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4:25~31)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you. I do not give to you
as the world gives.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and
do not be afraid.'(27)
평안을 너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네 마음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아라.
예전에 무심하게 부르던 찬양,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
성경의 말씀이 참 달고,
좀 더 속되게 표현하면 '맛있다.'
왜 그렇게 표현되는 걸까?
엊그제 T.V에서
첼리스트로 천재라 칭송받았지만
최근에는 지휘자로 변신한 장한나를 보았다.
그가 지휘의 묘미에 빠지게 된 과정이
내게 큰 공감을 불러 있으켰다.
먼저 곡에 대한 사랑을 시작으로,
곡의 마디마디마다 곡을 만든 이의 마음이
너무 궁금해서 질문을 시작한다.
그가 살아 있지 않기에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전인격을 총동원하여
그의 마음을 헤아린다.
그러던 중에 어떤 순간,
나도 모르게 그의 마음이 읽혀진다.
그때의 감동이 폭풍처럼 밀려온다.
나는 그가 되고 그가 내가 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나는 그를 그렇게 해석하고 이해했지만
다른 어떤 지휘자는 아주 다르고 독특하게
해석해서 같은 곡을 마치 매우 다른 곡처럼 연주한다.
그러면 나의 해석이 맞는가? 아니면 그의 해석이 맞는가?
곡을 만든 이는 아마도 누가 맞는가에는
아예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 곡의 기본적 맥락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그의 곡을 풍성하게 만들어준
두 작곡자에게 감사하며,
(살아 있었더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두 분 모두 훌륭한 곡 해석입니다.
오히려 제가 배웠고, 여러분은 제 곡을
더 멋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장한나가 바로 그런 인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설명에서 나는 그것을 Catch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누리는 은혜가 그것과
거의 완전히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세상 학문으로는 인문학(the humanities)의 속성이다.
그러니 마치 수학의 사칙연산처럼
이것이 맞으니 다른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라는 식의
접근법과 강요는
인문학, 즉 사람을 대하는 일체의 것
(역사와 문학 등 모든 예술)에 있어서만은
(좀 심한 말일지 모르지만) 단세포적인,
기본도 안되는 짓이다.
아니, 그것도 사람의 반응 중의 하나이니
인정하고 흥미롭게 수용할 수는 있으나
강압과 억압만큼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길이고 능력이시다.
그러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궁극적 문제,
즉 불안과 공포, 겁에 질린 우리에게
세상에서 결코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신다고 하니
소망이 된다.
파면 팔수록, 깊이와 넓이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헤아림에 감동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그러니 불필요하게 스스로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불안해지려는 것을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결박해버질 수 있기를.
예수님이 2천 여년 전에 하늘로 승천하시고
지금은 착하고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서 예수님의 능력 그대로
우리를 주장하고 계신다. 성령을 의식하며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이 예수님인 줄을 알고 두 손 들어 환영하는
존재이기를. 하나님! 감사합니다.
"쾌청한 주말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귀여운 막내 은준이의 모습에서 사랑을 느낍니다.
헌신과 사랑의 사람, 소영이를 보며 감사함과
감개무량함까지 느낍니다. 제가 뭐라고 이렇게 귀한
선물들을 주십니까?
내일은 주일입니다. 제가 아는 모든 이들이
주일의 감격과 은혜를 체험하기를.
또한 어려움과 고통으로 몸둘 바를 몰라하는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맛을 보기를...
기도합니다. 감사 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