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諦偈 [中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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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ḥ pratītyasamutpādaḥ śūnyatāṁ tāṁ pracakṣmahe
sā prajñāptir upādāya pratipat saiva madhyamā
眾因緣生法 我說即是無(空) 亦為是假名 亦是中道義
(Whatever is dependently co-arisen, that is explained to be emptiness.
That, being a dependent designation, is itself the middle way.
Whatever is contingently related, that is explained as emptiness.
That is contingently configured; it is the central path.)
apratītyasamutpanno dharmaḥ kaścin na vidyate
yasmāt tasmād aśūnyo hi dharmaḥ kaścin na vidyate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Something that is not dependently arisen, Such a thing does not exist.
Therefore a non empty thing does not exist.
Because there are no things at all, which are not contingently emergent,
therefore, there are no things at all, which are not emp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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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학 불교학과 (정상교, 동아시아)], [290~292쪽]
"먼저 18게는 '연기(緣起)하고 있는 것, 그것을 우리들은 공성(空性)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서로 서로 의존하여 일시적으로 가설(假設)된 것이며, 그것이 바로 다름 아닌 중도(中道)이다.'
그리고 19게는 '어떠한 것이든 연기하지 않고 생겨난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실로 어떠한 것이라도 공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이고
모든 현상은 연기되어 있으므로 공이고 중도임을 나타낸 게송...."
....
"프라티트야(pratītya)는 문법적으로 제런드(gerund)(절대분사) 용법으로
'도달하여'의 의미이고 우트파다(utpāda) '일어난다, 발생하다'의 의미이므로
해석해보면 '무언가 이것과 저것이 서로 도달하여 만나, 즉 조건 지어져 발생한다'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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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論 제24장 18게~19게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0여년 전에 읽은 漢譯과 다르게, 흥미를 느낀 점은 中道(pratipat saiva madhyamā)라는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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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 의하면 中道(majjhimā paṭipadā)는 <37보리분법 혹은> 8正道(ariya aṭṭhaṅgika magga)를 지칭합니다.
본문에서는 緣起(pratītyasamutpāda, paṭicca samuppāda)를 <경에서의> 中道(苦滅道)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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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道를 깨닫다.[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中道(苦滅道)에 의하여 緣起(苦集 혹은 苦滅을 포함한다고 해도)을, 혹은 확대 해석하여
中(苦滅)에 의하여 法(緣起)을 드러낸다[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라는 것은 가능하지만,
流轉門<혹은 還滅門까지 포함된다고 해도>인
緣起(pratītyasamutpāda)가 中道(혹은 中 madhyamā)인 것은 아니며,
此緣性(idappaccayatā)을 緣起라고 하며,
有無 兩極端인 아닌 세간의 集滅(緣起)로 조망(觀察)하는 것을 中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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緣起=空性=假名=中道, 즉 同格關係로 이해하면 이상한 결론이 도출됩니다.
산스크리트어를 모르니 정확한 번역은 알 수 없지만
초기경을 참고하여 이 관계를 정립한다면 緣起 = 空性까지는 따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緣起 즉 集聖諦(혹은 滅聖諦) = 假名은 지나친 해석이고
緣起 = 中道(8正道/苦滅道聖諦)는 아예 성립하지 않는 내용입니다.
특히 空이라는 표현대신 無라는 번역은 경문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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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2:15
6.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는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Sabbaṃ atthī’ti kho, kaccāna, ayameko anto.
6. 짯짜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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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Sabbaṃ natthī’ti ayaṃ dutiyo anto.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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깟짜야나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中]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Ete te, kaccāna,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正見(中道)에 의하여 즉 中에 의하여 法=緣起을 드러낸다....는 그나마 따라 갈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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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ijjā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pe…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Avijjāya tveva asesavirāganirodhā saṅkhāranirodho; saṅkhāranirodhā viññāṇanirodho…pe…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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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대한 선학들께서 모두 [緣起 = 中道]라고 말씀하신다면
받아들여야....????
緣起가 苦滅道와 동의어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 않나요?
연기는 고성제임이 확실하지요.
고멸도성제는 연기를 역행시키는 길입니다.
글므로 연기를 열반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거지요.
마라가 없음 붇다도 없으니
'봄봄'님의 .............
[*正見(中道)에 의하여 즉 中에 의하여 法=緣起을 드러낸다....는 그나마 따라 갈 수는 있습니다.]라는.........
표현은 ........... 좀 ..... 문제가 많은 표현입니다.
첫째, 부처님께서는 <중도(majjhimā paṭipadā)에 의해서 法을 드러내신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직 <중에 의해서(majjhena ) 法을 드러내신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중도'와 '중'은 다른 표현이라는 것인데요......... 예를 들어 ... 경전에
@아위자 중도(majjhimā paṭipadā)는 <팔정도로 대표되는 '37조도품'>을 지칭하는 표현이시고요.........
중에 의해서(majjhena )는 <촉멸, 현재, 비고비락, 식, (육)識, 유신의 멸>을 지칭하는 표현이거든요......
그 둘을 혼동하시면 ....... 아예 처음부터 이야기가 안 되는 것이고요..........
@아위자 둘째, <法=緣起(paṭicca-sam-uppāda)>라는 공식을 부처님께서는 지적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부처님께서는 ...... <法=緣已生(paṭicca-sam-uppanna)>이라는 공식을 말씀하셨습니다.
@아위자 쌍윳따니까에서, 緣起(paṭicca-sam-uppāda)와 緣已生(paṭicca-sam-uppanna)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설명되는 용어이고요.......
@아위자 <사물들(things)이나 사건, 현상 등등>은 <緣已生(paṭicca-sam-uppanna)의 법들(dhamma)>에 대한 번역어로서 사용될 수는 있으나, <緣起(paṭicca-sam-uppāda)의 '번역어'>로써 그러한 표현들을 사용한다면 .....그 양반은 '정신병자'이고요..........
@아위자 같은 이유로..... 소위 연기의 공식이라고도 말해서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다고 한다면 저것도 없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연기의 공식>이 아니고 <緣已生(paṭicca-sam-uppanna)의 법들(dhamma)의 '공식'>입니다. .......... 워낙에... 학자들이 <연기의 공식> 云云 하므로 ........ 일반인들께서는 "그러려니~"하시지만 ..... 그와같이 부정확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 학자로써 <웃기고 있는 '것'>에 불과하고요......
@아위자 '아위자' 자신도 논문에서 <연기의 공식> 云云 하는 것은 ....... 일일이 <緣起(paṭicca-sam-uppāda)와 緣已生(paṭicca-sam-uppanna)의 '차이점'>에 대하여 지적하기가 귀찮아서이고요....... ㅋㅋㅋㅋㅋㅋ ....... 사실은.... '차이점'을 설명하게되면...... <전혀 다른 용어>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
@아위자 소위 '法眼(=集한 법은 滅하는 법이다)'이라는 것은 <緣已生(paṭicca-sam-uppanna)의 법들(dhamma)에 대한 '앎(=안목)'>을 말하는 것인데요........
@아위자 일전에 '우뻬까'라는 아이디를 쓰시는 학자 분께서 <연기설을 둘러싼 쟁점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카페에 소개하신 적이 있으신데요..... 제가 알기로는 본인의 논문을 소개하신 것인데요...... 논문을 쓰신 필자 분은 <연기란 단지 '마음의 작용'을 다룰 뿐>이라는 주장을 하시는데요........ ㅎㅎㅎㅎㅎㅎㅎ
근거는 .......... 모든 사물들이 <의존적으로 존재한다>라는 식으로 '연기'를 이해하는 것은 '연기에 대한 오해'라는 지적입니다. '아위자'도 그렇게 봅니다.
@아위자 '연기'란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렇지만!
@아위자 <연기란 단지 '마음의 작용'을 다룰 뿐>이라는 주장은 좀........ 지나친 주장이기도 합니다. '아위자'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
@아위자 <緣已生(paṭicca-sam-uppanna)의 법들(dhamma)>이라는 표현이 지칭하는 바는 .........
정신적인 것들[=名]과 물질적인 것들[=色]을 모두 지칭하는 것인데요....... 곱씹어 지적하면 名[=인식론적인 것들]과 色[=존재론적인 것들]을 모두 함께 지칭한다고 보아야 하는데요........
<非色인 심의식과 色과의 관계>에서 無色인 名이 생겨나 .......면 ........ 그 '名'은 이미 '色'과 관련되어져서 생겨난 것입니다. ....... 제 추측으로는 ....... 아마 이 때 쯤에서 五慾樂(pañca kāmaguṇa)이라는 것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無色界의 '존재'들>도 어느 정도 수준의 五慾樂(pañca kāmaguṇa)을 즐기기에.........
@아위자 <그 즐기는 정도>가 심해지면 色界로 하강하는 것 같구요.....
@아위자
五慾樂(pañca kāmaguṇa)의 주범은 '識[=非色]'인데요...........
<그 즐기는 정도>가 더더욱 심해지면 <色界 내부의 慾界(kāma-dhātu)에 이르게 되는 것>인데요.......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하셔야 하실 점은 ...... 흔히 '世間(loka, 세상)'이라고 하면 三界를 지칭하는 용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世間(loka, 세상)의 끝에 도달한다>는 말은 <'三界의 끝'이나, '苦의 끝'이나, '윤회의 끝'에 도달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위자'가 <정도문제일 뿐이지 '無色界 존재들도 五慾樂(pañca kāmaguṇa)을 즐기고 있다'>라고 지적하는 것은...... 그들도 <世間, 苦, 윤회>에서 벗어나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지적임.
@아위자 五慾樂(pañca kāmaguṇa)의 주범이 '識[=非色]'이라는 지적은...... '無色界의 존재들'도 '識[=非色]'을 지니고 있기에 <世間, 苦, 윤회>에서 벗어나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아위자 혹자는...... '아위자'의 지적이 <사소한 지적이고 당연한 지적>이라고 여기실지 모르지만...... ㅎㅎㅎㅎㅎㅎ .... <'識[=非色]'의 스펙트럼>이 無色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땅하(愛)의 스펙트럼>도 無色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이고요...... <'世間, 苦, 윤회'의 스펙트럼>도 無色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입니다.
@아위자 악마 빠삐만이 <三界에 골고루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유>도 .... 빠삐만의 境界(visaya)인 五慾樂(pañca kāmaguṇa) 때문이라고 보는데요........ 그 五慾樂(pañca kāmaguṇa)의 주범이 識이라는 반복되는 지적을 하는 이유는 ....... <12연기의 유전문>에 거론되는 非色은 <심(citta)도 아니고 의(manas)도 아니고>요...... 識입니다. ....... 唯識(오로지 識)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고요..... <三界唯識>이라고 표현해야만 정확한 표현이 되는데요....... 예를 들어 삼계에서, <심(citta)+무명=식>이고 <의(manas)+무명=意識>이기에 그러한 표현을 하시는 것이고요....... 만약 <심(citta)+明=반야>가 되거나 <의(manas)+明=반야>
@아위자 가 되면은 <삼계해탈>이라는 것인데요......
@아위자 //중도(majjhimā paṭipadā)는 <팔정도로 대표되는 '37조도품'>을 지칭하는 표현이시고요.........
중에 의해서(majjhena )는 <촉멸, 현재, 비고비락, 식, (육)識, 유신의 멸>을 지칭하는 표현이거든요......
그 둘을 혼동하시면 ....... 아예 처음부터 이야기가 안 되는 것이고요.......... //
위 말씀은 봄봄이 항상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법=연기, 혹은 연기법 연이생법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본 카페에서 의견을 드린 적이 있으나
다시 한번 별도의 글에서 의견을 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여튼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_
@아위자 그러한 논리가 <慧해탈의 논리>입니다.
@아위자 먼저 본문을 작성해 주신 봄봄님과 댓글을 작성해주신 아위자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위위 맥락에서 한 가지 질문이 있어서 이곳에서 질문을 드리는점에 양해를 바랍니다.
명+의/ 심 = 반야 의 공식에서
명과 반야의 차이가 궁금하구요.
제가 이해하기에는 반야를 연이생이 아닌 연기로 이해가 되어 이점에 대해서 한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
@물마 ‘안지혜명광(眼智慧明光)’이라는 오득과(五得果)는 깨달음의 과정에서 거의 동시에 생겨나는 것으로 니까야는 언급하는데요......... 거기에서 ‘혜(慧)가 반야’고요, ‘명(明)이 삼명(三明)’을 지칭하는 말로서, 명(明)은 무명(無明)의 반대말입니다.
‘안→지→혜→명→광(眼智慧明光)’의 순서에서 보듯이 앞에 위치해 있는 것이 개념의 스펙트럼이 넓은 것이고 뒤로 갈수록 개념이 보다 더 분명하고 구체적인 것으로 이해되는대요.... 수준적인 측면에서는 뒤에 위치하는 것이 탁월한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마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면 .........안(眼)은 <육안(肉眼), 천안(天眼), 법안(法眼), 혜안(慧眼), 불안(佛眼)>이라는 스펙트럼을 갖는데요 ........ 불안(佛眼)은 삼명(三明)자를 지칭하는 안(眼)입니다.
@물마 반면에, 慧解脫자는 ...... 慧眼만 지니고 있는 것인데요.....
<혜해탈자---두 길로 해탈한자(양분해탈자)----삼명자>라는 '慧眼의 스펙트럼'이 있구요......
삼명자의 천안은 '못 보는 자'가 없는 수준의 천안이고요, 삼명자의 법안은 '제법이 현현'한 수준의 법안이고요....... 삼명자의 혜안은 '천안통, 숙명통, 누진통'이 모두 '혜(=반야)인 수준의 반야'입니다. 실로 굉장한 수준의 반야이지요........
@아위자 아위자님의 친절하고 세심한 맑고 밝은 안목에서 자비를 봅니다.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ㅡ()ㅡ
龍樹는 이 중 還滅門의 緣起說만을 논리적 오류가 없는 연기의 표현으로 간주한다.
용수는 제1 관인연품에서 심지어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연기공식조차 비판한다. <*비판 받는 부처님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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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ḥ śūnyatāṃ pratītyasamutpādaṃ madhyamāṃ pratipadaṃ ca
ekārthāṃ nijagāda praṇamāmi tamapratimabuddham: 廻諍論, 第71頌
空性과 緣起와 中道가 하나의 의미임을 선언하셨던 분,
함께 견줄 이 없는 붓다이신 그 분께 예배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