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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제3 수행편 제 2장 정기훈련과 상시훈련 제2절 상시 훈련법(常時 訓練法) 공부인에게 상시로 수행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상시 응용 주의 사항(常時應用注意事項) 육조(六條)」와 「교당내왕시 주의 사항(敎堂來往時注意事項)」 육조를 정하였나니라. 2. 교당내왕시 주의 사항 1. 상시응용주의사항으로 공부하는 중 어느 때든지 교당에 오고 보면 그 지낸 일을 일일이 문답하는 데 주의할 것이요, 2. 어떠한 사항에 감각된 일이 있고 보면 그 감각된 바를 보고하여 지도인의 감정 얻기를 주의할 것이요 3. 어떠한 사항에 특별히 의심나는 일이 있고 보면 그 의심된 바를 제출하여 지도인에게 해오(解悟) 얻기를 주의할 것이요, 4. 매년 선기(禪期)에는 선비(禪費)를 미리 준비하여 가지고 선원에 입선하여 전문 공부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5. 매 예회(例會)날에는 모든 일을 미리 처결하여 놓고 그 날은 교당에 와서 공부에만 전심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6. 교당에 다녀갈 때에는 어떠한 감각이 되었는지 어떠한 의심이 밝아졌는지 소득 유무를 반조(返照)하여 본 후에 반드시 실생활에 활용하기를 주의할 것이니라. |
[지난 주까지 요약 및 개요]
그 동안 정기훈련 11과목을 마치고 상시훈련 12과목 중에 6개 과목인 상시응용주의사항 6개 조항을 공부했습니다. 교전을 혼자 보시거나 공부했던 것과 지금까지 공부한 것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일원상의 진리를 내어놓으시고 그 진리에 들어가는 길을 신앙과 수행 길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것을 일상 수행의 요법으로 해놓으시고 그 일상 수행의 요법을 생활 속에서 활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복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반복의 훈련은 정시에 정기로 하는 반복의 훈련과 상시로 하는 반복의 훈련으로 나눠주셨습니다.
정기 – 법의 훈련, 삼학 11과목 = 정시(靜時) - 수양, 연구 주체 상시 – 수행의 훈련, 삼학 12과목 = 동시(動時) - 취사 주체 | |
〈 | 자력 – 상시 응용 주의 사항 타력 – 교당내왕시 주의사항 |
정기훈련은 정시(靜時)로 법의 훈련으로 삼학을 11과목으로 넣어놓으시고, 수양, 연구를 주체입니다. 상시훈련은 동시로 수행의 훈련으로 이것 또한 삼학입니다. 12과목이고 취사가 주체입니다. 이 상시훈련은 자력을 통한 훈련, 타력을 통해서 하는 훈련으로 나눠집니다. 자력으로 하는 것이 상시응용 주의사항이고, 타력을 입는 것이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입니다. 이것을 주의사항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들 정기훈련은 얼마나 나셨고, 정기훈련에서 얻고자 하는 수양, 연구, 취사 과목의 법을 제대로 알게 되셨나요? 해제하는 순간 동시에 상시의 결제라고 했는데 결제를 안 하시지 않았나요? 자력과 타력의 관계 속에서 과연 나는 자력을 열심히 했는지, 타력이라도 열심히 받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입자 때는 교당에 와서 입교를 하고 법명을 받아서 사종의무를 이행하게 됩니다. 법회를 보고 직장이나 가정에서 사용해야 하는데 잘 안되죠. 그러다가 정기훈련에 가서 ‘이런 것이 있구나, 참 좋네.’ 라는 생각을 가지고 해제를 하고 상시로 가는데 상시에서 잘 안됩니다. 그래서 초입자 때는 타력이 더 중요하고 상시보다 배우고 알아가는 정기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시응용 주의사항입니다. 그 중에서도 1조가 제일 중요하죠. 상시응용 주의사항 1조를 위해서 2조에서 6조까지 있습니다. 정기와 상시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상시응용 주의사항과 교당내왕시 주의사항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기훈련 들어올 때 상시훈련을 제대로 한다면 미리 준비를 해서 왔을 것입니다. 상시훈련을 제대로 안했다면 정기훈련에 와서 피곤해서 쉰다고 말씀하십니다. 100m를 뛰는 사람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서 달립니다. 하지만 마라톤을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달리지 않고 속도를 유지하면서 달리죠. 우리도 일생, 영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력과 타력이 없이 살 수 있나요? 정기 훈련만, 아니면 상시 훈련만 하며 살 수 있나요?
상시훈련에서 타력이라고 하는 것은 교당의 타력, 스승의 타력, 교화단, 진리, 법동지의 타력을 말합니다. 이 타력을 잘 입어야 합니다. 정기 훈련, 상시 훈련를 통해 법의 맥을 대야 성불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항마, 출가, 여래로써 살아가느냐 아니면 원불교를 다니지만 원만하지 못하거나 그만두기도 하고 스스로 성장이 안 되는 것을 느끼고 의기소침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각자의 판단을 보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몇 년 다니고 얼마나 알고, 해보고 또 그로 인해 얼마나 변해봤다고 원불교는 이렇더라, 저렇더라 생각하시나요. 원불교는 장엄한 부처님을 모시는 종교가 아니라 실제로 내가 부처님, 활불이 되자고 했습니다. 이 활불이 모습은 일상수행의 요법 9조를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이 9조를 실행하는 사람의 생활을 보면 하루 일과는 상시응용 주의사항으로 살고 일주일은 교당내왕으로 살며, 1년을 놓고 보면 정기훈련과 상시훈련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1년을 지나고 나면 신분검사를 하고 3년이 지나면 법위 사정을 통해서 법위가 올라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왜 정체될까요? 우선 원력이 크지 않아요. ‘이런 삶을 통해 중생의 모습을 버리고 나도 한번 성불해서 부처님이 되어 보겠다.’ 하는 원력과 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꿈이 없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교당 일정이 많으면 빠지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법마상전급까지는 자기 판단으로 하지 말고 스승이나 법에 맞게 판단 기준을 가지고 나의 판단을 보류해야 합니다. 꿈을, 서원을 이루고, 불보살이 되고 싶다면, 영생의 행복을 구해 살고 싶다면, 지긋지긋한 고통, 업력의 윤회의 놀음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한번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기훈련은 저축이고, 상시훈련은 활용입니다. 상시응용 주의사항은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는 최고의 적공입니다. 제가 항상 결혼식 주례를 볼 때 이야기하는 것이 하나는 감사생활이고 하나는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는 공부를 해라는 것입니다. 양심의 자기, 서원과 신심의 자기, 스승을 믿고 따르는 자기가 온갖 육신의 쾌락과 감정의 노예인, 업력에 끌려가는 아닌 마음을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아이들은 보고 있으면 열심히 하다가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놀죠. 교당에는 열심히 해도 집에서는 자기를 가르치는 적공을 잘 안하죠. 철저한 신과 서원이 없으면 어렵습니다. 형식으로, 주위만 맴도는 사람은 그 재미를 모르니 변화가 되고 기쁨이 솟아 올라올 수가 있나요. 혼자서 하는 게 쉽나요? 스승과 교화단의 타력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집에서는 부모님 멀리하고, 학교에서는 교수님, 회사에서 상사를 멀리하면 클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해서는 원만한 인격을 가지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안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결국은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은 상시응용 주의사항을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이 실제로 교당 온 시간은 일생에 5%도 안 될 것입니다. 교당 오는 시간은 실제론 많지 않은데 많다고 착각하지요. 거의 대부분 직장이나 가정에서 사회에서 생활하며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교당입니다.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은 상시응용주의사항의 길을 도와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할 것인가? 방심하지 말고 미리 연마해라, 조금만 놀고 경전, 법규연습을 해야겠구나, 의두, 성리도 공부 해야지, 조석으로 염불 좌선, 방심해서 못 챙긴 일기를 다시 챙기기 등을 하기 위한 교당입니다. 상시응용주의사항은 온전한 이 마음을 어떻게 지켰느냐 보존했느냐 잃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심법을 통한 마음개조라고 하셨습니다.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의 성립 과정
처음에는 원불교가 아닌 불법연구회였지요. 예전에는 교당이 아니었고 회관이라고도 했습니다. 그 당시 총부에 교무부라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교무님들이 많지 않아서 의문 난 것들을 총부의 교무부에 보냅니다. 지금은 교당으로 교무를 발령을 해서 쉽게 물을 수 있게 바뀌었죠. 교무로 나가면 법락을 줍니다. 이것은 대종사님, 종법사의 대행자라는 뜻입니다. 본인의 이야기가 아닌 대종사님의 법을 이야기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교당이 일종의 교무부가 되는 것입니다. 더 확대하면 교당은 교화단이고, 더 확대하면 세상입니다. 세계가 교당입니다.
원기 | 서기 | 교 서 | 제 목 | 비 고 |
11 | 1926 | 《불법연구회규약》 | 재가공부인이 교무부에 와서 하난 책임 | 처음 등장 |
17 | 1932 | 《보경육대요령》 | 공부인이 교무부에 와서 하난 책임 | 대상의 범위 확대 |
28 | 1943 | 《불교정전》 | 교무부에 와서 하는 행사 | ③ ‘양해’→‘해오’로 ⑤ ‘매월 3ㆍ6일’→ ‘매월 예회일’로 변화 |
47 | 1962 | 《원불교교전》 | 교당내왕시 주의사항 | 현재 사용 |
역사를 보면 원기 11년도에는 ‘재가 공부인이 교무부에 와서 하는 책임’이라고 했어요. 그랬다가 6년 후에 ‘공부인’으로 바꿔요. 출가, 재가를 합쳐 범위가 확대된 것입니다. 그 다음 공부인을 빼버리고 ‘교무부에 와서 하는 행사’로 했다가 다시 정산종사님께서 교전을 펴시면서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으로 정리해주셨습니다.
재가공부인이 교무부에 와서 하난 책임 (원기 11년, 불법연구회 규약) ①우기(右記) 응용주의사항을 지내나서 하시(何時)든지 교무부에 오고 보면 그 사항에 경과한 일을 일일이 문답하기를 주의할 일, ②엇더한 사항에 감각된 일이 잇고 보면 그 감각된 사유를 별지에 등서(謄書)하야 교무부에 허가엇기를 주의할 일, ③엇더한 사항에 대하야 특별히 의심나난 일이 잇고 보면 그 의심된 사유를 별지에 등서하야 교무부의 양해 엇기를 주의할 일, ④매년 삼동(三冬)이 되고 보면 엇더한 방면으로든지 비용금을 준비하야가지고 2개월이든지 3개월이든지 선원에 와셔 전문적으로 공부하기를 주의할 일, ⑤매월 3ㆍ6일에난 아모리 급한 사무가 잇다하야도 전기(前期)하야 처결하여 놓고 그날이 되고 보면 반닷이 그날은 온전히 교무부에 와서 공부에 대한 일만 주의할 일, ⑥교무부를 단여갈 때에난 엇더한 감각이 되얏난지 엇더한 사항에 의심업시 밝아졋난지 조사하여 본 후에 어느 방면으로 이로옴이 잇는가 업는가 생각하여보기를 주의할 일. |
원기 11년에 나온 내용을 보면 1조 ‘교무부에 오고 보면’ 이라고 되어 있고, 2조에 보면 ‘별지에 등서하여 교무부에 허가 얻기를’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제출이라 되어 있죠. 옛날에는 등서하라고 해놓으셨습니다. 말로 하지 말고 적으라는 것이죠. 적으라는 것은 주로 일기나 의문일 것입니다. 또 옛날에는 3 · 6일이라고 해서 예회가 6, 16, 26일에 봤습니다. 한 달에 세 번 봤어요. 지금은 토요일, 일요일로 바꿔서 정례법회로 매주 한 번 합니다. 또 2, 3개월의 전문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1박 2일, 2박 3일로 훈련을 해도 온전히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종사님 당대에도 어느 교도가 ‘장독에 뚜껑을 덮고 왔는지 걱정이 되어 훈련이 안된다고 집에 간다.’는 사람을 보고 대종사님께서 가라고 하시면서 저 사람이 다음 생에 무엇이 되겠냐고 하셨습니다.
교당에 오는 것은 타력을 입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타력은 여러 타력입니다. 교무님만 보고와도, 단장만 보고와도 안 됩니다. 동지들까지 다 같이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교화단으로 연결이 되어서 타력을 입도록 하는 것이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입니다. 어떤 사람은 단회하면 도망가는 사람이 있어요. 사실은 교당내왕시 주의사항 공부를 안했다는 것이죠. 대종사님은 어떻게 법통의 연원을 대셨나요?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은 여러 법동지들에게 맥을 대라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서가모니 부처님께 연원을 대셨죠. 그리고 정산종사님께서 나는 대종사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판단을 내릴 때 내 생각과 경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종사님이라면 어떻게 결정할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대종사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판단의 기준이 대종사님에 의해서 판단한다는 것이죠. 대종사님은 서가모니 부처님께 연원을 대셨고 공자는 항상 꿈에서라도 주공을 봤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어중간한 분들이 아만심이 커서 위에 스승이 없습니다. 깨달으신 스승일수록 오히려 위에 스승을 더 모시려고 합니다. 바둑, 장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기를 두든, 바둑을 두든 적당히 하는 사람은 초보자들입니다. 잘 하는 사람일수록 절대 적당히 하지 않습니다. 원불교 공부도 같습니다. 알면 알수록 스승이 고맙고 스승에게 더 맥을 대고 기운을 연할 수밖에 없는 게 공부입니다. 내가 알기 전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효과적인 방법은 신(信)입니다. 아직 긴가민가해도 타력을 잘 활용하려면 일단은 해야 합니다.
질문1) 우리가 혼자서 공부하면 되지 왜 교당에 나와야 할까요?
혼자하면 독단에 빠집니다. 점검을 받지 못하고 타력을 받지 못합니다. 여러분 어린이집에서 선생님 한 명이 아이들 두 세 명 정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명의 선생님은 6명을 넘어서 8~10명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공부를 해도 함께 했을 때 효과적입니다. 스스로 훈련, 서로 서로 훈련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원불교 만나서’ 강연을 합니다. 내가 원불교를 만나며 생긴 나름대로의 경험, 노하우, 시행착오가 있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 강연을 들으면서 공감도 되고, 나보다 공부를 더 한 사람도 있고, 앞으로 다가올 경계를 미리 말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교무님 설교보다 단회가 더 좋아야 합니다. 둘째는 법회 의식 자체가 좋으셔야 합니다. 입정하면 입정해서 좋고, 독경할 때 독경해서 좋고, 성가 부를 때 성가해서 좋은 것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이 교무님 법문, 설법입니다. 단회도 안하고 법회 식순은 형식이라고 생각하고 교무님 법문만 들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대종사님이 스승도 없이 대각을 하셨는데 왜 연원을 대셨겠어요? 연원이 없으면 외롭습니다. 힘을 못 받습니다. 대종사님이 스승의 끝이라고 하면 원불교도 힘을 못 쓸 수도 있습니다. 대종사님 위에 일체 생령들, 많은 성자들, 불보살들의 기운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연원을 대는 것이 훨씬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습니다. 연원도 입교연원뿐만 아니라 출가시켜준 연원, 견성시킨 연원, 보은 사업을 권장해주신 연원 등 여러 연원들이 있습니다. 집에서 혼자 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집에서는 사종의무도 이행 못하고, 그런 연원들은 어떻게 만나겠어요. 그래서 혼자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1. 상시응용주의사항으로 공부하는 중 어느 때든지 교당에 오고 보면 그 지낸 일을 일일이 문답하는 데 주의할 것이요, |
상시응용주의사항으로 공부하는 중 일일이 문답하는데 주의할 것이요. 1조는 맨 처음에 ‘어느 때든지 교당에 오고 보면’이라고 시작하지 않습니다. ‘상시응용주의사항으로 공부하는 중’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요즘의 원불교 교화에서 아쉬운 것은 교화단이 잘 활성화 안 되는 것과 상시응용주의사항과 교당이 연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상시응용주의사항으로 공부하는 중 공부의 자료를 가지고 교당에 온다는 이야기죠. 일요일 교당에 와야겠으면 미리 준비를 해야겠죠.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는 그 전날부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시선입니다. 노는 시간에 경전법규 연습을 하고 미리 일을 처리해야 하죠. 그래서 허송시간이 줄어들게 되겠죠. 일요일 법회 하나 보기 위해서 준비를 하다보니까 일주일을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무시선이죠. 그래서 법회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시간은 만드는 것입니다. 시간 없다는 사람들은 신심이 없거나, 관심이 없거나, 시간을 활용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법회는 회상(會上)이죠. 모임의 제일 위니깐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요.
상시응용주의사항으로 공부하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마음 놓고 해제했다가 교당 와서 열심히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때든지 교당에 오고 보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때라고 하는 것은 예회 날 아닌 날도 포함된 것입니다. 법회 날 아닌 날도 교당에 오면 동지가 있고, 스승이 있고, 공적인 보은의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든지라고 이야기해놓으신 것입니다. 교당의 의미는 교당, 교구, 총부, 훈련원, 조실 등이 되겠지만 응용해서 생각한다면 직장인은 회사이고 학생은 학교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도학과 과학을 병진할 수 있습니다.
교당이란 무엇 하는 곳인가?
교당은 뭐하는 곳인가요? 교당은 1차적으로는 마음공부를 서로서로 알려주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는 곳입니다. 또 성불제중하는 도량이고, 제생의세의 교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고, 세계 평화의 중심지요. 사회 정화의 원천입니다. 교당에서 정의와 평등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세계 어디에서 평등이 이뤄지고 정의가 세워지겠습니까? 교당에서 약자가 보호받지 못하면 어디서 약자를 보호하겠습니까? 교당은 원불교 교법이 실현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교당에서 우자가 큰소리 치고 일하려는 공도자를 헐뜯으면 되겠습니까. 다른 곳은 몰라도 교당에서는 공도자가 박수 받고 지자가 환영과 존경을 받아야겠죠. 그래서 각산님께서 세탁소라고 하고 복덕방, 변전소라고도 하고, 부처님 만드는 공장이라고도 표현해주셨죠.
2. 원불교 교도로서 교당에 내왕하는 목적은?
여러분 교당에 왜 다니세요? 마음 공부하러 오시죠. 영생의 행복을 여기서 마련할 수 있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중생의 탈을 벗어던지고 불보살 세계로 부처로 살겠다는 서원을 이룰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는 곳이 교당인 것입니다. 서로 배우고 전해주고 감정을 주고받는 곳입니다. 더 있다면 요새 젊은이들이 약한 대인관계, 사회성을 길러 줄 수 있는 곳이죠. 교화단 단회를 통해서 상당 부분 해결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종교의 기능 중에 재분배의 기능도 있습니다. 제가 간사 때 잘 사는 교도님들이 명절에 선물을 보내주십니다. 받은 양말이나 과일을 어려운 교도님께 나눠 줍니다. 저는 그때 종교의 재분배 역할을 하는 것도 봤습니다. 문화적 기능도 있겠죠. 각자의 재능기부도 하죠. 또한 장학사업, 자선사업, 복지사업이 이뤄질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교당은 교화만 하는 곳이 아닌 교화, 교육, 자선, 훈련 전부 다 이뤄지는 곳입니다.
‘오고 보면’ |
교당에 ‘오고 보면’이라는 것은 멀리서 보지만 말고 일단 와서 보라는 이야기지요. 오면서 가져 올 것이 있는데 한 주간 살았던 업력, 죄업입니다. 이 업력들을 법신불 앞에 풀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법회출석이 사종의무의 기초입니다. 또한 사종의무에는 신앙의 의무인 조석심고, 수행의 의무인 법회출석, 보은의 의무인 보은헌공, 입교연원이 있습니다. 일단 교당에 와야 배우고 점검도 받으면서 계속 할 수 있습니다.
그 지낸 일을 일일이 문답하는데 주의할 것이요. |
지낸 일을 일일이 문답하라고 했습니다. 교당내왕시 주의사항 1, 2, 3조를 보세요. 제가 원남 교당에서 교도님 질문 받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한 교도님께서 ‘교당내왕시 주의사항 2조, 3조는 지도인에게 감정 해오인데 1조에는 왜 문답 앞에 지도인이 없나요?’ 질문하셨어요. 저는 그때까지 몰랐는데 질문받자마자 알게 되었습니다. 질문은 서로를 공부시킵니다. 질문을 받고 딱 드는 순간 지도인에게 수직적인 감정과 해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답은 수평과 수직이 아우러진 것이죠. 단장과 단원, 신입교도, 교무님에게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지도인이라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질문 3) 누구와 문답해야 할까요?
법동지들 아무하고나 할 수 있습니다. 안에서도 지자본위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훈련을 가면 강연부터 시켰습니다. 예전에는 우자가 하도 큰소리 치는 문화가 있었길래 제가 어떻게 하면 저 우자를 조용히 시킬 수 있을까 했지요. 우자는 강연하면 조용합니다.
질문 4, 5) 무엇을 문답해야 할까요? 언제 문답해야 할까요?
문답은 지낸 일을 문답합니다. 문답을 할 때 보통 사후(事後) 문답만 하는데 사전(事前) 문답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미리 준비죠. 물론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지자본위하는 것이 좋지만 가능하면 물으셔야합니다.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에 가장 중요한 것이 서원이고 타력을 얻겠다는 신입니다. 그런데 교도님들은 묻지를 않아요. 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도와줄 수 없잖아요. 그러고 일 저지르고 후회하잖아요. 이왕이면 사후 문답이 아니라 미리 물어보세요. 1조는 수평적으로 지자본위해서 가능하면 많이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주로 교무님한테 묻는다면 참회할 일이 많겠죠. ‘교무님 제가 지난주에 감정을 주체를 못해서 이렇게 행동을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법문을 보다가 한 소식 얻었습니다.’ 얼마든지 문답할 수 있습니다.
질문 6) 어떻게 문답해야 할까요?
문답은 두루두루 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일일이 문답하라’고 하셨습니다. 꾸미지 말고 솔직히 하라고 하는 말이죠. 질문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자기 치심이 많거나 자존심이 있는 사람은 질문을 못합니다. 모르고 가고 있는 것이 더 창피한 것이죠. 모르는 것을 물어서 알면 되는데 모르는데 질문도 못하고 가는 것이 더 못난 것입니다.
2. 어떠한 사항에 감각된 일이 있고 보면 그 감각된 바를 보고하여 지도인의 감정 얻기를 주의할 것이요 |
지난 시간에 감각과 감상의 차이에 대해서 말씀해드렸습니다. 사물을 보고 그대로 그 사물에 대한 느낌을 아는 것은 감상입니다. 반면에 사물의 이치, 이면의 세계를 깨닫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감각이라고 합니다. 얕은 생각은 감상이고 깊은 생각은 감각인 것입니다. 일기를 기재할 때는 감각인지 감상인지 심신작용인지 구분하고 제목을 잡아서 당일 날 쓰는 것이 정기일기라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감각된 일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심신작용까지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른 스승의 감정을 얻으라는 것이죠. 사리에 지각을 얻는 공부입니다. 여러분 감정 잘 받으세요? 감정을 잘 받는 것이 중요하죠. 내가 확실하게 제대로 했는지, 제대로 알았는지, 아니면 더 효과적이 있는지, 잘못된 것이 있는지, 다른 선진님들이 해온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 미리 타력, 지도인을 통해서 얻는다면 아주 효과적입니다. 법가지(法可止)라는 것이 있어요. 내 빛을 멈추고 비슷한 깨침이 있는 사람에게 자문을 얻는 것입니다. 서로 감정을 할 수 있고 서로 지도인이 될 수 있지만 대체로는 지도인이 따로 있죠. 그것이 진퇴의 도라는 것입니다. 유마거사는 부처님 제자가 아닙니다. 유마거사가 부처님게 충고한 적도 있습니다. 유마거사가 서가모니 부처님과 비슷한 실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마거사가 법가지로 자신의 빛을 감추고 서가모니 부처님을 주세불로 드러나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어떠한 사항에 감각된 일이 있고 보면. |
잘한 것, 못한 것도 감각일 것입니다. 여러 가지 있겠죠. 대종사님 당대엔 일기를 써서 제출 했습니다. 대종사님이 감정을 하고 좋은 것은 회보에 따로 내서 서로 공유하게끔 하셨죠. 감각감상을 왜 기재할까요? 기재를 하면서 정리가 되고 기재를 하다보면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잘 몰라놓고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깨달았다고 해도 감정을 얻어야 합니다. 저는 일찍부터 선을 하면 진경에 들었어요. 선을 하다가 진경에 들지 않으면 화가 나서 방바닥을 쳤죠. 바로 감정을 얻었어야 하는데 얻지 않아서 오랫동안 혼자 시행착오를 겪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 체험이 있거나 경계가 있으면 먼저 선지자, 지도인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잘 했다고 격려를 해주기도 하고, 잘못 했다며 이렇게 해보라고 점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각감상을 일기로 쓰거나 감정을 얻으라고 하는 것은 바른 길을 제대로 가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잘못된 깨달음, 작은 깨달음을 정각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지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 감각된 바를 보고하여 |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닌 등서, 적어서 내라는 것입니다. 알려서 바치는 것이 보고(報告)입니다. 갑자기 찾아와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연락해서 시간을 잡거나 메일을 보내서 감정을 얻는 것이죠. 골동품을 감정 얻는 프로그램이 있었죠. 전문가가 감정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지도인은 확실히 판단을 할 수 있는 전문가를 말합니다. 지도자 중에 잘못 판단하면 죄업이 큽니다. 기술자도 기술의 감정을 받듯이 감정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도인의 감정 얻기를 주의할 것이요, |
지도인이 누구입니까? 원불교로 말하면 기본적으로 정사 이상입니다. 스승의 자격은 항마위 이상입니다. 원불교학과를 졸업하신 분들이면 기본원리는 아실 것입니다. 받은 다이아몬드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 감정을 받으니 아니래요. 알아도 확신하기 위해서 전문가에게 물어야 하는데 본인이 알지도 못하는데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웃긴 일인가요. 교당에 찾아온 사람들을 보면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견성을 했다고 확인을 받고 싶어서 글로 써온 사람도 있고 많아요. 감정을 얻는 것은 견성 인가를 얻는 것과 같아요. 견성을 했는지 인가를 얻는 것이죠. 부처님은 진기조사에게 감정을 얻었어요. 원효대사는 대안대사에게 감정을 얻은 것입니다. 서가모니 부처님, 원효대사가 뛰어나지만 그 위에 스승님이 있습니다. 주법에 신맥을 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을 맡으면 그 위가 될 뿐만 아니라 천지의 기운과 여러 사람의 합력 받기 때문에 성장합니다. 정산종사님도 상당한 경지에 오르셨지만 더 큰 스승을 찾으러 넘어 오신 것입니다. 정산종사님은 석두암에 저녁마다 가셨습니다. 날마다 대종사님을 뵈어서 뭐하셨겠습니까? 대종사님이 지도하실 것 지도하시고, 물어보실 것 묻고, 서로 논의하시기도 하고 회상 준비를 위해서 기운을 통하는 많은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질문 6) 왜 감정얻기가 잘 되지 않을까요?
여러분들 마음을 먼저 봅시다. 첫째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니까 물을 것이 없죠. 두 번째는 치심입니다. 내가 어느 정도까지 아는가를 보여주기 싫은 것이죠. 스승의 타력을 빌려 큰 불보살이 되겠다는 서원과 신심이 약해서입니다. 또 공부 좀 한 사람들은 중근병이 들어서 안 묻지요. 중근병이 들면 안 것도 같고 모른 것도 같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대단한 것 같다고 하니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이죠. 하근기보다 더 골치 아픕니다. 우리가 천도재를 지낼 때 축원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정견을 갖되 사견에 떨어지지 않고’라고 해요. 살아있을 때 삿된 견해를 가지고 살면 스스로 구렁텅이로 들어가는데 죽어서도 사견을 가지고 있으면 천도 받기가 어렵습니다. 사견을 부셔야 합니다. 감정에 놀아나고, 생각에 놀아나고, 자기의 주견에 놀아납니다. 주견을 넘자는 것이 신(信)입니다. 그래서 전탈전여(全奪全與)라고 주견, 아견, 나라고 하는 것을 스승이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스승이 뺏으려고 해도 자신이 안 뺏기려 하면 놔둬야지요. 그리고 업력의 놀음에 놀아나기도 합니다. 이것들을 넘은 일원상의 세계로 가기 위해 가장 빠른 것은 자력과 타력을 통하는 것입니다. 자기감정을 주체하기 어렵고, 시비이해에 빠진 생각, 주견, 자기도 모르는 과거에 지은 업을 받을 때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넘어서고 때로는 정당하게 활용해야 합니다. 감정, 생각, 주견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감정은 잘 활용하면 되고, 생각은 잘 쓰면 되고, 주견은 적당히 주체성 있게 공적으로 쓰면 됩니다. 그리고 업력을 확인해서 업력을 녹이는 기회로 삼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견에 빠지지 않도록 감정을 얻는 것입니다.
질문 7) 감정 얻기를 싫어하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할까요?
다른 사람 걱정하지 말고 자기 마음을 보라고 하셨죠. 공부가 잘못되면 내 마음은 안보고 다른 사람들을 탄단하는 시비심만 늘어납니다. 성자가 출세하면 천지에 있던 진리가 성자에게 옮겨가고 성자가 가시면 경전으로 넘어간다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주세불 법에다가 대조해봐야 합니다. 주세불의 타력을 잘 입으려면 기도하는 방식도 있고 간절한 신심이 있다면 여러분이 상상하지 못할 위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 생각과 판단과 지식만으로 진리의 세계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선 신의 세계로 진리는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깨달음이라는 선물이 오는 것입니다. 어중간히 지식 있는 사람이 지식에 속고 자기가 안다는 것에 속아버리죠. 그래서 자기가 잘난 줄 알고 감정을 받지 않는 것이죠.
질문 8) 교무님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그 실력이 인정되지 않을 때에는 어찌할까요.
일단 나는 왜 이리 복이 없는지 한탄해야죠. 교무님도 보면 같은 공부인입니다. 그러나 서원을 세운 분이죠. 나는 욕심 때문에 못했지만 교무님은 그 욕심을 놓고 서원을 세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서 가겠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학원 선생님이 마음에 안 들어서 공부 안 한다는 학생들은 자기만 손해죠. 학원 선생님은 그래도 전공했는데 자신보다 못하겠어요? 다시 말해 대부분 교무님들은 전공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하셔야죠. 또 이생에 처음으로 교무님 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질문9) 나의 생각과 교무님의 생각이 다르고 또 다른 교무님의 의견이 다른 때는 어떤 말을 표준할까요?
물론 지자본위를 해야 하지만 우리 교법에 근거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대종사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봐야죠. 나를 잘 아는 연원 교무님, 현재 소속된 지도 교무님의 의견을 먼저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을 찾거나 모질게 말 안하는 교무님을 찾아 가서 물어봅니다. 내 생각을 확인하려고 묻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우고 교무님이 말하는 것을 따르겠다고 물어봐야죠. 사업을 망하는 사람들을 보면 반대할 사람한테는 묻지 않고 성격만 좋은 사람들에게 물으니 망하지요. 그것도 자신의 주견입니다. 지도인이더라도 감정할 실력이 안 되면 그 위의 지도인에게 올려줘야 합니다. 제가 삼삼회 강의를 12년 정도 했어요. 단어 같은 걸을 질문하면 풀어주죠. 그런데 가끔 자기 교당 교무님한테 물어야 할 것을 저에게 물어요. 그러면 ‘그건 교당 가서 교무님께 여쭤보라’고 하죠. 반대로 당한 적도 몇 번 있어요. 훈련에 가서 법문에 대해서 대답해주는 것은 좋은데 잘 알지도 못하는 진로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분도 보았습니다. 물어보는 사람이 맥을 잘 대야 합니다. 가까이에 불공을 잘하면서 묻고 해야죠, 소속된 곳엔 제대로 못하면서 밖으로만 잘하면 결국 자신의 손실이죠. 외식은 새롭고 맛있지만 많이 하면 건강이 상해요. 교당에 초청강좌가 많아도 교도님들 병이 납니다. 새로운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법이 나온 11과목과 12개 주의사항을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죠.
3. 어떠한 사항에 특별히 의심나는 일이 있고 보면 그 의심된 바를 제출하여 지도인에게 해오(解悟) 얻기를 주의할 것이요, |
‘특별히’라는 말이 있지요. 문답은 이것저것 얼마든지 물을 수 있습니다. 적어서 제출하는 것은 특별히 의심나는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리 간에, 경전에 의심나는 것, 공부하다가 의심나는 것을 지도인에게 해오를 얻으라는 것이겠죠. 자연현상이나 경계나 경전을 보거나, 신심 없는 사람과 이야기하다보면 의심이 안 드나요? 흔들릴 때가 없으세요? 특별히 의심나는 것은 즉흥적인 것이 아닙니다. 질문을 하는 것, 해오를 얻는 것도 요령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심사숙고해서 해야 합니다. 내일 그 질문을 생각해도 생각이 날 것인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루 지나면 뭘 질문했는지도 까먹을 것을 질문하면 안 되겠죠. 질문은 막 던지면 안 됩니다. 평등한 관계에서는 질문을 해도 되지만 지도인을 모시고는 막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생활상에 있는 것도 질문할 수도 있겠죠. 질문이라는 것이 묘한 것이 있습니다. 질문을 주고받는 관계가 돈독해지면서 기운이 통하고 정이 통합니다. 예비교무들이 남녀 간에 이야기가 잘 통해요. 그러다가 둘이 나갑니다. 여기서는 의심이 들면 적어서 지나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연마하고 연마해서 그 속에서 이치를 찾아내고 해오를 얻어나가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무엇을 시키면 시킨 대로만 하시나요? 어떤 건을 보면 먼저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해 놓은 것과 윗사람이 말한 것과 같으면 같으니 스스로 좋고 다르면 어떤 것이 효과적인지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한 경계 겪을수록 통만법(通萬法) 명일심(明一心) 만법을 통해서 내 마음을 밝혀 나가는 것입니다. 항상 까닭이 있어야 합니다. 까닭 있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그 의심된 바를 제출하여 지도인에게 해오 얻기를 주의할 것이요, |
제출은 생각을 정리하라는 말입니다. 본인이 제출하려고 적다보면 정리가 됩니다. 일기도 비슷하죠. 해오를 얻는다는 것은 감각감상을 써서 심신작용을 써서 얻을 수 있습니다. 해오는 대각은 아니라 소소한 깨침이죠. 무념하지 않고 주의하라고 하셨죠. 법회 공부방 끝나면 ‘항상 질문하세요’라고 하죠. 교당에는 설교 들으러만 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교화단, 스승과 함께 서로서로 공부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왜 질문 안하느냐 물어봤어요. 별로 의심이 안 걸린다 대답합니다. 의심이 있어도 그 의심을 구체화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번뇌가 하루에 오만 가지 나온다고 합니다. 어제 생각한 똑같은 번뇌를 오늘 또 한다고 해요. 이 번뇌를 모아 모아서 하나로 귀일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번뇌가 의심이 되죠. 그리고 지도인과 교법에 대한 신심이 있으면 묻게 되어 있습니다. 질문이 묻고 답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속에 신뢰관계, 기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도인도 각 분야에 스승님이 있겠죠. 지자본위에 나오듯이, 솔성의 도와 인사의 덕행, 모든 정사, 생활에 대한 지식 등은 각 분야의 스승님에게 물어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문답감정 해오의 효과
사반공배(事半功培)라고 일은 반만 했는데 그 공덕은 몇 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전에 많은 선진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나도 궁금한 것이 있는데 이미 그분이 물어보셨고 대종사님이 기가 막힌 대답을 하셨지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저는 질문을 잘 하고 많이 한 사람이 예쁩니다. 그 사람이 공부심이 있는 사람이죠. 깨어있어야 묻고, 생각이 있어야 묻고, 상이 없어야 묻고, 서원을 이루려는 신심이 있어야 묻습니다. 질문한 것 몇 개만 예로 드리겠습니다.
대종경 제3 수행품(修行品) 17. 양도신(梁道信)이 여쭙기를 「대종사께옵서 평시에 말씀하시기를, 이 일을 할 때 저 일에 끌리지 아니하며, 저 일을 할 때 이 일에 끌리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하는 그 일에 마음이 편안하고 온전해야 된다 하시므로 저희들도 그와 같이 하기로 노력하옵던 바, 제가 이 즈음에 바느질을 하면서 약을 달이게 되었사온데 온 정신을 바느질을 하면서 약을 달이게 되었사온데 온 정신을 바느질 하는데 두었삽다가 약을 태워버린 일이 있사오니, 바느질을 하면서 약을 살피기로 하오면 이 일을 하면서 저 일에 끌리는 바가 될 것이옵고, 바느질만 하고 약을 불고하오면 약을 또 버리게 될 것이니,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는 것이 공부의 옳은 길이 되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때 약을 달이고 바느질을 하게 되었으면 그 두 가지 일이 그 때의 네 책임이나 성심성의를 다하여 그 책임을 잘 지키는 것이 완전한 일심이요 참다운 공부니, 그 한 가지에만 정신이 뽑혀서 실수가 있었다면 그것은 두렷한 일심이 아니라 조각의 마음이며 부주의한 일이라, 그러므로 열 가지 일을 살피나 스무 가지 일을 살피나 자기의 책임 범위에서만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방심이 아니고 온전한 마음이며, 동할 대 공부의 요긴한 방법이니라. 다만, 내가 아니 생각하여도 될 일을 공연히 생각하고, 내가 안 들어도 좋을 일을 공연히 들으려 하고, 내가 안 보아도 좋은 일을 공연히 보려 하고, 내가 안 간섭하여도 좋을 일을 공연히 간섭하여, 이 일을 할 때에는 정신이 저 일로 가고 저 일을 할 때에는 정신이 이 일로 와서 부질없는 망상이 조금도 쉴 사이 없는 것이 비로소 공부인의 크게 꺼릴 바이라, 자기의 책임만 가지고 이 일을 살피고저 일을 살피는 것은 비록 하루에 백천만 건(件)을 아울러 나간다 할지라도 일심 공부하는 데에는 하등의 방해가 없나니라.」 |
훈타원님께 직접 들었습니다. 바느질을 일심으로 했더니 약이 타버렸어요. 마음이 끌려버린 것인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공부한 것이냐 질문을 드렸어요. 대종경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대종사님이 엄청 칭찬해주셨어요. 그래서 복합유념에 대한 법문이 나온 것입니다. 얼마나 고맙습니까. 대종경 제2 교의품 3장에도 보면 대종사님 아드님이신 박광전 선진님이 일원상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서 여쭤봤습니다. 금강경에도 17장에 이 마음을 어떻게 그 마음을 주하고 항복받냐고 물어요. 부처님이 ‘착하고 착하다’라고 먼저 말씀하세요. 질문하는 것이 착하다고 하신 것이죠.
대종경 제14 전망품(展望品) 16. 최 도화(崔道華) 여쭙기를 「이 세상에 미륵불(彌勒佛)의 출세와 용화회상(龍華會上)의 건설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사람이 많사오니 미륵불은 어떠한 부처님이시며 용화회상은 어떠한 회상이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미륵불이라 함은 법신불의 진리가 크게 들어나는 것이요, 용화 회상이라 함은 크게 밝은 세상이 되는 것이니, 곧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의 대의가 널리 행하여지는 것이니라.」 장적조 여쭙기를 「그러하오면, 어느 때나 그러한 세계가 돌아오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지금 차차 되어지고 있나니라.」 정세월(鄭世月)이 여쭙기를 「그 중에도 첫 주인이 있지 않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하나하나 먼저 깨치는 사람이 주인이 되나니라.」 |
미륵불(彌勒佛)과 용화회상(龍華會上)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최도화 선진님께서 여쭤보시면 대종사님이 대답하시죠. 그러면 언제가 되겠냐고 장적조 선진님이 묻지요. 차차 된다고 하시니 정세월 선진님이 누가 주인이냐고 묻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법문입니까. 대종사님뿐만 아니라 질문을 통해 해오를 얻은 이 세 어른들이 너무 고맙습니까.
질문 1) 의심난 것을 물어보면 더 생각해 보라며 답을 해주시지 않는 이유는?
답을 바로 안 알려줄 때도 있어요. 생각을 너무 안하고 묻거나 질문이 잘못되었을 때나, 아직 답해주지 않는 것이 본인에게 좋을 때 안 해주기도 합니다. 소를 물가에 데려다만 주지 먹여주진 않죠. 자신이 먹어야 하죠. 깨달음의 세계도 안내를 해주지만 자기가 뚫고 들어갈 길이기 때문에 때로는 안 해주는 것이 오히려 자비일 수 있다는 것이죠. 구정선사도 대종경에 나오고 선외록에 자세히 나옵니다.
대종경선외록(大宗經選外錄) 12.은족법족장(恩族法族章) 5절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큰 도를 구하기 위하여 큰 신성을 바친 사람은 제 몸과 제가 가진 물질과 제 정성을 아끼지 않나니 만일 아낌이 있다면 참 신성은 아닌 것이다. 옛날에 구정(九鼎) 선사는 부유한 가정에 두 부인을 거느리고 살면서 큰 장사를 하는데, 하루는 비단과 백목 수백 필을 말에 싣고 어느 재를 넘다가 쉬고 있었다. 그때 어떤 거지 중 한 사람이 엷은 옷에 떨면서 지나갔다. 구정은 자비심이 일어나서 그 중에서 백목 한 필을 주려 하다가 아까와서 못 주기를 몇 차례 마음 속으로 반복한 후에 큰 힘을 써서 한 필을 떼어 주어 보내고 마음에 쾌활함을 금치 못하였다. 얼마 후 어떤 거지 한 사람이 자기가 스님에게 주었던 그 백목 한 필을 어깨에 걸치고 고개를 넘어왔다. 구정이 이상하여 그 이유를 물은즉 거지가 말하기를 `이 고개 너머에서 젊은 스님 한 분이 나를 보고 네 옷이 내 옷보다 더 급하니 이것 갖다 옷 지어 입으라고 주었다` 한다. 구정이 그 말을 듣고 나니 가슴이 벙벙하고 머리가 무거워서 큰 매를 맞은 듯이 스스로 부끄러웠다. 자기 재산을 전부 계산하면 백목이 수천 필인데 그 중에서 한 필 주는 것도 그렇게 힘이 들고 애가 쓰였거늘 그 스님은 한 필 얻어 가지고 가던 백목을 거지에게 주는데 그렇게 썩은 새끼 떼어 주듯 하니, 그 분이 필시 큰 보물을 갖춘 도인이로구나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끌고 가던 거마와 주단 포목을 모두 재에다 내버려 두고, 맨몸으로 그 스님을 따라가서 예를 올리며 제자되기를 간청하였다. 그 스님이 말하기를 `그대가 지금의 이 마음을 평생토록 계속 하겠다고 생각되면 따라와 보고 만일 중간에 변동이 있게 생겼으면 애당초에 그만 두라`고 하였다. 구정이 평생토록 스님을 따르겠다고 서원하고 스님의 보따리를 받아 짊어지고 해가 질 때까지 굶으며 걸어서 스님의 절로 찾아가 보니, 세상에 없는 빈찰(貧刹)이었다. 양식도 없고 나무도 없을 뿐 아니라 늙은 자기가 자식 같은 그 스님을 시봉하게 되었다. 그 스님은 방에 들어가서 명령하기를 `내가 발을 좀 씻고자 하니 물을 데워 오되 솥이 잘못 걸려 있으니 솥을 먼저 고쳐 걸으라`고 하였다. 몹시 춥고 시장하나 할 수 없이 언 흙을 파서 찬물에 이겨가지고 솥을 고쳐 걸었다. 그런데, 스님이 나와서 보고 `솥이 잘못 걸렸으니 다시 고쳐 걸라` 하며 뜯어 고치게 하기를 밤새도록 아홉 번을 하였다. 스님이 드디어 허락하시고 물을 데어다 발을 씻고 그 솥에다 밥을 지어 오게 하여 먹은 후에야 비로소 구정(九鼎)이라는 법호를 내려주며 시봉을 하라 하였다. 구정은 그런 후로 수십년간을 젊은 스님에게 일체 시봉을 드리면서 스님을 오직 큰 도인으로 알고, 믿고 의지하고 살아갈 뿐이요 별다른 법문 한번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젊은 스님이 중병이 들어서 임종이 가까와지는지라 최대의 정성을 바쳐서 간병을 계속하다가, 우연히 한 생각을 얻게 되었다. 스님이 이치를 깨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깨쳐 알아야 하는 것임을 확철 대오하였다. 그 후 구정은 모든 사리에 막힘이 없어져서 큰 회상을 펴고 수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신심과 정성을 스승에게 아끼고 있지나 않는가 생각하여 보고 구정 선사를 표준삼아 다시 없는 신성을 드리대어 보라." |
대종사님께서는 구정선사를 표준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솥을 9번을 걸어서 구정이라는 법호를 내려줍니다. 그러고 수십 년을 모셨는데 스님이 법문은 하나도 안 해주셨다고 해요. 신의 세계라는 것은 스승님에게 바치는 것이지만 결국은 내 안의 부처님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한 감정에 속아버리고 자신의 생각과 주견에, 업장에 속아서 중간에 벗어납니다.
대산종사 3집 제1편 신성(信誠) 27.스승의 은혜 말씀하시기를 「이 회상 만났을 때 부지런히 공부하여 성불(成佛)하고 좋은 인연 맺어 놓아야 한다. 만일 음시대(陰時代)를 만나 성현님께서 아무도 모르게 다녀가시면 어떻게 제도받겠느냐. 양시대(陽時代)에 나오셔서 회상을 펴셨을 때 성불하고 인연을 잘 지어 놓아야 한다. 불성(佛聖)들이회상을 펴시고도 십분의 이나 삼 정도 나타내고 가신다. 그러니 우리가 그 깊은 뜻을 어떻게 알겠느냐? 우리들의 작은 소견으로 계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느냐. 마치 두 발로 걸어가는 사람이 날아가는 비행기 속도를 측량하는 것과 같다. 성현을 삼세 (三世) 정도는 모셔야 법 받는다고 대종사님께서 자주 말씀하셨다. 구정선사(九鼎禪師)가 훌륭한 도인이시다. 보통 도가에 입문하여 처음은 잘하다가 시일이 지나도 얻어지는 것이 없으면 스승이나 회상에 대하여 변심하는 수가 많은데 구정선사와 같은 일생을 마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업장(業障)이 두터운 사람은 이 쪽에서 손길을 뻗어 주어도 자기 재주나 고집으로 윗 스승의 손길을 받지 않고 계교하다 넘어진다. 그것이 무서운 업장인데 그것을 모르니 마음 아픈 일이다. [삼세의 업장을 법력으로 누르고 굴리는 사람은 회상에도 손꼽아 셀 정도다.] 하신 대종사님 말씀이 참으로 깊이 느껴진다. 부모은(父母恩) 가운데 대종사님 은혜가 크시다. 그것은 영겁에 죽어 가는 이 마음을 살려 주셨고, 영겁에 병든 마음을 고쳐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종사님은 일체 생령의 부모이시고 법부(法父)이시 고 심부〔心父=靈父〕이시고 은부(恩父)이시다.」 |
대산종사님은 보통 삼세의 업장을 법력으로 눌러서 굴리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를 통과하셔야 합니다. 간단합니다. 감정, 생각, 주견, 업력을 놓아버리면 됩니다. 이것들을 초월한 서원과 신심, 도심, 이 한 마음이 있으면 통과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교당내왕시 주의사항 1,2,3조까지 했으니 앞으로는 교당에서 문답도, 감정도, 해오도 많이 얻으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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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당~!
감사해요~ 현승 교우님! 고생많으셨어요~!
도자부 최강조합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