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90
12월30일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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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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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2VslyAy8sk8 (유동철 리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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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어쩌면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어제 시메온 예언자에 이어 오늘 등장한 한나 여 예언자가 한평생 겪어온 고통은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열여섯의 나이에 혼인한 그녀는 남편과 혼인한 지 7년 만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그녀의 나이는 겨우 스물셋, 그때부터 60년 동안 홀로 살아왔습니다.
당시 여자로서 가장 큰 행복은 남편 잘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남편에 종속되어 한평생 별 탈 없이 백년해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건강한 아들 펑펑 잘 낳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한나는 정말 빵점이었습니다. 7년 만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참으로 많은 고생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가장 불행한 인생의 대표 격인 ‘청상과부’로 60년 이상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삶을 보십시오. 그 오랜 세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한평생에 걸친 기도의 결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큰 상급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바로 ‘지복직관’ 하느님의 얼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뵙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품에 안겨 계신 만왕의 왕,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품에 안아 본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희망도 없던 좌절의 시대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노력은 기다리는 일이군요. 비록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의 나날이라 할지라도 그저 기다리는 일입니다. 꼬이고 꼬인 인생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풀 방법이 없어 보이는 실타래를 손에 들고 있다 할지라도 기다릴 일입니다.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어쩌면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고통의 정도가 극심하다면 그것은 어쩌면 고통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정말 너무너무 지루하다면 기다림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기다리다 보면 선하신 하느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우리 앞에 좋은 날을 펼쳐놓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내에 백배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한나 예언자에게 하신 그대로 말입니다.
우리 모두 너나할 것 없이 희망합니다. 나이를 먹게 되면 좀 더 영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고. 우리는 꿈꿉니다. 지금은 비록 많이 부족하지만 노년기에 접어들면 좀 더 많이 기도하게 되고, 좀 더 많이 희생하게 되고,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이 세상을 하직할 순간이 다가오면 좀 더 이타적인 사람이 되고 하느님께 한 걸음 크게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아름답고 품위 있는 노인으로 죽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웬걸! 많은 경우 삶은 우리 의도대로 펼쳐지지 않습니다. 기도나 영적 생활은 습관이 중요한 것이어서 젊은 시절 기도에 맛들이지 않았던 사람이 나이 든다고 저절로 기도의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젊어서 육적으로만 살았던 사람이 연세 든다고 저절로 영적인 사람으로 탈바꿈되지는 않습니다.
이제 남은 날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안하무인으로 살아가시는 분들, 극 단적 자기중심주의로 살아가시는 분들, 끝까지 놓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분들, 그래서 정말이지 불행한 노년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들 꿈꾸실 것입니다. 영적이고 고상하고 품위 있는 노년기! 그렇다면 한나 예언자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 세상에 푹 빠져 삶을 허비하다가 어느 순간 영적인 삶으로 전환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충만한 영적 생활을 추구했고 그 맛을 들였습니다. 그 결과 살아생전 구세주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뵙는 평생소원을 이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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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jKTEKKJx4P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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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 끊는 방법: 내 생각은 내가 사는 집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언자 한나는 시메온과 함께 아기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봅니다. 한나는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평생 성전에서 기도와 단식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 여인입니다. 왜 성경은 굳이 그녀가 남편과 일곱 해를 살았던 것과 그 이후 성전에서 산 것을 밝힐까요? 그 이유는 그녀의 거처가 남편의 거처에서 하느님의 거처로 옮겨진 사실이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님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남편의 거처에 살면 그녀는 남편의 아내가 됩니다. 그러면 아내로서 생각하고 아내의 감정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볼 여유가 없습니다. 한나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자기 정체성을 주거지를 바꿈으로써 변화시킨 것입니다. 성전에 사는 예언자라는 정체성은 세속에서 굳이 신경 써야 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내 생각은 나의 정체성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학생이라면 학생이 아닌 사람이 가질 필요가 없는 생각과 감정으로 살아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거나 자신이 학교라는 공간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제라고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제는 성전에서 살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집에 살 수도 있습니다.
2021년 12월 30일 「매일미사」 묵상글에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의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탈리아로 유학 간 첫 학기에 유독 어려운 과목이 있었습니다. ‘기업 윤리’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언어도 문제였지만 토론 수업이라 도무지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교수님께서 질문하셨습니다. 번번이 한마디 말도 못 하고, 그저 멋쩍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날 때쯤 교수님도 답답하셨는지 이렇게 놀리셨습니다.
“자네는 성탄 방학이 되면 시칠리아섬의 작은 본당으로 봉사하러 갈 것이네. 가서 고해성사도 주고, 성탄 밤 미사 강론을 할 텐데, 신자들 앞에서 떠듬거리며 ‘오늘 밤은 성탄입니다’ 하고 한마디만 하면 신자들이 손뼉을 치고 난리가 날 것일세.”
신부님은 생각했습니다.
‘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 신부인 나를 다른 학생들 앞에서 놀리다니.’
신부님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영성 지도를 받는 날이었는데, 지도 신부님을 만나자마자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부님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바오로, 이 일로 배운 게 있어?”
“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면 절대로 학생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또 배울 게 있어?”
신부님은 생각을 좀 하다가 “제가 이탈리아 말을 잘 못 해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언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 또?”
“네. 이젠 없습니다.”
“그럼, 잊어버려!”
신부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또 흥분하여 “아니 어떻게 잊습니까? 제가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게 말이 됩니까?” 하며 씩씩거렸습니다.
영성 지도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오로, 너 지금 기도할 수 있어?”
“아니, 지금 기도가 중요합니까? 그 교수가 저를 놀렸다니까요?”
그러자 영성 지도 신부님은 “바오로, 하느님이 중요해, 아니면 그 교수가 중요해? 지금 네 마음을 온통 그 교수의 말에 빼앗겼잖아!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너의 마음을 그 말에 빼앗겨 하느님은 안 계시잖아. 바오로, 단 1초라도 네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세상 것에 빼앗기지 마!”라고 말했고, 이 말을 듣는 순간 신부님은 홍두깨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며 날마다 기도와 단식에 전념하던 한나 예언자처럼 단 1초라도 하느님 아닌 세상 것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겠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감정’입니다. 바오로 신부님은 교수가 한 말에 감정이 상했습니다. 그 감정은 그 사건을 자꾸 ‘생각’하므로 일어납니다. 영성 지도 신부님은 생각을 주님께 돌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은 ‘정체성’에 의해 규정됩니다. 내가 판사라면 판사의 일을 생각하고 도둑이라면 도둑의 일을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생각을 무조건 하느님께로 돌리려 한다고 쉽게 되지 않습니다. 정체성부터 확고하게 바꿔야 합니다. 이는 마치 잘못 걸려온 전화가 계속 온다면 자신은 누구누구라고 명확하게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다시 전화가 오지 않습니다.
사제라는 정체성은 학생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사제는 어디 머무는 사람입니까? 성전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정체성이 생각을 규정하기는 하지만, 그 정체성은 또 자신이 머무는 집에 의해 규정됨을 알아야 합니다. 한나 예언자가 성전에 머물지 않으면서 예언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을 밤낮으로 했기 때문에 그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사제라고 하더라도 여행자로 몇 년 동안 놀러만 다니며 신자들과 미사도 하지 않는다면 사제는 자신이 사제인지 여행자인지 구분할 수 없어지고, 그러면 사제로 생각해야 할 것보다 여행자로서 해야 하는 생각이 그 사람을 가득 메우게 됩니다. 따라서 개집에 머물면 개가 되고 그러면 개의 생각과 감정으로 행동하게 되지만, 우리가 성전에 머물면 하느님 자녀가 되고 그 정체성에 맞는 생각과 감정으로 행동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내가 초대한 대상의 집에 삽니다. 생각은 나의 정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나의 정체성은 내 안의 동굴에서 내가 누구와 대화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 누가 바로 내 집을 규정하고 그 규정된 집의 정체성이 곧 나의 정체성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 집은 내가 평소에 대화하는 대상의 집입니다. 내가 주님의 집에 산다면 자아가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 잘못 걸려온 전화라고 하며 바로 끊을 수 있게 됩니다. 잘못된 전화가 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 집의 정체, 혹은 나의 정체성을 밝히면 됩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더는 대화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나는 누구와 함께 삽니까? 그 안에 신이 있으면 나는 성전에 사는 것이고 그 안에 뱀이 있다면 나는 다른 존재가 됩니다. 이는 평소에 누구와 대화하며 사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는 그 정체성에 따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다가 죽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 자녀가 되지 않으면 구원을 위한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자녀만이 부모의 뜻을 이어받기 때문입니다. 한나 예언자처럼 성전에 머뭅시다. 그래야 세상 것들과 대화를 할 사람이 아님을 내가 알고 쓸데없는 생각들은 바로바로 끊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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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36-40: 한나라는 과부의 기쁨
시메온의 뒤를 이어 여 예언자 한나가 등장하고 있다. 먼저 시메온이 아기를 뵙고 품에 안아 본 다음에 한나가 나타났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38절)고 한다. 복음에 그녀의 조상과 지파를 밝힘으로써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키고 있다. 그들이 증인이 되는 것이다. 신비적인 의미로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의미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에서 기도하며 지내다가 하느님의 구원을 발견한 한나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여인이 과부라고 소개한다. 한나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뼈아픈 체험을 통하여 하느님께 더욱 의탁한 사람이었다. 현세에서 당하는 슬픔은 단지 이런 여인의 슬픔만이 아니라,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당하는 모든 고통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외면하게도 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어 그 뿌리를 튼튼하게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을 자기 생활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는 결혼한 후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 사람이었다. 여든네 살에 이르도록 성전에 몸담아 하느님께 봉사와 기도로써 지내왔다. 이것은 하느님 공경에 참으로 정성스러운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한나가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의 한나 할머니는 과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았고 충실히 믿었기 때문에, 또 하느님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분이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남녀가 혼인하여 한세상을 살아가면서 귀엽고 믿을 수 있는 자녀들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한 생애를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원하는 대로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현세의 큰 축복이겠는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모든 부부가 그렇지는 못하다. 또 부부 중에 어느 한 편이 세상을 먼저 떠났다고 해서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한나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겠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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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한나>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36-38)
한나도 시메온이 했던 말과(루카 2,29-32) 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 라는 말은, ‘메시아 강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은 ‘이스라엘의 해방과 구원’을 뜻하고, 그것을 기다린다는 말은, 자기들을 해방시켜 주고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라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 라고 증언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시메온이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을 했을 때에도 그렇고, 한나가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했을 때에도 그렇고, 사람들의 반응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사람들의 반응을 일부러 생략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생략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 때에는, 사람들은 엘리사벳과 함께 기뻐했고(루카 1,58), 즈카르야가 다시 말을 하게 되자 두려움에 휩싸였고, 모든 일이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고(루카 1,65),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서로 이야기했습니다.(루카 1,66)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목자들이 전하는 말을 들은 사람들이 놀랐다는 말만 있고(루카 2,18),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과 증언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무슨 반응을 보였는지에 관한 말이 없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메시아께서 강생하셨다는 말을 들으면 기뻐했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기뻐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복음서 저자의 입장에서는 기록할만한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사람들이 정말로 메시아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다리는 척’만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동방박사들이 메시아께서 태어나신 곳이 어디냐고 묻고 다닐 때, 예루살렘 사람들은 놀라기만 했고, 기뻐하지는 않았습니다.(마태 2,3) 시메온과 한나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사람들도 대부분 예루살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상황을 예수님 수난의 예고편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무관심’과 ‘냉대’도 일종의 박해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9-11)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강요한다고 해서 없는 기쁨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지만, 또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애쓰시지만, 그 구원은,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는 한나의 모습에서 성모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성모님은 교회 공동체의 중심에 계시면서, 또 교회의 어머니로서 ‘기도생활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성모님을 연상하게 하는 과부들이 여러 명 나옵니다. 동전 두 닢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는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3-4) 그 가난한 과부의 모습에서, 당신의 온 생애를 모두 하느님께 바치신 성모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성모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바치신 ‘봉헌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나인’이라는 고을의 과부의 모습에서도 성모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루카 7,12-13) 죽은 이가 과부의 외아들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이 연상되고,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과부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계신 성모님의 모습이(요한 19,25) 연상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의 모습에서 나중에 당신의 어머니께서 겪으실 고통과 슬픔을 보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젊은이를 살리시고,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신 일은(루카 7,14-15), 당신의 부활을 미리 예고하신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 18장에 나오는, ‘끈질기게 간청하는 과부’의 모습에서는(루카 18,3) 우리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의 이야기를 하신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7-8ㄴ) 우리가 성모님께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드리는 것은, 성모님께서 우리보다 더 간절하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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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하는 말 중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새옹지마, 전화위복’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절망도, 근심도, 걱정도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면, 우리가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면, 기다릴 수 있다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절망은 희망으로, 근심은 위로로, 걱정은 용기를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버지니아 성 정 바오로 성당으로 대림특강을 다녀왔습니다. 본당 신부님께 신문 홍보도 부탁드렸습니다. 코로나 변이 오미크론도 시작되었고,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제게 수호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버지니아에 고등학교 동창이 있었고, 저의 강론을 읽고 있는 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홍보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쉼표를 찍어 놓으셨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이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열매를 먹은 것은 분명 인류에게 ‘원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원죄가 있었기에 우리가 있을 수 있고, 그 원죄가 있었기에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예수님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유다는 하느님께서 찍어놓으신 쉼표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로 쉼표를 이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거두어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의 무게로 3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절망으로, ‘다 이루었다.’는 확신으로, ‘목마르다.’라는 갈망으로,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겨드리나이다.’라는 순명으로,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사랑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당신이 사랑하시는 교회를 맡겨 드렸습니다. 죽음의 십자가는 부활의 꽃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나라 운동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2달 전에 있었던 교통사고는 제게 마침표가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혈압이 높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혈액검사, 소변검사를 받을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검사 결과 다른 부분들은 모두 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의 건강을 돌봐 주실 의사 선생님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혈압약을 처방 받아서, 혹시 모를 위험을 예방 하게 되었습니다. 원망해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미워해서는 건강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따지기 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한 때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지금 문화를 선도하는 서구 문명도 한 때는 그리스, 로마의 문명으로부터 혜택을 받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사제생활 30년을 하고 있는 저도 한 때는 철부지 어린이였습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생각할 수 있다면 좀 더 겸손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나비가 한 때는 땅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였음을 기억한다면 하늘을 나는 기쁨을 더 깊게 느낄 수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마침표는 오직 하느님의 몫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올해도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363일을 욕심과 욕망 때문에 채우려고만 했어도, 오늘과 내일 마음을 비우고 나누는 삶을 산다면, 베푸는 삶을 산다면, 기도의 삶을 산다면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한해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나는 예수님을 만나고 축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세상의 분주함 속에서는,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만날 수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헤로데가 살았던 궁전에서는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과 규율에 얽매서 살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을 찾았던 한나는 예수님을 보았고, 축복의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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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이탈리아로 유학 간 첫 학기에 유독 어려운 과목이 있었습니다. ‘기업 윤리’라는 과목이었는데, 언어도 문제였지만 토론 수업이라 도무지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교수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번번이 한 마디 말도 못하고, 그저 멋쩍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날 때쯤 되자 교수님도 답답하셨는지 이렇게 놀리셨습니다. “자네는 성탄 방학이 되면 시칠리아섬의 작은 본당으로 봉사하러 갈 것이네. 가서 고해성사도 주고, 성탄 밤 미사 강론을 할 텐데, 신자들 앞에서 떠듬거리며 ‘오늘 밤은 성탄입니다.’ 하고 한 마디만 하면 신자들이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날 것일세.”
‘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 신부인 나를 다른 학생들 앞에서 놀리다니.’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거리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영성 지도를 받는 날이었는데, 지도 신부님을 만나자마자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신부님은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이 일로 배운 게 있어?”
“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면 절대로 학생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또 배울 게 있어?”
생각을 좀 하다가
“제가 이탈리아 말을 잘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언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그래. 또?”
“네, 이젠 없습니다.”
“그럼, 잊어버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또 흥분하여 “아니 어떻게 잊습니까? 제가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게 말이 됩니까?” 하며 씩씩거렸습니다.
제 얼굴을 쳐다보던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오로, 너 지금 기도할 수 있어?”
“아니, 지금 기도가 중요합니까? 그 교수가 저를 놀렸다니까요?”
그러자 그 신부님은 “바오로, 하느님이 중요해? 그 교수가 중요해? 지금 네 마음을 온통 그 교수의 말에 빼앗겼잖아!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너의 마음을 그 말에 빼앗겨 하느님은 안 계시잖아! 바오로, 단 1초라도 네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세상 것에 빼앗기지 마!” 이 말을 듣는 순간 홍두깨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날마다 기도와 단식에 전념하고 성전에 나가 하느님을 섬긴 한나처럼, 단 1초라도 하느님이 아닌 세상 것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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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민경철 안토니오 신부님]
<피해가지 않는 은총>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매달 봉성체 날 뵙게 되던 한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아는 것이 참 많으셨습니다. 말도 기똥차게 잘 하셨지요. 스스로 배움이 없는 사람이라고,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더니 보통이 아니셨습니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어서 오쇼’ 하면서 인사하자마자 신부를 앉히더니 신앙강좌를 따발총처럼 쏴대신 분이셨습니다. 이 양반이 신부가 되었으면 분명 설교가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셨을 텐데….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는지 물어봤더니 하루 종일 평화방송 라디오를 들으신다는 겁니다.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하루 하루 방송 메시지가 할머니의 교회지식과 신심을 높여준 것이지요.
듣기만 한 것이 아니고 기도는 또 얼마나 열심히 하시는지 묵주알 돌리며 하루 종일 중얼중얼 하시고 사셨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오랜 세월 홀로 살아오신 분이셨는데, 예수님 뵙기만을 기다리며 여생을 준비해온 삶이 오늘 복음의 한나와 많이 닮아 있어 불현듯 생각이 나는 모양입니다.
경건함으로 한 생을 살아온 한나가 한 아기에게서 메시아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은혜를 입었듯이 참되고 열심한 신앙인에게 은총의 순간은 결코 피해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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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2,37)
<하느님의 은혜!>
'한나'라는 예언자는 세상 적으로만 보면 참으로 가련한 여인입니다. 남편과 혼인하여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보면 참으로 행복 가득한 여인입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으니 말입니다.
히브리어인 '한나'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은혜'라는 뜻을 지닌 '안나'입니다.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으니,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충만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인 성령 충만함 안에 있었던 한나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속량, 곧 예루살렘의 해방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고 오늘 복음(루카2,36-40)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세상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말과 삶으로 전하는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6-17)
주님의 성탄을 믿고 기뻐하는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도 살고(부활), 영원히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희망을 조금씩 이루어갑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께서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으니, 옛 종살이를 하며 죄악의 멍에에 짓눌려 신음하는 저희를 구원하여 주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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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하느님을 섬기는 사람>
루카 2,36-40 (한나의 예언, 예수님의 유년 시절)
그때에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믿고 바라고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맑고 밝고 깨끗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과 다투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벗들과 다투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스스로 작아짐을 기뻐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가짐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아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아무 것도 부럽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홀로라도 외롭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죽음을 향한 삶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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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아기 예수님에게서 구세주를 볼 수 있기를>
아기 예수님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계시는 믿음의 벗님들께서는 갓 태어난 아이를 바라보며 세상의 근심 걱정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밝은 웃음을 지었던 날이 있었을 것입니다.
잠시 그 날, 그 웃음, 그 아이를 떠올려보십시오. 새삼 입가에 자그마한 웃음이 그려지면서 행복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의 일이든 오래전 일이든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바라보던 그 순간만큼은 아마도 우리 자신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온통 아이만으로 채웠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가장 가난한 사람이었지만, 세상 어느 누구보다 가장 행복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이처럼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예언자 한나를 만납니다. 이미 늙어 공동체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남편마저 없는 여자로서 달갑지 않은 뭇시선을 감내해야 했기에 이중 삼중의 가난으로 고통스러워했을 한나는, 하지만 아기 예수님께서 구세주임을 알아보고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던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한나는 자신의 행복에 머물지 않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기꺼이 나눕니다.
겉으로만 본다면 아기 예수님은 성전에 봉헌된 다른 아기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나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는 분명히 달랐기에, 평범한 아기 예수님에게서 구세주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아기가 구세주라는 것을 볼 수 있었기에, 구원을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나처럼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는 아기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요한이 말하듯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1요한 2,16)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욕망은 이기적 욕심에서 나오고, 살림살이에 대한 자랑은 가난한 형제들에 대한 무시와 거부를 동반합니다. 따라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란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할 다른 이들에게 무관심한 채 자기 자신 안에만 갇혀 있도록 강요하는 것들이요, 더 나아가 하느님조차 배척하라 부추기는 것들을 뜻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언자 한나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자신의 삶을 오직 하느님으로 채웠습니다. 한나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며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이처럼 한나에게 가난은 삶의 족쇄나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히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는 귀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생의 고비를 만날 때 깊은 좌절감에 자포자기 하고,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보다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의지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삶을 좀 더 안락하고 풍요롭게 하는 세상의 많은 것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단 한 분이신 구세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하느님 사랑에 힘입은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께서 탐욕과 경쟁을 부추기는 세상의 것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고, 비우는 만큼 채워주시고 베푸는 만큼 안겨주시는 하느님께 한 걸음 더 다가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리기 그지없는 아기 예수님에게서 온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실 구세주를 바라보고, 무쇠같이 단단한 거친 세상을 예수님과 함께 연약하고 작은 몸짓으로 서서히 변화시키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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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히말라야 등산을 하려면 반드시 고용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등산 안내자로 널리 알려진 셰르파입니다. 이들은 많은 짐을 운반하고 또 온갖 잡일을 하면서 등반을 돕습니다. 그래서 네팔에는 약 7만 명의 셰르파가 있다고 하네요.
등반을 돕는 셰르파가 꼭 필요한 것처럼,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셰르파 역할을 하는 도우미가 우리 주변에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우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운이 없어서 어떤 도우미도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 못 만났을까요?
등반을 돕는 셰르파를 만나려면 히말라야를 끼고 있는 네팔에 가야만 합니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즉, 내가 직접 네팔까지는 가야 셰르파를 만나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잘 살 수 있게 해주는 나의 도우미는 나를 직접 찾아오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그 자리로 가면 도우미를 분명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 계신 곳에 내가 가야 합니다. 주님 계신 곳은 주님의 뜻인 사랑이 펼쳐져 있는 곳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있으면서 주님이 안 계신다고 외쳐서는 안 됩니다.
엉뚱한 곳에 서 있으면서 운이 없다고, 주님께서 외면하신다고 불평불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한나라는 예언자를 만납니다. 구약성경에는 남자 예언자의 역할은 막중합니다. 구원을 알리고 구세주를 예언했습니다. 그에 반해 여자 예언자는 수도 많지 않았고, 하는 일도 부녀자들에게 성경을 해석하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주님의 봉헌식에 여자 예언자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이름은 한나로서 밤낮으로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기던 할머니 과부였습니다. 아마도 성전에 살면서 성전 일에 봉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남편과 일곱 해 살고서는 과부가 되어, 여든네 살이 될 때까지 성전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을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풍습에 따라 15세 전후로 결혼했을 것이고 일곱 해 살고 과부가 되었으면 자그마치 성전에만 60년 이상 있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굳게 믿었기에 기다리고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구세주를 뵙는 영광과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주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나 예언자와 같이 주님 안에서 끝까지 기다리는 사람은 분명 주님을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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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려고 하지 말고 비우세요.>
우연히 조병수 건축가가 지은 집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집 가로세로 7m 마당 곁에 한 평짜리 방 여섯 칸을 지었습니다. 하늘을 보고 빛과 바람을 느끼도록 만든 ‘땅집’입니다.
인터넷에 있는 ‘땅집’ 사진을 보니 너무나 멋져 보였습니다. 조병수 건축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작게 지으려면 마음이 작아야 합니다. 마음이 작으려면 비워야 하고 무엇이 소중한지 알아야 하지요.”
제 방만해도 너무 많은 것으로 채워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더 넓은 공간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너무 많은 것을 채우고 있어서 계속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작은 마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오로지 주님만을 모실 수 있는 작은 마음만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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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만으로 족하라>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그러나 현실은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방황하고 걸려 넘어지며 은혜를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오늘을 감사하고 늘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하며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 '한나'라는 예언자를 생각합니다.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벌써 이름에서부터 행복을 누렸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누엘은 “하느님은 빛이시다”는 뜻입니다. 아세르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빛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으니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이겠습니까? 그는 충만한 은총 안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름 자체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은총이 많아도 담을 그릇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나는 겉으로만 보면, 남편을 일찍 잃은 불행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루카 2,37) 불행한 처지에 매여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처지를 하느님을 섬기는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남편이 있다면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찍 과부가 된 것은 불행이지만 온전히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음은 행복입니다.
한나가 행복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한나의 행복은 그의 처지나 형편에 따라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것을 추구함으로써 누리는 행복입니다. 주어진 현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를 생각할 때입니다. 주변의 상황에 흔들림 없이 하늘을 향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왔다가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을 보았고 시메온이 예수님께 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루카 2,33-35) 그리고 구원자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관해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늘 성전을 찾아 기도한 덕택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원한다면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체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께 마음을 둔다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사랑과 기쁨, 희망과 평화로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청주교구는 내년 1월11일 오후 2시에 사제, 부제 서품식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5명의 교구사제 후보자와 2명의 수도사제 후보자. 2명의 부제 후보자가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일정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지금은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 한나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피정에 임하게 될 후보자를 위해서 희생의 기도를 봉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후보자들이 모든 희망을 오로지 천상 것에 둘 수 있도록 빌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그들이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기를 빕니다.
'한나'예언자가 하느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였듯이 사제. 부제 후보자도, 우리도 모두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셔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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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한결같고 초연한 정주의 삶>
-사랑, 신뢰, 지혜, 가난, 겸손-
겨울은 춥지만 맑고 깨끗해서 좋습니다. 잠깨어 일어나면 우선 집무실 앞 수도원 정원을 거닐며 하늘의 별들을 봅니다. 겨울 하늘의 별들도 좋고 본질로 서 있는 가난한 겨울나무들도 좋습니다. 밤마다 바라보는 늘 거기 그 자리 밤하늘의 카시오페아 별자리와 북두칠성입니다.
맑고 깨끗한 겨울 하늘도 좋지만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간 침묵과 고독의 겨울산도 겨울나무도 좋습니다. 계절마다 좋고 배우는 바 다 다르지만 겨울에는 무욕의 초연한 삶을 배웁니다. 어제는 참된 정주 영성의 한결같은 삶에 대해 나눴지만 오늘은 초연한 삶에 대해 나눕니다. 역시 참된 정주 영성의 열매가 초연한 삶입니다.
가난하나 한결같은 삶, 초연한 삶이 그대로 품위있는 아나뷤의 삶입니다. 어제 복음의 주인공이었던 시메온과 오늘 복음의 주인공 한나가 그 아나뷤의 전형적 모습니다.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둔, 하느님 사랑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아나뷤입니다.
사랑, 신뢰, 지혜, 가난, 겸손으로 요약되는 한결같고 초연한 정주 영성 삶의 모범이 한나입니다. 참으로 겨울 하늘처럼 맑고 깨끗한 한나의 영혼입니다. 새삼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깨끗한 영혼에 있음을 봅니다. 이런 순수한 마음에서 샘솟은 깨끗한 열정입니다. 깨끗한 마음, 깨어 있는 삶, 깨달음은 셋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직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정말 가난하나 아름다운, 참으로 영육으로 건강한 한나입니다. 오로지 일편단심 한결같이 초연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겨온 정주 영성의 한나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뢰하여 섬길 때 저절로 가난하고 겸손하며 지혜로운 정주의 삶이겠습니다. 오래 전에 써놓은 겨울나무에 대한 시 두편이 생각납니다. 모두가 오늘 복음의 한나를 연상케 합니다.
“누가
겨울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
나무마다
푸른 하늘
가득하고
가지마다
빛나는 별들
가득 달린 나무들인데
누가
겨울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1998.12.
역설적으로 가난한 듯 하나 텅빈 충만의 부유한 겨울나무들 같습니다. 동안거중의 겨울 배나무 밭을 산책할 때마다 갖는 느낌도 역설적으로 텅빈 충만의 부요와 행복입니다. 이어지는 ‘겨울나무’라는 시입니다. 복음의 한나 여인 앞에서 느끼는 마음도 아마 이러할 겁니다.
“떠나자
떠나 보내자
미련없이 아름답게
나 늘 푸른 사철나무보다
잎들 다 떠나 보낸 겨울나무가 좋다
가난한 겨울나무들 앞에서 서면
왜 이리 부끄럽고 부러워질까
왜 이리 가슴이 저릴까
하늘 향해 쭉쭉 뻗은 무수한 나뭇가지들
참 간절한 그리움의, 기다림의 촉수들
볼품은 따질 게 아니다
그대로 그리움 덩어리, 침묵의 기도로 구나
흡사 봄꿈을 꾸는 나무들 같다
하느님 향해 쭉쭉 뻗은
무수한 내 깨어 있는 영혼의, 그리움의, 기다림의 촉수觸手들!
나도 한 그루 겨울나무로구나
그대로 한 그리움 덩어리 침묵의 기도로구나
나도
겨울나무가 되고 싶다!-2000.12
진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공감과 감동을 선물합니다. 겨울나무들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시입니다. 겨울 속의 봄이듯 이런 기다림중에 맞이하는 주님입니다. 참으로 겨울나무같이 가난한 영혼들에게는 매일이 주님의 대림이요 주님의 성탄입니다. 이런 깨어 주님을 기다리던 가난한 한나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이시니 바로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런데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또 한결같은 초연한 정주 영성의 본보기가, 참된 아나뷤의 본보기가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예수 아기의 성장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부모의 인품이 환히 드러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요셉, 마리아 부모님의 인품을 그대로 거울처럼 보여 주는 예수님의 성장과정 모습입니다. 한없이 기다리며 무집착의 이탈의 초연한 사랑과 지혜로 예수 아기의 넓고 깊은 따뜻한 품이 되어 준 요셉, 마리아 부부임이 분명합니다. 칼리 지브란의 시집 ‘예언자’에 나오는 ‘아이들에 대하여’ 라는 시의 진실을 이미 꿰뚫어 살았던 부부임이 분명합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갈망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나왔을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 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는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 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애쓰지는 마라
큰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한나와 시메온, 요셉과 마리아, 모두가 가난하나 참으로 한결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섬겼던 겸손하고 지혜로운 아나뷤이었습니다. 바로 요한 사도가 우리 모두 육신의 세상적 욕망에 초연하여 한결같은 정주의 참 삶을 살도록 간곡히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랑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냥 놔두면 미풍으로 끝날 지나가는 것들에 유혹되어 어리석게도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며 분별력의 지혜를 잘 발휘하여 세상을 잘 보살피고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맛’이 아니라 ‘하느님 맛’으로 살라는 것이며, 무지의 탐욕이나 질투, 분노에서 벗어나 초연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오로지 하느님께 희망과 사랑을 둔, 겸손하고 지혜로운 아나뷤으로 한결같고 초연한 정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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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NrJaaDZN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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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 38)
우리를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막을 수 없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로
가고있다.
성탄은 어제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의 살아있는
이야기로
우리 마음을
울린다.
우리를 위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된다.
잊어버릴 수
없는 하느님의
탄생이다.
성탄은
우리를 일으키는
기쁨의
이야기이다.
성탄의
이야기를 통해
복음은
살아있는
복음이 된다.
이야기가
깊어지면
우리의 삶도
깊어진다.
이야기의
바탕에는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이 있다.
하느님의
이야기를
다시 듣는다.
하느님의
이야기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비로소
바라보게 되고
비로소 듣게되는
성탄의 변화이다.
성탄의 이야기는
하느님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되찾아주고 있다.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 사랑이다.
사랑은 새롭고
사랑은 뜨겁다.
사그라들지 않는
아기 예수님과
함께 이 하루를
시작한다.
아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사랑은
막을 수 없고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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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성탄은 기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성탄에서 멀리 있는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성탄과 더불어 함께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진심으로 하느님 탄생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삶에서 무엇이 더 좋은 것인지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느님 말씀에 더욱 친숙하게 다가설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하느님 중심으로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이 깊어질수록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선하여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기도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성탄의 기도는 한나와 같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으로써 하느님 탄생에 다가가는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감사의 성탄축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우리가 나누어야 할 것은 하느님 탄생의 신비뿐입니다. 탄생의 신비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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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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