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연회청은 단(團)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전각으로 호화롭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도처에 현란한 궁등이 밝혀져 불야성(不夜城)을 이
루고 있었으며, 끊임없이 들려오는 주악(奏樂) 소리가 한껏 흥취를 돋구었다.
한마디로 대연회청은 축제 분위기였다.
사람들의 유쾌한 웃음소리와 술잔 부딪치는 음향 등이 전각 밖으로까지 흘러 나와 이
밤의 연회가 얼마나 성대하고 흥겨운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대연회청의 후미(後尾).
그 곳에는 마치 빠짐없이 구색을 갖추기라도 하듯 드넓은 화원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
었다.
월광(月光)이 은가루처럼 쏟아져 내려 밤의 화원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색채로 피
어나고 있었다.
북리뇌우.
그는 언제부터인가 거창한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 전청을 벗어나 총부단주인 소소향과
함께 화원을 거닐고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북리뇌우는 천천히 걷다가 한 송이 백작약화(白芍藥花) 앞에 이르자 발길을 멈추었다.
소소향이 기다렸다는 듯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을 건네 왔다.
"연회는 어땠나요?"
북리뇌우는 별다른 느낌이 없는 덤덤한 어조로 대꾸했다.
"유쾌하게 어울렸어야 했건만 그러지 못했소이다."
소소향이 얼른 그 말을 되받았다.
"그 말씀은 불쾌했다는 뜻인가요?"
"아니, 그렇지는 않았소. 관심이 없었을 뿐이외다."
"당신을 위해서 베풀어진 연회인데도요?"
북리뇌우는 무심한 눈길로 그녀를 힐끗 돌아다보았다.
"내가 언제 원한 적이 있었소?"
"그야......."
소소향이 뭐라 말하려 하자 그는 중도에서 끊었다.
"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난 공허한 말장난이 싫소."
"아!"
그렇게 미인(美人)에게 면박을 준 북리뇌우는 시선을 주었던 백작약 한 송이를 꺾어
들었다.
"언젠가 의부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나오. 십방무림통사단의 인물들은 극
소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나는 지금 그 말씀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
외다."
"본론을 요하시니 저도 한마디하죠."
소소향은 민망해 하는 기색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사실이에요. 그것이 본 십방무림통사단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하구요."
"자고로 벌레 먹은 잎은 제거를 해 버려야 꽃이 제대로 생명을 유지해갈 수 있는 법이
오."
북리뇌우는 정말로 백작약의 꽃잎을 들추어 몇 개인가를 손으로 뜯어냈다. 그 광경을
보며 소소향은 일편 공감을 표하면서도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아요. 자칫 십방무림통사단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요
."
"그냥 내버려두어도 마찬가지요."
"그건 그렇군요."
그녀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은 총사의 직위를 사양하고 싶소."
"혐오스러워서요?"
북리뇌우는 씨익 웃었다.
"그렇듯 단순한 이유를 대는 저의가 뭐요? 총부단주께서는 누구보다 머리가 좋으신 걸
로 알고 있소만."
이번에는 소소향이 풋 하고 웃었다.
"죄송해요. 또 말장난으로 가고 있나 보죠."
"취미요?"
"어쩌면요. 딱딱한 대화의 연장보다는 낫지 않나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아니오."
북리뇌우는 정색을 지으며 자르듯 차갑게 말했다.
"본인은 무엇보다 거추장스럽지 않은 신분으로 일을 매듭짓고 싶소. 또한 반드시 그래
야만 하오."
소소향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몇 개의 꽃잎 정도가 아니라 깊고 왕성하게 뻗어 있는 뿌리를 잘라내야 하는데도요?"
"거센 폭풍우가 휘몰아친다고 가정해 보시오. 그러면 저절로 답이 나올 것이오."
"무모한 발상이에요. 그랬다간 뿌리는 고사하고 나무 전체가 다친다고 말씀드렸을 텐
데요?"
북리뇌우의 안면이 멋대로 씰룩였다.
"그것이 겁나서 총단주와 그대는 지금까지 그 일을 방관만 하고 있었소?"
"그래요. 표면상으로는요."
"난 그럴 수 없소. 이제까지 어떤 일이고 즉각적으로 처리했던 만큼 앞으로도 내 방식
을 고수할 작정이오."
소소향의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생전의 그 분도 그랬어요. 북리총사 말이에요."
"후후...... 난 그 분의 제자이자 아들이오."
아예 말문이 막혀 버린 그녀에게 북리뇌우가 물었다.
"그 일에 의부께서도 관여하고 계셨었소?"
소소향은 쓰게 웃었다.
"관여 정도가 아니라 실은 그 분께서 주도하셨지요."
"정황이 짐작대로 맞아떨어지는군."
"쯧! 좋겠군요. 금후로는 마음껏 치고 달릴 수 있어서."
"맞소."
북리뇌우의 시원스런(?)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탄식처럼 읊조렸다.
"정말이지, 당신은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폭약과도 같은 사람이에요."
"후후, 그 폭약의 도화선에는 불이 붙어 있소."
"못 말리는!"
소소향은 질려 버린 듯 혀를 내둘렀다.
스스스.......
한 인영이 그들에게로 유령처럼 다가온 것은 그 때였다.
그 자는 일신에 묵의(墨衣)를 걸친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북리뇌우 앞에 이른
그는 정중히 군례를 취하며 말했다.
"총단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북리뇌우는 지체없이 대꾸했다.
"본인도 알현을 청하려던 참이외다."
그들 삼 인은 화원을 벗어나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석궁(石宮).
매끄러운 백유석(白油石)으로 축조된 거대한 궁이 울창한 수림 속에 우뚝 서 있었다.
십방무림통사단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그 석궁은 만인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리 만
큼 당당한 위용을 갖추고 있었으며, 모양새도 호화롭기 이를 데 없었다.
북리뇌우와 소소향은 묵의중년인의 안내로 그 앞에 이르러 있었다. 석궁의 전면에는
금빛 찬란한 편액이 걸려 있었다.
<십방무전(十方武殿)>
웅휘한 필체로 그렇게 씌어진 이 곳이 십방무림통사단 총단주의 거처였다. 이르자면
십방무림통사단 내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묵의중년인이 북리뇌우를 향해 말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처음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정중한 태도였다.
"알겠소이다."
북리뇌우의 대답이 있은 후 그는 십방무전의 정문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도 진입
은 허용되지 않았다.
"무슨 용무인가?"
어디선가 얼음장같이 냉막한 음성이 들려와 그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이는 아마 통과
의례인 모양이었다.
묵의중년인은 그 물음에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고했다.
"친위대주(親衛大主)올씨다. 총단주의 명을 받고 총부단주와 신임 총사를 모시고 입궁
하려는 중입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북리뇌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로서는 현상황을 납
득할 수가 없었다.
'이 곳에서는 친위대주라는 자도 저 정도로 권한이 없단 말인가? 입궁하는 데만도 저
토록 굽신거려야 하다니.'
이 때였다.
스스스......!
두 줄기 바람이 스치는 듯하더니 묵의중년인의 앞에는 또 다른 두 개의 묵영(墨影)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그들의 형체는 나타나던 순간부터 뭉클거리는 검은 기류로 뒤덮여 있어 누구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소소향이 북리뇌우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저들은 수천쌍제(守天雙帝)라는 인물들이에요. 저들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총단주
뿐이죠."
"흠, 신비로 무장을 한 위인들이로군."
북리뇌우는 별 관심 없다는 듯 내뱉으며 묵영, 즉 수천쌍제를 응시했다. 소소향이 그
들에 대해 더 설명해 주었다.
"저들은 본단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아요. 오직 총단주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만이
저들의 임무예요."
"쯧! 여러 가지로 재미없군."
소소향은 기가 막히다는 듯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저들을 두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십방무림통사단을 통틀어도 당신 외엔 없을
거예요."
북리뇌우는 짓궂게 씨익 웃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있소? 저들은 듣지도 못했는데."
"끙!"
그녀는 괴상한 신음을 발하고는 내심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 사람은 무슨 짓을 할지 종잡을 수가 없군. 설마 총단주의 면전에서도 이러
지는 못하겠지?'
그것은 그녀가 북리뇌우를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실상 그는 십방무림통사단의 총단주
가 아니라 당금의 황제 앞에서도 마음만 내키면 농을 던질 수 있는 위인이었다.
현재는 필요에 의해 극도로 자제하고 있을 뿐.
스윽!
하나의 묵영이 미끄러지듯 북리뇌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안내역을 맡았던 묵의중년인
도 그 뒤를 따라 다가서고 있었다.
수천쌍제 중 일 인인 묵영은 잠시 북리뇌우를 관찰하는 듯 침묵을 지켰다. 그 바람에
주변 공기는 싸늘하게 냉각되었다.
묵영은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신을 통해 암암리에 무형의 암류를 발출해 냈고, 그 기류는 회오리를 일으키며
주위의 모든 것을 휘감았다.
그로 인해 북리뇌우는 물론 함께 있는 소소향이나 묵의중년인마저도 숨통을 조일 듯한
압박감을 느꼈던 것이다.
결국 그다지 길지도 않았던 묵영의 침묵은 북리뇌우를 위해 마련된 특별한 통과 의례
인 셈이었다.
그러나 북리뇌우는 그것을 아주 간단히 넘기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표정
으로 말문을 열었다.
"장난은 사양하겠소. 본인은 한가한 사람이 아니오."
"장난?"
묵영의 눈이 검은 기류 속에서 번뜩 하는 광망을 폭사했다. 그러한 모습이란 가히 전
율을 유발시키는 것이었다.
그 묵광이 꺼지는 찰나, 묵영은 크게 외쳤다.
"두 분은 남고 공자만 입궁하시오!"
얼음가루가 풀풀 날릴 듯한 그 음성에서는 도무지 인간이 지니게 되는 감정이라곤 한
올도 느낄 수가 없었다.
스스스......!
그들 수천쌍제는 이내 그 곳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소소향이 북리뇌우를 향해 말했다.
"이 곳에서만은 누구를 막론하고 저들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요. 혼자 가시는 도리밖
에 없겠군요."
"당신은 마치 이 곳이 사지(死地)라도 되는 양 말하는구려. 내가 어디 죽으러 가오?"
북리뇌우는 태연하게 말하더니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십방무전의 정문으
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소소향의 눈에서 기이한 출렁임이 일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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