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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日대사가 中대사처럼 말했다면... 선택적 굴욕, 도를 넘었다
조선일보
이한수 문화부장
입력 2023.06.19. 03:00업데이트 2023.06.19. 06:28
https://www.chosun.com/opinion/taepyeongro/2023/06/19/SYH6JZZCFVFQHHJTIGRV3LZH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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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대사가 “베팅, 후회” 말했다면
‘노 재팬’ 항의 격렬했을 것
아무리 내로남불이 특기지만
日엔 굴욕, 中엔 못 느끼나
[서울=뉴시스] 김금보 기자 = 반중단체 회원들이 14일 오후 서울 중구 주한 중국대사관 인근에서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3.06.14. kgb@newsis.com
“일각에서 일본이 패배할 것이라는 베팅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잘못된 판단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분들은 일본의 역사와 사회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일본 국민들이 덴노 헤이카(천황 폐하)의 지도하에 일본몽이란 위대한 꿈을 이루려는 확고한 의지도 모르며 그저 탁상공론만 하고 있습니다. 단언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일본의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란 점입니다.”
주한 일본 대사가 한국 고위 인사를 저들 대사관에 앉혀놓고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후 상황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여야와 정파를 떠나 강력히 항의하고, ‘노 재팬’ 운동이 펼쳐지고, 감정 격해진 일부는 일본 대사관 앞에 달려가 해당 대사 추방을 외치며 격렬히 시위하고, 끝내는 심각한 폭력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국교 단절까지 이어질 대형 사건으로 번질 수도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8일 오후 서울 성북구 중국대사관저를 방문해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와 만찬 회동을 하고 있다. 싱 대사는 이날 "중국 패배에 베팅하는 건 잘못된 판단이다'" 내용의 강경 발언이 담긴 원고를 15분간 읽었다. /뉴스1
지금 일본 대사는 위 같은 말을 결코 할 수 없다. 만약 이런 말을 했다면 그 시기는 120년 전쯤 어느 날일 것이다. 국방도 경제도 허약한 한국(대한제국)에 그렇게 말한들 저들이 어쩔 수 있겠나 판단해야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 말해도 될 법하니 그리 말하는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앞두고 “한국은 임금과 신하 간에 음모가 많은 데다 나라를 지킬만한 힘이 없어 항상 동양 평화를 해치는 화근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자리에 있던 한국 고관대작들은 이런 말 듣고도 제대로 항의 한 번 못 했다. 결국 망국으로 갔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모두(冒頭)의 인용은 주한 중국 대사가 한 말에서 단지 ‘중국’을 ‘일본’으로, ‘시진핑 주석님’을 ‘덴노 헤이카’로 바꾼 것이다. 중국 대사는 120년 전이 아니라 2023년 6월, 불과 열흘 전인 지난 8일 한국의 야당 대표단을 저들 대사관에 앉혀놓고 공개적으로 위같이 말했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달랐다. 여야와 정파를 떠나 강력히 항의하거나, ‘노 차이나’ 운동이 펼쳐지거나, 격해진 일부가 중국 대사관으로 달려가 해당 대사 추방을 외치는 일 따윈 벌어지지 않았다. 중국 대사는 그렇게 말해도 저들이 어쩔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 말해도 될 법하니 그리 말한 것이다. 이런 말 듣고도 자리에 있던 야당 대표단은 항의 한 번 하지 못했다. 지금을 120년 전 어느 날로 착각한 걸까.
필자가 사는 지역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최근 이곳저곳에 현수막을 내걸었다. ‘독도에 다녀왔습니다. 대일 굴욕 외교 꼭 막겠습니다’라고 적었다. 무엇을 두고 굴욕이라 지칭하는지 수긍하기 어려우나, 야당 의원이 대통령의 대일 외교를 굴욕이라고 프레임 씌워 공격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잣대는 정대하고 일관돼야 한다. 이 의원은 중국 대사의 망언에 대해선 지금껏 아무런 현수막도 내걸고 있지 않다. 이 의원뿐 아니다. 야당 의원 중 중국 대사 발언에 분노와 굴욕을 느끼고 항의한 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재명 대표는 사건 직후 “중국 정부의 태도가 마땅하지 않지만, 국익을 지켜내기 위해 공동으로 협조할 방향을 찾는 게 더 중요한 일 아니겠나”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저들이 저급하게 나와도 우리는 품격을 지키면 된다. 그러나 이 대표가 “일본 정부의 태도가 마땅하지 않지만, 국익을 지켜내기 위해 공동으로 협조할 방향을 찾는 게 더 중요한 일 아니겠나”라고 한 적 있는지 들어보지 못했다. 아무리 내로남불이 특기라지만, 거대 야당의 선택적 굴욕과 선택적 분노가 도를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