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함은 토정비결로 유명하다 년초에 심심풀이로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에서는
상당한 믿음이 있을것으로 생각된다.
아산영인에는 토정 이짐함의 선정비가 남아 있는데 이 비는 임진왜란의 이전의 古碑 이고
또 이지함이 마지막으로 벼슬을 한 곳이기도 하다.
즉 토정 선생이 아산현감 이후에 돌아가시니 영인에 남아 있는 이지함의 선정비는 이지함의
이력을 말해주는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토정의 기이함은 여기저기 보인다.
동산옹(東山翁)이 말하기를 .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그를 만나 보고는 강우(江右)의 1인(人)이라고 칭찬하였는데, 짐승의 말을 알아들었다고 한다. 《記言 卷11 淸士列傳》
임하필기 제22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이지함(李之菡)이 기민을 구활(救活)한 일
선조(宣祖) 3년(1570)에 영남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 이때 이지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이인(異人)이라고 하였다. 그는 유랑하는 백성들이 누더기를 걸치고 밥을 구걸하는 꼴을 불쌍히 여기고서 커다란 집을 지어 그들을 머물게 하고 수공업을 가르쳐 각자 자기의 의식을 해결하도록 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무능한 자에게는 볏짚을 주어 짚신을 삼도록 하고는 그 일을 감독하니, 하루에 능히 열 켤레를 만들어 냈다. 그것을 내다가 팔자, 하루에 일한 것으로 쌀 한 말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남은 이익을 미루어 그들의 옷가지를 만들도록 하니, 서너 달 사이에 옷과 식량이 모두 충분해졌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고(故) 명신(名臣) 이지함(李之菡)의 유집(遺集)을 보건대, 이지함이 일찍이 인천에서 상중(喪中)에 있는 조헌을 조문하였는데, 그날 밤 요사한 혜성(彗星)이 하늘에 뻗쳤으므로, 조헌이 그 조짐이 어떠한지를 물었더니, 이지함이 말하기를, ‘혜성은 길면서 더딘 것과 짧고도 빠른 것이 있는데, 이것은 10여 년 뒤에 천하에 반드시 큰 난리가 있어 백성이 참살당하여도 세상에 이를 감당할 사람이 없을 조짐이니, 그대는 더욱 옛 글을 읽어서 국가에 보답하라.’ 하였는데, 임진란(壬辰亂)에 이르러 그 말이 과연 부합하였습니다. 신이 계해년 겨울에 겸사(兼史)로서 금중(禁中)에 입직하였는데, 그때 혜성의 재이(災異)가 한 달이 넘도록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신이 목격한 바인데, 걱정하고 탄식하는 것은 이제 연수를 헤아려보니 마침 이지함이 말한 것과 근사하기 때문입니다.
담헌서 홍대용
조헌(趙憲)도 또한 선정(先正)으로 일컬어지니, 과연 문묘(文廟) 배향여부엔 관계 없구려. 중봉(重峰)의 학문이 과연 율곡(栗谷)ㆍ우계(牛溪)와 더불어 같소?”
“그의 학문에 대한 조예를 감히 율곡ㆍ우계에 견줄 수야 있겠습니까마는, 지극히 공평한 그의 본심이나, 완전히 갖춰진 오륜(五倫)은 천고에 그 짝이 없습니다. 실천한 행실이 이와 같을진대, 그의 학문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내를 장계할 적에 병화(兵火)의 침범이 없을 곳을 택하였고, 또 천고(天鼓) 소리를 듣고 수길(秀吉)의 출병을 미리 알았다 하던데, 어찌 그토록 신묘하오.”
하였다. 한정유가 아뢰기를,
“전에 어떤 사람이 이로써 송선정(宋先正)에게 물었더니, 선정은 ‘중봉(重峯)이 어찌 다른 술법을 가졌겠는가? 다만 지극한 정성을 귀신처럼 했을 뿐이다.’고 대답하였답니다.”
하였다. 내가 다시,
“이지함(李之菡)은 호는 토정(土亭), 동국(東國)의 이인(異人)으로 특히 천문(天文)에 밝았는데, 중봉이 일찍이 스승으로 섬겼으니, 중봉의 미래를 아는 술법 또한, 토정에게서 나왔을 것입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토정은 고사(高士 덕이 높은 선비)라, 정력(定力 선정을 닦는 데서 나오는 힘) 또한 보통에 뛰어났던 게지요.”
“제주(濟州)에서 여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 말씀입니까?”
“그렇소.”
앞에서 이야기 하듯이 토정의 기이함은여러대를 거쳐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인물이 되었다.
당대의 권력자의 숙부(영의정 이준경)이고. 나중에는 손서가 이덕형이니
친족과 인척이 당대의 권력가이지만 청렴겹랙하여 많은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