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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카스(박광열)님
주 안에서 반가움을 가지며
질문과답을 통해
님과 복음의 친밀한 교제를 갖게 됨에
주께 감사드립니다.
님은 누가복음 14장에서 말씀 해 주시고 있는 내용이 지닌 의미의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기 질문을 해 주시면서 그 답변을 쉽게 설명하여 줄 것을 청했습니다.
이에 님이 질문하신 내용을 먼저 보겠습니다. 님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게 된 설명을 해 나가면서 알고자 하시는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궁금한 부분이 14장입니다. 누가복음을 14장, 성경학자들은 이 14장을 네 구분으로 해 놓았더라구요. (1) 1절에서 6절까지는 수종병 든 사람을 고치시다. (2) 7절에서 14절까지는 끝자리에 앉으라. (3) 15절에서 24절까지는 큰 잔치의 비유. (4) 25절에서 35절까지는 제자가 되는 길로 구분되어 있더라구요.
이 네 가지로 구분되어 있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내용을 이해 할 수 없군요.
* 수종 병 든 사람을 고치신 이유라든가
* 끝자리에 앉으라 하신 것은 겸손하라고 말씀하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세상 것으로 갚을 수 없는 은혜를 그들에게 베풀어야 나에게 복이 된다는 뜻인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고,
* 큰 잔치의 비유는 그 잔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목사님 설교에서는 계시록에 나오는 천국잔치라고 하기도 하시고, 초청받은 자들의 거절은 선택받은 자들의 거절이라고 하기도 하고, 아무에게나 값싼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등등
만약 선택받은 자의 거절이라면 불가항력적은 하나님의 은혜가 맞는 것인지?
* 제자가 되는 길에서는 이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인가요? 까지는 그런대로 수긍이 가는데, 28절부터 어렵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배당 건축에 적용해서 교회가 믿음을 내세워서 무리하게 건축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성명하기도 합니다만은 그 설명이 맞는 것인지?
또 임금이 대적할 수 없는 적이라면 미리 계산하여 화친을 청하지 않겠느냐 하신 말씀에 이어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것은 제 상식으로는 연결이 되질 않고, 소금의 비유도 그렇고, 거의 다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직 저는 성경에 대한 깊이가 없으므로 쉽게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님이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님이여!
님이 질문한 누가복음 14장은 님이 본 바대로는 성경학자는 네 부분으로 나누었다고 하였습니다만, 문장 구조에 의해 단락을 나눈다고 하면 (1) 1-6절, (2) 7-11절, (3) 12-14절, (4) 15-24절, (5) 25-30절, (6) 31-33절, (7) 34-35절, 이렇게 일곱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님이 제시한 성경학자가 구분한 네 부분에 의하여 님이 질문한 내용을 따라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님이 질문한 것에서 보게 되듯이 질문의 내용이 성경 네 부분을 가지고 하는 것이기에 네 개의 질문입니다만, 사실 질문 자체는 마지막 네 번째 질문의 경우는 네 번째로 질문하는 하나의 질문이 아니고 이 네 번째 질문 안에 세 개의 질문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질문이 전체로 보면 여섯 개나 됩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여섯 개의 설교에 해당하는 양이 필요한 답변이 되어야 하는 적지 않은 양입니다. 단답형으로 답변을 드리기엔 그럴 내용이 아니며, 단답형으로서는 충분한 이해를 도울 수 있기엔 미흡할 것이기에, 설명이 길어 그 양이 많더라도 시간을 갖고 독서하듯이 찬찬히 읽으시며 님이 알고자 하는 궁금증이 해소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먼저 첫 번째 질문인 ‘눅 14:1-6절 : 수종병 든 사람을 고치시다.’에서 님이 알고 싶어하신‘예수께서 수종병을 고치신 이유’입니다.
누가복음 14장 1-6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은 수종병 든 사람을 예수께서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여 고치신‘수종병’은 피부병의 일종입니다. 신체의 어떤 부위에 물이 고여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가는 병이죠. 예수님 당시에 이 병은 하나님의 저주로 생긴 병이라고 여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유전에 의하면 이 병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서 위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 치료해도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안식일에는 치료를 금한 병이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수종병을 치료하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종병에 걸린 사람을 예수께서 안식일에 고치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수종병에 걸린 사람을 고치는 것은 불법이었던, 그래서 안식일에는 수종병에 걸린 사람을 고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일로 지켜 왔던 것을, 예수께서 안식일에 수종병 걸린 사람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심으로 안식일법을 어겨 깨뜨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종병 걸린 사람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것을 두고 적지 않은 교회에서 행하는 설교는 대체적으로 수종병을 비롯한 모든 질병 걸린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 이름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들이 걸린 병을 깨끗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몰고 갑니다. 그래서 그렇게 될 수 있으니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자신들의 병을 고쳐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며, 구하는 자는 구한대로 응답 받을 것이라고 하며,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좋은 믿음에 있는 자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수종병 든 사람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것이 그러한 것에서 있는 것이겠는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알고 있다면 이는 참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며, 그러한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져나가는 것이라면 그 믿음은 참으로 잘못된 믿음입니다.
수종병을 앓는 사람을 고치는 이적을 예수님이 행하신 것은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바리새인과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 율법교사들은 수종병에 걸린 사람을 고치는 치료를 하는 것을 안식일에는 하지 못할 일로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 규정에 의해 지키도록 해온 전통에 따라 수종병 걸린 사람을 안식일에는 해서는 안 된다고 대대로 알고 있으며, 그렇게 대대로 백성들에게 가르쳐왔기에, 수종병에 걸린 사람을 고쳐 그 병으로부터 풀어 자유하게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안식일에는 계속해서 붙잡아 두고 그 얽매임에서 억압 받음에 있게 하는 잘못을 하고 있었습니다. 즉, 안식일 규정이 하나님께서 본래 내신 의도인 하나님의 구원(해방/자유)에서 벗어나 오히려 사람들의 몸과 그 생명을 속박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께서 수종병 든 사람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것에는 단지 그의 신체를 피부병으로 억압하고 있던 질병으로부터 풀려나게 하여 자유한 몸으로 자신 있게 살아가게 해 주시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유대인들이 깊이 인식하고 있어야만 하는‘죄 인식’에 대한 이해에 의한‘죄로부터 구원하실 메시야’문제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께서 본문에 이르기까지 해 오셨던 구속 사역의 행적 중에서 귀신들렸던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11:14-26), 이번 수종병 걸린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셨듯이 또한 안식일에 18년간을 중병에 걸린 여인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시는 것에서(13:10-17) 죄 아래 있는 자들을 사단이 사로잡고 종으로 삼고 있는 사단에게 매여 있던 자를 사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풀어주는‘사단, 곧 마귀로부터 구원하실 메시야’를 알게 해주시는 예수님 자기 계시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악한 세대에 있는 그들의 유전에 따른 잘못된 관념을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는 것에서 나타내신 본래의 의도로 바로 잡아 주시는 것에서 질문하기를“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앞서에서 있은 일인 예수께서 회당에서 안식일에 강론 중 18년 동안이나 중한 병에 걸려 있던 한 여자를 고치는 이적을 행하셨을 때 회당장이 크게 분노하며 무리를 향하여 일할 수 있는 날이 한 주간에 엿새씩이나 있으니 그 엿새 동안에 어느 날이고 와서 고쳐달라고 하면 되는데 왜 하필이면 안식일에 고쳐달라고 하느냐면서 안식일에는 안 된다고 하였던 사건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가 안식일에 자신이 수종병에 걸린 사람을 고치는 이적을 행한 것에 어떤 행동으로 예수님을 대할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수종병 걸린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고는 그를 낫게 하여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묵묵부답에 있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예수님의 이 이야기에도 이렇다 저렇다 하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반박할 어떤 빌미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을 통해서 죄 아래 있어 마귀의 차지가 되어 있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에는 안식일법이 규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엿새간의 창조 사역을 끝내어 완성하심으로 이제는 여섯째 날까지 만들어오시던 일을 그치셨다는 것에서, 그래서 이제 창조하시는 사역을 그만하셨다는 것에서 안식이 말씀되고 있는 것에 근거하고 있습니다(창 2:2-3). 그리고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이 안식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휴일이 되어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고 하는 개념을 갖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 되었던 430년의 기간을 끝내고 애굽에서 빠져나오게 하신 유월절이 시작된 밤에서 시작되어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출애굽 한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것에서 이레 동안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다가 이레째 되는 날은 여호와의 절기로 갖는 무교절을 지키게 하셨으며(출 12:-13:10), 그 절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섯째 다음 날이 안식일임을 주지시켜 안식일임을 인식할 수 있게 하신 후(출 16:22-30:),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기록하신 열 가지의 언약인 십계명을 주셔서 제4계명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을 명시화 해 주신 것에서 입니다(출 20:1-17). 하나님은 이렇게 율법의 언약인 십계명의 제4계명에서 안식일을 지키게 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 자신과 그의 자녀, 그리고 그의 소유인 종과 소, 나귀 등 그가 기르는 가축, 그리고 그의 집에 머물고 있는 나그네(외국인)까지도 똑같이 안식하게 하셨습니다(출 20:8-12; 신 5:14-15). 그 모두는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그들의 안식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안식에 자신이 택한 백성이 영원히 있게 하기 위해서 열 가지 언약인 언약의 율법, 곧 십계명이 지닌 뜻(하나님의 본의)에서 약속해 주심으로 바라봄에 있게 하신 메시야를 보내셔서 죄와 사단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을 구속 사역을 수행하게 하십니다.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엿새 동안은 물론이거니와 안식일에도 죄와 사단의 종 되어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압제자로부터 해방시켜 풀려나게 하여 자유한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레째 되는 날에는 안식하게 하신 안식일 계명이 의도하고 있는 죄, 불의가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충만한 참된 안식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거룩한 안식일을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낸 장로들의 전통인 안식일법에 의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사단으로부터 풀려나게 하는 구원 사역을 못하게 막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우물에 빠진 아들과 가축을 비유로 말씀하심으로써 이 악한 세대를 책망하시는 것이요,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에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가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안식일법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만든 안식일 율법을 거스림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대적하는 악을 행함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실체를 안식일에 수종병 든 자를 고치시고“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라고 물으심으로 그들의 마음에 숨어 있는 악한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내심으로 그들을 부끄러움에 두셨으며, 예수님의 이 물으심에 그들 중 누구도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함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악함을 스스로 인정함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안식일에 수종병 든 사람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에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하신 것이 지닌 뜻인 본의적 의미를 알게 해주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누구신지를 알리시는 예수님 자기 계시의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에 있는 당시의 악한 세대로 규정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율법교사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악함에 있었는지를 알게 해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2. 두 번째 질문인‘눅 14:7-14절 : 끝자리(말석)에 앉으라.’에서 님이 알고 싶어 하신“이렇게 끝자리에 앉으라 하신 것은 겸손하라고 말씀하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세상 것으로 갚을 수 없는 은혜를 그들에게 베풀어야 나에게 복이 된다는 뜻인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고…(그러니 이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인지 알려 주세요)”라고 한 것에 대한 답변입니다.
누가복음 14장 7-14절은 사실상 두 개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7-11절이며, 이것이 님이‘끝자리에 앉으라’는 제목을 말해준 내용입니다. 그리고 12-14절은 7-11절에 이어서 연결성을 갖고 예수께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이야기로서 7-11절과는 구분되는 독립된 내용으로 예수께서 자신을 초대한 주인에게 초대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초대해야 할 사람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초대한 자의 의중이 의롭지 못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님의 질문에 대한 여기서의 답변은 7-11절에 국한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님이 알고 있는 누가복음 14장 7-11절의 제목인‘끝자리에 앉으라’는 제목은 본문의 내용에 나오는 이야기를 갖고 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정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곳에서 예수께서 해주시는 말씀은 예수께서 초청을 받은 식탁의 자리에 함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저마다 높은 자리, 곧 상석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행위가 그들 자신에게 어떤 부끄러움으로 있게 할 것인지를 알게 해 주시는 말씀에서 초청을 받거든 차라리 가장 끝자리로 가서 앉으라는, 곧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말씀을 해주시며, 이러한 이야기를 해 주시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에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제목을 잡는다면“식탁의 상석에 앉으려는 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보다 적절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제목에 너무 마음 쓰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본문이 지닌 의도, 곧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해 주시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파악하여 그 이해에 있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내용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에 초대를 받아 음식을 잡수시러 바리새인 지도자의 한 사람 집에 들어가셨을 때, 그리고 이곳에서 수종병이 든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그 자리에는 식사 초대를 받은 다른 손님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자리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아랫자리보다는 윗자리를 선호하였습니다. 이는 아마도 주인과 가까운 자리에 앉고자 해서 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나서 예수님은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너희는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마라. 혹시 너희보다 더 높은[귀한] 사람이 초청받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높은 사람이 왔는데, 그가 앉아야 할 자리에 너희가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주인이 너희에게 다가와서는‘죄송합니다만, 이 자리는 손님이 앉을 자리가 아닙니다. 이 자리는 손님 앞에 계신 분을 위해서 준비된 자리입니다. 하오니,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시고 다른 자리를 찾아 앉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낮은 자리로 내려가 앉게 되는 창피를 당할 것이 아니냐. 그러니 초청을 받으면 너희는 차라리 맨 끝에 있는 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주인이 와서‘친구여, 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까? 그러지 말고 어서 이리로 올라와 당신을 위해서 준비한 자리에 앉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는 다른 모든 손님들 앞에서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을 가지고 대개의 경우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설교 되고 있으며, 성도들 또한 그러한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는 님이“이렇게 끝자리에 앉으라 하신 것은 겸손하라고 말씀하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세상 것으로 갚을 수 없는 은혜를 그들에게 베풀어야 나에게 복이 된다는 뜻인 것 같은데, 잘 모르겠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겠는지요. 아닙니다. 본문은 그 핵심적 구절이 마지막 절에서 보는“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에 있으며,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에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를 위하여 정해지고 준비된 환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는 앞서 나온 안식일에 수종병을 예수께서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것에서 죄와 사단으로부터 풀려난 자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매임에서 풀려난 자는 더 이상 사단이 그의 주인으로 있지를 않으며 따라서 사단의 나라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그의 주인이 되시며 그를 하나님의 나라에 받아들이시고 한 자리에 그를 앉게 하십니다. 그에게 베풀어지는 이 모두는 예수께서 베푸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자의 모습이 적절하게 비유되고 있는 것이‘끝자리’, 곧 ‘낮은 자리’란 표현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해 주시는 말씀은 그를 위해 준비하신 정해진 자리를 표현하는‘높은 자리’입니다. 그래서“어서 이곳으로 올라와 앉으십시오. 이곳이 당신이 앉을 자리입니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낮은 자리’와‘높은 자리’는 초청 받은 자의 마음 상태가 겸손과 교만을 나타내거나, 또는 서로 비교가 되는 명예가 있고 권위가 있는 자리를 가지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자들 중에서 부끄럽게도 낮은 자리에 앉을 자가 있는가 하면 영광스럽게도 높은 자리에 앉을 자가 각각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쉽게 보는 결혼 잔치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잔치를 배설한 주인의 환대를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구속 사역에 의해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사단으로부터 풀려나 그들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소망임을 알게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의 행위에서 보는 바인, 죄와 사단을 멸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며, 예수님을 반대하여 예수님이 행하시는 구속 사역을 훼방하여 가로 막으며, 이를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내세워 마치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들이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인 양 보임으로 사람들로부터는 칭찬을 들으며 존경을 받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려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탐하여 앉고자 하는 자리가 결코 그들이 앉을 자리가 되지 못하고 그 자리로부터 쫓겨나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수치를 겪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을 왜곡시켜 겸손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으로나, 낮은 자리에서도 묵묵히 충성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존귀히 여겨 높은 자리에 앉게 해 주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든지, 자기를 비우고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여 다 바침으로 가난하고 비천한 낮은 자의 자리에 처하게 된 자를 하나님이 축복하여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게 하신다는 등의 따위로 그릇되게 말해서는 안되겠습니다.
3. 세 번째 질문인‘눅 14:15-24절 : 큰잔치의 비유’에서 님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인“그 잔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목사님 설교에서는 계시록에 나오는 천국잔치라고 하기도 하시고, 초청받은 자들의 거절은 선택받은 자들의 거절이라고 하기도 하고, 아무에게나 값싼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등등 만약 선택받은 자의 거절이라면 불가항력적은 하나님의 은혜가 맞는 것인지요?”라고 한 것에 대한 답변입니다.
누가복음 14장 15-24절은 님이 제목을 말한 바인‘큰 잔치의 비유’입니다. 이는 16절에서“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큰 잔치의 비유’라고 제목을 할 때, 이 큰 잔치가 어떤 것에서 베풀어지는 큰 잔치인지에 대하여 모호합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큰 잔치의 성격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비유가 말해지게 되는 본문 안에서 이러한 큰 잔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에 의해서 큰 잔치가 갖는 성격을 파악하여 그 이해에 있으시면 됩니다. 그것은 15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그러자 예수께서‘큰 잔치의 비유’를 드는 말씀을 시작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큰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은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을 통해서 알려 주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마련하고서는 종을 보내어 많은 사람을 초청하였다. 그 그런데 잔치에 참석할 시간이 됐을 때 정작 초청 받은 사람들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한 사람은 이제 막 밭을 사서 그곳에 가봐야 하기 때문에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다른 한 사람은 방금 소 다섯 겨리를 샀기 때문에 그 소들을 부려보아야 하므로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한 사람은 이제 막 결혼을 했기 때문에 신부와 함께 있어야 해서 잔치에 가지 못하겠다며 주인에게 전해주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종으로부터 들은 주인은 크게 분노하여 그 종에게 시내의 큰 거리와 골목에 나가 가난한 자, 몸이 불편한 자, 저는 자, 앞을 보지 못하는 자 할 것 없이 다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종이 주인이 시킨 대로 하였으나 그래도 아직 자리가 남자 주인은 다시 그 종에게 길과 산울타리로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데려다가 자리를 채울 것을 지시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비유의 핵심이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큰 잔치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는“큰 잔치를 배설한 주인이 처음에 초대했던 사람들 중에는 주인이 마련한 잔치를 맛볼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배설하고 아들을 보내서 그 잔치에 참석할 것을 초청하시고 있습니다만, 예수님이 비유에서 이야기 해 주시고 있는 것에서 보는 대로 유대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늘에 계신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의 나라의 통치를 받는 것에 기쁨을 가지며 소망 중에 바라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밭이며 소이며 가정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이 모두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로의 청함을 받은 것에 있는 것보다도 앞서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이 유대 백성들을 사로잡고 있는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며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 받고 참석할 것을 청함을 받고서도 그 거부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주는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큰 잔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것이 식탁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사람은 복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시작되었지만,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하시는 말씀을 바리새파의 두령인 주인의 초청을 받고 식사하기 위하여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 곧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고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들으라고 큰 잔치 비유를 이야기 해주신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악의적으로 예수님을 배척함에 있는 그들은 하나님 나라 잔치 떡을 먹는 복을 받음에 있지 못하고 이곳에서 내쫓김의 화를 당함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러한 자신들을 결코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알아 듣고 그 깨달음에 있어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로 충만함에 있는 은혜를 입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주신 말씀을 님의 질문에 보면 어떤 분(목사)은 계시록에 나오는 천국잔치라고 하기도 하고, 초청받은 자들의 거절은 선택받은 자들의 거절이라고 하기도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가당치 않은 설교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참으로 잘못된 설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에서의 하나님 나라 잔치를 요한계시록에서 언급해 주시고 있는 천국(의 잔치)과 연계하는 그 자체는 이의를 제기할 것은 아니지만, 지금 예수님은 천국의 잔치와 이곳의 참여에 있는 복에 초점을 두고 그 초청에 있음을 다루는 것에서 해 주시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들을 하나님 나라 잔치 떡을 먹는 복 있는 자로 여기고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예수님을 배척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을 부인함에 있는 악함에 있는 한 결코 하나님 나라 잔치의 떡을 맛볼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알려 주시는 것에서 큰 잔치 비유를 들어 이야기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말이죠. 이 비유를 가지고 초청받은 자들의 거절은 선택받은 자들의 거절이라고 하다니요? 선택 받은 자들의 거절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님이 말한 바대로 하나님의 선택은 불가항력적 은총 교리로 다루어지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은혜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힘으로 받아들이고 거부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큰 잔치 비유에서의 초청 받은 자들의 거부를 선택 받은 자들의 거절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를 완전히 곡해하고 있는 것으로, 참으로 가당치 않습니다. 큰 잔치 비유에서의 초청 받은 자들의 거절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의 거절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가기 위하여 음모에 있으며 예수님을 사로잡기 위하여 책잡을 기회를 엿보고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악함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아무에게나 값싼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를 물으며 궁금해 하였는데, 복음을 값싼 복음, 또는 이와는 반대인 값비싼 복음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에서 하시는 구원은 유대인과 이방인,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나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나, 어른이나 어린아이에게나 그 누구에게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하시고, 그에 따라서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구원하시겠다는 약속 그대로 하시는 것에서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으며, 사람의 힘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신다는 것이 말해지는 것이죠. 그리고 이는 금으로나 은으로가 아닌, 오늘날로 말하면 돈으로가 아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얻는 구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에서 값없이 받는 구원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에 대한 바른 이해에 있도록 하여야겠습니다.
4. 님은 누가복음 14장에서의 마지막 질문으로“25절에서 35절까지는 제자가 되는 길로 구분되어 있더라구요.”라고 하면서,“제자가 되는 길에서는 이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인가요? 까지는 그런대로 수긍이 가는데, 28절부터 어렵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배당 건축에 적용해서 교회가 믿음을 내세워서 무리하게 건축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성명하기도 합니다만은 그 설명이 맞는 것인지? 또 임금이 대적할 수 없는 적이라면 미리 계산하여 화친을 청하지 않겠느냐 하신 말씀에 이어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것은 제 상식으로는 연결이 되질 않고, 소금의 비유도 그렇고, 거의 다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선 누가복음 14장 25-35절에 대해서 설명드립니다. 님은 이곳을 한 본문으로 보았습니다만, 앞서의 서두에서 제가 구분하여 설명해 드렸듯이 이 구절은 사실은 셋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입니다. (1) 25-30절, (2) 31-33절, (3) 34-35절입니다. 이 모든 곳은 다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님은 한 질문에서 이곳 세 곳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갖는 의문을 한 덩어리로 뭉퉁그려서 질문하면서도 궁금해 하는 세 개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상은 세 곳 본문에서 갖는 의문을 각각 질문하고 있는 세 개의 질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님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달라고 하였는데, 그러려고 하면 여기에서만도 다시 세 편의 설교에 해당하는 답변이 되는 양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이 점을 인지하시기 바라며, 할 수 있는 한 너무 길지 않도록 하려고 합니다만, 그럼에도 충분한 설명이 되도록 답변하는 것이 되게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5-35절에서 첫 번째인 25-30절은‘망대 건축자의 비유’입니다. 두 번째인 31-33절은‘임금(왕)이 치르는 전쟁 비유’입니다. 세 번째인 34-35절은‘맛을 잃은 소금 비유’입니다. 이 세 곳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비유는 각각의 비유이긴 하지만 이 두 개의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는 같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두 개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시는 것은 같은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무릇 내게 오는 자가……하지 않으면(……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의 문장형식에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비유는 그렇게‘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에 있는 자의 궁극적 결말의 형편, 그 처지가 어찌 될 것인를‘맛을 잃은 소금’을 들어서 비유적으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첫 번째 비유인 25-30절은‘망대 비유’입니다. 내용은“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1)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게 된 건지요. 그것은“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즉 예수님이 초청 받은 집에서 나와 길을 가시자 수많은 무리를 이루는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것을 예수께서 보시고 말씀하시게 되었다는 거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수행하실 것에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체포되어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 죽음을 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시는 것인데, 그러한 예수님을 뒤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고 그 생각에 의해서 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에 대한 의식도 생각도 없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그들이 따른 하나님 나라의 주인(임금/왕)과 함께 하는 것에서 하나님 나라 잔치 떡을 먹는 참으로 행복한 자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본 비유 앞에서 이야기 해 주셨듯이 예수님을 배척함에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리고 이들의 가르침과 지도를 좇는 백성들은 그들의 악함으로 결코 그 복을 누림에 있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무리의 군중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나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럼으로써 하나님 나라 잔치 떡을 먹는 복 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고 하면 말이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그들도 함께 참예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종은 그의 주인과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법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있게 될 일이 이제 곧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눈앞에서 훤히 펼쳐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문을 받으시고 채찍을 맞으며 머리에 가시관이 씌어지고 해골의 산이라고 불리는 무섭고 두려운 곳인 골고다 언덕에 세워지는 형틀의 십자가에 달려서 양손과 양발목에 못이 박히며 조롱과 모욕을 당하며 고통스럽게 매달려 죽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뒤따름은 그 현장에 자신들도 함께 하는 것이지 않겠는지요.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그 일을 겪습니다. 예수께서는 홀로 그 일을 당하십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께서 여러 차례 예고하여 말씀해 오신 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십니다. 그리고 영광중에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온 세상에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 그 주 예수께서 아버지와 함께 성령님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해 가십니다. 성령이 임하신 자는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동참합니다. 예수님의 열 두 사도는 이 동참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였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그리고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열 두 사도는 자신의 모든 것에서 떠나 예수님과 함께 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걸으며자신에게 주어진 복음 사역을 수행하여 갔습니다. 이들은 한 장소에 머물러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그리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까지 그리스도 예수님을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것에서 그들을 이끄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랐습니다.그러니 말이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그리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함께 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께서 온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으로 받들어 고난 받으시고 죽음을 당하실 것이 정해진 대속주로서 지셨던 십자가를 그대로 따름에 있게 하실 것으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려 한다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예수께서는“……하지 않으면(……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해를 돕기 위해서 두 개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 하나가‘망대 건축자의 비유’입니다. 망대는 탑을 뜻하는데, 이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고 탑이 있는 성, 곧 건축물입니다. 이 망대를 건축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비유 내용의 초점은 그 망대를 건축하는 자, 그러니까 망대를 세우는 주인(건축주)를 가지고 하시고 싶은 이야기를 해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성을 건축하고 그곳에 보초를 두고 안팎을 살피는 일을 하기 위하여 망대를 짓는 성주(또는 왕)를 비롯한 건축 책임자가 소요되는 비용이 얼마나 될지를 충분히 검토도 해보지 않고 시작하여 기초만 닦고 얼마 못가 건축이 중단된 채 정작 건물을 완공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만일 그럴 경우는 건물은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건물 짓는 책임자는 무력한 자로 조롱과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비유의 의도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서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함으로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서 예수님을 따르면 그에게서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망대를 건축하는 자가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을 생각하지 않고 건축한다면 중도에 그만둘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는 예수께서 여러 차례 예고하신 것에서 하나님이 예수께 하실 일을 정하신 일을 드러내어 알려주신 십자가에서 이루실 구속 사역에 따르는 많은 사람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시나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일을 하시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 그는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그 죽음에 자신의 목숨도 함께 연합되어 있어 자신의 죄에 대하여서 함께 죽은 자가 되고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신 생명에 자신의 생명도 함께 연합되어 하나님 앞에 산 자가 될 것이었습니다(롬 6:1-10).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예수님을 따름에서 자신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을 보기에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때도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제자의 길을 갑니다. 그는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하는 것으로 취하신 그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갑니다. 그는 그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가 따르는 예수께로 그의 마음도 뜻도 힘도 목숨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것을 알지 못하여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보지 못하는 자는 예수님을 친 칼이 자신을 향할 때 예수님에게서 떠나 흩어집니다. 그가 따르려는 예수께로 그의 마음도 뜻도 힘도 목숨도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그리고 자기 목숨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할 이유를 갖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나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자신의 주이심을 시인함을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 있습니다.”(눅 14:15)라고 하는 말에“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눅 14:24) 라고 대응하는 말씀을 예수께서 하시고 나서, 이어서 큰 무리를 이루는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것을 보시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망대 건축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가 이러한 것인데, 님이 말한 바에서 보는,“어떤 이들은 예배당 건축에 적용해서 교회가 믿음을 내세워서 무리하게 건축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설명하기도 합니다.”는 것은 과연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 맞겠는지요. 어떻게 그러한 설명이 맞을 수 있겠는지요. 그러한 설명이 참으로 가당키나 하겠는지요.‘망대 건축자의 비유’는 예배당 건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수행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에 계신 것에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날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고 있는 내용을 알고 그 기억에 있으며 이로 인해서 가져야 생각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자기들에게 어떤 것인지를 알고 그 의식에 있어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아무 것도 없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을 때 그러한 그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는 것, 역설적으로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미워하여 예수님에게서 떠나 하늘의 영원한 것을 버리고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이 전부인 자기가 소유한 것을 붙들 것이기에 그에게서는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의 길은 그에게 있지 않을 것임을 알게 해 주시는 것이 입니다.
한편, 님은“또 임금이 대적할 수 없는 적이라면 미리 계산하여 화친을 청하지 않겠느냐 하신 말씀에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것은 제 상식으로는 연결이 되질 않고, 소금의 비유도 그렇고, 거의 다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망대 건축자의 비유’에 이어서 다시 또 하나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누가복음 14장 31-33절인‘왕이 치르는 전쟁 비유’의 이야기를 가지고 님이 질문한 것입니다. 이 비유는‘망대 건축자의 비유’에 이어지는 또 다른 표현으로 해 주고 있는 것이기에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는“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는 것으로 망대 건축자의 비유와 같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망대 건축자의 비유와는 내용 전개에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어떤 왕이 전쟁에 임할 때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자신의 전 군사를 동원하여 목숨을 내놓고 싸우지 않겠느냐는 것을 의도하고 있습니다. 왕은 2만 명의 적군을 1만 명의 군사로 어떻게 상대하여서 승리로 이끌 것인지를 신하들과 의논하고서 전쟁에 임하여 이순신장군이 말했던‘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의 정신으로 싸워 전쟁을 승리로 거둔다는 것으로 이러한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 목숨을 기꺼이 바쳐 전쟁터에 나가 싸우지 않는 한에는 왕은 사절단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는 수치를 당할 것이라는 것을 들어서“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쟁에 임하는 왕은 적은 수의 군사를 가지고서도 많은 수의 적군을 목숨을 다해서 싸워 승리로 이끌고자 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가 자기 소유를 버리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따름에서 오는 하나님 나라 잔치 떡을 먹는 기쁨의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가 자기 소유를 버리고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자가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을 따름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을 다 이루신 죄 용서와 영생하는 생명을 얻음에서 있게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님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또한 앞으로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계속해서 가져나가는 믿음에 있는 것은, 그래서 평생을 예수님을 믿는 자로 사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예수님을 사랑하며, 나아가서는 자기 목숨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입니다. 신명기 6장 4-5절에서 보게 되는“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언약 관계에 님을 두신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서입니다.
끝으로, 님이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질문한“……소금의 비유도 그렇고, 거의 다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했는데, 누가복음 14장 34-35절에서 해 주시고 있는 말씀으로, 이것을‘소금의 비유’라고 제목을 삼는 것은‘맛을 잃은 소금의 비유’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냥 소금을 가지고 비유로 든 것이 아니고 맛을 잃은 소금을 가지고 비유로 사용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지금까지 이야기해 오신 말씀을 마무리하는 결론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맛을 잃은 소금을 비유로 들어서 앞서 두 비유에서“무릇 내게 오는 자가……하지 않으면(……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하신 말씀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는 자들의 형편이 어찌 될 것인지를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소금이란 음식에 맛을 내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금이 맛을 지니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소금이 지니고 있는 맛을 잃어서 맛이 없는 소금이 있겠는지요. 그런데 만일 소금이 제 본질인 짠 맛을 잃는다고 하면 아무 가치 없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 예수님은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어버리면 소금을 무엇으로 짜게 할 수 있을 것이냐면서, 흙으로도 거름으로도 쓸 수가 없어서 다만 밖에 버려질 뿐이니 길을 왕래하는 이 사람 저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처지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고대 이스라엘에 있었던 상황에 의해서 인용하셨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짠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쓰레기로 취급되어 길에 버려지는가 하면 평평하여 사람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는 가옥의 옥상에 뿌려 흙을 딱딱하게 굳도록 만드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맛을 잃은 소금은 거름으로도 쓰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비유로 삼아서 당시 예수님을 따라 나서고자 하나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제자 됨의 속성이 없으므로 하나님 나라로부터 버려진 자의 비참함을 말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없이 하나님 나라 잔치의 떡을 먹는 행복에 있을 것을 생각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이며 부끄러움에 처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 비유에서 말씀하시게 되는‘맛 잃은 소금비유’에서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인 밖에 버려질 것이, 그래서 다만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인 것이 의도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질문에 대한 답변의 글을 마칩니다. 님이 누가복음 14장을 읽으면서 여기에 등장하는 여러 사건을 대하며 갖는 궁금증이다 보니 한 번에 여러 개의 많은 질문을 하는 경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보니 누가복음 14장 한 장 안에서 갖는 각각의 질문에 대응하는 답변을 드려야하므로 부득이하게 글의 내용이 대단히 긴 장문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답변을 전개해 나가는 설명이 흐트러지고 진부해진 것은 아닌지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읽기에 많은 시간과 인내의 수고가 들어가게 됨에 양해를 구합니다. 시간을 갖고서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 하나 하나씩 상대해 가시며 결국 누가복음 14장 전체를 이해하는데 뚜렷한 초점이 이끌어가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음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님, 그리고 본 글을 읽으시는 회원들께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 내용이 지닌 의미를 파악하여 올바르게 보실 수 있는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는 누가복음 14장 전과 후와의 연관에서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혹, 본 글의 답변으로도 충족되지 못하는 미흡한 부분이 있어 궁금증이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누가복음이 매주 계속해서 올려지고 있으니 이 여행을 통해 도움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답변해주신 글을 읽느라 감사의 인사가 늦었습니다.
감사하고 너무 많은 수고를 하게 해 드려서 죄송한 마음에 무어라 인사를 드려야 할지??
성경상식이 없는 저로서 그냥 간단하게 답변이 될 줄 알고 질문을 드렸는데, 너무나도 상세하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답변을 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매주 올라오는 글을 기다릴걸 하는 후회도 해 보았습니다.
답변해 주신 글을 프린트해서 몇 번 읽었습니다.
아직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매주 올리시는 글을 읽으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그 때에도 이해가 안 되면 다시 질문을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