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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mabe no uta 해변의 노래
1. 개요
대한민국의 생물학자·농학자·원예학자. 임호식에 이은 한국인 2호 농학 박사이다.
도쿄 미나토구 태생이며,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했다. 1935년 《배추속(Brassica)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을 통해
유채(B. napus)가 배추(B. campestris)와 양배추(B. oleracea)의 자연교잡종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세계 최초로 종의 합성과 종간
잡종에 관한 개념을 제시(우장춘의 삼각형)했고, 겹잎 페튜니아 육성, 배추와 양파의 일대 잡종을 육성하여 재배가 쉽고 농해 저항성에
강한 작물을 개발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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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禹長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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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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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의 모습
아버지는 을미사변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조선인 우범선이며, 어머니는 일본인 사카이 나카(酒井ナカ)다. 아버지가 1903년에
고영근에게 암살되어 가세가 기울자 6살 때는 고아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후일 가정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어머니를 따라 히로시마로 이사하여 구제중학교까지 마친 후, 박영효의 주선으로 조선총독부에서 학비를 지원받으며 1916년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 실과에 진학하였다. 실과는 학사학위를 받는 과정이 아니라 제국대학에 부설된 구제전문학교 수준의 과정이다. 원래 우장춘은 교토제국대학 공과대학에 진학하고 싶었기 때문에 구제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농학실과에 가야만 학비를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농대에 진학했다고 한다.
1916년 도쿄제대 농학실과에 입학했을 무렵 우장춘은 본인에게 한국의 혈통이 함께 흐른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사건을 겪게 된다. 1918년, 조선의 도지사가 방일하여 조선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일 연설을 하는 강당에서 와세다대학에 다니던 유학생 김철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단상에 뛰어올라 "당장 이따위 연설을 멈춰라! 네놈이 그러고도 조선인이냐!"라고 일갈하며 그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대학 신입생이던 우장춘은 이 사건을 계기로 김철수를 수시로 만나게 되는데, 처음에 김철수는 우장춘이 도지사의 연설 내용과 멱살잡이 사건에 대해 일본어로 묻자 "조선어도 모르는 녀석이 무슨 자격으로 여기 왔냐."고 다소 날선 반응을 보였다가 아버지가 조선인이라는
우장춘의 말을 듣고 납득하고 아버지의 성함을 물었다. 우범선이란 이름을 들은 김철수는 우장춘에게 '당신의 부친 우범선은 역적이고
매국노요, 당신이 아버지가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당신이 배운 것으로 봉사하며 살아야 하고 절대로
당신의 조선인의 성을 갈지 마시오.'라고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 준다. 그 이후 김철수와 우장춘 박사는 우장춘 박사가 먼저 작고할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하고 지냈다고 한다. 이후 1920년에 졸업하였고 농림성(현 농림수산성. 한국의 농림축산식품부에 상응하는 행정 기관.) 산하 연구소에 취직하여 나팔꽃의 유전에 대해 연구하였다.
1924년에 일본인 와타나베 코하루(渡辺小春)와 결혼했다. 비하인드 스토리에 따르면, 모친 사카이 나카의 친구가 1917년 즈음부터
똑똑한 우장춘에게 자기 아들의 가정교사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여 우장춘이 그 집에서 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그 어머니 친구의 고종 사촌동생이 코하루였다. 두 사람은 집에서 당연히 자주 만났었을 테고, 결국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그런데 코하루 집안의 남자 어른들이
우장춘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결국 코하루는 집안과 의절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코하루는 3년 후, 망명 조선인을 지원하는 일본인의 명목상 양녀가 되어 스나가로 성씨를 바꾸고 우장춘은 그 일본인의
데릴사위로서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는 이름을 얻었다. 자녀들도 일본인으로 키우기로 하여 스나가 성을 사용했으나, 우장춘
본인은 계속 우씨 성을 사용했다. 그의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주의 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단 이름은 그가 쓴 영어 논문에도
저자가 '우 나가하루(Nagaharu U)'로 나와 있어 서양에서는 다들 일본인으로 알고 있다.
1936년에는 아래에 언급하는 과학계에서 호평을 받은 논문을 발표로 도쿄제국대학에서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그의 공식적인 위상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무려 16년 동안 기수(技手)라는 하위직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변적인
연구주제로 간주된 원예 분야만을 맡고 있을 뿐이었다. 1937년에 농사시험장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이후 곧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타키이 종묘 회사에 연구원으로 입사하여 그곳에서 십자화과 식물에 대한 연구에 진력하다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퇴사했으며 이후 4년 반을 실업자로 지내다가 1947년 한국에서 경남도 농림국장 김종의 주도로 일어난 우장춘 박사 환국 운동이 벌어져 1950년에 귀국하였다. 당시의 우장춘은 한국을 확고히 조국으로 생각한 것도 아니었기에 당연히 애국심이 투철한 상태가 아니었고, 그의 가족이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한국과 일본의 경계인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장춘 박사의 환국에는 우장춘
박사 환국 추진 위원회를 필두로 한 정부의 적극적인 우장춘에 대한 지원 약속이 꽤나 주요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우장춘 환국 추진
위원회가 결성된 이후, 이들은 일본인 소유의 농지를 불하받아 연구 부지를 마련하고 1948년에는 정부 지원을 받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설립을 추진해 1949년 마침내 우장춘이 학수고대하던 연구소가 출범했다. 이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의 후신이 지금의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다.
이 때 일본에서는 우장춘을 보내기가 아쉬워서 여러 수를 동원했으며 그를 감옥에 가두려는 꼼수까지 부리며 귀국을 말렸지만 우장춘은 한 발짝 앞서 자기 발로 조선인 강제수용소에 들어가 한국 정부에서 보내 준 한국인 신분증을 제시하면서 송환선에 탑승하는 방식으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왜 대한민국이 우장춘을 그토록 원했냐 하면, 독립 후 대한민국은 농업 생산력이 부족해 우량 종자의 개발과
보급이 필수적이었고, 우장춘과 같은 농학 인재는 대단히 귀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100만 엔을 이적비로 우장춘에게 주었다. 2024년 현재 물가로는 20~30억 원 정도의 가치다. 우장춘은 이 돈을
한국에 뿌릴 우량 종자를 사는데 다 써 버렸다. 이후 한국에서 사망할 때까지 9년간 지내며, 6.25 전쟁 중엔 대한민국 해군 정훈장교로
임관해 소령으로 전역하기도 했다. 한국의 육종학과 농업의 발전에 기틀을 다졌다. 말이야 대우를 해 줬다고 하지만 열악한 한국 사정상
그야말로 자리만 내준 거고,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나마 우장춘이 농림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농림부가 돈이 없다며 거절하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가서 하소연했더니 대통령이 농림부 장관을 불러 질책했기에 고생은 심해도 다행히 대우마저 엉망은 아니었다.
다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받고 일본으로 가기 위한 여권을 마련하기 위해 고생하면서 이승만에게도 발급을 도와달라고
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끝내 받지 못하고 임종 소식을 들어야 했던 악연도 있는데, 우 박사가 일본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여권을
발급해 주지 못하도록 대통령이 일부러 막은 것이 분명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결국 우 박사는 한국에서 상복을 입고 장례식도 어머니 시신 없이 한국에서 빈소를 차려 치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들어온 조의금으로 우물을 파고 여기에 어머니의 자애로운 젖이라는 뜻의
'자유천(慈乳泉)'이라 이름짓고 돌에 새겨진 글씨도 친필로 썼다.
대통령에 의해 농림부장관에 내정되었으나 거절하였고, 농가에 수익이 큰 벼와 감자, 무와 배추 등을 개량하기도 했다. 또한 제주도,
거제도, 욕지도 등 남부 지역에서의 귤 재배 가능성을 시험하기도 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실제로 결과가 뛰어나 현재 감귤 산업이 바로
우장춘의 공로다.
1959년, 국립의료원에 입원하여 십이지궤양 수술 후 병세가 악화되어 8월 10일에 사망했다. 사망 몇 시간 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받았다. 병상의 우장춘 박사에게 문화포장 수여 사실과 함께 포장이 전달되자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구나! 그런데 조금만 더
일찍 주지..."라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정부수립 이래 최초로 사회장이 거행된 한국인이었다.
우장춘의 헌신으로 대한민국에 현대 농업기술이 시작됐고 국민들은 기아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우장춘이
손을 댄 우량 종자들은 외국 것을 능가하는 엄청난 품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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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장춘 박사 묘는 수원 여기산에 있다. 여기산 일대는 야생동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며 일반인 출입이 금지됐다. 이곳을 관리하는 수원시에 방문 전 전화를 하면 출입가능하지만 이를 모르고 방문했다가 발걸음을 옮기는 일이 종종 있다.[사진=김지영 기자]
그의 묘소는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구)농촌진흥청 뒷편에 있다.
3. 연구 업적
3.1. 종의 합성 이론
우장춘이 이룬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1935년 '배추속(Brassica)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라는 박사 학위 청구 논문을 통해
'종의 합성'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먼저 배추속 식물의 염색체를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얻은 가설을 세우고 배추와 양배추의 교잡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유채를 실험적으로 만들고, 그 과정을 유전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그 동안은 카더라였던 종간 잡종의 매커니즘과
종의 합성이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밝혔다. 주요 배춧과 작물의 게놈 관계도가 삼각형의 관계를 이룬다고 하여 우장춘의 삼각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생물체에서 다른 종 사이의 교잡은 교잡일 뿐이고 새로운 종이 될 수 없다는 그간의 과학계의 정설을 깨트리는
결과를 낳았으며 식물은 돌연변이가 아닌 종간 교잡을 통해서도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결국 육종학이나 식물학에서는 물론, 생물학 자체에서도 '종의 분화는 자연 선택만의 결과이다.'였던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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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의 삼각형(Triangle of U)
우장춘의 삼각형에 꼭지점에 있는 식물들을 교잡하면 삼각형 변에 있는 다른 식물이 탄생한다는 이론으로, Brassica napus(유채)를
B. rapa(배추류)와 B. oleracea(양배추류)의 교잡을 통해 만들어냄으로 새로운 종의 탄생은 기존의 종의 교잡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다. 우장춘의 연구논문은 1935년 <일본 식물학 잡지>에 게재되었으며, 이듬해 이 연구성과를 주논문으로 하고 그간 발표한
여러 편의 논문을 부논문으로 하여 마침내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당 논문은 아직까지도 십자화과 식물(배추, 유채, 양배추)의 연구 논문이면 필수적으로 인용되는 논문이다. 한국인 또는 한국계
이름으로 알려진 과학 이론으로는 이휘소 박사의 이론과 쌍벽을 이루고, 아직까지 국외 과학 교과서에 이론의 창시자로 실린 사실상
유일무이한 한국인이 바로 우장춘이다.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노벨생리학·의학상도 탈 수 있었을 지 모른다.
3.2. 겹페튜니아 육성
그가 본래 농림성 산하 연구소의 농장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연구하던 주제는 페튜니아였다. 당시 관상용으로 인기가 높아지고 있던
페튜니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는데 홑페튜니아는 암술, 수술이 모두 정상인 반면, 겹페튜니아는 암술이 퇴화되어 종자 번식이
안 되고, 꺾꽃이 등과 같은 방법으로 번식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은 모두 각각의 단점이 존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우장춘은 페튜니아의 교잡 연구를 통해 종자로 번식하는 절대 우성의 완전 겹꽃이 피는 종자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겹페튜니아 육성을 통해
인공적으로 화훼 품종을 만들 수 있음을 처음으로 증명한 연구였으며, 당시 겹페튜니아 종자의 가격이 같은 양의 백금의 가격과 같을
정도로 비싼 상황이었기 때문에 산업적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지닌 연구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사카타종묘사는 겹페튜니아 신형
종자를 미국으로 수출하면서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훌륭한 연구 성과를 거두었지만 1930년 농림성 산하 연구소
농장의 화재로 인해 농장에 두고 온 논문까지 불타는 바람에 모든 실험자료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당시의 애달픈 심정을
'세차게 타오르는 불 속으로 뛰어들어갈려고까지 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주임으로 맡고 있었던 고노스 농장의
유채로 눈을 돌린 것이다.
3.3. 육종 연구
환국 이후의 우장춘은 오히려 학문적 연구가 아닌 실용적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장춘 박사 본인도 논문 발표보다는 우량 품종의
개발에 집중했다. 우선 1950년부터 1958년까지 다년에 걸쳐 우리나라의 기존 품종으로부터 우수한 종자를 찾아내 자급자족할 수 있게끔 하는데 집중했으며, 1955년 이후에는 서로 다른 품종들 사이의 교잡 시험을 통해 우량 일대 잡종 종자를 개발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일본산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한 결과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의 한국 토양에 맞는 배추를 개발하였고, 무, 고추, 양파 등과 같은
작물의 일대 잡종 품종이 1957년 첫 성공을 시작으로 1960년대 들어 다른 작물들 역시 잇달아 개발에 성공했다. 대표적으로
한여름철에도 평지에서 재배가 가능하게 된 평지여름무, 최초의 중간 잡종에 의한 다다기성 품종인 애호박, 당도가 높은 참외 신품종
금싸라기, 고랭지 여름배추 등의 우리나라 채소 산업의 전기를 마련한 여러 품종을 육성하는데 성공했다. 그 외에도 제주도에 감귤 농업을 제안하였다. 우장춘 박사는 피폐해진 한국 국토에 원예와 농업을 발전시켰고, 그 당시 열악했던 한국 농학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맡았다.
4. 씨 없는 수박 관련 오해
한국 내 대중들 사이에서는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우장춘 본인은 생전 이러한 주장을 한 사실이 없으나, 그의 사후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외부와의 소통 및 교류가 차단된 상태에서
그의 업적을 조명하며 '우장춘이 씨 없는 수박의 개발자'라는 유언비어가 혼입되었다. 1959년 정부에서 제작한 대한뉴스 227호
〈우장춘 박사 서거〉에서도 우장춘이 씨 없는 수박을 만든 것으로 소개된 바 있으며, 이후 1960년대에서 90년대, 더 나아가 극히
최근까지도 여러 서적, 방송 및 언론에서 진위 여부를 가리지 않은 채 서로를 잘못 인용하면서 오랜 시간 낭설이 재생산되었다.
무리하게 위인과 신화를 발굴하려던 한국 사회의 내셔널리즘 역시 이러한 낭설이 무분별하게 유포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일각에서는
'우장춘의 씨없는 수박'이 '과학의 권능을 보여주는 기적의 현현이자 한국 과학기술의 세계성을 증거하는 국가신화의 상징'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실제로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교토대학 명예교수 키하라 히토시(木原均) 박사이며, 우장춘은 일반 국민들에게 육종학과
농업기술을 설명하고 개량종자의 생산성 향상과 그것이 초래할 식량증산을 쉽게 소개하기 위해 씨 없는 수박과 그 종자를 최초로
한국으로 가져와 "새로운 농업기술을 배운다면 이렇게 신기한 수박도 만들 수 있습니다" 라고 가르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한 게 전부이다. 당대 생명공학에 생소하고 일반적인 씨가 있는 수박만을 봐왔던 한국 청중들로선 상당한 충격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일화가
이래저래 알려지는 과정에서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우장춘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 아니라, '씨 없는 수박을 한국에 최초로 들여와 보급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으며, 상술한 오해들은 인터넷이 충분히 보급된 2000년대 이후에서야 해소되기 시작하였다.
5. 수훈
부산시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포장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사후 추서)
6. 일화
우장춘이 사람들의 큰 환영을 받으며 부산항으로 환국했던 당시에 김병규 위원장은 "우리는 우장춘을 대마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며
그의 귀환을 뜨겁게 반겼으며, 이승만 대통령도 "돌아와 주셔서 고맙소"라는 말을 전했다. 이에 대해 우장춘은 "그동안 어머니의 나라
일본을 위해 일본인 못지않게 일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이 나라에 뼈를 묻겠다"며 귀환에
임하는 자세를 밝혔다.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그의 정체성이 바뀌게 되는 시점이자, 우장춘의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되는 순간이다.
그가 생애 막바지를 한국에서 보냈던 시기는 이승만 정부 시절이기도 했는데, 정치인들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도리어 냉대를
받기까지 했다. 일단 출신부터가 한일 혼혈인데다 그 아버지는 상기한 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우범선이었다. 게다가 일본에 오랜 시간
있었던 데다, 본인이 언어를 습득하는 것보다 연구를 중요시했기에 한국어가 간단한 읽기나 듣기만 가능했을 정도로 서툴렀고, 이 때문에 단지 한국어를 못 한다고 무시하는 정치인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그를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감싸준 사람이 이승만이었다. 일례로 그에게 농림부 장관직을 제의하거나, 상기한 이유로 그를 무시하며 연구 예산을 제공하지 않으려던 농림부 장관에게, "자네는 젊은데 벌써부터
노망이 났나?"라고 호통을 치고 우장춘에게 예산을 내어주게 한 적도 있다. 반면 학생들 사이에서는 한국사 최초의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점 때문에 우장춘의 추종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인근의 여학생들이 연구소 앞에서 대기하다가 그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때 그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는 일화도 있다.
우장춘의 연구소에는 우장춘의 명성을 듣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보수와 근무조건이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일하고 싶었던 사람이 많았다. 그는 차별화된 전문성을 지닌 연구조직을 효과적으로 구성하고 연구 시스템의 세대 전승을 위해 노력하였다.
연구소의 제자들에게 "눈빛이 식물의 잎을 뚫어 그 뒤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연구자는 연구 대상으로 삼은
사물의 상태를 한눈에 꿰뚫어 그 내면까지도 훤히 들여다볼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하면서
오직 후학 양성과 육종 연구에만 몰두한 우장춘은 연구소 책임자임에도 항상 작업복과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생활하여 '고무신 박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특유의 우직한 성품으로 표정이 상당히 굳어 있어서 별명이 불독이었다. 게다가 처음 보았을 때는 다소 오만하게 비춰질 정도로 과묵한
사람이었다. 대신 그런만큼 공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성격이어서 주변인들에게 늘 호평을 받았다. 가령, 자신의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연구원들 일부가 6.25 전쟁 발발 후 입대 명령을 받자 직접 윗선에 연락해 그들의 군면제를 청탁해서 성사시켰고 그는 해군 정훈장교
신분을 부여받아 연구원들을 관리했다. 그렇게 우장춘의 도움으로 위험한 전장에 가지 않아도 된 연구원들은 대신 그를 따라 밤낮없이
일해야 했다. 문제는 우장춘이 힘들게 연구원들의 징병을 막았더니 이 소식을 들은 정치인이나 기타 유력자들이 자기 아들에게도 똑같은 청탁을 해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에서 살던 이복누나까지 조카를 데려와서 군면제 청탁을 부탁하자 발끈해서
"나라를 위해 쓸 수 있는 재능이 없으면 그냥 군대 보내십시오!"라는 말로 일관하며 쫓아냈다.
한국에서는 '현지처'를 두고 살았다는 말이 떠돌지만, 와전이다. 남편과 사별한 어느 중년 여인이 우장춘을 존경하여 우렁각시 노릇을
했고, 우장춘이 일본에 있는 가족들 때문에 재혼을 거부했는데도 계속 그의 살림을 도와주었다. 그래서 이 소문이 바다 건너 아내에게까지 전해지자 아내는 아이들이 독립하면 한국에 와서 같이 살려고 했던 생각을 접었고, 남편의 위독 소식을 듣고 나서야 한국에 와서 임종을
지켰다. 이때 간호사로 위장해서 우장춘과 면회했는데, 한 눈에 알아보았고, 그간의 묵은 오해를 풀 수 있었다. 그냥 살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였을 뿐인데 일본에서는 현지처로 와전되어버렸다고 한다.
사망하기 3일 전에 병상에서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 때 한 말은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해
주는구먼. 그런데 조금만 더 일찍 주지."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장춘은 반역자인 우범선의 아들이고 신생 독립국가였던 상황에서
전쟁까지 치른 대한민국의 어려운 사정상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뒤늦게나마 우장춘의 공로가 인정되어 훈장을 수여받았으나 죽음을
목전에 두었으니 우장춘의 심정은 착잡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애국자로 살아간 인물. 일본에서 성을 바꾸거나 하며 조금만 굽히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을 모조리
버리고 대한민국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일본 정부는 우장춘을 대마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는 설이 돌 정도로 우장춘을 보내기
싫어했다. 만약 자존심을 굽히고 일본에서 생활했으면 상당한 지원을 등에 업고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의 개인 연구에 투자해 지금보다
학술적으로 개인 경력에서도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적으로는 가족과 계속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걸 포기한 것.
게다가 순수 한국인도 아닌 한일 혼혈이고, 일본 태생이기 때문에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우장춘의 어머니가 일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장춘을 조선인으로 키운 덕택. 심지어 도쿄제대도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 유학생 신분으로 진학했다. 이승만이 그를
농림부장관에까지 내정했는데도 과학자로서 묵묵히 일했다. 우장춘이 존경받는 이유에는 이렇게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고 오로지
과학자로서의 연구에만 몰두한 것도 큰 지분을 차지한다.
의외의 취미로 그는 바둑, 화투, 마작, 장기 등의 게임을 아주 좋아했다. 화투에 몰두한 나머지 일본의 코이코이를 변형한 고스톱으로
만들어 한국에 소개한 장본인이다. 단순히 그걸 유희로만 즐긴 게 아니라 바둑과 화투 등에서 나타나는 수학적 확률] 연구에도 관심이
있어, 일본에 있던 시절에는 화투 족보의 확률을 연구하고 계산한 책을 내려다가 농업시험장 상관 데라오 박사한테 혼났던 일화도 있을
정도였다.
반면 술은 정말 못 마셨다. 우장춘이 아직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에 어머니 사카이 나카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중히 여겨서 하루는 아들에게 강제로 술을 따라주어서 마시게 했는데, 어머니와 강제로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한두 잔 마시고는 그대로 뻗어버린 탓에
어머니가 대노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럼에도 대인관계에 힘쓰도록 충고한 어머니의 말을 잊지 않아서, 그가 한국에 정착하고나서는
최소 한 번이라도 서로 인사라도 하라는 의미로서 연구소에서도 아침 조회는 무조건 참석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7. 기타
실제 연구 업적이 대단함에도 불구하고 씨 없는 수박의 창시자라는 와전된 사실만 조명되어 전해지는 데다가, 그에 대한 내용은 고작 책
모퉁이에 짧게 나오는 수준. 오히려 일본에서 우장춘의 연대기를 더 열심히 공부하고 그에 대한 책을 내는 형편이다. 사실 우장춘의 모든
학문적 업적은 일본에서 쌓은 것이며, 한국에서 보낸 마지막 10년 동안은 새로운 학문적 업적 쌓기를 포기하고 해방 후 혼란상과 전쟁을
겪어 황폐해진 한국의 농업 발전을 위한 실험과 육종 사업에 치중했다. 일본에서 그가 굳이 한국인이라고 밝히지 않는 것도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일이다.
유언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에서 가져온 벼를 손에 쥔 채로 말한 "이 벼! 끝을 보지 못하고 내가 죽어야 하다니..."였다. 당시 박사는 한 번
심어 두 번 거두는 이기작이 가능한 벼 품종을 개발하고 있었다. 원산지에선 충분히 가능하지만 최소한 당시 한국 기후에선 겨울의 존재로 인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며,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는 2010년대에 들어 전라남도 등지에서 이 방법이 시범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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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 박사 묘가 농촌진흥청이 위치했던 수원 여기산에 있다.[사진=김지영 기자]
수원시에 있는 농촌진흥청 산하 연구소인 원예시험장 한 가운데에 흉상이 있다. 거기에 속한 여기산(麗岐山)에는 우 박사의 묘소가 있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우장춘 박사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그 앞 길의 도로명도 우장춘로이다. 환국 후 근무지인
부산원예고등학교(현 부산전자공업고등학교)를 기념하는 것이어서 그 동네에 우장춘 이름이 남은 것이다.
그의 넷째 사위는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3대 경영인 중 하나로 꼽히는 이나모리 가즈오(1932~2022)이다. 이나모리는 전자기기,
세라믹 제품 등을 생산하는 대기업 교세라의 창업주이고, 일본항공(JAL)이 파산했을 당시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부탁으로 회장을 맡아 경영을 정상화시키는 등 전설적인 경영인으로 추앙받는다. 프로축구단 교토 상가 FC의 회장직도 역임했으며, 제82회 천황배에서
박지성이 팀을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끈 직후 유럽(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하게 되자 남긴 "어딜 가든 응원하겠지만 언젠가 반드시
돌아와 달라. 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와도 받아주겠다."라는 말이 축구팬들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다.
농학자 한상기가 우장춘을 멘토로 삼아 육종학 연구를 하기로 다짐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 나왔던 어린이용 세계 과학자 위인 전집에 우장춘이 들어가 있었다. 1990년대 이전 당시의 어린이 도서, 세계 위인전은
대부분이 일본에서 나온 것을 중역하여 해적판으로 낸 것이었는데, 크게 알려지지 않았고 한국 교과서에도 제대로 안 나온 우장춘은
일본 출신이어서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우범선에 대해서도 명성황후 시해의 주동자라는 얘기 없이 "망명 정객"이라고 간단하게 한 줄만 나온다.
1993년 제작된 초롱이의 옛날여행이란 애니메이션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목소리 연기는 성우 설영범이 맡았으며 근현대의
인물이다 보니 고증은 매우 훌륭한 편. 다만, 주 시청자가 저학년 어린이들이다 보니 아버지가 조선인이고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것까지만 언급하고 아버지 우범선이 을미사변의 주동자였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KAIST 본원 정문 앞, 갑천을 가로지르는 2016년 준공된 카이스트교에 역대 과학자 흉상들 중 우장춘의 흉상을 볼 수 있다.
네바다 대학교 임원철 교수가 2022년에 우장춘의 삼각형 중 마지막 유채인 이디오피아 유채의 유전체 지도를 완성하였다.
이로써 우장춘의 삼각형 내에 있는 모든 유채의 유전체 지도가 완성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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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중매체에서
이말년 시리즈의 에피소드 8 과일의 꿈에 의사양반 포지션으로 나왔다(...).
은근히 잡다한 지식에 우장춘 박사의 일생이 나왔다.
모바일 게임 세계 정복 2:나라 키우기에서 위대한 과학자로 나오며 농지에서 얻는 식량을 5만큼 늘려준다.
8.1. 다큐멘터리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매국노가 낳은 애국자
[꼬꼬무 66회 요약] 진화론을 수정한 조선인 천재 과학자 우장춘, 그가 안정된 삶 대신 조국 위한 희생을 택한 이유는?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SBS방송)
9. 둘러보기
[1] 박사 학위 논문: 유채(Brassica Napus)의 합성과 특수수정현상에 따른 배추속(Brassica)에 대한 게놈 분석(あぶらな属に於ける「ゲノム」分析、附「ナプス」の合成と特殊授精現象) (1936)
[2] 같은 시기 홋카이도제국대학에서 농학 박사 학위를 받은 임호식보다 논문 통과는 빨랐으나, 학위 수여 날짜가 밀려 농학 박사 1호
타이틀을 양보했다고 한다. 임호식 박사의 학위 수여일은 1936년 4월 14일이고 우장춘 박사의 학위 수여일은 1936년 5월 4일이다.
[3] 우범선이 을미사변에 가담한 걸 평소 고깝게 여겨 우범선을 죽이려고 술자리를 마련해 방심한 틈에 죽였다. 하지만 고영근이 우범선을 암살한 진짜 이유에 관해선 논란이 있다.
[4] 중학생 시절의 우장춘은 인문계열 과목, 특히 국사(물론 여기서 국사는 일본사를 뜻한다.)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못 봤으나 이공 계열인 수학, 과학은 수준급으로 엄청 잘했었다고 한다.
[5] 1919년 전국 대학의 단과대학이 학부로 개편됨에 따라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실과가 되었고, 1935년 도쿄제국대학에서 독립하여
도쿄고등농림학교가 되었다. 1944년 도쿄농림전문학교로 개칭하고, 1949년 신학제에 따라 도쿄농공대학 농학부가 되었다.
[6] 공과대학이 공학부로 바뀐 것 역시 1919년 단과대학이 학부로 일괄 개편되고 나서다.
[7] 당시 일본에서는 중등학교(구제중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 예과(예비문), 혹은 대학 예과에
상응하는 구제고등학교를 먼저 졸업해야 했다. 즉 구제고등학교 재학생은 예비 대학생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언제나 고등학교 입시가
입시생과 부모들의 관심사였고 재학생들의 프라이드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고 전해진다. 구제고등학교가 내지에만 있었기 때문에
구제고등학교에 못 간 조선인들은 학제상 동급(이지만 격은 비교적 낮게 취급된) 구제전문학교밖에 선지가 없었다. 우 박사가 입학한
농학실과는 본과보다 한 단계 낮은 전문학교에 상응하는 곳이라 중졸도 갈 수 있었다. 물론 실과나 전문학교 졸업 후에는 제국대학 본과에 편입할 수 있었다.
[8] 공대로 갔다면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공밀레로 전쟁 무기 개발에 투입됐을지도 모르니 어쩌면 좋은 일인 셈이었다. 여담으로 이런
식으로 공과 쪽으로 간 사람들 중 한 명이 이부카 마사루 소니 창업주다. 또 다른 창업주 모리타 아키오도 이공계열이긴 했지만 공학부는
아니고 이학부 물리학과였다.
[9] 우장춘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일본인 편모슬하에서 자랐기 때문에 조선어를 할 줄 몰랐다. 그래서 도지사의 조선어 연설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에 도지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학생들의 표정이 굳어지고 김철수가 멱살까지 잡았는지 정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10] 김철수는 좌익 계열이었던 만큼 이후 인생이 평탄치는 못했다. 그래도 이복동생 김창수가 자유당 출신으로서 국회의원으로 지냈고, 이승만 대통령과의 인연 덕에 목숨은 건지고 1986년, 93세까지 살았다.
[11] 한자를 보면 알겠지만 한자 이름은 그대로 '장춘'이다. 이를 일본어로 읽어 長春(ながはる)라고 쓴 것.
[12] 우장춘 박사가 이중적인 의식을 가졌다기보다는 당시 조선은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당해서 존재하지 않는 국가였고, 그러니 국제
학계에서 활동하는 것이 일본 학술계를 통할 수밖에 없는 데다가 서양인들에게는 '장춘'이라는 조선식 이름보다 '나가하루'라는 일본식
이름이 더 익숙하고 읽고 발음하기도 용이했을 것이라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13] 일본은 독일과 더불어 박사 학위 취득이 매우 까다로운 나라다. 특히 문과 계열은 한때 도쿄대학 교수진 중에도 박사 학위를 보유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꼽던 시절이 있었을 정도라고. 그래서 박사 과정만 수료하고 다른 곳에서 일하는 중에 논문 등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여러 문제점이 발생하여 문부과학성에서 1992년부터 원활한 박사학위 부여를 촉진하고 있다. 하지만
2021년에도 博士課程満期退学(박사과정만기퇴학) 혹은 単位取得満期退学(단위취득만기퇴학)인 대학교수들이 심심찮게 보일
정도였다.
[14] 그 이유는 그가 조선인 성씨인 우를 고집해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연구소에서도 그가 놀라운 성과를 내고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자 그에게 조선 성을 버리는 조건으로 승진시켜주겠다고 회유를 했으나 우 박사가 그걸 거부하여
오랜 시간 승진하지 못했다.
[15] 이러한 배경 때문에 우장춘의 환국 동기를 그의 사상이 민족과 국경을 넘어 인류의 복지를 추구한 '과학 휴머니즘'이었기 때문이라고 바라보는 관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연구가 가능한 국가의 지원을 따라서 내셔널리티와 무관한 동기로 그의 환국을 이해한다.
[16] 말 그대로 당시 불법 체류자가 된 한국인들을 모았다가 송환하는 곳. 쓰시마에 있었다.
[17]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일부 수정하게 하는 업적 정도면 세계적인 박사 수준이다. 물론 우범선의 아들이란 찝찝한 핏줄 탓인지 그룰
불러오냐 마냐를 두고는 국회에서 진통이 있었다. 결국 우장춘 박사에게 편지를 보내서 입국할 것인가 말 건가 물어보기로 하는 걸로 결론냈다지만 사실상 부결된 거라고 봐도 별반 차이가 없다. 대한민국으로서는 당시 우장춘이 한반도가 아닌, 일본에 있던 게 신의 한 수
였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당시 한반도에 있던 인재들 상당수가 월북했는데 비날론을 발명한 리승기 역시도 한국전쟁 중인 1950년에
월북했다. 이는 당시 북한이 남한보다도 더 교육이나 연구 여건이 좋았기 때문인데다 북한 역시도 이런 인재 영입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장춘은 일본에 있으니, 반미 반일을 국시로 삼는 북한에서는 부르고 싶었다 쳐도 껄끄러워서 부르기 곤란한 처지고
남한에서는 부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18] 말이 돈이 없다는 거지 사실은 매국노의 아들이라는 주홍글씨와 한국어도 제대로 못 쓴다는 이유로 우장춘을 일방적으로 개무시한
것에 가까웠다.
[19] 나중에 사정을 들은 이승만이 당시 농림부 장관을 불러 "자네는 아직 젊은데 벌써부터 노망이 났나?"며 대놓고 쪼인트를 까고
우장춘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라고 지시한 일화는 유명하다.
[20] 대한민국과 일본의 수교는 1965년 6월 22일에 이루어졌고 당시에는 외교 관계가 없어서 양국 국민들은 웬만한 이유로는 왕래가
정말 어려웠다. 매일같이 공무원들을 찾아가 여권을 내어 달라고 촉구해도 미수교국에는 가실 수가 없다는 상투적인 대답만 돌아오는
허사 끝에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기대해 볼 대상이었던 것이다.
[21] 그리고 대한민국도 인재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앞 주석에서 말했듯 한국전쟁을 통해 리승기 박사가 월북했는데 그만 월북한 게
아니고 여러 인재들이 여건이 더 좋은 북한을 향해 월북했다. 이러니 남아있는 인재를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22] 길쭉했던 토종 배추를 지금과 같이 통통하게 품종개량을 했던것도 우장춘 박사의 업적이었다. 이외에도 아예 뿌리는 무이고 열매는 배추인 형태로 개량하기도 했다. 이름은 '무추'.
[23] 어린이를 위한 위인전에서는 무를 개량한 것과 관해 재미있는 얘기가 실려있다. 한 연구원이 들려주기를, 울산의 어떤 선비가 벼슬을 얻어 서울로 올라갈 적에 고향에서 먹던 무 맛이 기가 막혀 하인을 보내 그 무를 가져오게 했다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들은 우장춘 박사는 그 무를 찾아와달라고 부탁하였고 연구원이야 그저 옛날 이야기일 뿐이라고 응대했지만 우장춘 박사는 그런 얘기가 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며 고집을 부려 해당 지역의 무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무 맛이 실제로 꽤 괜찮아서 이것을 바탕으로 개량에 나섰다고 한다.
[24] 신경통을 이겨내기 위해 진통제를 자주 많이 복용한 것이 해가 되었다. 사실 전쟁중인 1952년 전쟁통에 그 역시도 부상을 입었고,
그것이 그의 커리어를 발목잡게 된다.
[25] 현재는 전주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했으며, 구 농촌진흥청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산하 선거연수원으로 사용 중이다.
[26] 과거에 많이 사용했던 노새 등에서도 볼 수 있듯 그 전에도 잡종을 많이 사용하긴 했지만, 어떤 원리인지 규명하지는 못했다.
[27] 네바다 대학교 임원철 교수팀이 Brassica carinata 유전체 완성 후 <The Plant Cell> 에 게재 The final piece of the Triangle of U: Evolution of the tetraploid Brassica carinata genome('우장춘의 삼각형'의 마지막 조각: 사배체 Brassica carinata 유전체의 진화.)
[28] 우장춘은 대학원 재학 중에 곧바로 학위를 받은 '과정박사'가 아닌 외부에서 자체적으로 연구를 하고 학교 측에 논문을 제출해 심사를 통과하고 학위를 받은 '논문박사'였기 때문에 주논문 외에 여러 부논문이 필수였다. 과정박사는 해당 대학원에 소속을 둔 대학원생이
재학연한 내에 그 대학에서 다이렉트로 받는 것이라서 학위논문 1편만 쓰면 되지만 논문박사는 외부에서 개인적으로 연구 활동을 하던
학자, 혹은 뒤늦게 배움의 목마름을 느낀 만학도 등이 혼자서 논문을 쓰고 심사만 학교에서 받고 받는 학위라서 더 많은 논문 실적을
요구한다. 물론 학위의 격은 과정박사가 훨씬 높게 쳐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구제박사'라는 이름의 논문박사 제도가 1970년대 중반에 이미 폐지된 지 오래이나 일본에서는 '사회인박사'라는 이름으로 아직 존속 중이다.
[29] 이건 아주 쉬운 예이다. 예를 들면 귤속의 잡종 계통 분류는 정말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다만 우장춘이 좀 더 오래 살아 노벨상을
수상했더라도 공식적으로는 출생지를 기준으로 일본 출신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므로, 국내에서는 손기정이 IOC에는 일본 국적의
기테이 손으로 기록된 것과 비슷한 불만을 느낄 것이다. 사망 후에는 한국이 추가되었겠지만. 물론 실현되었다면 국내에서는 손기정을
한국 선수로 예우한 것처럼 우장춘을 사실상 한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로 예우하였을 것이다. 반대 사례로 미국인 찰스 피더슨의 경우
부산 태생이라 한국 수상자로 기록되어있지만 그 어떤 한국인도 피더슨을 한국 노벨상 수상자로 간주하지 않고 한국인 노벨상 하면
김대중과 한강 두 명이라 답한다.
[30] 나팔꽃이라는 말도 있다.
[31] 원래부터 제주도에 감귤을 키우지 않았냐고 생각할 수 있으나 조선시대 품종과 현재 품종과는 수확량 등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게다가 여러 난리 등으로 별로 안 남은 상태였기도 했고 심지어 우수한 품종은 진상품 고난에 못 이겨 제주도민들이 스스로 베어 죽이기도 했다.
[32] 군사정권 시기 한국인의 자유로운 출국이 제한되었던 것, 외국 문물이 정부에 의해 검열당한 것 등이 그 예이다. 특히 이 오해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일본과의 소통 창구가 민간에서는 반일 감정에 의해, 제도적으로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의 매체 검열에 의해
막혀 있었던 것이 크다.
[33] 이 때문에 우장춘을 등용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도 정계에서 거셌지만 김병규를 비롯한 지지자들은 을미사변 당시 세상에 나지도
않았고 달리 친일 행위를 하지도 않은 우장춘을 단지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하고 우범선이 저지른 짓들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고 맞섰고 결국 이 주장이 어렵게 이긴 덕분에 우장춘은 귀국했다.
[34] 이것도 한국에 와서 몇 년 살아서 그 수준이 된 것이며, 처음 왔을 때는 한국어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히 일상 대화나 강의는
모두 일본어로 하였다. 그나마 해방된지 얼마 안 된 시기고 어린 시절부터 일제 치하에 살던 사람들도 많아 상호 일본어 대화 자체는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우장춘 본인은 한국어를 배울 시간에 한국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우장춘은 아버지도 없이 어릴 때 가난 탓에 어머니와 헤어져 고아원에 살아야 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한국어를 익힐 수 있었을 리가 만무함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어보다 일본어가 더 편하고 유창한 세대가 많았다. 그래서 우장춘을 한국어 못한다고 비난하는 건 억까에 가깝다.
[35] 이승만이 평생 학을 뗐던 두 단어가 바로 일본과 공산당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조선말이 어눌해 사실상 일본인이나 다름없는 우장춘의 든든한 우군이었던 이승만의 태도는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겠다. 이승만은 독립 후 10여 년이 지난 1954년에도 단지 일본놈들이 한반도를 밟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일본 선수단의 입국을 거부하고 월드컵 예선을 두 경기 다 일본에서 치르고 오라고 할 정도로 평생을 반일주의자, 반공주의자로 살았다.
[36] 우장춘의 연구소는 업적도 업적이지만, 우장춘이 인적자원관리를 굉장히 잘했다. 과거나 현재나 문제가 되는 연구원, 대학원생들을 정당한 대가도 없이 열정페이로 착취하는 문제와, 교수/범죄 문서를 참고해보면 알 수 있듯이 연구소는 직업윤리 문제가 옛날이든 지금이든 심하게 안 좋았다. 그러나 우장춘 박사는 그 당시에 믿기 어려울만큼 자기 사람들을 지금 기준으로 봐도 살뜰히 잘 챙겨주었다. 후술할 연구원들을 한국전쟁 당시 징병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쓴것부터 말 다했다. 비록 그의 연구소는 박봉일지언정, 조직문화가 좋아 근무조건이 열악하고 급여가 적어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37] 소수정예로 운영되는 중에 단 한 명만 빠져나가도 연구소가 큰 어려움에 처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국방부에서는 청년들이 수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서 목숨을 바치고 있는 마당에 박사의 연구원들만 징집에서 제외해 주는 것은 공정성 문제가 있어 안 된다고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군인들도 먹어야 전투를 하고, 이 연구원들이 군에 공급할 식량 증산에 기여중인 사람들이라고 거듭 설득했고 결국 승인되었다고 한다. 이 일은 훗날 이공계 박사를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대체복무시키는 전문연구요원 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38] 아버지 우범선이 일본으로 망명하기 이전에 한국인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즉 우범선 본처의 딸. 의외로 우장춘과 이복누나의 관계는 우장춘이 누나의 청탁을 거절하기 전까지 나쁘지 않았다.
[39] 사실 우장춘의 이복누나 입장도 할말이 있는게, 어느 누가 전쟁통의 사지로 자기 아들을 보내고 싶겠는가? 게다가 한국전쟁 당시 국군은 보급지원이 매우 열악하고 악습이 지금보다 매우 팽배한데다 장비와 간부들의 수준이 실로 절망적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전투중에 죽는것보다 군생활중 질병이나 부상, 굶주림으로 죽을 확률이 더 높았을 군대에 그 누가 가고 싶을까? 그리고 대답이 달랐을 가능성은 없었겠지만, 일언지하로 거절하고 돌려보낸 직후 우장춘도 그녀가 받아들이도록 완곡하게 충분히 설득했어야 할 것을 괜히 홧김에 그랬다며 후회했다고 한다.
[40] 육종학 연구도 확률 및 통계에 의해서 연구 된다. 멘델 유전 법칙처럼 기본적으로 이전 세대에서 원하는 형질이 유전될 가능성을 연구해야 하며 해당 통계를 기반으로 육종 계획을 수립하기도 한다
[41] 우 박사는 이미 소학교, 중학교 시절부터 수학과 과학을 정말 잘해서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수리적 지능이 비상한 인물이었다.
강단에서 수학과 통계학도 직접 가르쳤을 정도.
[42]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넘어가는 사실이지만, 방정환 못지않게 한국 위인중엔 손 꼽히는 보드게임 개발자에 들어간다. 현재
대한민국의 민속놀이(...)나 다름없는 고스톱의 창시자가 우 박사고, 민화투나 삼봉 등의 룰도 정립한게 다 우장춘의 공. 한국마작의 룰도 그가 집대성했으며, 심지어 현재 한국 장기를 일본의 쇼기와 다르게 정체성을 성립한 것도 우장춘 박사.
[43] 사카이 나카는 메이지 시대 극초반인 1872년생이었는데, 일본 근대화의 시작인 메이지 유신이 그보다 겨우 4년 전인 1868년에
일어났었다. 즉 한창 근대화가 진행 중인 시기에 태어난 인물이었으니 당연히 전근대적 사고방식과 근대화의 물결이 혼재된 시대를
살았고, 이런 어머니가 "술을 못 마시면 사회생활에서 남들에게 이지메당한다"라고 걱정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술 강요
문화가 거의 없어진 한국과 달리 일본은 지금까지도 보수적인 문화가 남아 있어 술을 못 마시는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못한다는 인식이
남아 있는 판국인데 하물며 그 시절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44] 이는 위의 개요의 마지막 단락에 일본어 위키에 좀 더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다며 링크를 달아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대략 1953년부터 우장춘이 학계의 영향력이 매우 높았을 당시니...
[45] 이 당시 부산원예고등학교는 지금의 부산전자공업고등학교다. 부산전자공고는 원래 농업 및 원예학교로 처음 시작하여 우 박사가 환국한 무렵에는 부산원예고였다. 원예고가 전자공고가 된 이유는 1970년 공업계 학과가 추가로 설치되고 1974년에 농업계 학과가 폐과되어 이때부터 공업계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자공고 근처에 있는 동래원예고등학교는 전자공고에서 폐과된 농업 교육 기능을 이어받고자 1974년 한독원예학교라는 이름으로 별도 출범한 것이다. 그래서 전자공고는 연혁에 부산원예고 시절을 포함하고 있어 이를 자교의 전신으로 삼고 있다. 즉 물리적, 정신적 뿌리는 전자공고에 있으나 기능적 뿌리는 동래원예고에 있는 셈이다.
[46] 2002년 대회로 결승전은 다음해인 2003년 1월 1일에 열렸다.
[47] 그런 이유로 당시 국내 발행 세계 위인전인 '삼성당 소년소녀 위인전기전집'에는 일본의 장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일본 미쓰비시 재벌 창업자인 이와사키 야타로가 들어간 일까지 있었다. 전범기업이 아닌 세계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한 기업의 설립자라도 일단
실업가라서 정치, 과학 등에서 세계적인 업적을 남긴 이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위인전에 들어갈 리가 없던, 소위 '장사꾼이 웬 위인?' 하던
시절에, 덤으로 반일감정도 꽤 컸던 시절에 전범기업의 창업자가 위인전에 들어간 것은 이런 중역 해적판이라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쇼가쿠간 소년소녀위인전기라는 책을 카피한 책이었다). 2020년대 위인전에 마오쩌둥, 호찌민 등이 들어간 것만큼 논란이
있었다.
[48] 6차 교육과정에서는 국민/초등학교 6학년 사회 과목이 사실상 한국사 과목이었고, 그마저도 "을미사변의 주동자가 우범선이었다."
수준의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9] The Plant Cell 저널에 등록: The final piece of the Triangle of U: Evolution of the tetraploid Brassica carinata genome
출처: 나무위키
주: ※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