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북리뇌우.
그는 얼굴이 굳어진 채 십방무전의 내전(內殿)으로 이어진 긴 복도를 따라 걷고 있었
다.
'소소향, 그녀는 나와 비슷한 일면이 있다. 웬만해서는 심중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면 벽은 외부와 다름없이 새하얀 백유옥석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바닥에도 고급스
런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다.
천장에는 군데군데 오리알 만한 야명주가 박혀 밝은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내게 걱정을 내비쳤다면?'
북리뇌우가 심각해진 이유는 자신을 휩싸고 도는 기류 때문이었다. 그의 안면에는 어
느덧 긴장감마저 떠올라 있었다.
'이건 분명 살기(殺氣)다. 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도를 더해 가고 있다.'
그는 정적 속에서 무엇을 발견해 내려는 듯 시각과 청각을 모두 곤두세웠다. 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들리는 것이라곤 그 자신의 발자국 소리가 전부였다
'흠, 조짐이 좋지 않군.'
북리뇌우는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전신으로 감지되는 살기
가 단지 위협의 수단 정도가 아닌, 필살(必殺)의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누구일까, 이렇듯 작정하고 나를 죽이려 하는 자는?'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서서히 공력을 끌어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콰쾅!
굉렬한 폭음이 울리며 복도의 양편 석벽과 천장에서 수백 개의 장창(長槍)이 그를 향
해 폭출되었다.
파파파팟―!
"웃!"
북리뇌우의 입에서는 짧은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미처 피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수백 개에 달하는 장창은 그대로 그의 몸을 고슴도치로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어찌 된 셈인지 그 상태에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대신 만면에 노기를 띤
채 무섭게 전면을 노려보았다.
"예감이 이런 식으로 맞아 떨어지는군."
그 순간 놀라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파파파― 째쟁―!
그의 몸에 박힌 수백 자루의 장창들이 반탄력에 의해 모조리 허공으로 퉁겨졌다가 바
닥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북리뇌우의 전신에서 폭발하듯 일어난 자청색 기류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 때
에 그의 눈빛은 기이하게도 은은한 회백색(灰白色)을 띠고 있었다.
푸스스스.......
바닥에 떨어진 장창들은 이내 한 자루도 남김없이 가루로 변해 부스러졌다.
반면 북리뇌우의 몸에는 작은 상처 하나도 없었다. 그는 나직하나 냉혹함이 깃든 음성
으로 입을 열었다.
"나오라, 누구냐?"
대답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종전대로 깊고 괴괴한 정적만이 사위를 감돌며 방금 전
에 일어났던 돌발적인 사태를 비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 정적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쿠쿠쿠쿠―
괴음향과 함께 이번에는 양쪽의 석벽과 천장이 움직이며 북리뇌우를 사이에 두고 빠른
속도로 좁혀 왔다.
그 광경을 보자 그는 역시 당혹해 하기보다는 불쾌한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계속 유치한 수법으로 나를 우롱할 셈인가?"
모욕감 탓인지 그의 회색 눈동자에서도 분광이 일었다.
북리뇌우는 양측 석벽을 향해 쌍수를 치켜들었다. 섬뜩한 혈류가 그의 손에 연기처럼
어렸다.
"마염대접인!"
슈팟!
귀청을 찢을 듯한 파공음과 함께 두 줄기의 혈선(血線)이 북리뇌우의 손끝에서 뻗어
나갔다.
콰쾅!
굉음을 울리며 혈선은 석벽을 강타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석벽은 의외로 멀쩡했던 것이다.
"흠, 제법 단단하군."
북리뇌우는 냉담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 사이에 벌써 석벽은 그의 몸에 닿을까 말까
할 정도로 좁혀져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혈류로 휘감겨 있는 양 수를 좌우로 뻗었다.
파파팍!
믿을 수 없게도 그의 손은 단단한 석벽으로 깊숙히 파고들었고, 석벽에는 구멍이 뻥
뚫린 바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석벽은 계속 조여와 북리뇌우는 무참하게 그 중간에 끼어 있었다. 이
대로라면 어떻게 해도 압사(壓死)를 모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북리뇌우는 그 상태에서 스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어떤 자인지 후회하게 될 것이다. 반드시 내게 베푼 만큼 되돌려 받게 될 테니까."
동시에 그의 미간에는 자청색 혈광이 떠올랐다. 그것이 그의 상징이자 운명의 표상이
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운명은 그를 압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휘류류류―
자청색 혈광은 부챗살처럼 전면으로 번지더니 회오리를 일으키며 그의 일신을 휘감았
다. 그 순간을 기해 이번에는 그의 몸 전체가 한쪽 석벽으로 스미듯 박혀 들어갔다.
콰르르릉― 콰쾅―!
석벽은 마침내 굉음을 일으키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
북리뇌우.
그는 석벽의 잔해인 돌무더기 위에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사방이 십여 장에 달하는 하나의 석실(石室)이었다. 그가 지나오
던 복도는 벽이고, 천장이고 모두 뭉뚱그려 석실 내에 설치된 기관장치라면 맞았다.
북리뇌우의 시선은 석실의 중앙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곳에는 한 괴인(怪人)이 정
좌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대략 초로(初老)의 나이로 보였지만 확실치는 않았다. 산발한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은 채 바닥까지 늘어져 있어 용모를 추측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신에는 다 낡아 빠져 초라하기 짝이 없는 회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가만히 앉
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숨막히는 살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그의 눈은 봉두난발 사이로 북리뇌우를 노려보며 소름 끼치는 녹색 광망을 쉴새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누군가, 그대는?"
북리뇌우가 물었다.
"알려고 하지 마라."
회포괴인은 음성마저도 짙은 살기로 젖어 있었다. 그를 향해 북리뇌우는 흰 이를 드러
내 보였다.
"후후, 나는 알아야겠는데도 말인가?"
"피차에 물을 필요도, 대답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둘 중 하나는 죽게 되
어 있으니까."
"누구 마음대로?"
북리뇌우의 말에 회포괴인은 더 이상 응대하지 않았다.
스윽!
그는 할 말을 다 마쳤다는 듯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유령처럼 미끄러지듯 북리뇌우에
게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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