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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17
#혜진의 아파트 현관 앞(밤)
혜진: ...
동원을 바라보는 혜진.
동원: ...
혜진을 바라보던 동원이 순간 부르르 떤다.
혜진: ...
버티듯 동원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혜진.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준수.
동원: (고개만 조금 돌려 준수에게) 집사람과 할 얘기가 좀 있는데.
준수: ... (혜진을 본다)
혜진: (준수를 보더니) 저녁 잘 먹었어요.
준수: (뭐라고 하려는데)
혜진: 고마워요.
미소로 준수의 말문을 막는 혜진.
준수: ...
천천히 동원을 보는 준수.
동원: ...
화를 삭이듯 입을 벌리고 하늘을 보고 있는 동원.
준수: ... (혜진 본다)
혜진: ...
고개 푹 숙이고 있는 혜진.
서너 발자국 뒷걸음질치는 준수.
준수: 잊지 마세요. 오늘 저녁에 한 약속 무슨 일이 있어두 지킬 겁니다.
돌아서 가버리는 준수.
고개 들어 준수 쪽 보는 혜진.
가다가 뒤돌아보고 가다가 뒤돌아보고 하면서 멀어지는 준수.
혜진: ...
문득 눈물이 핑 도는 혜진.
#아파트 단지 입구(밤)
도망치듯 오는 준수.
뒤돌아본다.
움직이지 못하고 그렇게 서있다.
#혜진의 아파트 거실(밤)
문 열고 들어오는 혜진.
거실 불 키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동원: ...
문 앞에서 안을 둘러보는 동원.
소파로 가서 털썩 주저앉는다.
동원: 이런 뜻이었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게.
안방 쪽을 본다.
응답이 없다.
동원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간다.
낡은 냉장고 문을 연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
두리번거리다 싱크대 위에 놓여있는 컵을 집어 들고 수돗물을 틀어 물을 받아 벌컥 들이켠다.
그러다 문소리에 안방 쪽 보는 동원.
혜진이 나와 방문에 등을 기대고 선다.
입 꽉 다물고 바라보는 동원.
안방 문에 등 기댄 채 물끄러미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혜진.
동원: 알았어. 따지는 내가 바보지.
현관 쪽으로 가는 동원.
구두 대충 신고 현관문 열려고 하던 동원이 멈춘다.
혜진: ...
바닥만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혜진.
현관문 손잡이 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동원.
동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혜진: ...
동원: (홱 돌아서며) 남편이 바람 한 번 피웠다고 너두 바람을 펴.
혜진: ...
동원: 나더러 어떻게 살라구. 챙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잖아.
혜진: ... (비로소 본다)
동원: ... (보다가 참으려고 한숨을 토해내는)
혜진: 그게 괴로워요?
동원: 뭐라구.
혜진: 남들이 어떻게 볼까 그게 걱정되구 괴롭냐구요.
동원: 내참 기가 막혀서. 나 같으면 미안해서 라도 내 얼굴을 똑바로 못 쳐다보겠다. 니가 뭘 잘했다고 눈 부릅뜨고 횡설수설을 하는 거야.
혜진: ...
기가 막혀 고개 돌리며 웃는 혜진.
동원: 웃어?
혜진: (쏘아보듯 본다)
동원: 그래 우습겠지. 하동원이 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딴 놈 맛을 봤으니.
혜진: (울부짖듯) 그렇게 밖에 말 못해요. 그렇게 해야 속이 시원하냐구요.
동원: 상스럽다?
헤진: ...
또 한번 터져 나오는 비웃음.
동원: (보더니) 정말 이해가 안 되네. 니가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냐.
혜진: 말해봤자 당신은 이해 못 해요.
동원: (이죽거리듯) 말을 해봐.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혜진: (바라보는)
동원: (비꼬듯) 윤혜진씨, 지 에편네가 젊은 놈 손을 잡고 히히덕거리며 오는 꼴을 봤는데 고운 말이 나가게 생겼어요.
혜진: 그래서요?
동원: 뭐가 그래서야.
혜진; 당신 그래서 죽고 싶어요?
동원: 뭐라구.
혜진: 그런 꼴 보니까 분하고 창피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죠? 그 생각뿐이죠? 당신 눈엔 하잘 것 없는 여자가. 당신한테 상처 준 게 그게 분하고 억울해서 어쩔 줄 모르는 거잖아요. 네, 창피하겠죠. 당신같이 유능한 남자가 이런 꼴을 당했는데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겠죠. 하지만 그런다고 당신은 죽을 사람 아니잖아요. 나 같은 거 잃어버려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어요. 당신 능력이면 나보다 훨씬 젊고 나은 여잘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은 날 잃어버리는 거 하나두 두렵지 않다구요. 하지만 난 아녜요. 당신을 잃어버리는 게 두려웠어요. 당신한테 버림받을까봐 삼년 넘게 한 여자와 바람을 피워도 모르는 척하고 살았어요. 당신이 한 여자가 아니라 이런저런 여자와 바람을 피고 다녔으면 난 불안하지 않았을 거예요. 한 여자에게 미친 건 아니니까 날 버리진 않겠지. 그러다 그만 두겠지. 가정을 버리진 않겠지.
동원: ...
혜진: 난 당신이 바람펴서 죽고 싶었던 게 아녜요. 당신한테 버림받을까봐 그게 무서워서 죽으려고 했던 거예요.
동원: (뭐라고 하려는데)
혜진: 당신두 그래요?
동원: ...
혜진: 날 잃어버릴까봐 그게 괴로워서 여기까지 찾아왔냐구요.
동원: ...
혜진: (목이 메어) 아니잖아요. 그래서 여기 온 게 아니잖아요.
비로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혜진.
#아파트의 작은 공원(밤)
벤치 위에 두 발 올려놓고 턱 괴고 앉아있는 준수.
혜진의 아파트 쪽을 쳐다본다.
준수: ...
곧추세운 무릎에 턱을 문지르는 준수.
#동. 혜진의 아파트 거실(밤)
안방 문에 기대 쪼그리고 앉아있는 혜진.
소파에 머리를 감싸 쥐고 앉아있는 동원.
혜진: ...
동원 본다.
괴로워서 천장보고 한 숨 쉬었다 머리를 빡빡 긁었다 하는 동원.
혜진: 괴로워 할 거 없어요. 난 혼자 살 거니까요.
동원: (노려보듯 본다)
혜진: (고개 돌리며) 혼자 살 거예요.
동원: 흥, 봐주시네.
혜진: 당신 때문에 혼자 살겠다는 거 아녜요.
동원: 애들 핑곈 대지두 마.
혜진: 당신은 애들 못 키워요.
동원: 별 걱정을 다 하시네.
혜진: 애들은 돈으로 못 키운다구요.
동원: 그렇게 애들 걱정하는 사람이... (화가 나서) 뭐, 나한테 버림받을까봐 죽고 싶었어?
혜진: ...
동원: 그래서 고작 한다는 짓이 젊은 놈하고 (부아가 치밀어 벌떡 일어나며) 좋아, 끝내자고. 그래두 설마하고...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믿고 싶지가 않아서... (노려본다)
혜진: ...
동원: (버럭) 좀 빌면 안 되냐.
혜진: ...
동원: 나 같으면 미안해서라두 빌겠다. 봐주든 안 봐주든.
현관으로 가서 구두를 신는 둥 마는 둥 문 열고 나가는 동원.
#동. 문 앞 현관(밤)
문 꽝 닫고 밖으로 나가는 동원.
#동. 거실(밤)
혜진: ...
두 손으로 곧추세운 무릎을 꽉 움켜 안는 혜진.
#동. 아파트 마당(밤)
씨근거리며 가는 동원.
주위를 휘번덕 살펴보며 성큼성큼 가는 동원.
#동. 거실(밤)
혜진 쓰러질 것 같다.
무릎 감쌌던 손 풀며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지탱한다.
혜진: ...
고개 푹 숙이고 숨 죽여 울기 시작한다.
#동. 부근 길(밤)
길가에 세워놓은 차에 타는 동원.
안전벨트 당긴다.
벨트가 잘 안 나온다.
화가 나서 안전벨트 확 잡아당겨 채운다.
시동을 걸려고 주머니를 뒤진다.
아무리 찾아도 차키가 없다.
그러다 문득 운전대 옆을 본다.
차키가 꽂혀있다.
동원: ...
힘이 빠지며 시트에 깊숙이 몸을 누인다.
긴 한숨.
동원: (소리) 어떡한다? ... 저걸 그래두 데리고 살어? ... 애초에 죽고 못 살아서 결혼한 것두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데리고 살자니... 으휴, 미치겠네.
벌떡 몸을 일으켜 두 눈을 부릅뜨는 동원.
시동을 건다.
기어를 넣고 떠나려는데 핸드폰 벨소리.
다시 기어 넣고 전화 받는 동원.
“지금 뭐해요?” 다애 목소리.
동원: (당황해서) 지금?
“집이에요?”
동원: 응.
“지금 우리 집으로 오면 안돼요?”
#다애의 원룸 안(밤)
전화기 들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다애.
옆에서 그러지 말라고 손 내젓는 명자.
다애: 그래요?
“낼 다시 전화하라구.”
다애: 보고 싶은데... 알았어요. 그럼 할 수 없죠 뭐... (놀리듯) 굿나잇...
길게 내뿜고 전화 끊는 다애.
몸을 움츠리며 웃는다.
명자: 너 왜 그러니. 너 자꾸 그러면 똑같은 사람 되는 거야.
다애: 누구하고.
명자: 너 그 여자 때문에 팽 돈 거 아냐. 그 여자 때문에 준수씨가.
다애: 그러니까 나두 빚 갚아야지.
명자: 그게 웃긴다 그거야.
다애: 뭐가 웃겨.
명자: 먼저 그 여자 남편 뺏은 게 누구니, 너잖아.
다애: 언니 누구 편이야.
명자: 누구 편은.
다애: 내 편이잖아. 내 편이면 무조건 내 편 들어야지.
명자: 내 말은 다 깨끗이 잊고 새 출발 해라, 그거야.
다애: (눈 부릅뜨고) 안 되잖아. 잊어버리려고 해두.
명자: 너 그거 사람 힘으로 되는 거 아니다. 사람이 사람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거. 니가 아무리 변명해두 이건 고춧가루 뿌리는 것밖엔 안 된다구.
다애: 그래두 난 그럴 거야. 고춧가루 아니라 그보다 더한 거라두 뿌릴 거야. 왜 나만 불행해져야 돼. 그 여자가 뭔데 준술 차지하느냐구. 싫어, 난 그 꼴 못 봐.
고개 돌리고 눈물 훔치는 다애.
#혜진의 집 거실(밤)
들어오는 동원.
성숙: (부엌에서 나오며) 어딜 갔다 오시는 거예요, 하 선생님.
동원: 애들은.
성숙: 내가 재웠죠. 어찌나 칭얼대는지.
동원: 미안해요.
안방으로 가는 동원.
성숙: (따라가며) 혜진이 만나러 가신 거 아녜요. 아휴, 좀 내버려두세요. 그러다 말겠죠. 설마 지가 정말 집 나가겠어요.
안방 문 열려다 뒤돌아보는 동원.
성숙: 여잔 말리면 더 해요. 지가 몇 조금이나 버티겠어요. 두고 보세요 애들 생각나서 한달두 못 버티고 제 발로 기어들어올 테니까요.
동원: ...
꾹 참고 뒤돌아보고 있는 동원.
성숙: 벌써 주무시려구요.
동원: 네... 아침 일찍 나가야 돼서.
성숙: 쉬세요, 그럼.
베시시 웃어 보이는 성숙.
안방 문 열고 들어가는 동원.
#동. 안방(밤)
들어와서 침대에 벌렁 누워버리는 동원.
성숙: (밖에서) 뭐 마실 거라두 갖다 드려요?
동원: ...
#동. 거실(밤)
성숙: (안방 기웃거리며) 혜진이 걱정 마세요. 걔 성격에...
목을 빼서 안방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성숙.
응답이 없자 한숨을 푸욱 내쉬는 성숙.
#동. 안방(밤)
동원: ... (소리) 맞어, 잡으면 더 날뛰겠지. 지가 한 짓이 있으니까 더.
신음하며 침대에 엎드리더니 손으로 침대를 마구 두드린다.
#혜진의 아파트 전경
이른 아침이다.
전화벨소리.
#동. 부엌
싱크대에서 주전자에 물 끓이고 있는 혜진.
혜진: (전화) 네, 전데요. 말씀하세요.
#여행사
미세스리: (전화) 혜진씨 오늘 일 좀 나갈래. 갑자기 스케줄이 바뀌어서... 잘됐다. 그럼 지금 당장 김포공항으로 나가. 하네다서 오는 비행긴데... 그래, 부탁해. 여덟시까진 도착해야 돼.
다짐하고 전화 끊는 미세스리.
휴우 내쉬고 다시 부지런히 전화 거는 미세스리.
#혜진의 아파트 앞
혜진 서둘러 나온다.
시계를 보고 걸음을 재촉하는 혜진.
#동. 공원 앞 길
혜진 온다.
그러다 흠칫해서 멈춘다.
혜진: ...
아연해서 바라보는 혜진.
공원에 준수가 서있다.
부스스한 모습이다.
혜진: ...
그냥 가려고 하다 다시 준수 본다.
웃으며 그냥 가라는 손짓하는 준수.
혜진 가만히 한숨쉬고 준수에게 간다.
혜진: 밤새도록 여깄었어?
준수: (끄덕)
혜진: 여기서 밤을 새웠단 말야.
준수: 여기서 잘 보이거든요.
손짓한다.
뒤돌아보는 혜진.
혜진의 집 아파트 현관이 보인다.
기막혀 준수를 보는 혜진.
어깨를 으쓱하며 히죽 웃어 보이는 준수.
혜진: 들어오지.
준수: 여기서 보고 있는 게 더 좋아서요.
혜진: ...
준수: 여기서두 다 보이거든요.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
혜진: ...
바라보다 가만히 웃는 혜진.
시계 본다.
준수: 바쁘시면 그냥 가세요. 내 걱정마시구요.
혜진: (생각하더니) 차 가져왔지?
준수: (얼른 끄덕)
혜진: 김포공항에 여덟시까지 가야해. 준수씨가 차 태워주면 공항 가서 차 한 잔 할 시간 남을 거야.
준수: 여기서 기다리세요.
혜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길 쪽으로 달려가는 준수.
그런 준수를 바라보는 혜진의 입가에 한숨처럼 떠오르는 미소.
#김포공항 주차장
공항청사 지붕 위로 떠오르고 있는 여객기.
준수가 청사 안에서 커피와 도넛이 든 종이판을 들고 나와 주차장으로 간다.
세워놓은 차에 타는 준수.
준수: 하난 블랙이고 옆에 건 설탕 크림 다 탄 건데요. (턱으로 가리킨다)
혜진: 이거?
준수: 네.
설탕, 크림 탄 커피 집어 드는 혜진.
준수: 샌드위치 살까 하다가 도너츠 가게가 있길래 도너츠 사왔어요. 단 거 싫어요?
혜진: 좋아.
도너츠 한 개 집어 한 입 베어 먹고 커피 마시는 혜진.
준수: (바라보고 있다)
혜진: (앞만 보며) 앞으론...
준수: ...
혜진: ....
준수: 앞으론 뭐요.
혜진: ... (말 못하고 한숨)
준수: 집에 찾아오지 말라구요?
혜진: ...
준수: 전화두 걸지 말구요?
혜진: (본다) ...
준수: ...
혜진: 애들을 찾아와야 하거든. 그러자면 시간이 필요해.
준수: 얼마나요?
혜진: (앞을 보며) 빨리는 안 되겠지. 우선 내가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 하는데.
준수: (다급하게) 나 돈 있어요.
혜진: ... (다시 본다)
준수: 데려오세요. 내가 돌봐줄게요.
혜진: (웃으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냐.
준수: 뭐가 복잡한데요.
혜진; (한숨쉬듯 앞을 보며)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준수씨가 이런 일에 끼어드는 거... 우선 내가 싫어.
준수: ...
혜진: (보며) 남의 도움 받고 싶지가 않아. 그게 누구든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싶지가 않다구.
준수: ...
혜진: (괴로운 미소)
준수: 알았어요.
혜진; ...
준수: 무슨 말인지 알겠다구요.
혜진: 고마워.
차에서 내리는 혜진.
따라서 내리는 준수.
준수: 이런 식으론 만나줄 거죠? 우연히... 오다가다 만나는 건 할 수 없잖아요.
혜진: (본다)
준수: 안 만나려고 이리저리 피해 다녔는데도 우연히 마주치는 건 할 수 없다구요.
익살 떨듯이 늘어놓는 준수.
혜진: (웃음 참는)
준수: 안 그래요?
혜진: ...
결국 웃고 마는 혜진.
소리 없이 웃는 준수.
혜진 청사 쪽으로 간다.
바라보고 서있는 준수.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공항청사로 들어가는 혜진.
차에 타는 준수.
도너츠를 정신없이 허겁지겁 입안에 처넣기 시작한다.
목이 막혀 커피 들이켠다.
뜨거워도 참고 도너츠와 커피를 목구멍 속으로 넘기는 준수.
#증권회사 객장
전광판에서 명멸하는 주식시세표.
동원: ...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현필: (슬며시 옆으로 오며) 뭘 보고 계세요, 부장님.
동원: 신입 때 저걸 보고 있으면 피가 끓어올랐거든.
현필: ...
주식시세표 보고 동원 보고 하는 현필.
동원: 어디 한 번 해보자.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현필: 지금도 그러세요?
동원: ...
전광판 노려본다.
명멸하는 주식시세표.
동원: (소리) 그래, 어디 다시 한번 붙어보자.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현필: (주위 살피며 속삭이듯) 신 부장님은 아닌 거 같애요.
동원: 뭐가.
현필: 인터넷이요.
동원: (본다)
현필: 오세요, 부장님.
슬며시 동원을 잡아당기는 현필.
#동. 옥상
동원: 신 부장이.
현필: 네, 이리로 옮겨 오자마자 저한테 집적대드라구요. 자기 밑으로 오라구요.
동원: 얼마나 준대.
현필: 뭐, 큰 거 한 장. (웃으며) 부장님 급수에선 작은 거 한 장이지만요.
동원: 받지 그랬어.
현필: 받았죠.
동원: 받았어?
현필: 네, 주는데 받아야죠.
동원: 어, 이 자식 봐라.
현필: 네, 맛있게 받아먹었습니다.
동원: 그래서 뭘 넘겨줬냐.
현필: 우리 팀 투자 전략 같은 거죠, 뭐.
동원: 내 사생활 정보도 넘겨준 거 아냐.
현필: 아녜요, 부장님. (펄쩍 뛰며) 뭘 알아야 넘겨주죠. 전 부장님 사생활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몰라요. (웃으며) 첩보영화에 나오는 이중간첩 있죠. 말하자면 제가 그런데요, 저쪽엔 허위정보나 쓰레기만 넘겨주고 원래 주인이신 우리 하 부장님껜 여전히 충성하고.
동원: (보는)
현필: 잘했죠, 뭐. 부장님 라이벌인 신중호 사단의 심장부에 특공대를 투입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동원: 그런데 알아보니까 인터넷에 내 와이프 사진을 올린 게 신중호가 아니다.
현필: 아니더라구요.
동원: 뭘로 증명해?
현필: 어저께 신 부장님하고 한잔 했거든요. 취한 척 하고 한마디 했죠. 그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치사하게 사생활을 건드리는 건... (동원 눈치 본다)
동원: 그랬더니.
현필: 아니래요.
동원: 그런데 왜 내가 물어보니까 시인을 했대.
현필: 저두 그 점을 따졌죠. 그랬더니 변명해봤자 의심할 텐데 뭣 하러 아니라고 하
녜요.
동원: ...
현필: 하는 소린가.
동원: 너 애들 데리고 대박 터질 주식 좀 찾아봐.
현필: 작전 들어가시려구요?
동원: 뭐 하나 터뜨려야지 잘못하다간 먹은 거 다 토해내게 생겼어. (가다가) 냄새 풍기지 말고 잘 찾아봐.
성큼성큼 가는 동원.
현필: 절 믿으시는 거죠, 부장님.
알았다고 손 흔들며 가는 동원.
현필: ...
휘파람 불던 한숨을 휴우 내쉬는 현필.
#동. 복도
동원 온다.
화장실로 들어간다.
#동. 화장실.
들어오는 동원.
신중호가 소변을 보고 있다.
옆의 변기로 가는 동원.
동원: 발령 났어?
신중호: 뭐.
동원: 본부장.
신중호: 이번 주 안에 나겠지.
동원: 우진 사건 회장님이 아시나.
신중호: (웃으며) 그게 언제 적 얘긴데.
동원: 증권사에 기록될 정도의 주가조작 사건인데 쉽게 잊혀지겠어.
신중호: (보며) 나라는 걸 증명할 수 있어?
동원: 물론이지.
신중호: (웃으며) 무슨 수로.
동원: 요즘은 왜 이렇게 오줌발이 시원치 않은지 몰라. 마누라가 속을 썩여서 그러나.
세면대로 가서 손 씻는 동원.
신중호: (세면대로 와서) 같이 죽자 그거야.
동원: 같이 살자 그거지.
신중호: 내 밑에 있으라는 게 싫다?
동원: 이 바닥에 이등이 어딨냐.
손 씻고 휴지로 손 닦는 동원.
그런 동원을 미심쩍어 힐끔거리며 보는 신중호.
동원: 그만 밟어. 그럼 나두 조용히 있을게.
나가버리는 동원.
께름칙해서 보는 신중호.
#동. 사무실 안
들어오는 동원.
현필, 대진, 석환이 수군대고 있다.
동원이 들어오니까 슬며시 흩어진다.
동원: (현필에게) 뭐해, 현필아. 장 끝났는데 나가서 알아보잖구.
현필: 회의 중입니다. 어디부터 나갈까하구.
동원: 나부터 퇴근한다.
현필: 네, 부장님.
동원 나간다.
현필 한숨 내쉬고 동원의 의자에 앉아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대진: 쌩쌩한데 부장님.
현필: 하부장이 어떤 사람인데 그만한 일에 기가 죽냐.
대진: 나 같으면 뒤통수가 따가워서.
현필: 니들 잡초 알지. 밟으면 밟을수록 더 대가리 치미는 잡초, 그게 하동원이야.
손으로 머리에 깍지 끼고 동원의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흔들어대는 현필.
#어느 카페
동원 들어온다.
창가에 앉아있는 다애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동원: (앉으며) 이쁘네 오늘.
다애: 데이트가 있어서 좀 꾸몄거든요.
동원: 데이트.
다애: 그것두 데이튼가 맞선 보는 건데. 왜 내가 말 안했어요. 미국서 변호사하는 사람인데 한번 저녁 먹어줬더니 자꾸 따라다닌다구요.
동원: 그랬어?
다애: (끄덕이며) 네. 내가 좋대요.
동원: 잘됐네.
웨이터 온다.
동원: 나중에.
웨이터 간다.
동원: 왜 만나자고 했어.
다애: (웃으며 가만히 본다)
동원: 선 본다는 얘기 해주려고?
다애: 회사 홈페이지에 사모님 사진 올라왔죠? 그거 내가 올린 건데.
동원: ... (보일 듯 말 듯 씰룩)
다애: 왜 그랬는지 안 물어봐요?
동원: 물어보면 그 일이 지워지나.
다애: ... (웃음 걷힌다)
동원: 미안해 할 거 없어.
다애: 누가 미안하대요.
동원: 선 잘 봐. 웬만하면 시집가고.
일어나는 동원.
다애: 잠깐만요.
동원: (다시 앉으며) 인생에 제일 비참한 게 뭔지 알어? 패배자가 되는 거야. 특히 남자는...
다애: ...
동원: 패배자가 되면 다 잃어버려. 돈두 여자두 가족두 친구두... 사랑만 가지곤 못 사는 거야. 이놈의 세상은.
다애: ...
동원: (바싹 얼굴 디밀며) 다애가 왜 날 좋아했지?
다애: 꼭 돈 때문만은 아닌데.
동원: (비웃음 같은)
다애: 시작은 그랬지만 지내다 보니까.
동원: 정이 쌓였다.
다애: 뭐 그런 거.
동원: 사람 망치는 게 그놈의 정이란 거 몰라. 생존경쟁에서 패배한 놈들이 제일 먼저 내세우는 게 그놈의 정이라는 거.
다애: 그럼 우린 순전히...
동원: 순전히 뭐.
다애: ... (보더니 한숨 푹 쉬며) 아녜요.
동원: 날 원하면 기다려. 모든 걸 제자리에 돌려놓을 때까지. (일어나려고 하는데)
다애: 사모님은요.
동원; (본다)
다애: 사모님두 용서해 줄 거냐구요.
동원: 용서? 무슨 용서.
웨이터가 온다.
동원: 이따가 오라고 했지.
놀라서 돌아가는 웨이터.
동원: 다애야, 용서란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사람한테나 필요한거야. 칼날을 쥔 놈이 무슨 용서.
다애: ...
동원: (싱긋 웃더니) 기다려, 너두 다시 찾으러 올 테니까.
일어나 가버리는 동원.
다애: ...
멍하니 앉아있는 다애.
#준수의 오피스텔 앞
박병식의 차가 와서 멈춘다.
차창 내리고 두리번거리는 박병식.
경비원이 달려온다.
경비원: (반갑게) 아이구 오셨습니까.
박병식: 주차장 입구가 어딘지... 올 때마다 헷갈려.
경비원: 내리십시오. 제가 대드릴게요.
박병식: 고맙수. (내리며) 요즘두 그 수상한 놈들이 얼씬거리우?
경비원: 말두 마십시오. 사방에 깔려있어요. 내가 아무리 눈총을 줘도 꿈쩍두 안합니다. (차에 타며) 들어가 보십시오. 기다리는 눈치던데.
박병식 차 주차장으로 끌고 가는 경비원.
박병식: 거 조심해요. 어디 부딪히지 말고.
덜컹거리고 가는 차를 걱정 되서 바라보는 박병식.
#동. 준수의 방
부엌에서 뭔가 만들고 있는 준수.
유리문 너머로 기웃거리는 박병식.
준수: 들어오세요. 문 열려 있습니다.
박병식: ...
안으로 들어간다.
준수: (부엌에서) 앉아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박병식: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 좋구만.
준수: 점신 안 하셨죠.
박병식: 여기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돈이 참 좋은 거야, 응?
앉아서 둘러보는 박병식.
준수가 오븐에서 피자를 꺼내 통째로 식탁에 갖다놓는다.
준수: 오시죠.
박병식: 그게 뭐야? 피잔가.
준수: 내가 개발한 한국식 피잡니다. 느끼한 맛을 없앴으니까 아저씨 입맛에도 맞을 거예요.
싱크대 가서 마실 것들을 식탁 위로 옮긴다.
박병식: (어슬렁 식탁으로 가며) 강회장님을 찾아갔었다면서.
준수: 네.
박병식: 빌었어? 살려달라구.
준수: 네. (식탁에 앉아 손 부비며) 먹죠.
박병식: 쉽게 용서해 줄 사람이 아니지. 어떤 사람들인데.
준수: 지난 일월에 성구가 파리 간 건 성구가 아니라 저였습니다.
박병식: (본다)
준수: 성구 여권을 위조해서 내가 갔다 왔어요. 일이월에 쓰고 다닌 신용카드도 성구 이름으로 내가 쓴 거구요.
박병식: 그래, 그렇게 얘기하니까 다 이해가 되잖아. (피자 한 조각 집으며) 왜 그랬어?
준수: ...
박병식: (먹으며) 맛있다.
준수: 작년 크리스마스 무렵에 성구하고 북해도엘 갔었어요. 둘이 산 위에 올라갔다가 성구가 발을 헛딛고 절벽에서 떨어졌어요.
박병식: (끄덕인다)
준수: 사고였습니다.
박병식: 그 때 왜 신고 안했어. 일본 경찰에 신고했으면.
준수: 무서워서요. 당황했구요.
박병식: (먹기만 하는)
준수: 그때는 성구가 사고로 추락했다는 걸 믿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병식: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준수: ...
박병식: (웃으며) 혹시 성구씨 대신 자네가 강성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 아냐. 그래서.
준수: 그럴지도 모르죠.
박병식: (끄덕이는)
준수: 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죠. 짧은 순간만이라도 성구처럼 살고 싶다는 충동을 이길 수가 없었어요.
박병식: 그러니까 문제는 그거구만. 성구씨가 실수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준수: ... (마른침 삼키며 바라보는)
박병식: 객관적인 상황이 말야. 자네가 성구씨를 살해했다는 걸 증명하는 거 보다 그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가 더 힘이 들게 돼있었다 그거지.
준수: 도와주십시오.
박병식: 나보고 그걸 증명하라?
준수: ...
박병식: 진즉 사실대로 털어놓을 것이지.
준수: 절 믿어주세요.
박병식: (불쑥) 그때 누가 운전했어.
준수: (흠칫)
박병식: 수정인지 그 차에서 떨어져 죽은 아가씨.
준수: 운전은 제가 했습니다.
박병식: (힐끔 본다)
준수: 성구와 수정일 태우고 별장으로 가는 길에 차에서 만취한 성구가 수정일 겁탈하려고 했어요.
박병식: 그러다 그 아가씨가 차에서 떨어졌다.
준수: 자세힌 모르겠어요. 전 운전만 했으니까요.
박병식: 그 아가씨가 폭행을 당하고 있는데도 말릴 생각을 안 했단 말야.
준수: 전 악어새니까요. 악어가 뭘 집어 삼키든 난 기다렸다 악어의 이빨 사이에 낀.
박병식: (좀 화가 나서) 그러니까 어떡하다 그 아가씨가 떨어졌는지 그건 모른다 그거야.
준수: 네.
박병식: ...
준수: 비명 소리 같은 게 나서 백밀러를 올리고 뒤를 봤어요. 성구가 여잘 별장으로 데려갈 때는 항상 백밀러를 밑으로 내리고 운전을 했거든요.
박병식: 백밀러를 올려서 뒤를 보니까 이미 그 아가씨가 차에서 떨어진 후였다.
준수: 네.
박병식: 성구씬 그 때 어떡하고 있었어.
준수: 웃고 있었습니다.
박병식: 웃고 있어?
준수: 너무 취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거 같앴어요.
박병식: 경찰에 알린 거 자네가 맞지.
준수: 네.
박병식: 자넨 목격자로 빠지고 운전은 성구씨가 할 걸로 만들고.
준수: 네.
박병식: 뒤집어 씌웠네.
준수: ... 네.
박병식: (한숨) 일이 그렇게 된 거다.
준수: 그 때두 사실대로 신고를 할까했지만 강회장님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박병식: (끄덕이며) 강회장이 알았으면 자네한테 뒤집어 씌웠겠지.
한숨 내쉬더니 생각하면서 피자를 한 입 베어 먹는다.
준수: ...
박병식을 응시하며 가만히 피자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고 베어 먹는 준수.
박병식: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다 털어놔.
준수: ...
박병식: 내가 자넬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준수: 절 살려줄 분은 아저씨 뿐인 거 같아서요.
박병식: 두 사건 다 목격자도 없고.
준수: ...
박병식: 더 중요한 건 살아있는 사람두 자네뿐이라는 거야.
준수: ...
애원하듯 박병식을 바라보며 마른 침 꿀꺽 삼키는 준수.
박병식: 생각 좀 해보자구.
어기적 어기적 피자 먹는 박병식.
박병식: 이거 정말 맛있네. 뭘루 만든 거야.
정말 맛있게 먹어대는 박병식.
#박물관 앞 주차장
혜진이 깃발을 옆에 내려놓고 벤치에 앉아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읽고 있다.
미세스리: (오며) 뭐 바쁜 일이 생겼어?
혜진: 네, 미안해요.
미세스리: 괜찮아. 급한 불은 껐으니까. (혜진이 들고 있는 소설 보더니) 그래두 책 읽을 여유는 있네.
혜진: (웃으며) 아녜요. 우석씨가 번역 한 번 해보라고 그래서.
미세스리: 혜진씨, 차라리 책을 한권 써봐.
혜진: 저 같은 게 무슨 책을요.
미세스리: 뭐... 바람난 남편 때려잡기. (웃으며) 야, 그거 잘 팔리겠다. 나하고 반씩 나눠서 써볼까.
혜진: (웃으며) 그러죠, 뭐.
미세스리: 참 빨리 가봐. 바쁜 일 있다면서.
혜진: 네.
얼른 일어나 깃발 집어 들고 간다.
미세스리: 깃발은 두고 가야지.
혜진: 내 정신 좀 봐.
웃으며 얼른 깃발 벤치에 내려놓고 서둘러 가는 혜진.
#학원 앞
택시 와서 멎고 내리는 혜진.
학원으로 달려간다.
학원에서 아이들이 나오고 있다.
나리와 나래를 찾아 기웃거리는 혜진.
아이들 안 보인다.
가만히 한숨 내쉬는 혜진.
“애들 기다리세요?” 다애의 목소리.
흠칫 놀라서 보는 혜진.
다애: 당분간 애들 얼굴보기 힘드실 걸요.
혜진: 무슨 소리야.
다애: 내가 동원씨 속을 좀 긁어놨거든요.
혜진: ...
다애를 노려보다 시계를 들여다보는 혜진.
다애: 동원씨 회사 인터넷 홈페이지에 부인 사진을 한 장 올려놨어요.
혜진: 무슨 사진?
다애: 두 남자를 양손에 올려놓고 어느 쪽을 버리고 어느 쪽을.
혜진: (내지르듯) 말했지. 다애씨는 이번 일에 끼어들 자격이 없다고.
다애: 부인은 무슨 자격으로 두 남잘 다 차지하려고 그러는 거죠?
혜진: (아연해서 보는) ...
다애: 지난번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부인한테 당했지만 오늘은 할 말은 해야겠어요.
혜진: ... (한숨 내쉬더니) ... (꾹 참고) 난 애들만 있으면 돼.
다애: 그래요?
혜진: ...
다애: 그럼 괜히 그런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나?
혜진: 정말 그런 짓을 한 거야?
다애: ... (빤히 보더니) 네.
혜진: 왜.
다애: 부인이 다 차지하게 내버려두기가 싫어서요.
혜진: (격해져서) 난 애들만 있으면 된다구 그랬지. 애들과 내 사이를 갈라논다고 다애씨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 거야.
다애: 뭐... 질투심이라고 해두죠. 하여간 오늘은 기분 좋네요. 처음엔 부인이 애들을 보러 학원에 왔다가 실망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훔쳐볼까 했는데 그건 너무 잔인한 거 같애서요. 그래서 미리 알려드리는 거예요.
다애 생긋 웃고 돌아서 간다.
혜진: 잠깐.
못 들은 척 가는 다애.
혜진: (다급해서) 다애씨 나하고 얘기 좀 해.
다애를 쫓아가는 혜진.
#다애의 액세서리 가게 안
싱글싱글 웃고 있는 준수.
그런 준수를 노골적으로 흘기는 명자.
준수: 눈 찢어지겠어요, 명자씨.
명자: 준수씨 정말 그러는 거 아냐. 다애가 그러다 진짜 약이라고 먹고 죽어버리면 어떡할 거야.
준수: 그런 짓 할 애 아닌데.
명자: 저렇게 약을 올린다니까.
화나서 쇼윈도 정리하는 명자.
준수: 잠깐 다애 얼굴이나 보고 갈까 왔더니 글렀네. 다애 들어오면 왔다갔다구 전해줘요.
준수 문 쪽으로 간다.
명자: 그럼 좀 기다리던지.
준수: 오해하지 마세요, 명자씨. 다애하고 난 친굽니다.
명자: 그래두 한 때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는데 어떻게 친구가 되냐. 웬수나 안 되면 다행이지.
준수: 그런가.
놀리듯 웃는 준수.
#놀이터
벤치에 우두커니 앉은 혜진.
그네를 타고 있는 다애.
다애: (발 구르며) 전번에 만났을 때 서로 상처받은 걸루 치자고 했더니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세요?
혜진: ...
다애: 너 같은 건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른다고 날 비웃었죠?
혜진: ...
다애: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을 해 봤어요. 내가 얼마나 준술 좋아했나...
발을 힘껏 구르는 다애.
높이 떠오르는 그네.
혜진: ...
다애: (다시 천천히 타며) 그래서 생각을 해 봤죠. 부인한테 가장 소중한 게 뭘까...
혜진이 반사적으로 벤치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다.
그네를 멈추는 다애.
노려보는 혜진.
다애: 부인 혼자 그 모든 걸 독차지 할 순 없어요.
혜진: ...
다애: 동원씬 부인한테 애들 안 줘요. 애들을 주면 떠나갈 테니까. 나무꾼과 선녀처럼. 그러니까 애들을 잃고 싶지 않으면 동원씨한테 비세요. 동원씨한테 빌기 싫으면 애들을 포기하시구요.
다시 그네를 타는 다애.
한껏 발을 구르는 다애.
그런 다애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혜진.
#혜진의 집 앞
혜진이 온다.
멈춘다.
집을 바라본다.
혜진: ...
망설이듯 서있다.
“너 왜 그러고 서있니.” 성숙의 목소리.
당황해서 뒤돌아보는 혜진.
성숙: 남의 집 왔니. 왜 들어가지 않고 그러고 보고 있어.
혜진: 나리랑 나래 학원에 안 왔길래.
성숙: 고모네 집에 보냈어, 동원씨가.
혜진: .... (맥이 풀린다)
성숙: 우선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하자구.
앞서서 집으로 가는 성숙.
바라보고 있는 헤진.
성숙: (뒤돌아보고) 뭐해, 들어와.
#다애의 액세서리 가게 안
명자: 야, 준수 왔다갔어.
다애: 뭐래.
명자: 그냥 왔다갔다고 전해달래.
다애: ...
눈물이 치솟는다.
명자: 이젠 준수 이름만 들어두 눈물이 쏟아지냐.
다애: (털썩 주저앉으며) 자꾸만 더 좋아지는 걸 어떡해. 포기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못 잊겠는데.
#혜진의 거실
거실로 들어간 혜진이 어정쩡하게 서있다.
성숙: (부엌에서) 아줌마, 저녁 준비 하셔야죠.
파출부: (부엌에서) 너 이놈의 새끼 이리 못 와.
복순이가 부엌에서 도망쳐 온다.
파출부: (쫓아 나오며) 아이구 내가 쟤 때문에 못 살아. 하루 종일 똥오줌 여기저기다 찍찍 갈기고 다니니.
복순이가 놀라서 구석에 처박혀있다.
혜진: ...
복순이 본다.
파출부: 너 한번만 더 똥오줌 아무데나 싸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어.
으름장 놓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파출부.
성숙: (따라가며) 아줌마, 내가 사다 준 가재미 얕은 기름에 바싹바싹하게 익히세요. 사장님 고소한 거 좋아하니까.
혜진: ...
복순이 본다.
구석에 처박혀 기가 죽어서 눈치만 보는 복순이.
혜진이 쭈그리고 앉아 손을 내민다.
눈치만 보는 복순이.
혜진: 복순아, 이리와.
문득 목이 메는 혜진.
복순 달려와 혜진에게 안긴다.
복순이를 꼬옥 안고 볼을 부비는 혜진.
#동. 부엌
생선 다듬는 파출부.
성숙: 이리 비켜보세요. 가시부터 발라내야 할 거 아녜요.
파출부: 알았어요.
성숙: 칼 이리 내보라니까요.
파출부: 아이구 그렇게 하고 싶으면 다 알아서 하세요.
칼 내주는 파출부.
성숙: 잘 보세요. 내가 어떻게 하나.
생선 지느러미를 칼로 도려내는 성숙.
성숙: (생각난 듯) 참 혜진아, 저녁 먹고 갈거니.
대답이 없다.
성숙: 보셨죠. 이대로 하세요.
칼 내주고 거실로 가는 성숙.
#동. 거실
나오는 성숙.
혜진 없다.
성숙: 얘가 어딜 갔어. (안방에 대고) 혜진아, 저녁 먹고 갈 거냐구.
#동. 애들 방
복순이 안고 서있는 혜진.
나리와 나래의 침대, 인형들
문득 눈물이 치솟는 혜진.
#동. 집 앞
복순이 안고 나오는 혜진.
성숙: (따라 나오며) 얘, 동원씨 오늘 일찍 들어온다고 그랬어. 기다렸다 얼굴이라도 보고 가. 너 자꾸 이러면 동원씨하고 점점 더 멀어진다.
혜진: ... (대꾸 없이 간다)
성숙: 하여간 고집은. (보다가) 그나저나 강아진 왜 데려가니.
도망치듯 복순이 안고 가는 혜진.
#혜진의 부엌
성숙 들어온다.
파출부: (채소 다듬으며) 강아지두 데려갔어요.
성숙: 거 왜 보는 앞에서 구박을 해요.
파출부: 사람 먹고 살기도 힘든데 강아진 무슨. (한숨쉬고) 그나저나 이집 사모님 복에 겨워서 저러지. 난 허구헌날 바람피우고 다녀도 돈 잘 버는 서방만 있으면 좋겠다.
성숙: 글쎄 누가 아니래.
삐죽하는 성숙.
#혜진의 아파트 거실
복순이를 의자 위에 올려놓는 혜진.
혜진: 여기 꼼짝 말고 있어. 마미가 저녁 짓고 나서 밥 줄게.
부엌으로 가서 저녁 준비하는 혜진.
차임벨.
혜진: 누구세요.
대답대신 또 한번 차임벨.
혜진: (더 크게) 누구세요.
“배달 왔습니다.”
혜진: ...
이상해서 현관으로 가는 혜진.
문 조금 열어본다.
준수가 얼굴 디민다.
준수: 오래 기다리셨죠.
기막혀 웃는 혜진.
문 열고 보따리 들고 들어오는 준수.
혜진: 이게 뭐야.
준수: 잠깐만 기다리세요. 또 있습니다.
밖으로 나가 보따리 더 들고 들어온다.
보따리 하나 먼저 풀더니 전기밥솥 꺼내는 준수.
준수: 짜잔.
전기밥솥 머리 위에 올려놓고 익살스런 포즈를 취해보이는 준수.
복순이가 짖어댄다.
놀라서 전기밥솥 떨어뜨릴 뻔 하는 준수.
준수: 니가 복순이구나.
전기밥솥 내려놓고 복순이 안아주는 준수.
뽀뽀를 해대고 난리다.
혜진: ...
비로소 가만히 웃는 혜진.
#혜진의 집 앞(밤)
동원의 차 와서 멎는다.
시동을 끄고 내리려다 멈추는 동원.
한숨을 내쉬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차를 돌려 큰길로 나간다.
#혜진의 아파트 거실(밤)
전기밥솥에서 수증기 빠지는 소리.
반찬 만드느라고 분주한 혜진.
거실 본다.
준수가 사온 물건으로 방안을 꾸미고 있다.
#동. 혜진의 아파트 마당(밤)
동원의 차가 와서 멎는다.
헤드라이트를 끈다.
혜진의 집이 보인다.
동원: ...
불이 환하게 켜진 혜진의 아파트를 노려보는 동원.
#동. 혜진의 아파트 거실(밤)
식탁에 마주 앉은 혜진과 준수.
촛불에 와인에 어울리지 않는 반찬들.
준수: 내일은 집안을 더 이쁘게 꾸며줄게요. 뭐 뭐가 필요한지 목록을 다 적어 놨거든요.
혜진: ...
가만히 바라보는 혜진.
준수: 어쩔 수 없었다구요. 뭐 살게 좀 있어서 마트에 갔는데 이쁜게 자꾸 눈에 띄지 뭐예요.
혜진: ...
준수: 핑계가 아니구요. 보세요, (거실을 가리키며) 근사하잖아요.
혜진: ... (가만히 한숨 내쉰다)
준수: 불안해요. 나하고 같이 있는 게요.
혜진: 가슴 속에 애들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데 뭐가 좋겠어.
준수: 알겠어요. 딱 와인 한잔만 마시고 돌아갈게요.
와인 병 집어 드는 준수.
혜진: 나중에.
준수: ...
와인 병을 놓는 준수.
혜진: (가만히 고개 돌리며) 미안해. 준수씨 하고 같이 있으면 애들 생각이 더 나.
준수: 왜요.
혜진: ...
준수: 나 때문에 자꾸 불행해지는 거라면 그렇다고 말을 하세요.
혜진: (본다) ...
준수: ... (말해놓고 혜진의 시선 피한다)
혜진: 그럼 어떡할 건데.
준수: (힐끔 보며) 정말 그래요?
혜진: ...
준수: 날 만나면 좋은 거 보다 나쁜 게 더 많으냐구요.
혜진: ...
준수: 그래요?
혜진: ... (눈물이 날 것처럼 고개를 저으며) 그렇지 않아. 세상에... (목이 메어 말을 멈춘다)
준수: ...
혜진: 김준수라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면 난 벌써 쓰러졌을 거야.
준수: 그렇죠? 변한 거 없는 거죠.
혜진: ...
끄덕인다.
눈물이 글썽해서 끄덕이고 또 끄덕이는 혜진.
그런 혜진의 손을 잡는 준수.
혜진의 두 손을 잡고 그 손에 볼을 부비는 준수.
그리고 가만히 혜진의 손에 입을 맞춘다.
그런 준수를 바라보는 혜진.
준수: (고개 들더니) 갈게요.
일어나서 거실에 던져놓았던 옷을 집어 드는 준수.
혜진을 본다.
고개 숙이고 앉아있다.
준수: 밤에 울면 안돼요. 우리 집까지 울음소리가 들린다구요. 그럼 약속 어기고 달려올지도 몰라요.
혜진: ... (보더니 끄덕끄덕)
준수 현관으로 간다.
문을 열려고 하다 멈춘다.
고개 숙이고 움직이지 않는 준수.
혜진: ...
그런 준수를 바라보다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인다.
갑자기 준수가 몸을 돌려 현관문에 기대며 소리친다.
준수: 같이 살면 안돼요?
혜진: ...
준수: 일분 일초두 떨어져 있기 싫다구요.
혜진: ...
준수: 그냥 얌전히 옆에만 있을게요.
혜진: (숙인 채 울음이 터지듯 고개를 끄덕이고 또 끄덕인다)
준수: 그런데 왜 자꾸 가라고 그래요.
혜진에게 달려가는 준수.
무릎을 꿇으며 혜진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혜진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그런 준수를 내려다보는 혜진.
움직이지 않는 준수.
혜진 준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준수: (중얼거리듯)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 갈게요.
혜진의 무릎에 더 파고드는 준수.
#동. 혜진의 아파트 앞마당(밤)
주차장에 세워진 동원의 차.
동원: ...
시트에 머리 기대고 차창 밖으로 혜진의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다.
현관에 준수가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동원: (부르르) ...
준수가 뒤돌아서며 혜진의 집을 쳐다보더니 손을 흔든다.
동원 몸을 숙여 차창으로 이층 혜진의 베란다를 쳐다본다.
베란다엔 아무도 없다.
준수: ...
어깨를 움츠리며 동원의 차를 지나서 주차장에 세워둔 차문을 연다.
차문 여닫는 소리에 무심코 옆을 바라보는 준수.
동원이 차에서 내리고 있다.
준수 반사적으로 혜진의 베란다 다시 본다.
역시 아무도 없는 베란다.
다시 동원을 보는 준수.
동원이 차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기다리듯 바라보는 준수.
이윽고 차에 기댄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더니 휴우 한숨을 내쉬는 동원.
웃기 시작한다.
바라보는 준수.
자꾸만 웃고 있는 동원.
바라보는 준수.
<17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