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1956년 명장 존 휴스턴이 감독하고, 명배우 그레고리 펙이 주연을 맡았습니다. 작가 허먼 멜빌이 1851년에 발표한 동명의 장편소설이 원작입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 에이하브(그레고리 펙 분)과 흰고래(백경)의 처절한 사투를 통하여 인간의 영혼과 파괴적인 충동을 장엄하게 묘사하였으며, 인간의 의지와 집념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하여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전성기의 그레고리 펙은 복수심에 불타는 강렬한 눈빛과 집념으로 뭉친 독특한 인물인 에이하브를 훌륭하게 연기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 집념의 선장 에이하브(그레고리 펙 분)
오래 전인 1956년에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인간과 고래의 사투 장면은 오늘날에도 진부한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특히 에이하브가 흰고래와 함께 깊은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해양모험영화의 진수를 맛보게 합니다. <뉴욕타임스>로부터 '우리 세기에 가장 빛나는 영화 중의 한 편'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1956년 뉴욕영화비평가상에서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 에이하브와 모비 딕의 사투
원작 <모비 딕>은 19세기 상상력에 정점을 찍은 “위대한 미국 소설”로 불립니다. 거대하고 흉포하지만, 섬세하고 정교한 이 작품의 매력은 수세대의 걸친 세계의 독자들을 사로잡고 혼란에 빠뜨리고, 심지어 좌절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복잡한 짜임새나 규모는 어떤 방법으로도 완벽하게 요약할 수 없습니다.
* 영화의 한 장면, 선원들
<모비 딕>은 사상의 광포한 바다라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리더십, 권력, 산업주의, 노동, 그리고 자연 등 미국의 모든 형상과 지위에 대한 위대한 고찰이기도 합니다. 피쿼드 호와 거기에 타고 있는 각양각색의 선원들은 미국 사회의 축소판입니다. <모비 딕> 이전까지는 미국 문학사상 그 어느 누구도 이렇듯 강렬하고 야심만만한 작품을 시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모비 딕>은 비가(悲歌)이자 정치 비평이요, 백과사전이요, 모험담이기도 합니다.
[ 간략한 줄거리 ]
* 복수에 불타는 에이하브 선장
선원을 꿈꾸는 청년 이슈마엘(리처드 베이스하트 분)은 '바다에 도전하는 자는 자신의 영혼을 잃게 될 것'이라는 마플 신부(오손 웰스 분)의 경고를 듣지 않고 포경선 피쿼드호에 오릅니다. 출항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낸 선장 에이하브는 한쪽 다리가 없어 고래뼈로 만든 의족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에이하브는 선원들을 불러 모아 자신이 '모비 딕'이라는 이름의 흰고래에게 한쪽 발을 먹혔으며, 이를 복수하기 위하여 흰고래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처음으로 발견하는 사람에게 줄 상금으로 스페인 금화를 돛대 위에 박아 놓습니다.
* 에이하브와 백경의 사투
오랜 항해 끝에 발견한 흰고래의 등에는 그 동안 여러 포경선이 쏘아 맞힌 작살이 무수히 꽂혀 있었습니다. 마침내 에이하브와 흰고래의 쫓고 쫓기는 싸움이 사흘 동안 펼쳐집니다. 첫째 날에는 에이하브가 탄 보트가 부서지면서 한 명이 죽고, 둘째 날에는 세 척의 보트가 파손되었으며, 셋째 날에는 흰고래가 모선인 피쿼드호에 달려들어 파괴시킵니다. 마지막 보트에 타고 있던 에이하브는 흰고래에게 작살을 명중시키지만 작살의 줄에 목이 감겨 고래와 함께 바다 속으로 잠기고 맙니다. 피쿼드호는 완전히 침몰하고 이슈마엘만이 바다를 표류하다 살아남습니다.
*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모비 딕
[ 작가 허먼 멜빌의 고향을 찾아 ]
미국 북동부 매사추세츠 주의 항구도시 뉴베드퍼드. 선창에서 가까운 조니 케이크 힐의 얕은 언덕길에 회색의 단촐한 2층 건물이 있습니다. 정면에 '선원 교회(船員 敎會)'라는 간판이 금색으로 빛납니다.
그 아래에 '1832년 5월 2일 헌당(獻堂)'이라 쓰여 있습니다. 정문 오른쪽 기둥에는 '허먼 멜빌의 <백경>에 나오는 포경선 선원 예배당'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고 나란히 왼쪽 기둥에 '뉴베드포드에는 포경선 선원이 있어서 인도양이나 태평양으로 출항을 앞둔 울적한 선원들은 반드시 이 곳에서 일요 예배를 보러 간다'는 <백경>의 제7장 첫머리의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교회 앞 잔디밭에는 조그만 바윗돌에 동판을 박은 기념석이 하나, 뉴베드퍼드의 어린이들이 고래잡이 선원들의 용감성에 경의를 표하여 1930년에 세운 것입니다.
* 선원 교회
<백경>에서 묘사된 예배당은 교회 건물의 윗층입니다. 손바닥만한 방에 긴 의자들이 몇 줄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벽면은 온통 <백경>에 쓰인 대로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은 고래잡이 배 선원들의 대리석 비명들로 꽉 찼습니다.
멜빌이 인용한 1833년의 것들은 보이지 않고 멜빌이 보았음직한 것으로는 '1835년 22세의 나이로 차이나 호에서 물에 빠져 죽은 존 글로버를 추모하여' 등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교회당 중안에 목만 댕강 잘라낸 선수(船首)가 하나 제상(祭床)에 얹힌 돼지머리처럼 덩실하나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백경>에서 '높직한 뱃머리 모양'이라고 표현한 유명한 설교단입니다.
멜빌은 소설에서 '이 설교단은 세상을 인도하는 영원한 앞머리'라고 썼습니다. <백경> 속의 내레이터인 이슈마엘은 이 앞에서 매플 신부의 설교를 듣습니다. 예배당 뒤켠의 긴 의자 하나에는 '허먼 멜빌의 좌석'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1841년 겨울 22세의 멜빌이 포경선을 타기 위해 뉴베드퍼드에 왔을 때 앉았던 자리입니다. 당시 교회는 지은 지 9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때의 경험으로 <백경>에서 뉴베드퍼드와 포경선 생활을 그렸습니다.
* 뉴베드포드 항구
멜빌이 <백경>을 쓸 무렵의 뉴베드퍼드는 포경업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1820년대부터 고래잡이 배가 모이기 시작한 이 항구는 한때 300척의 포경선에 1만 명의 선원들이 득실거려 세계 포경업의 수도라 일컬어졌고 당시 1인당 소득이 세계 제일인 도시라고까지 했습니다.
1860년대에 석유가 나오면서 고래 기름을 대신하게 되자 포경업은 사양길에 들어섰고 뉴베드퍼드의 상인들은 면실유 산업으로 투자를 돌렸습니다. 1920년대에 이마저 기울어지면서 뉴베드퍼드는 몰락하여 1970년대에는 미국에서 가장 실업률이 높은 7대 도시의 하나로 부끄러운 항구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 멜빌이 책을 쓰며 살던 집(지금은 기념관)
이제 이곳의 뱃사람들은 큰 고래 대신 조그만 가리비 조개나 잡아올리는 신세입니다. 뉴베드퍼드 포경선단의 마지막 배이던 찰스 모건 호는 뉴베드퍼드 아래쪽 코네티컷 주의 미스틱 항에 있는 수상 박물관에 정박하고 있습니다. 이 배가 현재 미국에 남은 유일한 포경선입니다.
왕년의 영광에 향수를 가진 뉴베드퍼드 시민들은 1966년 옛날의 부두 부근 일대를 사적지역(史蹟地域)으로 지정하고 복구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좁다란 거리들에는 자갈이 깔리고 가스등이 켜졌습니다. ‘미국 어느 곳에도 이만큼 귀족적인 거리는 없다’고 멜빌이 썼던 카운티 가의 옛 고래 상인들과 포경선 선장의 집들은 새로이 꾸며졌습니다.
선원 교회의 바로 길 건너 맞은편은 포경 박물관입니다. 1903년 개관한 이 박물관은 성대(盛代)를 앨범 삼아 포경선의 모형, 선구(船具)들을 모아놓고 포경 관계 수집품으로는 세계 제일을 자랑하며 뉴베드퍼드의 사적 지역의 센터가 되어 있습니다. 이 박물관 앞에서 떠나는 관광버스를 타면 ‘모비 딕(白鯨)의 길’이라 하여 옛날 포경 산업의 유적지들을 한 바퀴 돌아줍니다. 교회 옆의 ‘선원의 집’은 지금도 뜨내기 선원들을 잠재워 주는 합숙소입니다.
* 멜빌이 집필하던 방
시청 옆의 시립 도서관에는 포경선들의 항해일지 등과 <백경>의 초판본이 진열되어 있고 건물 앞에는 작살을 든 고래잡이 선원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1913년에 세운 뉴베드퍼드의 상징입니다. 동상에는 ‘고래를 죽이느냐, 배가 구멍이 뚫리느냐’라는 고래잡이 선원들의 모토가 새겨져 있습니다.
멜빌은 <백경>을 포경선 엑세스 호가 1820년 큰 고래의 공격으로 침몰당한 이야기를 책으로 읽었습니다. 그 후로 대서양 연안의 각 항구에서는 ‘모차 디크’라는 거경(巨鯨)이 공포 속의 화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모차 디크는 소설 <백경>이 나온 지 8년 후인 1859년 결국 죽음을 당했고 그때까지 이 괴경(怪鯨)은 30명 이상의 선원을 희생시켰다고 합니다.
매사추세츠 주의 내륙 쪽, 멜빌이 청소년 시절을 보낸 올버니 가까이의 피츠필드. 여기서 조금 시외로 빠져나간 곳이 홈스 로드라는 긴 숲 사잇길 한쪽 가에 ‘애로 헤드’라는 이름의 외딴 농가가 있습니다. 멜빌이 31세 때인 1850년에 사 들어와 13년 동안 살던 집입니다.
그는 <백경>을 이 집에서 완성했습니다. 버크셔 군(郡)의 사적 위원회가 이 집을 매입하여 멜빌 기념관으로 개관한 것은 미국 독립 200주년 때인 1976년의 일입니다. 근처의 레녹스에 살던 <주홍 글씨>의 작가 나다니엘 호손이 찾아와 멜빌과 문학 토론을 벌이던 헛간도 고쳐져 공개를 하고 있습니다.
* 멜빌의 묘지, 오른편은 부인의 묘
멜빌은 이 친교로 <백경>을 나다니엘 호손에게 헌정했습니다. 애로 헤드의 2층 서재에는 멜빌의 단편 <나와 벽난로>에 나오는 벽난로와 함께 <백경>을 쓴 책상이 놓여 있습니다. 멜빌이 <백경>을 집필하던 당시의 모습은 그의 부인이 일기에 쓴 것이 있습니다. ‘남편은 매일 아침부터 저녁 너댓 시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었지만 어떤 날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러다가 주위가 어둑어둑해지면 말을 타고 마을로 내려갔다......자고 나서 아침 일찍 일어나면 조반 전에 산보를 하고 때로는 운동을 위해 장작을 패기도 했다.’
멜빌이 <백경>을 쓴 책상 앞에서 정면으로 내다보이는 창밖은 집을 둘러싼 넓은 농지 너머로 크레일로크 산맥의 나지막한 연봉(連峰)들입니다. 멜빌은 이 산줄기에서 대양의 파도를 연상했다고 합니다. 연목구어(椽木求魚)라더니, 실로 멜빌은 숲 가운데서 고래잡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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