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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내분과 세바의 반역
삼하 19:40-20:3
40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과 함께 건너니라
41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 왕께 아뢰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둑하여 왕과 왕의 집안과 왕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가게 하였나이까 하매
42 모든 유다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종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 내느냐 우리가 왕의 것을 조금이라도 얻어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있느냐
43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20:1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2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3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그들에게 관계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삼하 19:40-20:3 /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의 불화] 다윗왕은 요단강 서쪽에서 길갈 쪽으로 가고 김함도 왕을 따라갔다. 여기서부터는 유다 지파의 정규군이 모두 왕을 따라 행진하고, 이스라엘 열 지파의 정규군도 반절이나 왕을 따라서 행진하였다. 41) 그런데 갑자기 이스라엘의 나머지 군인들이 왕에게 몰려와서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유다 사람들은 우리와 동족이면서 어떻게 자기들끼리만 요단강을 건너가서 임금님과 그의 가족과 신하들까지 모시고 왔습니까?' 42) 그러자 유다 사람들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대들었다. `왕이 우리 유다 지파 사람이 아니냐? 너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흥분하느냐? 우리가 임금님을 빼앗아 가지고 달아나기라도 하였느냐? 아니면 우리가 임금님께 무엇을 얻어먹었거나 무슨 특혜라도 받았단 말이냐?' 43) 이스라엘 사람들도 지지 않고 유다 사람들에게 대들었다. `왕이 비록 너희 지파 출신이기는 하지만 너희는 한 지파뿐이고 우리는 열 지파나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희보다 열 배나 더 왕을 모셔야 할 특권이 있다. 그런데도 너희가 우리의 특권과 우선권을 무시할 수 있느냐? 또 처음부터 왕을 다시 모셔 오기로 작정한 사람들도 우리들이 아니었느냐? 어느 면에서나 우리들은 너희의 형 뻘이요, 너희보다 앞선 위치에 있지 않느냐?' 그러나 유다 사람들의 말이 더 모질고 날카로웠다. 20:1) [세바의 반란] 마침 그곳 길갈에는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난동을 부리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비그리의 아들 세바였다. 그가 갑자기 뿔나팔을 불며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이새의 아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는 유다 지파 사람인데 우리 이스라엘의 열 지파에게 무슨 유산을 물려주겠느냐? 이스라엘 사람들아, 공연히 속지 말고 어서 일어나 각자 집으로 돌아가자' 2)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다윗을 버리고 세바를 따라갔다. 그러자 왕을 따르는 사람들은 다시 유다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요단강에서 예루살렘까지 계속 왕을 따랐다. 3) [왕궁을 지키던 후궁들의 처벌] 예루살렘 왕궁으로 돌아온 다윗은 전에 왕궁을 지키도록 남겨 두었던 열 사람의 후궁부터 별궁에 가두고 감시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먹을 것만 대주었을 뿐 더 이상 후궁들을 찾지 않았으니 그녀들도 다윗의 딸 다말과 같이 외롭고 슬프게 갇혀 사는 신세가 되었다. 이 후궁들은 한때 압살롬 시대가 온 것을 알려 주던 깃발 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다윗은 이제 그 시대가 바뀐 것을 알리기 위하여 더 그렇게 하였다. 그래서 왕궁을 지키던 그 후궁들은 죽는 날까지 별궁에 갇혀서 생과부로 지냈다.
다윗의 환궁 문제로 인하여 유다 지파와 다른 이스라엘 지파 간에 갈등이 생깁니다. 이에 베냐민 사람 세바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40) 요단을 건넌 다윗은 길갈에서 많은 백성들의 환영을 받습니다. 사실 다윗의 환궁을 추진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열 지파였습니다. 유다 지파는 다윗 개인의 노력으로 이 일에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 지파는 다른 지파를 고려하지 않고 다윗의 환궁에 대하여 주도권을 가지고 추진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이어 나올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 됩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대립(41-43) 유다 지파의 독단과 그에 대한 다윗 왕의 처신은 다른 이스라엘 지파에 불만을 주게 됩니다. 먼저는 다윗 왕의 복위에 대하여서 이스라엘 절반이 추진하던 일을 왜 유다 지파가 가로 챘는가에 대한 불만인 것입니다. 지파 간의 시기와 질투를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하여서 유다지파는 다윗의 혈통으로 대답합니다. “왕이 우리의 친척이어서 그랬소!”(42) 이 말은 다른 지파는 다윗을 대적해도 된다는 논리의 어리석은 대답이 됩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분열된 나라가 겨우 봉합 과정에 있었는데, 다시 분열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바의 반란(1-2) 다윗 왕의 환궁 문제로 인하여서 이스라엘 나라는 다툼이 생겼고, 이때를 이용하여 베냐민 사람 세바가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사람은 사울가의 사람이거나 적어도 사울가를 지지하는 사람인 듯합니다. 그는 왕 다윗을 평범한 사람 ‘이새의 아들’로 격하하여 부르면서 다윗을 모독합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다윗을 떠나 각 자 장막으로 돌아감으로 자신들이 기름 부어 왕으로 삼은 다윗에게 등을 돌립니다.
다윗의 후궁 열 명(3)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피난 나갈 때 후궁 열 명을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하였습니다(삼하 15:16). 그 후궁 열 명은 압살롬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뒤에, 압살롬에 의해서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했습니다(삼하 16:21, 22). 다윗은 이들을 성 밖으로 내어 쫓을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었겠지만, 이들을 예루살렘 왕궁에 남겨 두었습니다. 자신의 아내들이었기에 율법(신 24:4)대로 별실에 가두고 관계를 끊었습니다.
적 용 : 갈등이 있을 때에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야 합니다.
슈바이처(A. Schweitzer 1875-1965 독일 루터교신학자. 철학자. 음악가. 아프리카 선교사. 노벨평화상(1952)수상)가 자기 재산을 모두 병원 유지를 위해 기부했으나, 그것으로는 몰려드는 환자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각지로 다니며 부득이 모금운동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자기 고향인 알자스에 들르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친지와 동료 그리고 각계 인사들이 기차역에 모여 ‘20세기 성자’를 영접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기차가 도착하자 환영 나온 사람들과 기자들은 1등실 앞으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슈바이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허둥대는 사람들의 눈에, 맨 뒤 칸 3등 열차에서 내려 초라한 모습으로 플랫폼으로 걸어 나가는 한 남자가 보였습니다. 그가 바로 슈바이처 박사였습니다. 사람들이 달려가서 그를 붙들고 “아니, 박사님! 어째서 3등 칸을 타고 오셨습니까?”하고 의아해 하면서 물었습니다. 그 때 슈바이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4등 칸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3등 칸을 탔습니다.”
< 설 교 >
유다와 이스라엘의 다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후 선악과를 세우셔서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지시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으면 인간은 영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열매를 먹으면 인간은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이러한 장치를 에덴동산에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이러한 장치가 인간을 위한 것입니까? 만약 인간을 위한 것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그러한 장치는 만들어 놓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선악과를 안 먹으면 영생을 준다가 아니라, 무조건 영생을 얻게 해주겠다는 것이 진심으로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선악과라는 장치를 만드신 것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입니다. 알다시피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메 날마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기쁨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창조되어진 세상의 경치가 좋아서가 아니라 세상이 곧 말씀의 세계였기 때문에 그것이 보시기에 좋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쁨은 말씀의 세계가 그대로 유지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만드시고 선악과라는 장치를 만들어 놓으심으로 말씀의 세계를 보호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즉 인간이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야 말로 말씀 아래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말씀의 세계였기에 그것으로 하나님의 기쁨은 계속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실패하게 되고, 결국 영생에서 멀어진 채 이제는 죽음 아래 있는 인간의 처지가 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입니다.
세상은 인간을 그의 인격이나 업적 등으로 인간의 존귀성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말씀 아래 있는 인간만이 오직 인간다운 인간으로 평가되어질 뿐입니다. 세상이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것을 치장하여 자신의 존귀성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도 말씀에 순종한자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말씀은 말씀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존재해 주기를 원합니다. 심지어 신조차도 자신을 위한 신으로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망이 말씀을 거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오직 말씀을 위해 오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말씀을 위해 사심으로 말미암아 유일하게 말씀을 위해 존재하는 참된 인간의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씀의 세계가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죽는다는 원칙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말씀의 세계에 내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의 세계의 백성으로 존재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영생에 참여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누구든 말씀에 순종하지 못함으로 죽음에 붙들려 있던 존재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하고 안하고 상관없이 모두가 동일한 처지에서 만난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망각하기에 교회에서 끊임없이 세력다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툼을 오늘 본문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40절을 보면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을 호행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요단을 건너 길갈로 오게 되었을 때 왕을 호위하여 함께 건넌 사람들은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백성이라는 용어는 개개인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지도자 위치에 있는 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유다 백성은 전부가 다윗과 함께한 반면 이스라엘은 절반만이 다윗과 함께 합니다. 그 이유는 유다 백성이 다윗 왕의 귀환을 이스라엘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귀환하는 모든 행사를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에게 알리지 않은 채 주관함으로 인해서 단지 다윗 주변에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다윗과 함께 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으로 인해서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에 다툼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41절의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서 고하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왕과 왕의 권속과 왕을 좇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네었나이까”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에게 나아와 유다 지파의 독단적인 행위에 대한 부당함을 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대해 유다 사람들은 “유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내느냐 우리가 왕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 주신 것이 있느냐”(42절)라고 말함으로써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즉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윗 왕을 모신 것은 다윗 왕이 자신들과 지친인 까닭이며 다윗으로부터 그 어떤 특혜를 받은 일도 없기에 이스라엘이 분노하는 것은 자신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임을 강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립과 다툼은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는 말을 보면, 서로가 양보하지 않은 채 다윗 왕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하는 것으로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라는 말은, 다윗 왕과의 혈통적 관계를 앞세우는 유다 사람들에 대한 반박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지파의 숫적인 우월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이 유다 사람들보다 더 다윗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될 위치에 있기에 다윗에 대해서는 유다보다 더 관계가 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에게 유리한 것을 내세우면서 누가 다윗과 더 가까운가를 따지며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자신들의 실체가 무엇인가는 보지 않은 채 서로 다윗에게 더 가깝다는 것을 주장하는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이들 모두가 다윗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더 가깝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처지입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 압살롬이 잘해준 것 때문에 압살롬이 좋다하며 다윗에게 마음을 돌렸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압살롬이 반역을 하게 되고 다윗은 피신을 하는 고생을 하게 된 것인데, 이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누가 더 다윗과 가까운가로 다툰다는 것이야 말로 똥 묻은 두 마리의 개가 서로 냄새난다며 다투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유다든 이스라엘이든 다윗에게서 마음이 돌아섰던 사람들입니다. 다윗 편에서 볼 때는 반역자일 뿐입니다. 그런 그들이 마치 전혀 다윗을 반역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다윗을 왕으로 섬겼던 사람들인 것처럼 다윗에 대한 서로의 위치를 두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편에서 볼 때는 그들 모두는 다윗을 배신한 자들일 뿐입니다.
눅 9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변론이 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눅 9:48)는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따지는 것은 ‘누가 더 공이 많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공이 많은 자가 천국에서도 크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사단의 사고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는 ‘공로’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 내어 놓을 공로라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한 어린아이는 자신의 공로가 없는 존재를 뜻합니다.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라는 것도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공로가 전혀 없는 자로 존재하는 것이 가장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이 바로 이런 사람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나의 공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공로로 들어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그들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택하신 결과였습니다. 이것을 그들이 알았다면 ‘누가 크냐’라는 다툼은 아예 있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의 현실은 ‘누가 크냐’라는 싸움에 휘말려 있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처럼 주도권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움으로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경쟁적으로 행하며 살아갑니다.
기도도 경쟁적으로 하고, 성경을 읽는 것도 경쟁적으로 하며, 심지어 목사를 섬기는 것에도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야 말로 천국과 상관없는 지옥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란 경쟁과 다툼이 있을 이유가 없는 곳입니다. 주도권 싸움이라는 것도 해당이 전혀 안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유는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의 공로로 되어진 것입니까? 여러분의 공로로 신자 되었고 예수님을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교회가 세워지고 지금까지 유지된 것이 여러분의 공로입니까? 그렇게 여겨진다면 서로의 주도권을 위해 싸우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지옥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나라, 즉 말씀의 나라에 들어와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공짜로 생명나무에 참여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존재로서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다같이 죽고 썩어질 사람들이 예수님의 공로로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런 우리가 모여서 누구의 공로를 내 놓는 것이 옳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환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지금도 예수님이 가신 길을 외면한 채 나에게 유리한 길을 가고자 하는 욕망이 들끓습니다. 그런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의 피가 가려주셔서 주님의 나라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세상에서 성공하고 큰 자가 된다’는 말은 지옥의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뺏긴다면 그 마지막은 결국 지옥의 사람으로 끝나게 될 뿐입니다. 자기 공로가 없는 그가 작은 자로 여김 받으며 그가 곧 천국의 사람임을 명심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자랑하기 바랍니다.
시편 59:1-2절을 보면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문자적인 이해를 묻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이 이 구절을 받아들이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께 원수라는 대상이 존재한다면 마음 깊이 이해되는 내용이겠지만 원수가 없다면 여러분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구절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 때문에 읽고 끝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이런 부분들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읽기는 읽으나 나의 삶과 너무 동떨어진 내용들이어서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다만 내 머리 속을 스쳐지나 가는 것이 전부인 것들 말입니다.
물론 말씀의 의미를 해석을 하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말씀의 의미를 해석하여 들려줘도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원수가 누구인가를 말해줘도 시편 59편과 같은 내용들이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는데서 찾고 싶습니다. 나의 모 든 것을 포기해야 할지라도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야한다는 생각도 없고, 아무리 예수가 좋다고 하더라도 예수 때문에 손해를 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세상과 적당히 타협을 하며 살았기에 원수라는 것이 존재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결국 다윗처럼 고난 받는 입장에 있지 않기에 원수에 대한 이야기가 이해가 안되는 것이고, 예수님처럼 주리고 고난 받는 약자의 길을 원하지 않기에 십자가가 이해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은 관심 밖이 되는 것은 자명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원수와의 싸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원수에 대한 관심도 없고 원수가 누구인가를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지키기에 급급하여 내 교회에 해를 끼치는 존재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뿐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십자가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십자가도 내 교회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식품으로만 존재할 뿐이지 예수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가 굳게 세워지고 증거 되기 위해서라면 내 교회는 망해도 좋다는 생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십자가가 증거 되는 것이라는 원수의 생각에 합류하여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 아니기에 그 마음은 자연 자기 유익이 있는 곳을 향할 수밖에 없고 자기 유익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유익이 되는 곳으로 마음이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유다와 이스라엘이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 다윗의 귀환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자기 유익을 따라 마음이 흘러가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입니다.
이들의 마음에는 다윗이 없습니다. 유익이 안된다 싶으면 다윗에게서 멀어지고, 다윗을 가까이 하는 것이 유리하다 싶으면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권세에 가까이 하여 득을 보려는 노림수만 있을 뿐, 자신들이 다윗에게서 멀어졌을 때의 결국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거룩의 관계가 유지되어집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 있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만 거룩의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다윗을 대적하고 멀리 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원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윗에게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무엇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인가만 따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본문에 세바의 반란을 있게 한 것이고 결국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윗 좇기를 그치고 세바를 좇은 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라고 말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시는 일에 있어서 주도권 다툼을 합니다. 유다는 다윗의 지친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세력이 더 강하다는 것을 내세워서 서로 다윗에게 가까운 위치에 있으려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리고 19:43절에서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고 말하는 것처럼 유다 사람들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다툼을 보면서 양쪽 모두의 관심은 다윗 안에서 얻어지는 하나님과의 거룩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권세에 가까이 하여 얻어지는 자신들의 유익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느 한쪽도 자기 유익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함으로써 결국 세바의 반란이 있게 된 것입니다.
세바라는 사람이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는 말로 이스라엘을 선동합니다. 세바의 말은 유다 지파가 다윗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면 자신들은 결국 다윗으로부터 멀어져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으며 얻을 유익도 없을 것이니 다윗을 따를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바의 선동에 마음이 움직인 이스라엘은 결국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2절)는 내용처럼 다윗을 좇지 아니하고 오히려 세바를 좇게 된 것입니다. 다윗보다는 자신들 앞에 서서 외치는 세바를 좇는 것이 더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물론 다윗보다 세바를 좇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세바를 중심으로 뭉친다면 오히려 강한 나라를 건설하여 크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을 좇음으로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득을 생각할 뿐, 다윗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좇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윗에게서 돌아선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다윗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메시야 언약을 무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어서 여러분께 돌아올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과연 무엇을 기대하고 예수를 좇고자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거룩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불의와 더러움의 자식인 우리가 하나님과의 거룩의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놀라운 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룩의 관계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십니까? 이 거룩의 관계에서 멀어지는 것은 곧 영원한 멸망이며 사망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을 안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의 이득을 꾀하기보다는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이라는 관계에 머물게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에게 가나안 여인 하나가 나아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외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이었는데 이 여인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는 것입니다. 즉 자기 딸이 귀신 들렸다며 예수님을 찾아와 사정을 하는데 예수님은 자신은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하면서 물리치시는 것입니다.
결국 여인이 이방인이기에 도와주지 않겠다는 의미의 말씀으로 들려질 수 있을 것이고,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거듭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고 다시 예수님으로부터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민망한 말을 듣게 됩니다. 이방 여인을 개로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이 한 말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불쌍한 처지에서 해방될 수 없는 자기 처지를 바라보고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힘을 빌려 득을 보겠다는 것보다는 예수님이 자신을 물리치지 않기만을 원합니다.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알기에 개로 취급을 받아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개의 위치에라도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먹고 살아가는 것이라면 어떤 위치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불쌍한 존재일 수밖에 없기에, 예수 밖에서는 높은 자리에서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간다고 해도 불쌍한 존재에 불과할 뿐임을 알기에 예수 안이라는 관계를 소원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을 큰 믿음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잘못됨은 다윗과의 관계에서 누릴 자신들의 위치와 이득만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환영하고 좇는 이유가 오직 자기 유익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여겼는데 세바가 선동을 하자 가차 없이 다윗을 좇는 것을 중지하고 세바를 향한 것입니다. 무엇이든 나에게 유리한 것만 선이고 진리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대로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라는 다툼을 했었지만 그들 역시 예수 안에서 자신들이 차지할 자기 위치만 생각했을 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어떤 높은 위치에 있어도 불쌍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의 모든 것 위에 위치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에베소서 2:1·2-13절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결국을 놓고 본다면 참으로 불쌍하기 짝이 없는 처지에 불과한 존재들이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운 거룩의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점을 잊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안이라는 관계에 있는 것이야 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소원할 것은 예수님이 아니면 개보다 못한 존재이기에 예수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개의 위치에 있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으로부터 얻어먹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산다면 원수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59편과 같은 내용의 말씀들도 얼마든지 자신의 신앙생활로 말미암아 이해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으로 인한 신자의 유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이미 넘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불쌍한 처지에서 구출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이해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습게 여기고,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 역시 자기 유익을 위한 계산이 앞서기 때문에 항상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이 나에게 유리하다 싶으면 가차 없이 예수께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구원 받은 자라면 인생이 자신에게 불리한 길로 흘러가고 남들보다 못한 위치에서 살아가게 된다고 해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까운 관계에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감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