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에 불려다니면서, ‘대통령은 권력이 없다. 권력은 검찰과 언론에 있다.’ 그건 현상적 분석이나, ‘검수완박법’도 그래서 나왔다. 사실 ‘법의 지배’ 하에서 최종 권력은 대법원이 갖고 있다. 그 권력을 잘 못 쓰면, 민주공화주의 헌법정신이 무너진다. 그 역사적 멍애가 노태악 선관위원장, 대법원 판사에게 내려졌다. 그 짐을 어떻게 벗어날지 지켜볼 일이다.
선관위가 도마 위에 올랐다. 선출직 공무원을 충원하는 관리를 맡은 기구가 선관위이다. 선관위 앞에서 대통령도 숨을 죽인다. 대통령을 할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선관위는 무소불위의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선관위에 문제가 생겼다. 노태악 선관위원장이 좌불안석이다.
동국문헌비고는 250권이다. 영조에서 시작(영조 45년, 1769년)해서 증보문헌비고로 고종의 기록이 되어 있다. 여기서 ‘동국’은 우리나라를 뜻하고, ‘비고’는 참고하기 위해 갖추어 둔다는 뜻이다. 왕이 시정을 할 때 참고하는 문서이다. 이 서책에 서구의 선거제도까지 기록이 되어 있다.
중앙SUNDAY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2023.06.03.), 〈정조가 꿈꾼 만민평등 ‘공화’ 세계, 세도정치에 막히다〉, 당연히 자기 할아버지 영조 때 만든 책을 참고헀다. “정조는 재위 20년(1796)에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란 글을 썼다. 화성(수원) ‘현륭원 행차’에서 돌아온 이듬해였다. ‘만천명월주인옹’은 임금의 호, ‘자서’는 내가 쓴다는 뜻이다. 수많은 하천(萬川)에 밝은 달(明月)이 하나씩 담기는 것이 백성과 임금의 관계라는 내용이다. 밝은 달은 군주인 나이자 태극으로, 태극이 음양-4괘로 분화하여 이르는 최종의 획 1677만 여를 나의 백성의 수라고 하였다. 백성은 곧 군주의 분신이라는 선언 아닌가. 군주가 나뉘어 백성이 되었다는 군민일체(君民一體)의 사상이자 신분제도를 근저에서 무너뜨릴 혁명적 사고다. 정조는 이 무렵 ‘민국(民國)’이란 단어를 즐겨 썼다. 국(國) 곧 왕실과 대·소의 민(民)이 곧 나라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민국사(民國事)’라는 말도 자주 썼다. 서얼 차별 없애고 노비제 혁파 결심-1800년 초 정조는 서얼(첩 자식) 차별을 없애는 법을 세우고, 노비제도의 전면 혁파를 결심한다. 이 해 외할아버지 홍봉한이 영조에게 올린 건의들을 모아 외삼촌 홍낙임과 함께 정리하여 『어정(御定) 홍익정공주고(洪翼靖公奏藁)』라고 이름 붙였다. 이 책 노비 항목의 서문 「노비인(奴婢引)」에 공·사노비 전면 혁파 결심을 적었다. 영조가 익정공의 건의로 도망 노비를 잡지 못하도록 한 조치를 크게 발전시킨 결단이었다.정조는 앞서 재위 15년(1791)부터 과거 제도의 혁신을 꾀하였다. 『주례』는 시험으로 관리 뽑는 것을 빈흥(賓興), 곧 손님을 찾아 모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빈흥시’라는 이름으로 각 도마다 소과 시험을 차례로 시행하고 그 결과를 도별 『빈흥록』에 담았다. 여기에 실린 각도 합격자 명단에 놀랍게도 4조(祖) 표시가 없어졌다. 이제부터 관리 등용에 양반과 평민을 따지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정조 말년 이 나라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공화’의 기둥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조는 노비제 혁파 결정을 내린 뒤 심한 피부병으로 병석에 눕는다.”
정조는 후손에 난항을 겪고, 어린 순조를 즉위시키게 되었다. 여기에 문제가 생겼다.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모시니, 수구파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동국문헌비고에 주로 관심이 있는 인사는 남인 출신이다. 이어 “1800년 순조 즉위 당시 궁중의 어른은 정순왕후 경주김씨였다. 정조 치세에 대비의 오빠 김귀주 일당은 노론 벽파(탕평 정치 거부파)의 핵심으로 정조와 자주 충돌하였다. 순조 원년 1월 대비의 수렴청정 아래서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대비 측의 벽파가 정조 친위세력(시파) 가운데 서학(천주교)에 가까이 간 사람이 많았던 것을 악용해 ‘사옥’을 일으켰다. 정조는 서학에 대해 유학을 바로 세우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면서 관용적이었다. 저들은 그 관용이 화를 불렀다고 하여 300여 명을 잡아 죽이거나 유배 보냈다. 정조가 양성한 우수 인재 다수가 제거되었다. 세자 보호 부탁을 받은 김조순마저 뒤로 물러서 있었다. 이듬해 1월에는 대비가 직접 나서 정조가 내린 노비 혁파 결단을 실행한다면서 왕실 소속 공·사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6만6000여명의 왕실 소속 노비가 해방되었으나 양반 사대부들의 노비는 그대로 남았다.”
신구대결이 일어난 것이다. 국내정치는 1987년 이후 386 운동권이 득세하고 있었다. 그 역사의 길목에 최종 칼자루를 잡안 인사가 노태악 대법관이었다. 노 대법관이 대통령 탄핵에 마지막 칼을 휘둘렀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7년 3월 10일 헌재에서 ‘파면’을 결정했고, 김세윤 판사, 김문석 판사(고법 형사4부), 노태악(주심·대법원 3부) 등 과정을 거치면서 노태악 대법관은 2021년 1월 14일 朴 대통령에게 징역 20년(새누리당 공천 개입 2년 포함 22년), 벌금 180억 원, 추징금 35억을 선고했다.(조윤영, 2021.04.14)
판결의 정당성은 제처두고, 이 그후 이상한 사회, 즉 김일성 신분사회로 흘러가고 있다. 여기서 노태악 대법관 및 선관위원장의 멍애가 시작되었다. 멍애는 소를 통제하는 일종의 고삐이다. 그후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 버린 것이다. 노 대법관은 대통령 판결은 의지지만, 민주공화주의 정체는 그후 이상하게 흘러가버렸다.
요즘 국정원 출신 이희천 교수가 여기저기 강연을 다닌다. 그의 논리는 ‘대한민국은 전복된 상태! 문재인정부의 5년...’이라고 했다. 국가사회주의 법이 국회에서 막 통과되고, 선관위는 북한 해킹에 무방비 상태라는 소리이다.
대한당 정당현수막이 이젠 언론광고가 아니라, 현수막 형태로 길가에 걸려있다. 인천 송도의 현수막이다. ‘선관위 공무원 사전투표함 보관장소 언제나 출입가능. 공무원 부정행위 발생 가능 백퍼센트!’(대한당), ‘사법부의 몰락은 대한민국 정의의 몰락이다’, ‘북한해킹에 보안점검 거부한 선관위, 무엇을 숨기겠다는 건가?’, ‘북한에 해킹 당하고도 보안점검 거부한 선관위를 수사하라!’ 그 논리가 틀린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정을 보면 1000명이 조사를 받고, 200명 정도 전직 관료가 구속된 상태이다. 풀려난 인사도 있고, 아직도 복역 중인 인사도 상당히 남아있다. 그 잣대로 보면 문재인 정부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치 순조 1년 남인을 일망타진 하듯 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정체성은 헌법정신의 자유주의, 시장경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방점이 간다. 그런데 지금은 민주공화주의가 아닌, 북한과 같은 국가사회주의 형태이다.
분명 역사는 과거를 다루고, 이 문제가 붉어지게 되어 있다. 먼 장래는 두고라도 내년 4·10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0개 월 앞으로 다가왔다. 다음 선거는 고사하고, 지난 2020년 4월 15일 선거도 부정선거로 얼룩져 있다. 이 상태에서 그 관리를 노태악 선관위원장 하 선관위 직원 3000명이 맡게 된다. 스카이데일리 장혜원 기자(05.31), 〈신뢰·공정 ‘와르르’..선관위 만신창이〉이라고 했다. 그 현상을 보고, 국민들의 마음이 편할 이유가 없다.
조선일보 김형원 기자(06.03), 〈선관위, 끝내 감사 거부...감사원 ‘고발 검토’〉, 〈아빠·형님 찬스, 지역 세습에도..자체 감사한다는 선관위〉, 선관위는 북한 사회모양 신분사회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정조가 개혁하려는 것도 신분사회였고, 1800년 순조 원년에 천주교 박해를 한 것도 신분사회를 개혁하려는 인사를 거세했다. ‘300백 명을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다.’ 그 중 똑똑한 정약용은 특별히 살려줬다. 한 사람이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나, 다른 인재들은 양이(洋夷)라고 배척했다. 그 사람들이 살아있으면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역사가 반복된 것일까? 386 운동권으로 볼 때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아야 할 정부’라는 말이 맞다. 그게 김일성 논리이다. 세습 김 씨는 대한민국 75년 헌정사를 다시 쓰고 싶다. 노태악은 ‘참 나쁜’ 동생이 될지 의문이다. 노 선관위원장은 자신의 멍애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생각이나 할까?
첫댓글 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