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태산의 정봉(正峯).
천단봉의 바로 아래에서 우뚝 솟아 수려한 웅자를 자랑하는 거봉이다. 그 곳에는 넓이
만도 사방 십 리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성채가 자리잡고 있다.
천하를 압도할 듯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는 그 성 안에는 고루거각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름하여 십방무림통사단(十方武林通社團).
당금 무림에서 당당히 사파(邪派)의 태두로 군림하는 절대패세(絶代覇勢)의 총단인 것
이다.
일몰(日沒)이 앙금처럼 깔려드는 시각이다. 주위는 신비스럽도록 짙은 홍광에 늪처럼
잠겨 들고 있다.
십방무림통사단의 정면에 위치한 문루 앞으로는 산역임에도 불구하고 광활한 대평원이
펼쳐져 있기도 하다.
그 평원에는 줄잡아도 일만은 족히 될 듯한 무병(武兵)들이 일체의 흐트러짐 없이 질
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또한 그들의 주변은 온통 바람에 휘날리는 흑색 깃발의 물결로 뒤덮여 있었으니, 장관
도 그런 장관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만 무병들이 치켜든 창검(槍劍)들이 모조리 날을 세운 채 번뜩이고 있어 그 기세란
가히 하늘을 찌를 듯했다.
무병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기대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것은 저 멀리 지평선에서 뿌
연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일단의 행렬로 인한 현상이었다.
행렬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군웅들의 얼굴에는 긴장을 하는 듯한 기색까지도 은은히
떠올랐다.
먼저 그들의 시야에 확보된 것은 북리뇌우의 평범한 사두마차였다. 그 뒤로는 예의 화
려한 백색 마차와 중갑기마전단인 천위묵룡단(天偉墨龍團)이 뒤따르고 있는 것도 보였
다.
하지만 북리뇌우의 마차를 보자 군웅들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실망의 빛이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노릇이었다.
현재 총사의 직위를 이을 인물이 이 곳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그들 중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그 인물이 가지게 될 지고한 신분과 걸맞은 장면을 상상했었건만, 이렇듯 지붕
도 없이 달랑 마부석에 어린 소년 하나 앉혀 놓은 빈약한 마차나 구경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따가닥...... 따각......!
북리뇌우의 마차는 온갖 사연을 달고 먼길을 온 보람도 없이 그처럼 중인들의 눈총(?)
을 받으며 그 곳에 당도했다.
그러나 막상 그 주인만은 예외였다.
북리뇌우.
그의 신색은 일만의 패기 넘치는 무병들을 앞에 두고도 담담하기만 했다. 다시 말해
자신감을 대변하는 듯한 그 태도야말로 어떤 분위기보다 위압적인 것이었다.
그는 물처럼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무병들을 돌아보았는데, 그 눈은 시종 유현하
고도 신비로운 빛을 발했다.
마침내 중인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기에 이른다.
"과연 인물이야."
"우리의 기대를 배신하지는 않으시는군."
대충 이러한 수군거림들을 접하며 마차는 도열해 있는 무병들의 한가운데로 전진해 가
고 있었다.
둥― 둥―!
총단의 건물이 있는 곳으로부터 웅장한 북소리가 울려와 평원을 진동시킨 것은 그 때
였다. 동시에 일만 무병들은 창검을 하늘로 치켜올리며 우렁찬 음성으로 외쳤다.
"존(尊)―!"
그 엄청난 함성과 더불어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북리뇌우를 향해 대례(大禮)를 올
렸다.
북리뇌우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들뜬다거나 기뻐하는 기색은 조금도
내보이지 않았다.
소악이 되려 흥분하여 난리였다. 그는 흡족한 얼굴로도 모자란지 연신 춤을 추듯 어깨
를 들썩이고 있었다.
"정말이지, 신이 납니다. 형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매일이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
그의 귀로 북리뇌우가 전음을 보내 왔다.
'시끄럽다! 너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난 이 자리가 불편해 죽을 지경이다. 이런 건
내 생리에 맞지 않는단 말이다.'
소악은 마부석에서 씩 웃으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쩝니까? 형님께서 워낙 대단한 분이신 것을. 천하의 누구라도 형님을 공경하지 않
을 수는 없지요."
그는 중인들의 시선도 고려하지 않고 평소의 어투로 북리뇌우를 마구 추켜세웠는데,
그것은 그의 진심이기도 했다.
북리뇌우는 점잖게 빙긋 웃어 보이기는 했지만 그의 귀로 쏘아져간 음성은 내용이 전
혀 틀렸다.
'너, 조금 있다 보자! 용서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소악은 그 말은 아예 못들은 척 딴전이었다.
둥― 둥―!
또 한차례 북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이번에는 거대한 문루의 안으로부터 한 채의 화려한 교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은 윤기 흐르는 자단목(紫檀木)으로 된 교자로써 일견하기에도 품위가 있어 보였
고 장식도 대체로 우아했다.
옥주(玉珠)와 피진사로 짜여진 주렴이 드리워져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으나 호
화로움이나 분위기로 미루어 고귀한 신분의 인물이 타고 있는 듯했다.
교자는 네 명의 건장한 흑의무복 청년이 한 귀퉁이씩 어깨에 메고 있었다. 장내의 일
만 무병들은 교자를 보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쪽 무릎을 꿇어 예를 취했다.
그 광경을 본 북리뇌우는 내심 집히는 바가 있었다.
'이 곳에 상주(常住)하면서도 전체 무병들에게 이런 예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라면 단
한 사람밖에는 없으리라.'
그의 눈이 강한 호기심을 띠었다.
'내 짐작이 맞다면 저 안에 타고 있는 자는 필경 십방무림통사단의 총단주(總團主)일
것이다.'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마차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지극히 오연한 태도로 교
자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눈치 빠른 소악은 벌써 마차를 세워 놓고 있었다. 북리뇌우가 가져야 할 긴장감을 그
가 앞서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 앞에서 교자를 메고 있던 사 인의 청년들이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에 따라 약간
올려다보아야 했던 교자는 자연히 북리뇌우의 눈 높이에 낮추어졌다.
교자의 주인이 그에게 예를 취해온 것이었다.
그제야 북리뇌우도 교자를 향해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러나 단지 그뿐, 그는
끝내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이 때에 중인들은 한결같이 불안한 빛이 담긴 눈으로 북리뇌우의 마차와 문제의 교자
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십방무림통사단에 소속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총단주의 앞에서는 부복대례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는 마주친 장소가 이 곳 총단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십방무림통사단이라면 현무림의 양대태두(兩大太斗)로서 지옥척살단에 의해 십지
(十地)의 일부가 무너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을 만큼 절대적인 단
체이다.
그 권위를 대표하는 자가 총단주이거니와, 그에게 예를 취하는 것은 당금의 무림인으
로서도 당연한 일이었다.
장내에는 기이한 침묵이 깔렸다.
그것은 원칙을 무시한 북리뇌우의 태도에서 기인된 침묵이었다. 중인들 중 누구도 그
를 이해하는 자는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 여.
교자 안에서 한 가닥 음성이 흘러 나왔다.
"입성(入城)을 환영하네."
음성의 주인은 초로(初老)에 접어든 인물인 듯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전해지는 느
낌이 인자하기 그지없었다.
"고맙소이다."
북리뇌우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청컨대 지나친 예우는 거두어 주십시오. 지나가는 길손의 자격으로 온 것이라 여겨
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그것은 뭔가 함축적인 뜻이 깃든 일언이었다.
"원한다면, 황제의 아들이라 해서 무조건 황제가 되어야 한다면 그도 불행한 일일 것
이야."
교자 안의 인물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아들이라는 신분만은 어떻든 변함이 없지. 이것만 기억해 주시기 바라
네. 이 곳은 나를 비롯하여 모두가 그대를 환영한다는 것을."
그 역시도 직설적이기보다는 우회를 한 응답이었다. 북리뇌우는 내포된 의미를 알아차
리고는 재차 고개를 숙였다.
"호의에 감사 드리오이다."
"저녁에 그대를 위한 연회를 준비하겠네. 될 수 있는 한 성대하게 치르고 싶은데 그것
도 사양할 텐가?"
북리뇌우는 빙그레 웃었다.
"아니외다. 연회가 베풀어지면 모든 병사들이 함께 먹고 마실 터인즉 기쁜 마음으로
따르겠습니다."
"음, 젊은 나이에 사려가 깊군. 저녁에 만나세."
그 말을 끝으로 교자는 네 명의 흑의청년들에 의해 옮겨져 문루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따각, 따각......!
소소향의 백색 마차가 북리뇌우의 마차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마차의 주렴을 걷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북리뇌우는 다소 어두운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의부께서 머무시던 처소에 먼저 가 보고 싶소."
웬만해서는 심중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에게도 어쩔 수 없는 한 부분은 존재했던 것이
다.
소소향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곳으로 모시겠어요."
그들 일행도 일만 무병의 예를 받으며 문루 안으로 사라져 갔다. 석양은 더욱 짙어져
사위를 붉게 적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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