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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북한은] 北,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신기한 투표 방식
입력 : 2015.07.21 10:29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084030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모여서 흥겹게 춤을 추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이렇게 집단적으로 춤을 추는 것은 국가적으로 뭔가 경축할 일이 생겼다는 건데요,
이틀 전 북한에서는 우리의 지방선거에 해당하는 도시군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선거를 인민주권을 실행하는 장이라면서 정책적으로 축제의 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새 공민증을 받아 안고 또 이렇게 첫 선거에 참가한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너무 기뻐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방금 선거에 참가해서 찬성의 한 표를 바쳤습니다. 평범한 노동자들이 또 저와 같은 평범한 여성들이 나라의 대의원이 다 되고 정말 생각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북한의 대외적인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투표장에 나왔는데요, 투표용지를 받아든 뒤 투표장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사진에 인사를 하고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바로 집어넣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중요한 즉, 천막으로 둘러싸인 기표소에 들어가서 내가 원하는 후보자에게 기표를 하는 절차가 없습니다.
북한의 선거는 여러 후보자 중에 한 명을 뽑는게 아니라 정해진 후보자에 대해서 찬반을 묻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투표가 진행되기 때문에 이번 선거의 투표율은 99.97%, 찬성율도 100%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투표율이 100%가 되지 않는 이유는 해외에 가 있거나 먼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지방 대의원은 매년 한두 차례 회의를 열어 지역의 일을 논의하는데요, 우리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도 그렇지만, 지방 대의원도 실권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084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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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투표를 어떻게 할까?
yoddi81|2007.10.08 13:56
지방 인민회의 대의원선거는 매 4년마다 치러지며 인민회의 대의원 수는 각 지역 인구수에 비례해 정해진다.
북한에서는 17살 이상의 공민이면 성별, 민족별, 직업, 거주기간, 재산 및 지식, 당별, 정견, 신앙의 차이 없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다. 대의원 후보자는 선거자들이 직접 추천하거나 정당, 사회단체가 공동 또는 단독으로 추천하다. 그러나 추천된 사람도 해당 선거구의 선거자회의에서 자격 심의를 거치고 선거자의 반수 이상이 찬성해야 정식 후보자로 등록된다. 기준은 '인민의 대표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이다.
공식적으로 선거구 내 후보자수가 제한되어 있지 않으나, 자격심의를 위한 선거자회의에서 절대 다수의 찬성을 받은 1명의 후보자를 등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때문에 투표는 대부분 찬반투표 형식이 된다.
북한의 투표방식은 '무기명'투표.
선거자가 투표용지에 있는 후보자의 이름을 필기도구로 가로 그으면 반대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선거진행 과정을 지켜보는 5명의 선거참관 성원들이 투표과정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것은 남쪽과 마찬가지다.
중병, 연로, 신체불구 등으로 선거자가 선거장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 선거위원회 관계자가 선거표와 봉인된 이동투표함을 갖고 투표하는 '이동투표제'도 실시된다.
선거 당일의 모습도 이채롭다. 선거장에서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선거장 바깥에서는 축하공연 등이 벌어져 선거일을 '축제일'의 하나로 만든다. 북한에서는 대의원 선거날을 하나의 명절처럼 기념하는 것이 전통화되고 있다.
북측의 설명에 따르면 '대의원선거가 인민이 정권의 주인으로써 자기 대표를 선거하고 그 기반을 공고히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http://tip.daum.net/openknow/4976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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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흑백함' 투표의 비밀
[해방일기] 1946년 11월 16일
김기협 역사학자 2011.11.16 08:52:00
1946년 11월 16일
한국민주당이 11월 15일 기자단 회견에서 발표한 담화문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북조선에서 거행된 선거 상황을 보면 공산 계열의 각 단체 대표로 조직된 선거 위원들이 도 혹은 군과는 인연이 먼 사람을 입후보자로 인정하고 선거 전에 청년 부녀 학생들을 총동원하여 입후보자에게 찬성 투표하라 권유하고 선거장에는 백 흑 양 상자 중 하나를 투표케 하였다. 이러한 부자연한 투표에서 공평한 인물이 나올 리 없고 공산계 인물만이 독점할 것은 동구주 소련군 점령지의 선거와 마찬가지다." (<서울신문> 1946년 11월 16일자)
11월 1일자 한민당 담화문을 7일자 일기에 소개했다. 입법 의원 선거가 "대체로 민의를 반영했다 할 수 있"으며 "조선 민족은 확실히 금반 선거에 있어서 그 자치 능력을 확인"했다는 담화였다. 입법 의원 선거를 이렇게 긍정하면서 이북 선거를 비판하는 것이 마치 제 눈에 들보는 못 보면서 남의 눈에 티는 잘 보는 것 같다.
오늘은 인민위원회 선거에 집중할 터이므로 입법 의원 선거의 문제는 눈감아두겠다. 한민당의 "부자연한 투표"라는 비판 내용을 먼저 살펴본다. "선거 전에 청년 부녀 학생들을 총동원하여 입후보자에게 찬성 투표하라 권유"하고 "선거장에 백 흑 양 상자 중 하나를 투표케 한" 두 가지 사실이 지적되어 있다.
엊그제 일기에 소개한 스트롱의 기행문 '북한, 1947년 여름'에 이 투표에 관한 한 여성 광부와의 대화가 들어 있다. 광부가 이렇게 말한 대목이 있다.
"정당은 우리 광산과 공장에서 모임을 주최하였고 인민들의 기호를 알아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함께 가장 적절한 사람을 추천하였던 것입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511쪽)
선거 전에 모임을 가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한민당 주장은 공산계에서 미리 정해놓은 후보를 지지하도록 이 모임에서 권유했다는 것이고, 이 광부의 주장은 이 모임을 통해 적절한 후보가 선택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한민당 주장이 전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볼 근거가 내게는 없다. 선거를 관리하는 쪽에서 미리 내정한 후보를 밀고 나간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전체적 원칙으로는 주민들이 모임을 통해 원하는 후보를 찾아내도록 하는 것이 선거의 효과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관리하는 쪽에서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리고 지난 9개월간 임시인민위원회(임시인위)가 가동되어 왔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임시인위 담당자들은 인민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 노력해 왔고, 많은 경우 이 선거는 그 담당자들에 대한 '재신임'의 의미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임시인위 체제가 재신임을 받아 정식 인민위원회로 발전하는 것이 이 선거의 목적이었다.
요즘 우리 정치계에서 '전략 공천'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에서 지도 집단이 강력히 필요로 하는 인물들을 낙하산으로 내려 보낸 경우가 없지 않을 듯도 하다. 그러나 인민이 선거에 만족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이 (여성) 광부(의 말)처럼 주민들이 알고 좋아하는 인물이 많이 후보에 올라야 했다. 낙하산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임시인위 체제를 통해 잠재적 후보자들이 충분한 검증을 받고 있었을 테니까.
후보 하나하나에 대한 찬부를 투표하는 '흑백함' 투표는 어릴 때부터 반공 선전에서 많이 듣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살펴보니 반공 선전 내용과는 많이 다르다. 흑백함 사용 자체가 비밀 선거 원리를 어기는 것처럼 얘기했는데, 그 점에서 아무 문제없는 것이었다.
흑백함 투표가 여러 명의 대표를 뽑는 데도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스트롱의 기행문에서 알게 되었다. 1947년 2월 하순의 리-동 단위 선거 때의 이야기로 보인다.
부락 선거에서도 대단히 흥미 있는 방식으로 검은 상자와 흰 상자가 사용되었다. 한 마을에서는 12명의 후보 가운데서 부락위원회 위원 5명을 뽑게 되어 있었다. 각 투표자에게 12장의 투표 용지가 주어졌는데 그 용지에는 후보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투표자는 지지하는 후보자의 이름이 적힌 용지는 흰 상자 속에 넣었고 지지하지 않는 후보자 용지는 검은 상자 속에 넣었다.
"용지 전부를 흰 상자 속에 넣는 것을 어떻게 방지합니까?"라고 내가 물었다.
"방지할 방법은 없죠. 그러나 그런 경우 그 투표자는 자신의 뜻에 반해 투표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던진 표들은 어느 후보가 다른 후보보다 앞서게 하지는 못하니까요. 그는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만큼 흰 상자에 넣어도 되고 검은 상자에 넣어도 되며, 원한다면 찬성 투표든 반대 투표든 하지 않은 채 용지 몇 장을 집에 가져가도 됩니다. 만일 그가 어느 한 후보를 강력하게 지지한다면 그 한 사람에게는 찬성표를 던지고 나머지 후보들에게는 반대표를 던지게 되겠죠. (…) 투표 총수가 계산되고 흰 상자의 표와 검은 상자의 표를 점검하면 우리는 마을 주민의 의사를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512쪽)
정말 흥미로운 방법이다. 민의 표출을 참 쉬우면서도 정확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12매의 투표용지를 구분할 독해력을 못 가진 투표자는 한꺼번에 두어 장씩 갖고 여러 차례 투표소에 들어가는 것도 허용되었다고 한다. 선거를 처음 해 보는 투표자들에게 참 친절한 투표 방법이다.
인민위원회 선거를 주관한 공식 주체는 임시인위였는데, 도-시-군 단위 선거의 후보 추천에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북민전)이 나섰다. 여러 정당-단체들이 북민전 안에서 논의하여 단일 후보를 내고 찬반 투표에 붙였는데, 충분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복수 후보를 낸 곳도 있었다고 한다(<북한 50년사 1>(임영태 지음, 들녘 펴냄), 124쪽).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인 북로당도 정파적 입장의 전략 공천은 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선거 결과도 "이러한 부자연한 투표에서 공평한 인물이 나올 리 없고 공산계 인물만이 독점할 것"이라는 한민당의 짐작과 거리가 있었다. 1947년 2월 20일에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237명 중 북로당원은 86명(36퍼센트)이었고, 민주당과 청우당이 30명씩, 그리고 무소속이 91명이었다. 무소속 중 다수는 정치와 관계없는 현장 일꾼으로서 북로당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단독 후보 찬반 투표를 이북 주민들이 만족스러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랑스러워 한 것으로 스트롱은 전한다. 단독 후보가 아니었던 리-동 단위 선거가 더 만족스러운 선거일 것이라고 스트롱 자신은 생각했는데, 주민들 생각은 다르더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마을 선거에 호기심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 선거는 유권자의 선택을 정확하고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를 나눠본 한국인들은 이 방식을 상당히 원시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들(=북한주민들)에게는 정당 간의 합의에 따라 세워져서 인민들에 의해 인준되거나 거부되는 단일 후보 방식(single slate)이 보다 '발전된 방식'이었다. 그들은 단일 후보 방식에서는 후보들이 대중 집회에서 먼저 광범위하게 거론되고 최종적으로 추천되기 전에 모든 정당 지도자들의 심사를 받게 되므로 이 방식이 최선의 대표를 확보하는 데 보다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512쪽)
그저께도 얘기했듯 스트롱의 서술을 읽는 데는 그의 정치 성향과 북로당 측의 선전 효과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대다수 이북 주민이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충분한 만족을 얻은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선출된 인민위원회는 임시인위와 다른 차원의 정통성과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소련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는 달랐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데 있어서 소련군 사령부의 지도를 받거나 승인을 얻어야 했다. 그러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성립을 계기로 소련군 사령부에 의한 인민 정권에 대한 지도와 감독은 사라졌고 행정권은 북한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변화는 '북조선인민위원회에 관한 규정'에도 반영되어 나타났다. 이 규정의 제1조는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조선에 민주주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북조선 인민 정권의 최고집행 기관이다"라고 규정했으며 제12조는 "각 국장 및 부장은 북조선인민위원회에 복종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사실상 소련군 사령부의 인민 정권에 대한 간섭을 소멸시켰다. (김주환, '해방 후 북한의 인민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311쪽)
1947년 초까지 소련군을 완전히 뒷전으로 돌려보내는 이북에서의 변화와 (미군)군정청의 부속기구로 입법 의원을 겨우 만드는 이남에서의 변화를 대비해 보며 한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 입법 의원이나마 선거 같지도 않은 선거로 뽑은 '민선' 45명 의원에 '관선' 45명을 합쳐 구성한 것이었으니. 이제는 정치 발전에 있어서 남북의 격차 자체가 통일 건국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남의 정치 발전 지체는 미군정의 정책 등 이남 사정에 1차적으로 따른 것이었지만, 이북 사정에 영향을 받은 점도 적지 않다. 친일파와 지주층을 대거 남쪽으로 내려가게 함으로써 이남의 반동 세력을 강화시키는 등 일방적 '개혁' 조치가 이남 사정을 악화시켰고, 이북 좌익의 역량 강화가 이남 좌익의 진로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 점과 관련해 이른바 '민주 기지 노선'이 당시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남식은 '해방 전후 북한 현대사의 재인식'에서 민주 기지 노선에 대한 확고한 입장이 1948년 3월 북로당 2차 당 대회에서 김일성의 보고에 나타났다고 한다.
8·15 해방 직후 우리 당은 소련 군대가 진주하고 있는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오직 북조선에서 민주주의적 근거지를 튼튼히 하여 전 조선 민족을 완전히 해방하여 조선을 부강한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 기지를 닦아 놓아야 되리라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였습니다. 북조선에 민주주의적 근거지를 튼튼히 닦으려면 오직 우리 당이 더욱 튼튼하고 강력한 대중적 정당으로 발전하여 광대한 인민 대중을 우리 당 주위에 결속·단결하여야만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당은 북조선 각지에 산만하고 조직 체계가 서지 않은 각도 지방당들을 결속하여 북조선의 모든 유리한 조건과 환경들을 리용하여 적당한 정치적 임무들을 수행할 수 있는 강유력한 중앙 조직 기관이 북조선에 필요함을 인정하고 1945년 10월 중순에 조선공산당 북조선 중앙국을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15~16쪽에서 재인용)
김남식은 이 인용문에 이은 설명에서 "조선공산당 분국이 설립되면서 민주 개혁들을 착수해나간 것 자체가 이미 북한 지역을 혁명 기지화하기 위한 조치"였으므로 1945년 10월 중순의 서북5도 당 대회에서 민주 기지 노선이 채택되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에 수긍한다. 그리고 "남한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들은 민주 기지 노선에 대한 인식을 거의 가지지 못함으로써 북한의 민주 기지 역량을 과소평가할뿐더러 그를 부정 또는 격하시켜 남한의 혁명 세력 중심의 모험주의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고 비판했다.
이 방면의 내 공부가 얕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만, 민주 기지 노선을 당시의 정답이었던 것처럼 내놓는 관점에는 불만을 느낀다.
김일성이 위의 보고를 행한 1948년 3월에는 이남 지역 사정이 민주주의 도입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낙착되고 있었지만, 1947년 초여름의 제2차 미소공위 때까지는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이남 사정을 완전히 비관하고 이북의 민주 기지 건설에 일방적으로 매진하는 데는 이북 지도층 내에서도 상당한 저항이 있었을 것 같다.
그 단계에서는 민주 기지 노선이 경합하는 여러 경향의 하나일 뿐이었다가 1948년 들어 북로당 노선으로 확립된 것이 아닐까. 앞으로 더 유의해서 살펴봐야겠다.
첫댓글 투표시간이 10시부터....오후 몇시까지죠.?.휴일인가?
위 글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 하였네요.
민주당 청우당이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있었지만
노동당 일당독재에서 이 야당세력들이
어떤 역활을 하는가 매우 궁굼했었는데...
위 글을 보고 어림 짐작되는 바가
야당은 지역 그리고 중앙당 대의원까지
진출할수 있다는 것 같습니다.
즉 야당이 집권당은 될수 없지만(노동당 일당독재는 북 헌법상에 못 박아놨죠)
지역대의원이나 중앙당 대의원까지는
가능하다는 의미 같습니다...^^:
전자 개표기 는 남한 에서 사용 하고 있으며 이 자들은 그걸 바꿀 마음도 없음...북한 이 전자 개표기 를 사용한다는 정보를 본적이 없음....ㅋㅋㅋㅋ 개 색끼들.....!
46년에는 투표 함이 흑 백, 두개였나 보네요? 우리 시절에는 투표함이 하나였고, 반대는 즐을 그으라고 연필을 놓아 두지만 그냥 누구나 찬성 투표 하는 것 만 알고 살아 왔었습니다. 선거날은 한복을 곱게 입고 출근전에 투표를 한 다음 직장에 가서 옷을 갈아 입군 했었습니다. 학생들 앞에서 한복을 입을 경우가 별로 많지 않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