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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간도 체험
1. 디아스포라의 시인 의식
만 27년 2개월 보름의 생애를 옥사로 마감한 윤동주에게 ‘간도(間島)’는
태어난 곳이자 사후에 안식처가 된 대지로 평양(1년),
서울(3년), 일본(도쿄, 교토, 후쿠오카 3년) 체재 기간 7년을 뺀 20년을 보낸 고향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과연 윤동주에게 간도가 영혼과 육신의 안식처이자 민족혼의 텃밭으로서의 고향이자
조국의 역할을 다 했을까? 그렇지 못한 것 같다는 결론을 도출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간도’란 명칭은 한중간의 갈등의 소지가 없지 않겠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그대로 쓰기로 한다.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으면서도 때로는 절실할 경우가 있는데, 윤동주가 만약 옥사당하지 않고 8.15를 맞았다면 그 후 어떻게 했을까 상상해 보는 것도 그 중의 하나다. ‘재만(在滿) 조선인’의 경우 광복 후 취할 길은 크게 두 갈레였다. 그대로 중국에 머무는 것과 귀국인데, 윤동주 일가는 두 선택으로 나뉘었다.
일주와 혜원은 귀국했고, 그들의 부모와 막내 광주는 중국에 남았으니 맏이인 동주가 어느 편에 섰을까는 그리 쉽게 단정지울 수 없을 것 같다. 아마 가족 중 가장 심각하게 고뇌했을 것이라는 가설은 그의 시로 미뤄봐서 유추할 수 있을 것이며, 어느 쪽을 선택(혹은 강요 당)했든 그는 영원한 디아스포라 의식에 젖어 그 선량한 표정으로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다른 한쪽 지역을 그리워하며 찢겨진 남북분단과 이에 덩달아 오갈 수 없었던 중국 대륙과의 사이에서 영혼의 중유(中有)로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시인이었지 않았을까.
이 가설은 윤동주에게 ‘간도’란 비록 태어나긴 했으나 ‘고향’의식을 심어주지 못한 채 타향이었음을 의미한다.
헌짚신짝 끟을고 / 나여긔 웨왔노 / 두만강을 건너서 / 쓸쓸한 이땅에 //남쪽하늘 저밑엔 / 따뜻한 내고향 / 내어머니 게신곧 / 그리운 고향집.”
<동시 고향집 - 만주에서불은->)(각주 1)
윤동주의 전기적 사실만으로는 풀이가 안 되는 작품이다. 그는 분명히 명동촌에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도 자신의 고향을 “남쪽 하늘 저 밑” “따뜻한 내 고향”이라 했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어머니가 그 고향에 계신다고 했다. 더구나 이 시를 썼던 때(1936.1)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 3학년(1935년 9월 편입) 겨울 방학을 맞고 있지 않는가.
여기서의 ‘남쪽’이란 현재 개념으로서의 남북 분단 구분법에 의한 ‘남한’이 아니라 한반도라는 조국 전체일 수도 있고, 그보다도 더 궁극적인 이상향의 상징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태어난 ‘간도’를 고향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대체 고향이란 무엇인가. 유목민이었던 인간이 1만 년 전 농경생활로 정착하면서 형성된 ‘고향의식’은 아시아 도작문화권(稻作文化圈)에서 유난히 집착력이 강하게 각인되었다. ‘이향(離鄕)’은 귀향을 전제로 했으며, 그게 못 이뤄지면 그 향수를 달래고자 ‘이향(異鄕)’이란 술어를 썼다. 바로 또 다른 고향이란 뜻이다. 여기엔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는 뜻도 있지만 고향을 영혼의 안식처나 유토피아와 같은 개념으로 써온 오랜 도작문화의 인습이 스며있다. 이 술어는 바로 윤동주의 문제작과 직결된다.
고향에 돌아온날밤에 /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엇다. //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 어둠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 백골을 드려다 보며 / 눈물 짓는것이 내가 우는것이냐 / 백골이 우는것이냐 / 아름다운 혼이 우는것이냐 // 지조 높은 개는 /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 어둠을 짖는 개는 / 나를 쫒는 것일게다. // 가자 가자 / 쫒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 백골몰래 / 아름다운 또다른 고향에가자.
1941.9. <또 다른 고향>
평이하기로 유명한 윤동주 시 중 가장 논란이 많은 작품이다. 연희전문 4학년, 마지막 여름방학을 용정(출생지 명동에서 1931년 늦가을 용정으로 이사)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낸 뒤 상경(주 2),
그가 좋아했던 정지용 시인이 살던 북아현동(주 3)으로 하숙집을 옮겼던 즈음에 쓴 작품이다. 대학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역사적인 위기의식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정신적인 안주지를 찾을 수 없었을 때였다. 이 불안한 시기에 <별 헤는 밤>(11월 5일), <서시>(11월 20일), <참회록>(1942년 1월 24일) 등 대표작이 씌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만큼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 걸 체득했음을 의미하며, 시가 “쉽게 씨워지는“(<쉽게 씨워진 시>,
1942년 6월 3일작) 게 아니라 그 고뇌가 절창을 낳은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윤동주 시세계의 3가지 비밀 코드는 자화상을 비춰주는 ‘거울(혹은 하늘이나 우물)’과, 그걸 들여다보면서 느꼈던 ‘부끄러움’, 그리고 일생 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실향민 의식으로서의 망향곡인 ‘고향’인데, 이 중 고향의식이야말로 그의 정신적 원형이 될 것이다. 즉 고향 상실자의 낭패감, 고향을 찾을 자격조차 박탈당해버린 나약한 존재자로서의 죄의식, 영원한 안주지를 향한 동경심이 그를 ‘부끄럽게’ 만들어 ‘거울’(우물)을 들여다보도록 했다는 뜻이다. 순서로 보면 거울을 들여다봄으로 써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되어 있으나 시적 구성이나 심리적 상태로 말한다면 이미 죄의식이 있었기에 들여다보면서 이내 부끄러움을 상기했다는 게 옳을 것이다. 왜 그는 자신이 태어난 데다 부모가 엄연히 생존해 있는 고향에서 타향의식 혹은 실향민 의식을 느꼈을까.
2. ‘간도’의 민족사적인 의미
윤동주에게 고향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는 망국인의 유이민으로 태어났기에 고향이 곧 ‘이향’으로 ‘또 하나의 고향’일 뿐이었다. 그가 태어났던 ‘북간도’는 ‘다민족 집성촌’이었다.
중국 동북지역으로의 조선인 이주 역사는 범월잠입기(犯越潛入期, 1677 - 1881. 빈농과 범법자들이 청나라와 조선으로부터 몰래 잠입하여 개간하던 시기) 이후, 근대적 이민기(1882- 1910)를 맞는다. ‘이민 초간(招墾)시기라고 부르는 이때 청 왕조는 동북 3성(吉林, 黑龍, 遼寧)을 넘보는 러시아 세력을 견제할 능력이 없어지자
1878년 지린(吉林) 일대의 통치를 이민정책으로 대체했다. 이 지역에 대한 봉금령(封禁領)이 풀린 게
1881년, 이민 실변(實邊)정책으로 전환하여 훈춘에다 초간총국(招墾總局)을 설치했다.
이어 조선족 전문 개간지역으로 연변을 확정지은 건
1885년이었고, 이로써 오늘의 조선족 이민문학의 총본산인 옌지(延吉)문화권이 형성되는 터전이 자리했다.
세칭 간도(間島)란 명칭이 유래한 것도 이후의 일로, 이 지명은 원래 조선 민간에서 유래했다. 두만강변의 모래톱 개간지를 간토(墾土) 혹은 간(墾島)라고 불렀는데, 이를 나중에는 사잇섬(間島)으로 부르게 되면서 정착해 버렸다. 이 명칭은 두만강 사잇섬을 벗어나 강 건너 옥토로 몰래 월경하여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확대 사용함으로써 동북 3성 중 옌지 일대를 간도로 부르게 되었다.
그간 중국은 청일전쟁(1894)의 패배로 맺은 시모노세키(下關)조약에서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 펑후도를 약탈당한 후 의화단 사건(1900)으로 체결한 베이징 의정서(1901)로 외국군 주둔도 허락하는 처지로 전락해 버렸다.
1904년 6월 15일, 중국과 조선 지방 관리들은 ‘중.한 변계선 후규약’을 체결, “간도라고 하는 ..... 가강(假江. 모래톱)의 땅을 의연히 종성(바로 윤동주 조상의 고향) 조선인들이 경작하게끔 세를 준다”고 정했다. 조선인 농민의 월경 경작 합법화인 셈인데, 사실상 이주의 묵인인 셈이며, 이런 조건에서 조선인 마을은 점점 늘어났다.
연길현(延吉縣) 용정촌(龍井村)에 조선인 마을이 처음 이뤄진 건 1877년 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함경. 평안도 출신 장정들이 열네 세대를 거느리고 회령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그곳에 터전을 잡은 것이 오늘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시원이 되었다.
해란강 기슭에 살던 조선 처녀가 강가에서 빨래를 하던 중 개구쟁이들이 잉어를 잡아 괴롭히자 그
걸 놓아줬는데, 그 잉어가 동해 용왕의 셋째 아들로 잠시 벌을 받아 잉어로 화신한 것이었다.
빨래를 할 때마다 그녀 앞에 나타나는 잉어가 안쓰러워 마을의 우물에다 넣어 길렀는데, 어느 날 밤 우물가에 가보니 총각으로 화신한 잉어를 만나 둘은 사랑, 용왕의 반대에 절망한 처녀가 우물에 투신자살하자 거기서 청룡 한 마리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 중국 조선족의 상징인 용정은 육도구(六道溝)란 명칭도 함께 썼으나 1931년 이후 ‘용정촌’으로 통일되었다.
이 전설처럼 아름다운 평원의 낙토에 중국과 조선인이 평화롭게 살고 있을 때 일본 헌병(중좌 사이토 스에지로, 齊藤季治郞 지휘)이 들이닥친 게 1907년 8월 19일. 20여 명의 군경과 54명의 관리가 대거 몰려들어 민가를 급습, 강점하곤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란 간판을 내걸었다. 중국 동북3성에 대한 일제 침략의 서곡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근거하여 “간도 한국인에 대한 보호”를 구실로 세칭 간도협약(間島協約, 1909.9.8)을 체결, 일제는 용정에다 간도일본 총영사관을 설치(1909.11)하고 영사관 분관과 경찰서를 세워 조선인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는 한편 독립투쟁을 압살했다.(각주 4)
중국 조선족이 통칭 ‘자유 이민 시기’(1911-1920)라고 부르는 이 기간에는 일제의 조선 강제병탄으로 대량 이민이 이뤄져 1920년 동북 조선족 인구가 45만 9천 4백 명이었다.
이 시기에 간도지역의 한인은 간도협약(1909)이 규정한 치외법권(治外法權)의 신분에서 만몽조약(滿蒙條約, 1915.5. 중국과 일제간의 체결)에 따라 만주 전역에 걸친 귀화 한인의 영사재판권을 강요당하는 처지로 변했다.
그 후 '이민 제한 시기'인 1921 - 1931년간 중국은 동북지역 조선족에 대하여 박해와 금족령으로 대응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 때문이었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본격화하자 중국은 조선인에 대하여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 보다는 청국인으로 귀화하지 않으면 일본의 앞잡이로 보면서 학대하는 정책으로 전환해 버렸다. 치발역복(薙髮易服)하면 ‘귀화인’으로 처우하여 토지 소유권을 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끼살이호(寄戶)’란 문패를 달아 구분하여 토지 소유권은 물론이고 개간한 땅마저 몰수하여 한족이나 만족에게 전매, 소작농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중. 일 두 나라는 이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쟁탈전에서 조선족을 담보로 삼아 민족 수난을 가중시켰다.
장쭤린(張作霖)의 동삼성(東三省, 吉林. 遼寧. 黑龍江省)독립선언(1922.5)과 북경 진출(1927.6)로 대원수 승격, 션양(瀋陽)에서 일본군에 의한 폭사(1928. 4) 등 역사의 대격변 속에서 간도 조선족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25년 6월에 체결된 삼시협정(三矢協定, 미츠야 미야마츠 三矢宮松와 奉天軍閥 警務處長 干珍이 체결)이었다. ‘불령선인(不逞鮮人)’ 단체의 해산과 독립운동가의 체포 및 인도, 무기 몰수 등이 강제된 이 조약으로 사실상 만주지역은 무장투쟁의 단계로 진입한다. 간도의 운명은 1931년 9.18 ‘만주사변’으로 만주국 정부를 가짜로 세우면서(1932.3.1) 일제 식민통치 체제로 편입됐다. (각주 5)
3. 다수이면서 소수인 의식
간도 혹은 만주 지역의 연도별 조선인 통계는 복잡하여 일률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나 시기에 따라서는 중국인보다 조선인이 다수인 지역도 많았지만 모국이 아니란 점에서 ‘소수민족 집단’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각주 6)
소수집단의 문학이란 그 첫째 특징이 탈영토화(脫領土化) 현상으로(주 7),
명동이 아무리 조선인 부락이라 할지라도 중국 영토이기에 ‘고향의식’은 희박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이 태어난 명동에 대한 애착보다는 언제나 ‘또 다른 고향’을 꿈꾸거나 모국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빨래, 줄에 걸어논 / 요에다 그린디도 / 지난밤에 내동생 / 오줌쏴 그린디도. // 꿈에가본 어머님게신, 별나라 디도ㄴ가, / 돈벌이간 아바지게신 / 만주땅 디도ㄴ가,
<오줌쏘개디도>
왜 그는 이처럼 고향상실 의식에 젖었을까. 어머니를 별나라에 계신 것(모친 김용은 1953.9.26. 별세)으로 삼은 것은 해석에 따라 논의가 달라지겠지만, 아버지를 만주로 돈 벌이 간 것으로 그렸다. 만주는 그에게 고향이라기보다는 식민지 백성이 살고자 찾은 이역 타관 땅으로 인식될 뿐이었다.
이 구절만 이상한 게 아니라 그는 연희전문 시절 서울에서 쓴 저 유명한 시 <별 헤는 밤>(1941.11.5)에서 “어머님, /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게십니다.”고 흐느끼는데, 왜 그는 북간도를 ‘고향’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어디서도 그는 고향을 갈구하면서도 북간도의 자연에 대한 동경이나 풍속화적인 삶의 현장, 안온한 산과 들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지 않았다.
이용악. 백석 등 북쪽 지역 출신 시인들의 향토색 짙은 시세계나, 정지용. 이육사 등 고향을 그리워했던 남쪽 지방 출신 시인들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이유는 바로 ‘소수 집단자 의식’의 디아스포라의식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윤동주에게 고향은 그렇게 달콤한 향수로만 노래될 수 없는 쓰라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까마기떼 지붕 우으로 / 둘, 둘, 셋, 작고 날아지난다. / 쑥쑥, 꿈틀꿈틀 북쪽 하늘로, // 내사......... /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 싶다,
1936.3월 25일 평양서 <황혼>
숭실중학이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분쟁에 휩쓸렸을 때 문익환과 함께 자퇴하고 용정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쓴 시다. 북쪽은 말할 것도 없이 간도이건만 역시 ‘고향’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는 바로 아래 시에서 밝혀진다.
이역인줄 모르는 소학생애둘이 / 지도째기 노름에. / 한뽐의손가락이 / 쩗음을 한함이여. / 아서라! 열븐 평화가깨여질가 근심스럽다
1936 봄想, 6.20. <양지쪽>
* 이 시는 나중 고쳤으나 안 고친 이 작품이 더 낫기에 그걸 인용했다.
“이역인 줄 모르는 소학생” - 이 잔잔한 한 마디 속에서 시인 윤동주의 시선으로는 자신이 성장했던 ‘만주‘ 괴뢰국이 아무래도 자신의 고향이나 조국이 될 수 없었음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난다. 소학생들이 지도 째기 놀이 하는 걸 보고 약탈의 생존본능을 간파하는 이 정치적인 민감성은 윤동주를 한낱 서정시인으로만 묶어 두려는 편협성을 질타한다. 그는 불과 넉 달 뒤에 아래와 같은 시를 쓴다.
갓쓴양반 당나구타고, 모른척지나고, / 이땅에두물든, / 말탄섬나라 사람이, / 길을뭇고지남이 이상한일이다. / 다시 곬작은 고요하다 나그네의 마음보다. // 구즌비 나리는 가을밤 / 벌거숭이 그대로 / 잠자리에서 뛰여나와, / 마루에 쭈그리고서서, /아이-ㄴ양 하고 / 솨--오좀을쏘다.
1936.10월23일밤. <谷間>
갓 쓴 당나귀 탄 조선 사람이 지나가는 건 알겠는데, 모른 척 지났다는 건 무엇일까. 뒤이어 말을 탄 일본인이 길을 묻는 건 알겠는데, 당시 용정에는 일인이 득실거렸는데 왜 “이 땅에 드물던” 일이라고 앞에다 썼을까? 이 표현은 조선인이나 일본인이 둘 다 용정 사람이 아닌 걸 뜻한다. 그런데 일인이 길을 묻고 지나가는 게 이상하다고 시인은 썼다. 그 이상한 풍경을 생각하다 잠에서 깬 시인은 마루에 쭈그린 채 아이처럼 그냥 오줌을 갈겼다는 심사는 아까 보았던 두 나그네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렸다는 뜻인데 대체 그게 뭘까?
혹 조선인은 위장 잠입자(독립운동가)이고 일인은 추적자(군경)가 아닌지 모르겠다. 피식민지 백성은 언제나 범죄용의자가 아닌가. 무사히 피신한 조선인의 심경으로 시인은 편히 오줌을 갈겼는데, 그게 오줌통이 없는 맨땅일 수도 있겠다 싶은 건 은근히 일탈을 꿈꾸고 싶은 심사와 통하기 때문이다.
남의 땅에 살고 있는 소수자로서의 자화상은 언제나 초라하다.
힌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 힌 고무신이 거츤발에 걸리우다. // 힌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 힌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9, <슲은족속>
바로 조선인의 자화상인 슬픈 족속으로 고향상실의 군상들이 부조(浮彫)된다.
이렇게 뜯어보면 윤동주 시에서의 고향은 그저 ‘또 하나의 고향’인 조국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은 않다. 그는 평양이나 서울 땅을 밟았을 때도 그리 환호작약하지 않았을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담담했음이 시에서 드러난다. 윤동주보다 한 살 아래로 그와 너무나 비슷한 비극적인 운명의 시인이었던 심연수(沈連洙, 1918-1945.8.8. 학병을 피해 寧安縣에서 용정으로 가던 중 汪凊縣 春陽鎭에서 일제의 앞잡이에 의하여 피살)(주 8)가 수학여행으로 모국을 밟으며 남겼던 감격적인 작품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4. 카프카적인 실존의식으로서의 고향
그런 한편 심연수는 ‘고향’의 상징성이 단순한 데 비하여 윤동주는 오히려 훨씬 깊은 고뇌의 대상으로 부각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즉 윤동주에게는 지상에 고향이 없다. 아담이 에덴을 떠난 이후 고향 상실자가 된 것처럼 윤동주에게도 이 지상에는 안주지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고향을 모국이나 조국의식으로만 환치시킬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다른다음 / 오래 마음 깊은속에 / 괴로워하든수많은 나를 /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 거리모퉁이 어둠속으로 / 소리없이사라지는힌그림자, // 힌그림자들 / 연연히 사랑하든 힌그림자들, // 내모든 것을 돌려보낸뒤 /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 황혼처럼 물드는 내방으로 돌아오면 // 신념이 깊은 으젓한 양처럼 / 하로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뜻자.
4.14. <힌그림자>
몇 년도의 작품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는 바로 <또 다른 고향>과 맞닿는 선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철들고 보니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 즉 혼과 백골로 나누어진 나를 함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낸다고 한다. 왜 고향이 아니고 고장이냐? 지상에 고향은 없기 때문에 고장일 뿐이 아닐까. 그러고 나면 나란 존재는 ‘신념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 없이 풀이나 뜯자’는 결말은 자아 추구와 그런 자아가 존재해야 될 좌표도를 제대로 찾은 상태를 뜻한다. 이것은 조국이나 기독교적 신앙만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다. 영혼과 육체만의 분리된 삶이 아니라 영혼조차도 분리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카프카적인 소수집단의 생리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윤동주의 고향의 의미는 탐지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그의 고향관을 가장 적나라하게 그린 구절은 산문에서 찾을 수 있다.
차라리 성벽우에 펼친 하늘을 처다보는 편이 더 통쾌하다. 눈은 하늘과 성벽경계선을 따라 작구 달리는 것인데 이 성벽이란 현대로써 캄푸라지한 넷금성(禁城)이다. 이안에서 어떤일이 일우어져스며 어떤일이 행하여지고 있는지 성박에서 살아왓고 살고있는 우리들에게는 알바가 없다. 이제 다만 한가닥 희망은 이 성벽이 끈어지는 곳이다.
기대(企待)는 언제나 크게 가질 것이 못되여서 성벽이 끈어지는 곳에 총독부 도청 무슨 참고관, 체신국, 신문사, 소방조(消防組), 무슨 주식회사, 부청(府廳), 양복점 고물상등 나라니하고 연다달아 오다가 아이스케크 간판에 눈이 잠간 머무는데 .....
(........)
이제 나는 곧 종시(終始)를 박궈야한다. 하나 내 차에도 신경행(新京行), 북경행(北京行), 남경행(南京行)을 달고 싶다. 세계일주행이라고 달고 싶다. 아니 그보다 진정한 내 고향이 있다면 고향행(故鄕行)을 달겟다. 다음 도착하여야할 시대의 정거장이 있다면 더 좋겠다.
산문 <종시(終始)>
서울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신촌 연희전문(그땐 변두리였다)으로 가면서 바라본 풍정을 심리묘사 수법으로 그린 이 수필은 가히 걸작의 하나지만 그리 주목 받지 못했다. 이 글에 나타난 ‘성벽 밖의 삶’은 윤동주가 키르케고르에 심취했던 기독교적인 신앙인으로서의 절대 고독자 의식과 카프카식 단절과 소의의식이 짙게 스며있다. 그는 식민지적 삶 속에서 모국에 와서조차 ‘성 밖의 삶’을 살아야만 했고, 그래서 성 안의 온갖 관공서나 기관들은 제켜두고 아예 성이 끝나는 지점을 자신이 추구해야 될 고향 찾기의 표적으로 삼는다. 그건 신앙이기도 하고 문학이기도 하며 사랑이자 조국애이며 이상향이자 영혼의 안식처요 진리의 담보이기도 하다. 그게 북경도 남경도 아닌, 세계일주로도 못 닿을 윤동주의 ‘고향’ 추구 의식의 궁극점이다.
왜 그는 ‘간도’가 ‘실향민 의식의 땅’이었을까.
5. 간도 - 영원한 타향 의식
윤동주의 증조부(尹在玉, 1844-1906)가 고향 함북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를 떠난 것은 조선족전문 개간지역으로 연변(延邊)이 확정된 이듬해인 1886년이었고, 윤동주가 태어난 것은 자유이민시기인
1917년으로 이민 4세가 된다.
대개의 경우 이민 3세 이하로 내려오면 모국어를 잊고 현지인화 되기 마련인데 ‘간도’란 지역적 특수성과 식민지라는 시대적인 조건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윤동주의 의식세계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간도가 윤동주에게 끼친 영향 중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기독교와의 관계일 것이다. 유학자 집안이었던 윤동주일가가 기독교로 개종한 건 재만 한인에게 장로교 선교(1900년대)가 이뤄진 이후로 용정에는
1907년에 용정교회가 처음으로 선 2년 뒤인 1909년에 윤동주의 외삼촌인 김약연(金躍淵)
주도로 명동교회가 세워졌다. 간도지역 기독교는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의 담당으로 교육 의료사업이
활발하여 은진중학과 명신여학교, 제창병원 등을 설립했는데,
윤동주와 동감인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는 바로 이 은진중학엘 다녔다. (각주 9)
그러나 윤동주에게 기독교가 안온한 영혼의 안식처로만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은 유소년기였고, 초등학교 상급생에서 중학 시절에는 이미 간도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이 애국계몽주의 세력에서 사회주의 투쟁가들로 교체되는 격변기로 그 혼란상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각주 10)
이런 정황을 고려하면 오늘의 시점에서 ‘간도의 기독교’를 바라보는 것처럼 향수 어린 신앙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유추할 수 있으며 그 한가운데에 윤동주가 위치하는 걸 보게 된다. 왜 그가 ‘간도의 수도’인 명동에서 안주지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실향민 의식에 젖어버렸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두 번째로 고려되어야 할 문제는 간도의 문화풍토와 윤동주의 활동 영역의 괴리현상이다. 민족운동과 마찬가지로 간도의 문화풍토는 민족해방 투쟁과 밀접한 연관성 위에서 형성된다.
중국의 망명문학 1기인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은 1908년에, 신채호(申采浩,1880-1936)는 1910년에 각각 중국대륙을 밟았다. 이 시기 망명문학의 일인자는 신정(申檉, 본명 申圭植, 1879-1922)으로, 그는 1911년 중국으로 가 우창봉기(武昌蜂起)에 참가하여 쑨원과 동지가 되어 활약했는데, 이들의 무대는 간도가 아니었다.
망명문학 1기와는 달리 2기의 중심지는 단연 간도로 항일 민족해방투쟁을 위한 카프문학의 영향이 어느 해외 이주민 지역보다 강했다.
이어 연변문학의 황금기를 장식한 최서해. 강경애, 김조규, 박팔양, 신영철, 현경준, 황건 등 30여명이 이 지역에 머무르거나 다녀가면서 이룩한 성과는 동인지 《북향》(1933년 창간), 수필집 《재만 수필선》(1939년), 소설집《싹트는 대지》(1941년), 시집《재만 조선인 시집》(1942년)과, 《만주 시인집》(1942년) 등을 낳았다.
특히 이 시기가 중요한 것은 ‘항일 혁명문학’이 형성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유격대가 냈다는 간행물 〈반일보〉, 〈서광〉, 〈화전민〉, 〈반일투쟁〉 등이나, 의용군이 낸
〈전고〉, 〈한국청년〉, 〈광복〉 등의 목록으로 그 뜨거움을 짐작할 수 있다. 항일을 위한 중국과의 연대가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했던 이 무렵에 조선인만의 ‘전지공작대’가 탄생한 것 또한 문예운동사의 특기 사항이다. (각주 11)
윤동주보다 열 살 연상인 시인 리욱(1907~1984년)이나, 한 살 아래로 윤동주의 막내 동생인 윤광주(1933-1962)와 절친했던 시인 심련수의 학창시절이나 경력, 유학시절 등을 비교하면 윤동주는 광란의 시대의 지성이 겪어야만 했던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각주 12)
이제 처음 화두로 돌아가면 이래서 윤동주는 영원한 디아스포라로서 8.15 때 생존했다는 가정으로 볼 때도 그 디아스포라 의식은 불식시키지 못한 채 안식처를 찾지 못한 시인의식으로 떠돌 것이란 결론이다. 그의 향수가 오늘의 해외동포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노마드 시대를 맞아 고향을 포기한 세대들에게도 윤동주의 고향의식이 여전히 유효하고 감동적인 것은 그만큼 윤동주의 향수가 지역적이거나 육신 위주의 고향 찾기가 아닌 영육합일의 이상향을,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극복하려는 투지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 주
1. 윤동주 시 인용은 왕신영. 심원섭. 오오무라 마스오. 윤인석 엮음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 민음사, 1999, 에 따름. 맞춤법도 그대로임. 단 한자만 한글로 고침.
이하 윤동주 시 인용에는 각주를 생략함.
윤동주의 간도 관련 유족 및 유적지는 오오무라 마스오, <<윤동주와 한국문학>>, 소명출판, 2001, 참고.
2. 당시 서울-용정 왕래는 경원선(서울 원산간 철도. 1914. 9. 16. 완전 개통, 총 223.7킬로미터)으로 원산까지 가서, 함경선(원산- 상삼봉까지. 1928년 완전 개통, 총 666.9킬로미터. 일제가 중국 동북부 정복을 목표로 만든 철도)을 타고 상삼봉에서 天圖輕便鐵道(開山屯-老頭溝. 1924.10. 연변경내에 처음으로 부설된 철도. 1934. 3. 광궤철도로 변경)로 환승, 용정으로 갔다. 훨씬 앞선 1906년에 개통된 경의선이 있었으나 위와 같은 교통편이 일반적이었다. 평원선(평양-원산)은 1941. 4. 1. 개통, 고원역에서 함경선으로 갈아탔다. 따라서 숭실중학이 있던 평양엘 가려면 용정에서 서울을 거쳐 경의선으로 바꿔 타야만 했다.
3. 정지용은 1937년부터 1944년 부천 소사로 이사 갈 때까지 북아현동 1-64 거주.
4. 중국 동북지역 한국 유이민(流移民)에 대해서는 (1) 현룡순 리정문 허룡구 편저 <<조선족 백년 사화>> 1권, 료녕 인민출판사, 1985, (2) 조선족약사편찬조 <<조선족약사>>, 국내판은 백산서당, 1989, (3) <<중국조선족 력사 상식>>, 연변 인민출판사, 1998, 등 참고.
5. 신주백 박사논문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 연구- 1925-40>>, 성균관대학교, 1995. 그는 민족운동을 ‘계열별 정립과 통일운동기(1925-28)‘, ’좌우대립과 세력 교체기(1929-1931), ‘유격운동의 시작과 연대 모색기’(1931-1935), ‘유격운동 고양과 민족운동 통일기’(1936-1940)로 구분했다.
6. 위의 각주 4, 5에 따르면 통계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략 1930년 동북지역 조선족은 63만 982명이며 한인 밀집 지역은 조선인이 70% 이상을 차지했다.
7. 들뢰즈. 가타리. 지음, 조한경 옮김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문학과 지성사, 2000, 참고.
여기서 소수집단 문학의 예로 카프카를 들면서 그 특징을 (1) 탈영토화, (2) 정치성을 강하게 띄는 점, (3) 집단성이 강하게 베인 점 등을 들고 있다. 참고로 발터 벤야민의 <카프카론>도 소수집단 의식을 논하고 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카프카는 유태인으로 타민족 속에 태어나, 다른 언어를 사용했고, 부유한 집안이었기에 가난한 유태인 집단에서도 소외됐으며, 거기에다 아버지의 엄격성과 육체적인 거구 앞에서 쪽을 못 폈다는 점이 지적되곤 한다.
이런 분석 틀을 윤동주에게 적용하면 적어도 앞의 3가지는 맞아 떨어진다. 즉 이국 태생에다 가난한 조선 이주민과 달리 비교적 유복했던 점이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소수 기독교도였다는 점이다. 연구자들이 당연시하는 기독교 신앙이 그 당시에는 소수집단의 종교였던 상황을 감안해야 될 것이다.
8. 심연수는 1918년 5월 20일 강릉 난곡리 399번지에서 태어나 7세 때인 1925년 가족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5년 뒤 헤이룽장(黑龍江)성 密山을 거쳐 신안진(1930, 12세), 용정(1936, 18세)으로 이사, 동흥소학교, 동흥중학교, 일본예술대학을 졸업했다. 22세 때 <<만선일보(滿鮮日報)>>(1940)에 시를 발표했는데, 사후 55년만인 2000년에 유작시와 기행, 일기 등 자료가 대량 공개되었다. 윤동주와 너무나 비슷한 시세계와 성장 경력을 가졌는데, 해외동포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심연수는 한국에서 태어나 이주해 간 교포 1세라면 윤동주는 현지에서 출생한 교민 4세에 속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 차이점이 바로 심연수는 한반도를 감격적으로 바라본 데 비해 윤동주는 ‘만주’나 ‘한반도’가 다 이미 남의 지배를 받는 땅으로 ‘또 다른 고향’을 찾아야 할 투쟁지로 인식토록 했을 것이다.
강원도민일보사, <<민족시인 심연수 시선집- 소년아 봄은 오려니>>, 2001, 참고.
9. 황민호 <<일제하 만주지역 한인사회의 동향과 민족운동>>, 신서원 2005, 참고.
10. 위의 책과 함께 각주 5 신주백의 글, 그리고 (1) <<延邊文史資料>>, 제8집 ‘종교사료전집’, 연변政協文史자료위원회, 1997, (2) 장세윤, <<중국 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명지사, 2005, 등 참고. 1922-1923년 경부터 동흥. 대성. 은진중학 학생들을 중심한 광명회(光明會)가 조직됐으며, 1926년 1월 25일에는 용정에서 ‘동만(東滿)청년총연맹’이 결성, 반종교적인 각종 운동을 전개했다. 신주백은 독립운동의 좌우 세력 교체기를 1929-30년으로 설정한다. 장세윤은 기독교 계열의 민족운동사 중 안창호. 양기탁의 1920년대 ‘이상촌 운동’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런 영향을 받기에 윤동주는 너무 어렸다.
애국계몽 세력에서 사회주의 투쟁으로의 교체기인 1929년 윤동주는 명동교회 소속 명동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사회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 학교가 ‘인민학교‘ 형태로 변모했다. 고종사촌 송몽규가 사회주의자 편에서 적극 활동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윤동주는 조용했다. 이 항목에 대해서는 송우혜, <<윤동주 평전>>, 열음사, 1989, 80-84쪽 참고.
11. (1) 임범송 권철 주필 <<조선족 문학연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89, (2) 조성일 권철 주편, <<중국조선족문학사>>, 연변인민출판사, 1990, (3) 김호웅 <<재만조선인 문학연구>>, 한국 국학자료원 1998, (4) 권철, <<광복 전 중국 조선민족문학연구>>, 한국 한국문학사, 1999, (5) 국제고려학회 문학부.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편찬 <<조선민족문학연구>>, 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 1999, 등 참고. 이 일련의 연구들은 민족독립운동에 초점을 맞춰 기술하면서 윤동주를 비중 높게 다뤘다. 그러나 분명히 윤동주는 다른 문인들과 그 경력과 사상, 문학세계가 다르다고 판단한다.
12. 리욱에 대해서는 각주 11의 목록 참고. 심련수는 각주 8 참고. 이들은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리욱은 일찍부터 사회주의에 경도했고, 김련수는 일본 유학 중 방일했던 여운형을 만나는 등 시사문제에 민감했다. 그는 학병 기피로 전전하다가 만주로 돌아와 시골에서 교직에 있던 중 일제 패망을 미리 알고 귀가 중 피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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