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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2월 15일 - 황장엽 북한 노동당서기, 남한으로 망명
1997년 이날, 황장엽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서기가 남한으로 망명했다. 황장엽 전 서기는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체계화한 인물이었다. 남한으로 망명한 사람으로는 최고위급 인물이며, 망명 이후 북한의 실정 폭로와 김정일 정권 타도 활동을 전개하다가 2010년 10월 사망하였다.
5월 18일 - 콩고 내전의 종식,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귀환
레랑데지레 카빌라는 부룬디, 우간다, 르완다 투치인 정권의 지원을 받아 콩고 자이르 해방 민주군 연합을 이끌고 정부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시작, 1997년 5월 수만명의 희생 끝에 승리하였다. 결국 모부투 세세 세코는 해외로 망명했고, 카빌라는 헌법을 정지하고 자이르에서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되돌렸다. 그러나 카빌라는 사실상 종신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7월 1일 - 홍콩 반환
홍콩은 1841년 아편전쟁에서 청이 패배하면서 영국령이 되었다. 영국령이 된 이래 홍콩은 영국의 주요 무역항이 되어 발전했다. 1984년 중국과 영국은 1997년 홍콩을 중국에 이전하는 조약에 서명하였고, 홍콩이 50여년 동안 특별 행정구로 편입될 것이라 명시되었다. 이후 1997년 7월 1일 자정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다.
8월 6일 - 대한항공 801편 추락
김포에서 8시 22분 출발한 KE 801편이 괌 안토니오 비원 팻 국제공항에 착륙을 실패, 추락하여 승객 237명이 중 214명, 승무원 17명 중 14명이 사망하는 등 총 228명이 사망했다. 이때의 사건 원인으로는 활주로를 가로막았던 기상 조건, 기장과 부기장의 소통 문제 등이 꼽혔다.
8월 31일 - 다이애나 스펜서 전 왕세자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
다이애나 스펜서는 현재 영국왕가 승계순위 2위인 윌리엄 왕자와 3위인 해리 왕자의 어머니이다. 스펜서 백작 가문의 후손으로 1981년 찰스 왕세자와 결혼하였으나, 부부간의 불화로 인해 1996년 이혼하였다. 뛰어난 패션감각과 복잡한 사생활 등으로 항상 소문의 중심에 있었다. 적십자의 지뢰제거 운동 등 많은 자선활동을 하였으나 1997년 파리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고 사망했다.
12월 3일 - 대한민국, IMF 구제 금융 요청
우리나라는 금융기관의 부실, 차입 위주의 방만한 기업경영으로 인해 대기업의 연쇄부도, 대외 신뢰도의 하락, 단기외채의 급증 등으로 외환위기를 겪게 되었다. 결국 정부는 모라토리엄(채무지불 유예)선언을 할 사태에 이르자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 외환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IMF가 제시한 조건에 따라 한국 경제 전방위의 수술이 단행되었고, 많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1998년
5월 21일 -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 32년 만에 퇴진
수하르토 대통령은 1967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수카르노 대통령을 축출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1998년 이날 퇴임할 때까지 7번 연임하였다. 집권 기간 중 인도네시아의 공업화에 기여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철권 통치를 벌였고, 350억에 달하는 부정축재로 '가장 부패한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97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이날 물러나게 되었다.
8월 17일 -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 성추문사건 관련해 대국민 사과성명 발표
클린턴 대통령의 여성관계는 92년 대선부터 표면화되었었다. 모니카 르윈스키는 백악관 인턴 직원이었는데, 클린턴과 그녀가 1년 반에 걸쳐 성적 관계가 지속되었다는 면과 빌 클린턴의 위증 문제가 겹쳐져 정치문제로 부각되었다. 이는 하원이 대통령 탄핵안 가결되어 상원으로 옮겨졌으나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8월 31일 - 북한, 대포동 1호 미사일 발사
1994년 미국이 확인한 대포동 1호가 98년 이날 무수단리에서 발사되었다. 1단계 로켓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남쪽 동해 공해상에, 2단계 로켓은 고도 65㎞로 일본 상공을 지나 태평양에 떨어졌다. 북한은 9월 4일 이를 '광명성 1호' 즉 인공위성이라고 발표했다.
1999년
6월 9일 - 코소보사태 종결
코소보는 알바니아계 주민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나 세르비아에 속했다. 세르비아에게서 분리 독립을 바랐던 반군들이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면서 코소보사태가 발발하게 되었다. 세르비아는 즉각 반격에 나서 반군과 거점 지역 주민들을 대량학살하였다. 이에 맞서 반군들은 코소보해방군을 중심으로 대항했다. 1998년 3월 31일 국제연합은 세르비아에 무기금수조치를 내렸고, 4월에는 세르비아의 탄압 금지를 요구하는 알바니아계의 시위가 벌어졌으나, 세르이아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종청소를 단행했다. 5월, 코소보사태에 개입을 선언한 나토는 세르비아에 경고했으나 세르비아는 무시하였다. 99년 나토군은 세르비아에 공습을 시작하였고, 6월 3일 드디어 세르비아는 국제연합의 평화계획을 승인하였다. 6월 5일부터 군사회담이 열려 9일 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코소보사태는 종결되었다.
6월 15일 - 제1 연평해전 발발
북한은 6월 6일부터 매일같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와 남한 영해를 살폈다. 그러다 9일째는 15이 80t급 경비정 2척이 어선 20척과 함께 NLL을 넘어왔으며, 이어 420t급 2척이 어뢰정 3척의 호위를 받으며 남하했다. 남한은 초계함의 76㎜ 함포와 고속정의 40㎜ 기관포 등으로 응사해 대항했다. 북한의 어뢰정 1척이 침몰, 420t급 경비정 1척이 대파되었고, 나머지들도 파손된 채 퇴각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북간의 영해문제가 다시금 부각되었다.
2000년
6월 13일 -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개최
대한민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1948년 분단 이후 남북의 대표가 처음으로 만난 회담이며, 6 · 15 남북공동선이 발표되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스포츠 교류 등이 진행되었고 남북관계가 화해분위기로 변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8월 12일 - 러시아 쿠르스크호 침몰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가 이 날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해에서 원인 모를 사고로 침몰, 승조원 118명 전원 사망했다. 사건 원인에 대해 영국, 미국, 러시아간에 침몰 원인 공방이 있었지만, 2002년 7월 러시아 정부가 쿠르스크호 안 어뢰에서 연료가 유출돼 폭발이 일어난 것으로 발표했다.
10월 4일 -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 붕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세르비아주의를 주창하면서 세르비아에 의한 유고연방 통치라는 허황된 꿈을 꾸었다. 밀로셰비치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정책은 크로아티아 내전에서 20만 명, 보스니아 내전에서 10만 명을 사망하게 했다. 98년 코소보사태에서 자행한 '인종 청소'로 '발칸의 도살자'란 오명을 얻었고, 결국 2000년 민중 봉기로 인해 실각하였다. 99년 구유고슬라비아국제형사재판소에서 전쟁범죄와 반인도적범죄 등의 혐의로 기소,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재판을 받던 중 2006년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10월 22일 - 마이니치신문, 후지무라 신이치의 '조작' 현장 포착
후지무라 신이치는 81년 4만년전 유물을 발굴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동안 3만 년 전 이전의 유물이 없던 일본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 후로 신이치는 일본에 최소 60만 년 전 인류가 출현했다는 유적을 연속해서 발견해 '신의 손'이라고 칭송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이니치신문이 신이치의 의혹을 조사, 결국 10월 22일 신이치가 '만든' 유물을 묻는 현장을 촬영하면서 신이치의 조작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써 그동안 발견되었던 유물을은 국가 사적 지정이 취소되었고, 교과서도 언급한 내용을 삭제하는 등 해프닝이 일어났다.
11월 11일 - 오스트리아, 카프룬서 대형 열차 사고
2000년 11월 스키 휴양지 키츠슈타인호른으로 향하단 상행 퓨니큘러 열차가 터널 안에서 전소, 12명을 제외한 모두가 사망했다. 열차에 불이 붙었고, 차장이 문을 열려고 시도했으나 열리지 않자 승객들이 유리창을 깨고 열차를 나왔다. 그러나 대부분 유독가스에 중독된 상태였다. 탈출한 155명을 중 터널 아래쪽으로 향한 12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뜨거운 불길에 의해 사망했다.
2001년
3월 18일 - 탈레반 정권, 바미안석불 파괴
아프가니스탄의 극이슬람원리주의 정권 탈레반이 바미안석불을 파괴했다. 바이안석굴은 53m의 거대한 석불과 함께 2만 여개에 이르는 동굴이 있으며, 1,000개의 벽화는 간다라미술을 기조로하고 있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를 이슬람교에 대한 모독으로 여긴 탈레반 정권이 3월 8일 완전히 파괴시켜버렸다.
6월 1일 - 네팔 왕실 대학살 사건 발생
이날 네팔 왕궁에서 비렌드라왕과 왕비가 죽고 디펜드라왕세자가 심각한 중상이 입는 등 총격 사건이 일어났다. 디펜드라왕세자도 4일 사망했으며, 이에 따라 비렌드라왕의 동생인 갸넨드라가 왕위에 올랐다. 이 사건은 갸넨드라가 왕위 찬탈을 노리고 저질른 것으로 밝혀졌으며, 많은 국민들이 왕정을 의심하게 되었다. 또 정부와 마오주의 반군과의 대화도 무산되어 정치적 불안이 심화되었다.
9월 11일 - 9·11 테러
이날 9시와 17시 20분 사이에 항공기 납치 동시 다발 자살테러로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쌍둥이빌딩)이 무너지고, 워싱턴 국방부 청사(펜타곤)이 공격받았다. 8시 LA로 향하던 아메리칸항공 소속 AA11편이 항로를 바꿔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과 충돌했으며, 9시 유나이티드항공 소속 UA175편이 남쪽 건물과 충돌했다. 아메리칸 항공 AA77편이 워싱턴 국방부 건물과 충돌했고, 10시 경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이 무너졌으며, 4분 뒤 유나이티드항공 소속 UA93편이 피츠버그 동남쪽에 추락하였다. 10시 30분 북쪽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 사건으로 세계 초강대국 미국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세계 경제의 중심부인 뉴욕은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다. 건국 이래 본토 중심부에서 외부의 공격을 처음 받은 미국의 자존심은 완전히 구겨졌다. 그것을 차치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90여 개국 2,800~3,500명의 무고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특히 항공기에 타고있던 266명의 승객은 전원 사망했다. 경제적 피해는 화폐가치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테러의 배후자로 부시 행정부는 오사마 빈 라덴의 추종 조직 '알 카에다'로 보았고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10월 7일 - 테러와의 전쟁 : 아프가니스탄 침공
9·11테러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미국은 영국과 함께 오사마 빈 라덴이 숨어있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9월 12일 테러 개입자들에게 사전 경고 없이 보복할 것을 천명한 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10월 7일 영국과 함께 알카에다 훈련 캠프와 탈레반 정부 군사시설 등에 토마호크미사일을 발사했고, 11월 20일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함락시켰다. 이어 22일 탈레반정권을 몰아내고 과도정부를 수립, 전쟁 종결을 선언했지만, 알 카에다와 탈레반을 뿌리 뽑는 데 실패하고 애꿎은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았다. 미국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2003년 이라크전쟁을 일으켜 사담 후세인정권을 몰아내고 과도정부를 세우는 등 대테러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2002년
1월 29일 - 조지 W. 부시, 악의 축 지목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날 대테러전쟁에 일환으로 이라크, 이란, 북한을 지명하면서 '악의 축'이라고 일컬었다. 레이건 대통령 당시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불렀고 2차 대전 당시 '추축국'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량국가' 중에서도 특히 국제 테러 지원과 대량 파괴무기 개발 등 국제 사회에 위협이 되는 나라들로 지목했다. 그러나 미국의 이해관계를 배경으로한 일방적 규정이었으며, 선악 이원론과 사실적 수단의 중시 경향 등 많은 비난을 받았다.
5월 20일 - 동티모르 독립
동티모르는 다른 인도네시아 지역과 다르게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다. 포르투갈의 지배가 끝나자 동티모르는 독립을 준비했지만 인도네시아에 병합되었다. 이후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에 맞서 투쟁했으며, 인도네시아는 이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이는 91년 11월 산타쿠르즈 대학살로 널리 알려졌으며, 동티모르 청년의 장례식 주간에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인도네시아군이 무차별 발포하여 271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인도네시아를 지원하던 미국은 92년부터 지원을 중단하고, 93년 유엔인권위원회가 인도네시아를 규탄했다. 98년 수하르토 대통령이 하야한 후 새정권이 들어서자 동티모르의 독립이 급물살을 타 99년 주민투표에서 78%가 독립을 선택했다. 9월부터 인도네시아군은 철수했고, 01년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 02년 샤나나 구스마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21세기 첫 독립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6월 29일 - 제2차 연평해전 발발
1999년 제1차 연평해전을 일으킨바 있는 북한은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2002년 6월 다시 북방한계선을 넘어왔다. 함포와 기관포를 주고받는 치열한 격전 이후 남한은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당했다. 북한은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 퇴각하였다.
8월 2일 - 앙골라 반군 군대 해산으로 27년 앙골라 내전 완전 종결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던 앙골라는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과 반공성향의 앙골라 해방민족전선(FNLA), 앙골라 전면독립민족동맹(UNITA) 등 3개의 조직이 대립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앙골라에 독립이 주어지면서 3자 간의 단합으로 독립했지만, MPLA와 FNLA · UNITA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초기 MPLA가 소련과 동유럽의 지원을 받아 우세했다. 중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FNLA · UNITA연합은 패퇴하던 중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개입으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으나, 쿠바와 소련의 지원 확장으로 MPLA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국제연합의 중재로 91년 휴전협정을 맺고 이듬해 선거를 치뤘으나 UNITA가 결과를 인정하지 않아 내전에 다시 돌입, 02년 UNITA 지도자 조나스 사빔비가 전사하고 반군 5만명이 해체되고 나서야 내전이 종결되었다.
10월 23일 - 체첸 반군, 러시아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 사건
체첸은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에 대해 꾸준한 독립 투쟁일 벌여왔다. 푸틴 대통령 집권기에 체첸에 대한 탄압이 더욱 거세지자 체첸 분리주의자 40여명이 모스크바 남쪽 멜르니코프거리의 극장에 기관총을 들고 난입해 700여 명의 관객을 인질로 잡고 체첸 전쟁을 중단할 것을 주장했다. 3시간 뒤 어린이와 임산부, 이슬람교도 등 200여 명을 석방하고 계속 인질극을 벌였다. 러시아는 26일 특수부대를 통해 진압에 성공했지만 12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해 과잉진압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후 러시아와 체첸 반군 사이에 크고 작은 분쟁이 지속되게 되었다.
2003년
3월 20일 - 이라크전쟁 : 미국, 이라크침공.
미국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고 자국민과 세계 평화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과 함께 3월 17일 최후 통첩을 보낸 후 '이라크의 자유(Freedom of Iraq)'라는 작전명을 세운 뒤 20일 바그다드 남동부에 미사일 폭격을 가함으로써 전쟁을 시작했다.
4월 10일 - 이라크전쟁 : 미국 · 영국, 바그다드 함락.
전쟁 개시와 함께 이라크의 미사일기지와 포병기지, 방공시설, 정보통신망 등에 대해 공습을 감행했고, 22일 바스라를 점령했다. 이어 바그다드를 공습하고 대통령궁과 통신센터 등을 집중적으로 파괴했다. 4월 7일 연합군은 바그다드 중심부로 진입했고, 이튿날 만수르 주거지역 안의 벙커에 집중 포격했다. 9일 영국군이 바스라 임시지방행정부를 구성하고, 다음날 미국이 바그다드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14일 이라크의 최후의 보루이자 사담 후세인의 고향인 북부 티크리트를 미국이 장악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이 전쟁은 개량형 스마트폭탄, 전자기 펄스탄, 소프트폭탄, 프레데터, 에이브럼스전차 등 첨단무기가 사용된 '전자전'이었다. 이 전쟁으로 미군 117명, 영국군 30명이 전사했고, 400명이 부상당했다. 민간인은 종군기자 10명을 포함해 1200여 명이 사망했고, 최소 2,320명의 이라크군이 전사했다. 또한 반전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으며 민간지역 폭격으로 민간인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시위는 격화되었다. 또한 미국의 목적이 이라크의 자유보다 이라크의 원유 확보, 중동 지역에 친미블록 구축, 경기 회복을 위한 돌파구 마련, 중동 정치구역 개편 등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비난받았다.
12월 13일 -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 체포
미군은 전쟁에서 패하여 도주한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을 수색해 체포했다. 사담 후세인은 1957년 바트당을 입당하고 69년 쿠데타에 참가하였고 79년 대통령이 되었다. 80년 이란-이라크 전쟁, 90년 걸프전쟁 등을 일으켰으나 91년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에게 패배하여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2003년 이라크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바그다드 교외로 도주, 숨어있었으나 미군에 의해 체포,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다. 1006년 사형이 선고되어 12월 사형되었다.
2004년
3월 11일 - 마드리드 동시다발테러 사건
에스파냐 마드리드에서 7시 시내교통 중식축 역할을 하던 아토차역에서 갑작스런 폭발이 일어난 뒤 같은 노선의 2개 역에서 잇따라 폭탄이 터졌다. 출근 시간대에 맞춰져 190명이 사망하고 1,800명이 부상당했다. 테러의 배후에는 알카에다가 지목되었다. 테러의 원인은 에스파냐가 영국과 함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앞장서 지원하고 전후에도 자국군대를 이라크에 파병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전세계의 테러의 공포가 확산되었고 미국의 대이라크 정책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4월 22일 - 룡천역 열차폭발 사건
이날 평안북도 용천군 용천역에서 질산암모늄을 실은 화물차량과 유조차량 교체작업을 하던 중 열차충돌이 일어나, 전철에 전기를 공급하는 고압전선이 끊어져 유류수송열차 위로 떨어지면서 나온 불꽃이 열차에 옮겨 붙어 대규모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용천은 서북지역 교통의 요지이며, 용천역은 피현군의 정유공장에서 석유를 실은 수송열차가 지나는 역이다. 이 폭발 사고로 철로가 훼손되고 역사는 물론 역 부근 학교와 관공서, 민가 등 기타건물이 부서져 폐허가 되었다. 가옥 1,800여 채가 완전 붕괴되었고, 8,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150여 명이 사망하는 등 피해가 커지자 대한적십자사 등 대북지원 민간단체와 국제기구 등에서 피해 복구를 지원하였다.
4월 30일 -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의 이라크 포로 학대사건이 언론을 통해 밝혀짐
아부그라이브수용소는 60년대 말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정치범과 반대파를 고문, 처형하던 이라크 최대의 정치범 수용소다. 주요 시설에서는 총 203명을 수용할 수 있고, 8개의 텐트 구역세는 모두 4,8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84년 4천여 명이 처형됬고, 90년대 후반 감옥을 청소한다는 이유로 2500여 명을 처형하는 등 악명 높은 교도소였다. 이 교도소는 이라크전쟁 때 파괴되었다가 미군이 체포한 이라크인을 수감하기 위해 재사용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미군 헌병들은 각종 잔혹한 방식으로 이라크인들을 고문했고 여수감자에 대한 성적 학대 등을 일삼았다. 남성 포로들을 발가벗겨 바닥에 쓰러트리는 것은 물론, 알몸의 포로 머리에 두건을 씌운 채 문이나 침대에 손을 묶는 등 포로들을 모욕하였다. 이러한 장면들이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해 지인들에게 전송되면서 차마 사람으로서 하지 못할 일들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사진들이 인터넷과 언론에 공개되면서 미국, 영국 등 연합군에게 인권 유린에 대한 지탄이 이었으며, 세계의 인권을 지킨다는 미국의 위신이 추락할 대로 추락했다.
2004년 12월 26일 - 인도네시아 대지진 강타
7시 수마트라섬 북서부 해안 해저 40㎞에서 리히터 규모 8.9의 강진이 발생했다. 수소폭탄 270개,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의 266만 개의 위력에 해당하는 이 강진은 1900년 이후 전세계에서 발생한 지진 중 5번째로 큰 규모였다. 이 지진으로 발생한 초대형 쓰나미는 수마트라섬 북부 아체주를 급습, 남아시아 전해안으로 뻗어나갔다. 푸켓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방콕, 미얀마, 방글라데시, 인도 동부 및 스리랑카와 몰디브까지 밀어닥쳤다. 멀게는 아프리카 동부해안까지 뻗어나가 탄자니아에서 10명, 케냐에서 1명이 사망했다. 이 지진해일로 총 30만 명이 사망하고 실종되었으며, 인도네시아에서 24만 명이 사망했고 스리랑카에서 4만 여 명, 인도에서 1만 5000여 명이 사망했다. 특히 세계적 휴양지인 푸켓과 몰디브 등에서 수천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11월 ~ 12월 - 우크라이나 오렌지혁명
우크라이나는 92년 소련에서 분리독립했지만, 러시아어를 쓰며 친러시아 성향의 동쪽과 우크라이나어를 쓰며 친서유럽 성향의 서쪽으로 나뉘어져 있다. 04년 동쪽을 대표하는 여당의 야누코비치 총리와 서쪽을 대표하는 야당의 유셴코가 박빙의 대선을 치르게 되었다. 당시 쿠치마 대통령은 10년 동안 실정을 거듭하여 민심을 완전히 일었다. 대선 결과 박빙의 승부로 재집권에 성공한 여당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포착되면서 서쪽 지역 중심으로 오렌지혁명이 시작되었다. 당시 시위자들은 야당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옷과 목도리를 걸쳤고, 오랜지색 깃발을 휘두르며 시위를 이어갔다. 결국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거를 실시하게 되었으며, 8% 차이로 야당의 유셴코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유셴코 대통령이 내걸었던 개혁은 국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5년
2월 16일 - 교토의정서, 발효
지구온난화 규제와 방지를 위한 국제협약인 교토의정서가 이날부터 발효되었다. 1997년 일본 교토에서 개최된 기후변화협약 제3차 당사국충회에서 채택된 것이 2005년 발효된 것이다. 선진국으로 분류된 38개국은 2012년까지 평균 5.2%의 온실가스 감축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멕시코와 함께 온실가스 감축의 압력을 받고 있으며, 미국은 자국 산업보호를 위해 2001년 기후변화협약을 탈퇴했다.
3월 24일 - 키르기스스탄에서 꽃피운 튤립혁명
3월 키르기스스탄에서 14년간 장기집권한 아스카르 아카예프 정권을 무너뜨린 튤립혁명이 일어났다. 아카예프 정권의 부정선거로 촉발된 이 시위는 24일 대통령궁을 점거하였고, 대법원이 선거 무효화를 선언하면서 아카예프는 러시아로 망명하고 총리 니콜라이 타나예프는 사임하였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정권이 정치 · 경제 개혁에 실패하고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자 2010년 4월 7일 제2차 튤립혁명을 일으켜 바키예프를 몰아냈다. 시위대의 상징색인 레몬색을 따서 '레몬혁명'이라고도 한다.
2006년
6월 4일 - 몬테네그로 분리 독립, 해체된 유고연방
유고슬라비아연방은 슬로베니아를 위시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이 독립하여 떨어져 나가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만이 남게 되었다. 두 국가는 좀 더 느슨한 형태의 국가 연합인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을 수립했으나 수적 우위에 있던 세르비아 때문에 몬테네그로 내에서는 분리 독립 움직임이 일었다. 5월 주민투표에서 독립 찬성이 과반수를 넘자 독립을 확정, 세르비아는 그동안 받은 국내외의 지탄 등을 고려하여 독립을 인정하였다. 6월 4일 몬테네그로 의회는 독립 선언을 발표하였고,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국가연합'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10월 9일 - 북한 핵실험 단행
2003년 핵확산 방지조약을 일방적으로 탈퇴한 북한이 이 날 10시 35분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핵실험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100% 북한 고유 기술로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한국에서는 그 여파로 지진파가 감지되었다.
2007년
4월 2일 -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지기론사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은 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을 말하며,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주택 담보 대출이었다. 2000년대 들어 유동성 광잉과 저금리로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자 이에 편승한 모기지론 업체들 간의 과한 경쟁으로 서브프라임 등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06년 말 13.7%로 급상승했다. 급상승하던 집값이 하락세로 떨어지고 04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금리를 5.25%로 대폭 올리자 이자부담이 커진 저소득층이 원리금을 제때 갚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브프라임의 연체율이 20%로 급상승, 4월 2위를 차지하던 서브프라임 대기업 뉴센트리 파이낸셜이 파산신청을 내면서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사태'가 일어났고 이는 세계 경제로 파급되었다.
4월 11일- 알제리에서 알카에다의 폭탄테러로 33명이 사망
알제리 알제에서 정부청사 부근과 공항 근처 경찰서에서 연쇄 폭탄테러로 33명이 사망하고 220여 명이 부상당했다. 알카에다는 이 일의 배후에 자신들이 있다고 발표했다. 알카에다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몇차례 더 연쇄 폭탄테러를 일으켜 12월에는 50여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4월 16일 -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
미국 버지니아 블랙스버그에 위치한 버지니아공대에서 무차별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32명이 사망했으며, 29명이 부상을 입었다. 범인은 재미 한국인 조승희로 밝혀졌으며, 미국 영주권자로 8세 때 이민을 간 1.5세대였다. 그는 사건 직후 자살하였다. 이 사건은 미국 최악의 총기 살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9월 29일- 미얀마의 군부가 반정부 시위가 '진압'되었음을 선언
이번 시위는 군정부가 8월 15일 천연가스 5배, 경유 2배 등 연료값을 갑자기 인상하면서 촉발되었다. 9월 5일에는 승려와 군인들 간의 무력 충돌에서 승려 4명이 체포되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종교계까지 참여하여 시위는 확산되었다. 사태가 커지자 군부는 9월 6일 양곤과 만달레이에 야간 통행엄금을 발령하고 집회도 금지했다. 9월 22일에는 시위대가 아웅산 수 치를 방문하였으나 26부터 군부가 바리게이트를 설치하고 아웅산 수 치를 가택 연금했다. 29일부터는 군부의 강력한 탄압에 의해 시위가 잦아들었으며, 외부의 시선을 고려하여 군부 지지 시위를 조장하기도 했다. 이 시위에서 군부는 13명이 숨지고 11명이 부상당했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더 많은 이들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월 23일 - 네팔, 왕정 폐지 결정
네팔은 1996년부터 모택동주의를 추종하는 반군과 내전을 겪어야 했고, 2001년 왕과 왕비를 포함한 10명의 왕족이 살해되는 참사를 겪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즉위한 갸넨드라왕이 전제적인 정치를 벌이다 2006년 반정부 시위로 입헌정치로 돌아왔다. 2007년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을 폐지할 것을 결정했고, 2008년 제헌의회가 공화제를 채택하면서 239년 동안의 왕정이 종식되었다.
2008년
2월 13일 - 오스트레일리아 케빈 러드 총리, 원주민 말살 정책에 사죄
이전 2007년 존 하워드 정권에서는 호주 정부가 원주민들에 대한 민족말살정책이 이전 정권의 일이었다는 이유로 사죄나 보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2007년부터 집권한 케빈 러드 행정부는 이날 범정부차원에서 첫번째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등 적극적인 사죄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정부 주도의 토착민 가정 및 사회 파괴행위에 대해 사죄하면서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보인 것이다.
2월 17일 - 코소보, 세르비아로부터 독립 선언
코소보가 이날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99년 전쟁을 치른 세르비아는 이 해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했다. 세르비아는 2008년 10월 유엔 총회에서 독립에 대한 합법성 여부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요청했으나 사법재판소는 이를 적법하다고 못박았다. 현재 코소보의 독립은 미국과 서방국가등 69개국이 인정하고 있으며, 러시아, 중국, 세르비아 등은 인정하고 있지 않다.
2월 19일 -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직 퇴임
49년간 쿠바를 통치해 온 피델 카스트로가 이날 국가평의회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쿠바의 국가평의회 의장은 614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의회에서 선출하며, 국가평의회는 31명의 각료로 구성되어 있다. 이어 5일 후에는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 모두 바티스타 친미 독재정권을 몰아낸 쿠바 혁명의 주역들이다.
2월 26일 - 뉴욕 필하모닉, 북한 동평양대극장에서 첫 평양 공연
북한은 지금까지 전통적 우방국과 수교국의 악단들만 음악 공연을 하게 했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미국 뉴욕 필하모닉 공연을 허락했다. 18시경부터 북한 국가와 미국 국가가 차례로 연주되었으며, 바그너의 '로엔그린' 3막 전주곡, 드보르자크의 9번 '신세계로부터'. 거슈윈의 '파리의 미국인', 최성환의 '관현안 아리랑' 등이 공연되었다. 이 장면은 방송을 타고 전세계로 방송되었다.
7월 11일 -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이날 16시 50분 경, 북한 금강산관광지구에서 남한 국적의 여성 관광객 박왕자가 군사 경계지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남한은 북한에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으나 북한이 거부하면서 실제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8월 7일 - 러시아 - 그루지야 전쟁발발
그루지야는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친서방관계를 유지해왔다. 러시아는 그루지야 내 남오세티야를 지원하면서 두 나라의 감정의 골은 깊어갔다. 결국 러시아와 그루지야는 7일부터 5일 간 전면전을 시작했다. 이 전쟁으로 최소 390명의 시민이 사망했고 19만 명이 피난길에 올랐다.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산발적인 총격전이 이어져 적개심은 높아만 가고 있다.
8월 18일 -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사임
철권통치로 파키스탄을 통치하던 무샤라프 대통령이 이날 사임했다. 1999년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지 8년 10개월 동안 수차례 비상조치와 정치 탄압, 부정 선거 등 집권 연장을 위한 무리수를 거듭한 끝에 국민들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9·11 이후 미국의 지지를 받은 무샤라프는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가 의문의 피격으로 사망하면서 국민들의 반감이 상승했다. 결국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무샤라프는 대통령을 사임하게 되었다.
12월 6일 - 2008 그리스 반정부 시위가 시작
15세 소년이 총으로 숨지게 한 경찰에 대한 항의에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는 점차 확산돼 아테네와 트리칼라시, 베리아, 데살로니키 등지에서 일어났다. 시위 3일째인 8일에는 시위대가 경찰하게 되었으며, 12일에는 500여명의 시위대가 경찰청사를 포위하기도 했다.
12월 14일 - 조지 W. 부시 대통령, 기자에게 신발 투척을 당함
미국 부시 대통령이 한 기자에게 신발 투척을 당했다. 이라크를 방문해 누리 알-말리키 이라크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을 하던 중 이집트 카이로 소재 알-바그다디야 TV 소속의 문타다르 알-자이디 기자가 '이것은 이라크인들이 주는 선물이다. 당신은 개다'라고 소리치며 부시에게 신발을 던졌다. 현장에서 그는 체포됬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12월 27일 - 이스라엘, 가자 지구공습
이스라엘이 '캐스트 레드'라는 군사작전 아래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로켓 공격을 뿌리 뽑겠다는 명목으로 가자지구를 공습했다. 이스라엘의 공습은 2009년으로까지 이어져 1월 18일 일방적 휴전을 선언할 때까지 22일 동안 팔레스타인인 1,400여 명을 죽였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무장교전이 이어지는 등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긴장은 여전하다.
2009년
1월 31일 - 케냐, 전복된 유조차에서 흘러나온 기름 때문에 벌어진 대참사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170km 떨어진 곳에서 유조차가 전복되었다. 평범한 교통사고로 끝날 것 같았던 이 사건은 가난한 마을 주민 수백명이 유조차에서 흘러 나온 기름을 주어 담다가 불꽃이 번지면서 순식간에 불이 마을을 덮았다. 결국 100여 명의 주민들이 사망했으며 외신들은 '가난이 부른 비극'이라고 전했다.
4월 5일 - 북한 광명성 2호 발사 / 5월 25일 - 2차 핵실험 성공
북한은 4월 5일 함경북도 무수단리에서 하나의 로켓을 발사했다. 북한은 이를 은하 2호 로켓에 탑재된 인공위성 광명성 2호라고 발표했다. 북한은 이어 궤도에 진입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남한과 미국측은 인공위성 발사체가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추락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북한은 풍계리에서 5월 25일 두번째 핵실험을 단행하면서 전세계가 북한을 주목하게 되었다.
4월 25일 - 세계보건기구, 국제적 건강 위기 선포
2009년 4월부터 멕시코에서 급속도로 퍼져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신종 인플루엔자는 미국 등 주변으로 옮겨가면서 세계보건기구가 국제적 건강 위기를 선포했다. 2009년 말 감염환자가 260,000명이 넘어섰으며, 감염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20여개국에서 나타났다. 129여개국에서 감염 환자가 발생했다.
5월 19일 - 26년의 스리랑카 내전 종식
스리랑카를 지배하던 영국은 녹차 재배를 위해 인도 남부의 타밀인들을 대거 스리랑카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스리랑카가 독립하면서 타밀인들은 그대로 남겨지게 되었다. 1983년 독립을 요구하던 타밀 반군이 13명의 스리랑카 군인을 살해하면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였다. 잠시 내전이 중단되었으나 1999년 대선 이후 내전이 재발, 2009년 타밀 반군의 지도부 대다수가 사살되고 반군이 섬멸되다시피되자 타밀 반군은 패배를 시인하였다. 그러나 10만 여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민간인이 살해되었으며, 해소되지 않은 종족 갈등과 억압된 사회분위기등은 해결해야할 일로 남았다.
7월 6일 - 위구르서 사상 최대 반중 독립요구 시위
신장위구르자치구는 티베트와 함께 중국의 2개 화약고 중 하나이다. 700여 년간 독립된 제국을 세웠던 위구르인들은 1949년 중국에 통합된 이후 끊임없이 분리 독립운동을 요구하고 있다. 티베트에 비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지 못해 폭력적인 방법을 많이 사용해 온 위구르인들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테러를 계획하기도 했다. 2009년 대규모 반중시위가 일어나 100여 명이 숨지고 800여 명이 다쳤다.
11월 25일 - 두바이, 두바이월드의 채무상환 연기요청(모라토리엄) 발표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면서 전세계 경제가 충격에 빠졌었다. 두바이는 해변에 팜 월드나 더 월드, 세계 최고층 건물인 부르즈 할리파 등 오일머니를 이용한 토목공사를 진행했지만 일정한 수익이 나오지 않자 모라토리엄을 발표했다. 두바이 쇼크는 전세계가 충격을 받았으나 아랍에미리트의 맏형 아부다비가 도왔기 때문에 사태는 진정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두바이는 충격에서 벋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0년
1월 13일 - 아이티 대지진 강타
6시 53분, 7.0의 강진이 아이티를 강타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 인근 지표면에서 13km 깊이에서 발생한 이 지진은 대통령궁과 주요 건물들을 비롯해 포르토프랭스를 철저히 파괴했으며, 23만여명이 사망했다. 첫 지진 이후 여진이 2시간 동안 6차례 발생했고, 9시간 동안 26차례나 발생했다. 지진은 히스파니올라섬에서 국경을 맞대는 도미니카공화국과 쿠바, 자메이카, 베네수엘라 등지에 감지됐고, 인근 국가들은 쓰나미 경보를 발령했다. 또 20일 5.9 규모의 지진이 다시 발생하였다. 이후 10월 콜레라가 창궐하는 등 국민들의 생사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부정선거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아이티는 혼란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2월 27일 - 칠레 서부 대지진 강타
2010년 2월 27일 칠레 콘셉시온 북북동쪽 115km 해역에서 모멘트 규모 8.8의 대지진이 칠레를 강타했다. 이 위력은 1960년 발디비아 지진(규모 9.5) 이후 칠레에서 발생한 가장 강력한 지진이며 지구축이 흔들렸던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으며 7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지진 당시 규모는 아이티의 지진보다 더 큰 규모였지만, 대비를 잘 했기 때문에 초기 피해는 적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여진과 지진해일에 대한 방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더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3월 23일 - 오바마, 건강 보험 개혁법안 서명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추진하는 건강 보험 개혁법안에 서명했다. 건강 보험 개혁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1912년 선거공약으로 내건 이후 100여년 동안 남겨진 개혁 과제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여러 개혁을 추진하면서, 3천 200만 명이나 달하는 '보험 사각지대'에 놓인 미국인들을 건강 보험 수혜자로 끌어들이는 개혁법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이 법안을 두고 민주당과 공화당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3월 26일 - 천안함 사태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해군 초계함인 PCC-772 천안(천안함)이 격침, 침몰되었다. 이 사건으로 40명이 사망했고 6명이 실종되었다. 정부는 침몰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민간 · 군인 합동조사단을 구성하고,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 스웨덴, 영국 등 4개국 24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이 5월 20일,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를 통해 미국과 유럽, 일본, 인도 등의 지지를 얻어 안전보장이사회의 안건으로 회부되었으며, 천안함 공격을 규탄하는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천안함의 침몰에서 인양, 조사 발표까지 우리나라 사회와 주변국의 관심이 들끓었으며, 침몰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가설과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북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4월 10일 -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 비행기 사고로 사망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이 탑승한 폴란드 공군 소속 투폴레프 Tu-154M이 러시아 스몰렌스크 인근에서 추락,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이날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에 남아있는 오랜 앙금이었던 카틴 숲 학살의 추모식 행사에 초대받지 못해 개별적으로 방문하려다 사고를 당했다. 카틴 숲 대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비밀경찰조직 NKVD가 폴란드 포로 군인 22,000여명을 학살하고 스몰렌스크 인근 카틴 숲에 매장한 사건이며,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은 1970년대 반공산당 운동에 가담하면서 부터 반러시아 성향을 보여왔고, 2005년 바르샤바 시장 재직 시에는 러시아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체첸 무장세력 지도자 조하르 두다예프의 이름을 딴 광장을 조성해 러시아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4월 10일 - 타이 반정부 시위 격화
타이 방콕에서 군경과 반정부 시위대가 충돌, 21여 명이 사망했다. 이는 1992년 시위 과정에서 40여 명이 사망한 이후 최악의 유혈사태다. '레드 셔츠'라 불리는 반정부 시위대에 경찰과 군은 강제 해산작전에 들어갔으나 격렬히 저항하면서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레드 셔츠'는 2006년 쿠데타로 물러난 탁신 전 총리를 지지하는 이들이며, 아피싯 정부를 불법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9월 28일 - 44년만에 열린 북한 당대표자회
북한은 이 날 44년만에 당대표자회를 개최했다. 1980년 마지막 대표자회를 얼였을 당시 김일성, 김정일을 비롯해 5명의 상무위원은 김정일 위원장 혼자만 남았다. 몇번의 연기 끝에 열린 이번 대표자회에서는 김정은, 김경희, 최룡해 등 6명이 조선인민군 대장 칭호를 받았으며, 김정은의 후계구도가 공식화되어 3대 세습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10월 13일 - 칠레 산호세 광산에서 매몰된 광부 33명에 대한 구조 완료
8월 5일 칠레 북부 아타가마사막 산호세광산에서 70만톤의 암석과 토사가 무너져 내려 지하 700m 아래 33명의 광부들이 매몰되었다. 칠레 정부가 첨단 시추 공법을 통해 구조활동을 나선 지 17일 만에 지하에서 살아있다는 메모가 전해지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세계에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전세계의 관심과 응원을 받았고, 각지에서 전문가들이 광부들을 구조하기 위해 구조 현장의 '희망캠프'로 몰려들었다. 또한 매몰된 상태에서 밝고 의연한 자세로 침착하게 대처한 33명의 광부들의 모습에 전세계가 감동했다. 이윽고 10월 13일, 구조작업이 진행된 69일 만에 33명 전원이 지상으로 무사히 귀환하였다.
11월 23일 - 연평도 포격 사건
북한은 이날 14시 30분 경에 남한 대연평도에 170여 발을 포격했다. 이에 남한은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80여 발을 대응사격하면서 반격했다. 이 사건으로 쌍방 군인 7명이 전사했으며, 민간인도 2명이 사망했다. 남북교전으로 민간이 사망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로 처음이어서 국제적인 관심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천안함 사건으로 벌어진 남북갈등이 심화되었다.
11월 28일 - 위키리크스가 미국의 외교문건 25만건 공개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언 어샌지는 영국의 가디언지와 뉴욕 타임스 등의 기자와 협의해 수십만 건의 외교 문서를 공개했다(케이블 게이트). 본래 위키리크스는 어샌지가 2006년 정부와 기업, 단체의 불법 · 비리 등 비윤리적 행위를 고발하는 웹사이트다. 어샌지가 공개한 문건의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비판에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국제적 명성과 지지를 받았고 2011년 재스민혁명에도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