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힘을 다하여 자식들을 교육시킨 결과로
좋은 대학에 진학시켜
큰 아들은 현재 미국에서 의사로 있고
작은 아들은 대기업의 임원으로 서울에 사는데
정작 그들의 부모는 쓸쓸히 시골에서 텃밭 가꾸며
근근이 지내고 있는 어떤 노부부의 얘기가 나왔습니다.
자식을 온힘을 다해 힘들여 열심히 키웠더니 국가의 자식이 되고
뒤지지 않게 신경 쓰며 키웠더니 사돈의 자식이 되고
뒷바라지 변변치 못하여 간신히 키웠더니 내 자식이 된다는 이야기.
웃자고 하는 얘기이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죽은 박사 자식보다
살이 있는 멍청이 자식이 낫다는 말도 있습니다.
집안에 사소하지만 급하게 해결해야 할일이 생겼는데
미국에 있는 아들을 부를 수 없고
서울에 있는 아들을 부를 수도 없고~
일 년에 명절이나 생일 정도 보는 아들.
사진을 통해 보거나 어쩌다 전화 통화로
겨우 몇 마디 이야기 나누는 정도의 손자들 ~
어려운 시절에 몸 받쳐 키웠건만 살만해지니
각자도생 각개전투 대형이 되어 버렸습니다.
무릎 꿇고 앉아 산을 지키는 못난 소나무.
그 못난 소나무가 부모의 산소를 지키고,
선산을 지키고, 고향을 지킵니다.
토질 좋은 곳에서 햇빛과 비바람 적당히 받으며
곧게 잘 자란 소나무는 재목감으로 사라집니다.
괴이 하면도 특이한 소나무도 분재용으로 사라집니다.
척박한 곳에 뿌리를 내린 못난 소나무는
모진 고생을 하면서 자라야 합니다.
설령 크게 자란다고 해도 재목감이 되지 못하니
사람들이 거들 떠 보지 않습니다.
결국 못난 소나무가 남아 산을 지킵니다.
산을 지키면서 씨를 뿌려 자손을 번성케 하고
모진 재해에도 산이 훼손되지 않도록 산을 보존합니다.
잘난 소나무가 멋지게 자라 재목이 될 수 있는 것도
못난 소나무가 산을 정성스럽게 지켜 준 덕분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그 못난 소나무를 업신여기며
함부로 합니다.
우리 서로가 못난 소나무이면서,
너는 나를 우습게 알고, 나는 너를 우습게 생각하고
서로 힐난하며 깎아 내리고 나보다 크는 꼴은 보지 못하며
잘난 소나무만 바라보고 우러러 봅니다.
우리 대부분은 못난 소나무입니다.
우리 자식들도 잘난 소나무 보다는 못난 소나무가 될 확률이 더 큽니다.
그런데 그 못난 소나무가 우리에게 효도하고
우리의 산소를 지키고 우리 고향을 지킵니다.
나라의 교육정책도 못난 소나무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잘난 소나무는 잘난 소나무대로 열심히 키워야 하겠지만
평생 동안 고향을 지키게 될 못난 소나무들을
우리가 쉽게 생각하고 소외 되게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 되면 고마운 일이지만 자식이 평범하거나 좀 뒤떨어지게
성장 하더라도 구박하지 말고 사랑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더 정성스럽게 키워야 합니다.
이런 아이가 결국은 내 곁에 오래남아
내가 아플 때 나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 갈 놈입니다.
못난 소나무도 함께 모이면 울창한 숲이 됩니다.
서로 지지하고 응원하는 못난 소나무가 우리방 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