 숭얼숭얼 피워놓고
붉어져가는 꽃잎 같은 기억 들추며
누구를 마중하는 듯 고운 옷차림 입니다
올 봄 날도 한 철 내내 사랑에 잠겨
무시로 쏟아지는 꽃빛에 버무려진
당신을 느끼고 만나 마음을 건네면
따뜻한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해 부신 날에도
종잡을 수 없이 마음 어수선한 날에도
발끝을 세운 추억에 잠겨
함께했던 그 날을 생각하면
그만 행복해지고 말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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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의 가을은
이명희
숨이 찬 마루턱에서
서러운 나이테 몸 속에 품고 서 있는 나무
정수리 노란 물감으로 물들여
한껏 멋을 부리고 서있는데
생이란 무엇일까
시인이 쓰다 버린 낙서처럼
구겨져 버린 휴지 같은 것일까
산비탈을 구르는 타다 남은 불씨 같은 노을
빈 하늘을 서성거리는데
바람을 재운 들녘은
감탄사를 부려 놓은 그림처럼
낮게 엎드리고 있는데
낡은 시간의 한 부분
정겨운 빛깔을 입혀주고 싶어
어둠과 정적 속에 깊이 가라앉아
종종걸음을 치는데
흔적 속에 갇혀진 수많은 순간들
우루루 쏟아져 나와
민첩함을 잃은 채
어슴푸레한 모습을 열어 보이는데
이제 풍경이 되어버린 존재들
덧창을 닫고 커튼을 내리면
꿈을 꿀 수 있을까
나의 가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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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봄날의 기도
이명희
내 안의 모든 것들은
우울한 내면이 힘겨워 추락하며
함몰된 자리가 깊습니다
이제 부재의 시간으로부터
존재의 삶으로 돌아와
쉼표를 멈추는 숨결에 익숙하여
빛이 차오름을 맞이 하렵니다
영혼의 관문이신 당신을 통하여
제 생의 이미지가 아름다운
가치지향적인 사색에 물들게 하렵니다
봄 빛 따사로워
눈가에 이슬 젖게 하시오니
하늘보다 가슴이 시려도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느끼며
삶은 평이하지 않고
빛 속에 희망의 빛이 나는
경이감이 가득한 것임을
당신 앞에서 노래하렵니다
제 안의 쉼표가 너무 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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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봄날의 안부
이명희
그리운 것들을 죄다 불러 모아
바닥에 눕혀 놓고
한 폭 수채화를 그립니다
한정 없는 미련 한 덩이
추억이 꽃피는 화원에서
시린 가슴을 데우며
너울너울 춤을 춥니다
우리가 꽃이었다면
우리가 바람이었다면
서로의 안부가
궁금하지도 않았을 것을
붉은 꽃잎 한 장에다
그리움으로 씁니다
대책 없는 이 봄날을
그대는 어떻게 보내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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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봄밤
이명희
흔들려도 좋으련만
흔들려도 좋으련만
다문다문
꽃 핀 자리
끓어 오른 피에 놀라
깔깔한
슬픔 껴입는
사람아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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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새해의기도
이명희
하늘과 땅 사이
그 그늘과 그늘 사이
넉넉한 여백위로
햇살 한 줌 지나가게 하여
희망과 꿈과 사랑이
빗물처럼 내리고
바람처럼 불어오며
음악처럼 흐르게 하소서
어둠을 이기는 평화
빛과 함께 하는 평화
그 평화가 온누리 지배하여
온유한 사랑의 기쁨 출렁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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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슬픈 사랑
이명희
애써 기억하면 흐려지는 얼굴
불러보면 눈물이 먼저 나는 그리움
아직도 환한 적막에 갇혀
가푼 숨 몰아쉬며 바람 속에 서있다
낮은 돌담에 내려앉은 아슴한 기억
솔기마다 간직한 슬픈 삶의 여정
선율처럼 아프게 빗장을 두둘긴다
빛으로 버무린 잎새들은 하나 둘
바람의 울음소리 따라
휘어지는 굽이 길 흔들리며 떠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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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픔 하나
이명희
말 없어도 나는 안다
그대 마음 아프다는 걸
시선이
꽂히는 자리
두고 간 너의 숨결
뿌리째
흔들어 대는
회오리바람 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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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애수
이명희
멀지 않은 날에
함께 하지 못할 줄 알면서도
맞잡은 손은 항상 따뜻했었다
세월 지나 슬픈
그리움으로 남을줄 알면서도
행복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먼 훗날 가슴 후비는
허무함에 온 가슴 시릴 줄 알면서도
따뜻함을 밀쳐낼 수 없었다
이제는 먼 풍경이 되어버린
사랑스럽고 가여운 우리들의 사랑
야멸차게 내몰아치지 못한 죄로
빈방에서 온종일 웅크리고 있는
나를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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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어지로운 봄
이명희
벙실벙실 핀 꽃들
푸름푸름 익어 가는 봄
어렵게 들춰낸 마음 저편
애원하고 아파하고 기뻐하며
행복했던 향기 찾아가는 가슴에
격한 파동이 인다
물들고 싶어
일렁이고 싶어
바람이 되고 싶어
행간에 스미어 바램을 찍어내며
어지럼증을 앓는다
오래된 그리움 여전히 붉디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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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오월에는
이명희
초록이 빛나는 숲으로 들어가
맘속까지 푸른 물이 들은
달콤한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
달달하게 익은 햇살
고물고물 앉아있는
그리운 기척 찾아 옛 향기 깔아 놓고
오랫동안 가두어 놓아 저민 가슴에
굴절이 되어버린 추억 꺼내
곱게곱게 펴가며
긴 터널을 빠져 나온
아름다운 사랑과 손을 잡고
사뿐사뿐 춤을 추고 싶다
바람처럼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내 생의 한 복판을 지나갔던 화려함을 만나
떨림을 멈추지 못한 불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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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용서의 언덕으로 오르는 길에서
이명희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경계는 어디 있을까
끝이 없는 물음표의 심연에 빠져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모래의 늪에 빠진 여자
인간이 세워놓은 욕망의 흐릿한 기준 속에서
짐승도 인간도 못된 절대적 모순을 안고
몸부림을 치며 사는 여자
목적지 없이 도망치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용서의 언덕으로 오르는 길에서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하며
실체의 존재함으로 세상 가운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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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있다 그런 날
이명희
불현듯
떠나고 싶다
울컥 보고싶다
아무런 까닭 없는데
할 말도 딱히 없는데
뼛속을
파고드는 그리움
거스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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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잊은 줄 알았는데
이명희
그런데도
가끔씩
아주아주 가끔씩
가슴이
저려오는
통증이 있습니다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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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장미
이명희
그토록 고왔던 사랑도
이별 후엔 눈물이 되고
가슴 후비는 가시가 되는 것을
어둠 딛고 일어서는
안개 같은 그리움 풀풀 날리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간절한 소망 태우며
차마 끄지 못한 불씨 하나
허공을 붙잡고 살지라도
크게 나무라지 마십시오
바람이 건드린 내 영혼은
깊은 사랑으로
이미 붉어졌습니다
아무리 이슬에 목을 축여도
갈망은 언제나
불타는 목마름이었습니다
이미 굳어버린 심장을 밟고
이별의 숨결 쓰러진
오열의 길 갈 수밖에 없습니다
수없이 망설이고 주저하며
떠나보낸 것들을 위한
사랑의 향기가 되라고
유유히 떠오른 태양은
겹겹 꽃잎마다 화인 같은
발자욱을 찍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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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저무는 강가에서
이명희
강가에 우두커니 서서
먼 하늘 바라보고 있으니
바람은 온 몸을 스쳐
손톱 끝까지 춥습니다
그리움이 많아 외로움이 컷 던
웃자라 넌출거린 생각들로
가슴에 자국을 내었던 생채기
강물 속에서 파도를 칩니다
안타깝게 보낸 시간들이
미안해하며 시린 손을 내밀자
강물 속 출렁이는 창백한 얼굴
괜찮다 라며 황급한
손사래를 칩니다
외로운 사람의 절박함처럼
흔적 없이 녹아버리는 싸락눈
외로움의 끝은 만남이라며
하염없이 강물위로
내려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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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긍정과 부정속의 존재
간격이 있어야
사랑이 샘솟는 사이가
되는것 같아요
이명희 님의
긴 여운이 남는글속에
미소 한 자락 띄워봅니다
가슴이 기억하는 향기
이명희
누가 알까 건조한 하루는 꿈도
그리움도 사치라고 그 환한 봄날이
다 가도록 아무것도 담지 못해
말라 가는 가슴을
허망하게 시드는 꽃눈을 뜨고도
보지 못했다 바쁜 듯 떠밀린 듯
끝없이 파도치는 일상 그저 산다는
건 오로지 견디는 것이었다
이명희 시인님의
고운글에 쉬어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