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은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이야기다 ]
봉천동 슈바이처로 불리며
평생 가난한 사람들의 주치의로 살아온 공로로
국민훈장인 동백장을 수훈한 의사 윤주홍 님.
윤주홍 님의 헌신적인 삶은
1973년, 판자촌이 늘어섰던 서울의 한마을에
'윤주홍 의원'을 열면서 시작합니다.
윤주홍 님은 평생 진료비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주민들을 생각해 진료비는 절반 수준만 받았고,
부모가 없는 보육원 아이들을 위해서
무료로 치료와 수술을 해주었고,
매년 의사가 없는 섬마을에도 찾아가서도
의료 봉사를 했습니다.
작은 질병부터 골절이나 화상,
맹장 수술에서 분만까지 전반적인 치료와 수술로
아픈 주민들을 돌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삶은 무려 46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또한, 생계가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서
'관악 장학회'를 설립한 후, 지금까지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수만 무려 2,000여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윤주홍 님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가 있었는데
수십 년 전 한 청년이 주문하지도 않은 자장면 한 그릇을
철가방에 담아 가져왔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수년 전 인근 보육원에서
교사가 밤중에 맹장염을 앓는 아이를 데려왔는데
윤주홍 님은 돈을 받지 않고 수술을
해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가
청년이 되어 중국집에 취직한 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들고 온 자장면은 첫 월급으로 사 온 것인데
윤주홍 님은 그때의 일을 말했습니다.
"그 청년의 마음이 고마워 눈물을 흘리며
자장면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2019년 병원 문을 닫게 되었는데
그건 아내의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는 평생 무료 진료와 사비를 털어 왕진을 다닐 때도
잔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내가 아니었다면 이런 삶을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아내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병원은 문울 닫았지만, 다른 이들을 돕는
삶의 방식은 변하지 않았는데 2021년에는
고려대의료원에 의학 발전 기금 10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나눔과 봉사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고운 빛으로 물들일
한 알의 꽃씨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출처미상>
"있으면 주고, 없으면 나누라. 없는 가운데 나눔이 신체를 떼어내는 고통일지라도 행하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며 살아오며 '봉천동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윤주홍 원장(윤주홍의원)이 평소 말하는 지론이다. 그는 60년 전 하나님과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약속했으며 지금도 그 약속을 한결같이 지켜가고 있다.
무의도 진료와 '봉천동 슈바이처'의 탄생
판자촌 사이에 세워진 병원, 무슨 그리 아프고 다칠 일이 많은지 윤주홍 의원은 늘 문전성시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치료비를 모두 받을 순 없었다. 윤 원장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주면 주는 대로 받으며 치료했다. 윤 원장은 판자촌을 오가며 밤중에도 가난한 환자를 돌보기 위해 왕진을 다녔다. 그런데 어느 밤중에 칼 든 노상강도 2명을 만났다. 목에 차디찬 칼이 들어오니 무조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갑이고 가방이고 모두 내놓았다.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윤주홍 원장.
그런데 가방을 뒤지던 한 강도가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강도에게 다급히 말했다. "야, 이 사람 윤주홍이야 윤주홍. 여기 아래 윤주홍 의원 있잖아. 며칠 전에 우리 아들도 치료해 줬단 말이야." 둘은 잠시 눈빛을 교환하더니 윤 원장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이에 앞서 윤 원장은 고열이 난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왕진을 갔다. 그때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사내가 있었는데, 윤 원장은 개의치 않고 아이를 치료해 줬다. 그런데 그 강도가 그 아이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이런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에는 한 아이와 어머니가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이 여성은 당시 한국일보에서 근무하던 기자의 아내였다. 그 기자는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고, 한국일보 '표주박'이라는 코너에 '봉천동 슈바이처'로 윤 원장을 소개했다. 그렇게 '봉천동 슈바이처'가 탄생한 것이다.
윤주홍 원장은 봉천동에서 빈민들을 위한 진료를 이어가면서 보육원을 돌면서 아이들을 치료하기 시작한다. 당시 윤 원장에게 도움을 받은 아이들만 해도 2000여 명이 넘는다. 또 윤 원장은 1994년 관악장학회를 설립해 돈이 없어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돕기 시작했다. 무의촌 진료를 포함한 수많은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윤주홍 원장은 제1회 서울시민대상과 국민훈장 동백상 등을 수상하게 된다.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가거든 뭐든 다 먹지 말고 항상 3분의 1은 남겨야 한다. 수확 철이 되면 벼나 보리는 다 베지 말거라. 그리고 이삭을 줍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로 내쫓아서는 안 된다." 어린 시절 윤주홍 원장의 할머니는 언제나 몸소 나눔을 실천했다. 할머님은 내가 가진 것 중에 3분의 1은 다른 이를 돕는 데 써야 한다고 했다. 할머니의 가르침을 윤 원장은 지금까지도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다.
"사실 그렇게 나누고 봉사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죠. 없는 사람에게는 삼분지 일도 힘든 법이에요. 그래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1할 중 2푼은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는 거예요. 힘들 때 나누는 건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는 고통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해요. 그래야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법이거든요."
평생을 나눔과 봉사의 삶을 살아온 윤 원장, 그는 2푼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것을 내놓고도 혹시나 내가 나를 위해 남겨놓은 것이 없는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윤 원장. 60년 전 '남을 위해 살겠다'라고 '봉천동 슈바이처' 윤주홍 원장이 했던 그분과의 약속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출처; 고대학교의료원 웹진>
첫댓글 한국의 슈바이처 이군요!
감동적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