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암류(暗流)의 회오리 속에서
[1]
전청(殿廳).
외형이 그랬듯 내부도 대체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이다. 이 곳을 중심으로 하여
다시 십여 개의 정실(靜室)이 방원형으로 늘어서 있기도 하다.
북리뇌우와 소복여인 추서운.
두 남녀는 전청에 마련된 탁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뜨거운 향차가 더
운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북리뇌우는 찻잔을 집어 들며 추서운을 정시했다. 그 무언의 눈짓은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 보라는 의미였다.
이를 알아차렸는지 추서운이 입을 열었다.
"짐작컨대 신임 총사께서는 소녀가 십방밀륜단(十方密輪團)의 단주라는 점이 마땅치
않으실 겁니다."
"부인하지 않겠소."
북리뇌우는 굳이 감출 이유가 없는지라 터놓고 응수했다. 추서운이 희미한 미소와 함
께 말했다.
"소녀는 만박성가(萬博聖家) 출신이에요. 아니, 좀더 분명히 말하자면 마지막 후계자
라고 할 수 있지요."
북리뇌우의 눈이 흠칫 흔들림을 보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금 만박성가라고 하셨소?"
"네."
"놀랍구려. 만박성가의 후계자가 존재했었다니."
북리뇌우는 충격을 입은 듯 나직이 읊조렸다.
만박성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무불통지(天下無不通知)의 가문이다.
그 가문의 인물들이 머릿속에 담고 있는 지혜로 이르자면 가히 하늘을 덮고도 남으리
라는 속설이 나돌 정도이다.
실제로도 만박가의 자손은 대대로 특이한 체질을 타고나 십 세 이전에 천하의 모든 학
문에 통달하며, 어떤 방면으로든 천하제일을 구가할 만한 자질을 타고난다.
따라서 세인들은 만박가의 한 사람을 얻으면 천하를 열 번 얻을 수 있다는 말까지도
스스럼없이 하곤 한다.
그러나 신(神)의 섭리는 공평한 것인지 이 천부적 자질을 가진 만박가의 기재들에게는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특이 체질로 인하여 그들은 공통적으로 삼십 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거나 백치로 변하
고 마는 것이다.
단, 아직 백치로 된 예는 드물고 대개의 기재들이 아깝게도 삼십 세를 바라보는 시점
에서 요절하고 말았다.
실로 극단적인 행(幸)과 불행(不幸)을 동시에 지니고 태어나는 불우한 운명의 소유자
들인 것이다.
때문에 만박성가는 손을 잇지 못하고 대가 끊겨 백 년 전부터는 멸절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한 만박성가의 마지막 후계자가 지금 북리뇌우의 앞에 마주앉아 있는 것이었다.
북리뇌우는 담담하려 애쓰며 말을 이어갔다.
"의부께서는 평소 외인들의 묵룡부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셨다던데, 그건 단주와 연관
이 있는 얘기요?"
추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되겠지요. 사실 저의 진면목은 십방무림통사단 내에서 누구도
알지 못해요."
"거기에는 총단주도 포함되오?"
"네."
북리뇌우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 다시 물었다.
"본인의 앞에는 어째서 나타났소?"
추서운은 눈을 빛내며 침착하게 말했다.
"전임 총사의 유지가 계셨으니까요."
"어떤?"
"그 분과 저는 오랫동안 어떤 일을 함께 계획해 왔었지요. 그 일을 신임 총사와 매듭
지으라고 하셨어요."
"으음! 그랬구려."
북리뇌우는 고개를 끄덕인 후, 부언했다.
"나도 언젠가 그 정도는 제룡(帝龍) 소사부(少師父)로부터 들은 기억이 나오."
"그 계획은 이제 완벽하게 세워져 있어요. 공자에 의해 실행될 일만 남았을 뿐이지요.
추서운은 보다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다.
"거기에 필요한 것들도 모두 준비되어 있어요."
"이 곳에 말이오?"
"네, 그래요."
북리뇌우는 안면을 굳힌 채 허공을 응시했다. 이어 그는 자르듯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
다.
"본인은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는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소."
추서운은 가볍게 눈을 치떴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겐 한 가지 커다란 의문이 있소. 그것을 풀기 전에는 단주가 뭐라 말하든 응하지
않을 생각이오."
"으음......."
추서운은 무엇인가 짐작되는 것이 있는 듯 신음을 흘리더니 쓰디쓴 음성으로 물었다.
"그 의문이란 전임 총사와 관계된 것인가요?"
북리뇌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난 아직도 의부께서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소. 그 때 십
방무림통사단은 대체 무얼 했소? 당연히 그 분을 도왔어야 했거늘......."
"그만! 그 얘긴 하고 싶지 않아요."
추서운이 그의 말을 끊으며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흥분한 탓인지 가뜩이나 창백했던 그녀의 안색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는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분노가 불길처럼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가 쏟아낸 말은 이런 것뿐이었다.
"일이 그리 된 것은...... 제 불찰이었어요. 저로서는 변명하고 싶지도 않고, 변명할
말도 없군요."
그나마 말을 마치자 추서운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더 이상 그 부분에 관해서는 응
대할 의사조차 없다는 듯.
북리뇌우가 그녀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회피하면 다요?"
추서운의 눈길이 그에게로 되돌아왔다.
"누가 회피를 했다는 거죠?"
"후후......."
북리뇌우는 낮은 웃음 뒤로 냉랭하게 말했다.
"우리는 어차피 같은 일을 도모하게 될 터, 피차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소이다. 어서
감추고 있는 바를 말하시오. 자책을 가장해도 내겐 통하지 않을 것이오."
"어...... 없어요, 감추는 건."
잘라 말하면서도 어쩔 수없이 떨려 나오는 추서운의 음성을 들으며 그는 확신할 수 있
었다.
'무엇인가 있긴 있었군!'
그는 한결 담담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본인은 단지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오. 그럴 만한 자격쯤은 있으리라고 사료되오만?"
"모른 척 해 주시길 바랐는데......."
추서운은 비로소 졌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녀에게 북리뇌우는 힐난이라도
하듯 되물었다.
"당신이라면 천붕지통(天崩之痛)을 겪고 나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세할 수 있겠
소?"
"아!"
"내 그 분을 의부라고 말했거니와, 실제로는 그 이상이셨소. 소사부께서도 친형님이나
다름이 없으셨고. 그 분들의 죽음을 나는 절대 묵과할 수 없소."
그의 눈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한 줄기 경련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결코 포기되어
질 수 없는 분노의 빛이었다.
"당신은 정말...... 고집이 세시군요."
추서운은 길게 탄식하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소녀는 어쩌면 처음부터 당신과 그 일을 가장 먼저 상의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북리총사의 뜻과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에 망설였었지요. 그 분은 당신을 아끼시니까요
."
"그 말 뜻은?"
"내막을 알고 나면 당신은 필경 위험에 빠질 겁니다."
북리뇌우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상관없소. 이미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소."
"그렇다면 좋아요. 말하겠어요."
추서운은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는 듯 잠시 침묵한 후에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북리총사께서는 참변을 당하시기 직전에 다섯 마리의 전서구와 특급 전령사자(傳令使
者) 삼 인을 이 곳으로 보내 오셨어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모두 죽은 채로
발견되었어요. 그 분이 타계하신 후에요."
"으음! 그런 일이......."
북리뇌우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추서운은 호흡이 가빠진 듯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을 이어갔다.
"본 십방밀륜단의 특급 전령사자는 어떤 인물과 마주쳐도 쉽게 목숨을 잃지 않아요.
그런데 삼 인 모두가 북리총사의 위급을 알리지도 못하고 감쪽같이 살해당한 것입니다
."
"그 점에 대해 짚이는 바는?"
추서운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있기는 합니다만......."
"어떤 것이오?"
"아직 심증일 따름입니다."
그녀는 짧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응시했다.
밖은 적막한 밤이었다. 차가운 별빛만이 어둠 사이로 무수히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형상화되지 못한 언어들처럼.
거기에 반발하듯 북리뇌우가 말했다.
"단주의 말을 종합해 보건대 십방무림통사단의 내부에 그 흉수가 있는 것 같소만, 아
니오?"
추서운은 말없이 고개만을 끄덕여 보였다.
"그것이었군. 후후후......."
북리뇌우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격정을 대신해 기소를 흘렸다. 그의 낮은 웃음소리에서
는 언뜻 듣기에도 소름이 끼치도록 냉혹한 기운이 물씬 풍겨 나왔다.
"맹세하오만, 흉수는 필히 내 손으로 처단할 것이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군요."
추서운은 탄식에 이어 신중하게 덧붙였다.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자칫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 되면 북
리총사께서는 지하에서도 통곡을 하실 테고, 소녀는 씻지 못할 죄를 저지른 셈이 됩니
다."
"그것은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이구려?"
북리뇌우의 말에 그녀는 정색을 하며 답했다.
"그들의 손에 북리총사마저도 당하셨다는 점을 간과하시면 안됩니다. 섣불리 뽑아 내
기엔 그 뿌리가 너무 깊지요."
"그럼 날더러 어쩌란 말이오?"
"일단은 사태를 관망하도록 하세요. 총단주께서도 이 일을 알고 계시니 조만간 어떤
조치가 있을 겁니다."
이 때였다.
구우우......!
밖에서 한 마리의 전서구가 날아 들어와 추서운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어느
새 침착을 회복한 듯 태연하게 전서구의 발목에 묶여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풀었다.
그것을 펼쳐 읽고 난 후, 그녀는 생긋 웃기까지 했다.
"공자를 위한 연회가 열릴 것이니 대연회청(大宴會廳)으로 오시라는 전갈이군요."
북리뇌우는 별로 내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총단주께서는 번거로운 것을 무척이나 즐기는가 보구려."
추서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총단주께서는 이번 연회를 계기로 당신에게 주요 인물들을 파악하게
하시려는 겁니다."
"그런 복선이 깔려 있다면 당연히 참석을 해야겠군."
북리뇌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추서운이 그에게 두터운 두루마리 하나를 내밀었다.
"그 전에 이것을 보도록 하세요. 단주급(團主級) 이상은 물론 십지(十地) 영수들의 신
상내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알겠소."
북리뇌우는 두루마리를 받아 막바로 펼쳐보았다. 잠깐 동안을 빌어 그것을 주욱 훑어
본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개인의 무공내력과 수준까지도 자세하게 기록을 해 놓았구려. 고맙소,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소이다."
"가능하면 기록들을 외워 두세요. 몸에 지니고 계시면 아무래도 불상사가 따르게 될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리다."
북리뇌우는 몸을 돌리려다가 문득 물었다.
"연회가 끝난 뒤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거처는 어디요?"
"이 곳이에요. 북리총사께서 신임 총사가 오셔도 함께 기거하라고 미리 언질을 주셨더
랬습니다."
"나와 함께 기거를?"
"네."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는 추서운에 비해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떠올라 있었다.
"단주는 그래도 괜찮다고 여기시오?"
"그렇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요?"
그녀는 오히려 북리뇌우의 말이 이상하다는 투였다.
"아...... 아니, 없소."
북리뇌우는 대충 답하고는 황급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문 밖에는 소악이 서서 그를 기
다리고 있었다.
"가자."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오죽림 사이로 사라져 갔다.
추서운은 창문을 통해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의 눈은 강렬한 의지가 내포된 듯 여느 때보다 유난히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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