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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사유
모더니티의 원-장소, 도시: 짐멜과 벤야민
짐멜과 벤야민은 근대 도시에서의 삶을 사색한 희귀한 선구자들이다.
그리고 훗날 만개하게 될 장소의 현상학적인 접근을 선취한다.
그렇지만 공간과 장소를 구분하며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공간의 개념에 대항하여 기억, 전통, 의미, 상징, 관습 등이
적재된 장소의 구체성을 제안하는 현상학과 벤야민과 짐멜의 접근은 사뭇 다르다.
어떻게 공간은 나에게 장소로서 현상하는가를 묻기 전에 공간은 어떻게 나에게 그렇게 장소로서 체험되도록 나타나는가
그리고 그렇게 체험을 생산하는 힘은 무엇인가를 묻는데 있어, 그들은 훗날의 현상학보다 더 발본적이고 비판적이다.
벤야민은 마르크스주의적 상품의 현상학으로부터 장소의 체험 구조를 들춰낸다면 짐멜은 신칸트주의적인 접근을 취하며
화폐 경제의 세계로부터 장소의 현상(appearance)을 다룬다.
잘 알려져 있듯이 파사주 프로젝트를 완성하려는 벤야민의 좌절된 시도 가운데 일부로 출간된 『제2제정기의 파리-보들
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그리고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는 보들레르의 서정시를 통해
근대자본주의가 생산하는 지각과 체험을 해부한다.
그 때 지각과 체험의 조건은 바로 도시에서의 삶, 특히 산보객으로 상징되는 도시에서의 삶이다.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에서 추상적 객관성을 강요하는 화폐경제 및 합리적 이성의 세계가 둔감함과 그의 대응
으로서의 개인주의를 낳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러나 둘은 닮은 만큼이나 다르기도 하다.
그 차이는 공간의 지각과 체험에 대한 두 가지 이질적 접근, 즉 사회학과 마르크스주의의 차이와 같다.
짐멜 – 대도시적 삶의 산만함(blasé)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에서 근대의 사회, 기술적 메커니즘에 의해 “개인이 평준화되고 소모되는 데 대한 반항”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이는 또한 니체주의와 사회주의를 추동한 공통적 동기라고 진단한다.
그렇기에 문화에 대한 분석은 “삶의 개인적 내용과 초개인적 내용들 사이에 어떤 등식이 성립하는지, 그리고 개인의 인격
이 외부의 힘들과 화해하는 적응능력들이 어떠한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p.36).
그렇다면 그에게 문화의 분석이란 개인의 체험을 구성하는 외부의 힘, 그 결과 개인의 삶 속에 포함되어 있는 초개인적인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그는 문화를 읽는다는 것을 ‘체험’에 스며든 외적 규정으로 분별한다.
그리고 그에게 체험이란 도시에서 살아가는 개인이 겪는 경험이고 그를 규제하는 외적 규정이란 “화폐 경제와 이성의
지배”이다(p.37).
그는 “대도시에 사는 개인들에게 전형적인 심리적 기반”을 “신경과민”이라고 진단한다.(p.36)
그리고 이 때문에 대도시에서 삶은 훨씬 지적 성격을 띠게 된다고 말한다.
시골과 소도시에서의 정서적 관계들이 정신의 무의식 층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꾸준하고 지속적 습관을 통해 가장 잘
발전하는 것과 달리 대도시인은 끊임없는 외적, 내적 자극들에 시달리며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지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 이것은 어떻게 하여 초래된 것일까.
그는 화폐경제와 이성의 지배라는 객관정신의 우위에서 찾는다.
이 둘은 모두 객관성을 우위에 두며 개별성을 희생하는 태도이다.
짐멜은 화폐란 “모든 현상들에 공통적인 것, 즉 모든 성질과 특수성을 단지 수량적 문제로 평준화시키는 교환가치만을
문제” 삼는다고 지적하며 개체성에 기초한 정서적 관계와 달리 “상호급부에 대한 객관적 계산”(p.38)에 기초한 것이
대도시인의 인간관계라고 말한다.
“대도시적 삶의 형식”이런 화폐경제와 객관적, 계산적 정신 혹은 지적 기조가 상호작용하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는 것
이다.
결국 “대도시적 삶이 팽창하고 복잡해짐에 다라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정확성, 계산가능성, 치밀성은 대도시의 화폐
경제적, 지성주의적 성격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내용들에도 반드시 일정한 색채를 부여한다.”(p.40)
그리하여 짐멜은 대도시적 삶의 형식의 핵심적 특성으로서 “둔감함(blasé)”을 제안한다.
신경자극의 과포화 상태에서 비롯되는 둔감함은 자극에 생기 있게 반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둔감함은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증세”로서 이는 한편으로는 “대도시 안에 침투된 화폐경제에 대한 충실한 주관적
반영”이기도 하다.(p. 42)
그리고 이런 둔감함은 서로가 대하는 태도의 면에서도 효과를 초래하는데 그것이 “속내 감추기”와 “반감”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대도시에서의 삶은 “보편적인 정신적 삶의 형식이자 외관”으로서 나타날 수 있다.
작은 집단에서 부과되었던 개인의 삶에 대한 제약은 완화되거나 사라지고 개체성이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도 한다.
이는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을 적으로 대하는 조직과 집단에서의 삶과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도시에서의 삶은 비할데 없는 내적, 외적 자유가 주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더불어 대도시는 개별적인 차이를 증대하고 장려하는 장소이다.
경제 분업이 최고로 발달한 장소인 대도시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과를 전문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성에 쫓기고
이는 “대중의 욕구를 분화․세련화시키고 풍부하게” 만든다.
이로서 개별적 차이가 커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 위해 차이에 대한 감수성을 자극하면서 대도시에서는 “유별남, 변덕,
멋 부리기” 등의 과장된 행동이 나타나게 된다.(p. 50) 요컨대 개성을 강조하려는 유혹이 왕성하다.
짐멜은 “개인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충동”(p.50)은 넓게 보아 객관정신이 주관정신에 비해 우세해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언어나 법률, 생산기술이나 예술, 과학이나 가정용품에 구현된 정신의 총합은 나날이 발전하는데 비해 인간주체들의
정신적 발전은 매우 불완전하며 점점 더 뒤쳐”지고, 이에 반해 “개인들의 문화는 지석, 유연성, 이상주의에 있어 오히려
퇴보”하는 형국이 벌어진다.
결국 “개인은 사물들과 세력들의 거대한 조직에 비해서 한낱 먼지와 같은 존재로 격하”되고, 개인들을 “주관적 삶의
형식이 아니라 순수하게 객관적 삶의 형식으로” 만들어간다.
따라서 비인격적인 내용들과 제공물들로 가득찬 세계에서 “개인적인 것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개성과 특성을
짜내야”하기에 이른다.
산보객(flâneur)의 우울
벤야민의 『제2제정기의 파리-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는 많은 점에서 짐멜의 관찰과 닮은 점이 있다.
이 글에서 대도시의 정신적 삶을 분절하기 위해 벤야민은 보들레르를 소환한다.
그렇지만 그는 보들레를 소환하기 위해 베르그송, 프루스트 그리고 프로이트를 우회한다.
서정시가 불가능하게 된 시대의 마지막 서정시인인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를 이해하기 위해 벤야민은 경험의 구조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이해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경험의 구조를 탐색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시도들, 그러나 상이한 방향에서 출몰했던 시도들을 대조할 필요
가 있었을 것이다.
벤야민은 그의 물음을 이렇게 요약한다.
“충격 체험이 규범이 되어버린 경험 속에서 어떻게 서정시가 자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그러한 서정시엔 고도의 의식성이 기대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즉 그러한 시는 그것이 창작될 때 작용했을 어떤 계획을 상상하게 만들 것이다.”(pp.190-1)
결국 그는 “경험을 기만당한 사람, 근대인”(p.224)을 사색하기 위해 보들레르를 참조한다.
그러나 그 보들레르는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의 시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계산적인 이성의 지배 혹은 지성주의의 지배로부터 대도시의 삶을 풀이하는 짐멜처럼 벤야민 역시 “충격의 요속 개별적
인상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면 클수록, 의식이 자극의 방어를 위해 부단히 긴장하면 할수록 그리하여 의식이 성공을
크게 거두면 거둘수록, 그 인상들은 그만큼 더 적게 경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말한다.(p.192).
그러나 여기에서 벤야민은 시인이 충격의 체험 속에서 우연적으로 포착하는 순간을 성찰하며 그것을 자신의 시를 생산할
장소를 찾아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충격은 대도시의 삶의 효과라는 점을 벤야민은 강조한다.
그리고 그런 충격을 처리하면서 살아가는 인물을 내세운다.
그것은 보들레르 자신이기도 할 만보객이다.
어떤 이는 “시학의 형태와 산업생산방식의 독특한 관계가 나타내 보이는 특수한 형식으로서의 알레고리 개념, 물신으로
서의 상품 그리고 근대성 사이의 상호연계성-이것이 벤야민의 보들레르 연구의 핵심이다.”라고 단언한다.
아마 그런 단언을 풀이한 것이 이글턴의 다음과 같은 서술일 것이다.
“벤야민이 볼 때, 만보객(flâneur)은 보들레르 텍스트의 이면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쇠락하는 프티 부르주아계급의 떠돌이 유물로서, 그가 사물과 관계하는 방식은 알레고리 작가와 비슷하다.
그는 태평하게 도시를 배회하고 정처 없이 헤매고 나른하면서도 은밀하게 경계 태세를 취하는 존재로서, 그가 온 몸을
보여주는 형식은 상품의 형식과 비슷하다.
그의 고독한 박탈 상태는 파편으로서의 상품의 존재를 반영하며(벤야민은 상품이 군중 속에서 ‘버림받는다’라고 말한다),
그의 배회가 마치 마술처럼 물리적 흔적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상품이 생산의 흔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를 ‘개성’으로 생산해내려고 애쓰는 것, 그가 신사이자 아마추어로서 자기가 혐오하는 산업노동 속을
흘러 다니는 것은 퇴색하는 아우라가 상품 생산에 저항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상품 그 자체, 곧 영원히 자족적이 ‘주체’가 따분한 노동분업의 산물이면서도 자기가 노동분업을 보상한다고 나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보객과 상품 둘 다 댄디 복장을 차려 입고 있다.
만보객은 한편으로 장터를 어슬렁거리되 흥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정신적으로 상품 생산에 선행하지만, 다른 한편
으로는 그 자신이 원형적인 상품이다.
그가 대중에 공모하는 동시에 대중을 경멸한다는 사실은 그 원인 중에 하나다.
바로 이 점에서 만보객은 알레고리 작가와 닮았다.” 테리 이글턴,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 김정아 옮김,
이앤비플러스, 2013, pp. 54-5.
여기에서 이글턴은 단숨에 벤야민의 텍스트의 핵심을 요약한다.
그가 제시하는 방식은 짐멜의 화폐경제, 합리적 이성의 자리에 상품 형식이라는 것을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물론 상품형식 혹은 상품형태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벤야민이 취하는 마르크스 독해를 꼼꼼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그가 상품을 알레고리와 등치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노동생산물, 아니 그저 간단히 자본주의적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사물이 상품이란 ‘형태(form)’를 취하게 됨으로서 겪게 되는 전환을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가 상품이라는 자본주의적 노동생산물의 형태를 설명할 때 형이상학적인 미묘함과 신학적 변덕으로
가득 찬 사물, 유령적인 대상성(spectral objectivity), 객관적 사유 형태(objective thought-form) 운운의 표현을 사용한 것에
유의해야 한다.
벤야민은 그런 점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란 제목을 참조하자면 마르크스를 “상품현상학”의 저자로서 읽는지도 모른다.
상품현상학이 물신화된 지각과 체험을 말하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상품이 사물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현실로부터 분리된
채 “사회적 상형문자”처럼 나타난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라면, 벤야민은 산보객이라는 페르소나가 대도시에서 체험하는
지각과 체험을 폭로한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서 근대성과 근대적인 미라는 것의 특징을 찾아낸다.
“오늘날의 행인들(-만보객)은 교통신호에 맞춰 방향을 잡기 위해 사방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렇게 기술은 인간의 감각체계를 복합적 형태의 훈련에 종속시킨다.
이후 영화가 등장하여 어떤 새롭고 절박한 자극을 원하는 욕구에 부응하게 되었다.
영화에 이르러서는 충격의 형식을 띤 지각이 일종의 형식적 원리가 되었다.
컨베이어 시스템에서 생산의 리듬을 규정하는 것이 영화에서는 수용 리듬의 근거가 된다.”(p.216).
그리고 벤야민은 기계장치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동일한 움직임에 노동자가 자신을 동조시키듯이 거리에서도 미소짓기
라는 “모방적 충격 완화제”(p.217)을 통해 반복된다.
그리고 이는 수공업(경험 속에서 그것에 맞는 기술적 형태를 발견하는)에서의 연습(Übung)을 공장제에서의 훈련(Dressur)으로 대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는 놀이공원에서의 다양한 놀이기구를 통해 표현되는 기계적 훈련을 통해 다시 확장된다.
따라서 만보객의 행동은 “충격에 대한 일종의 반응양식”이다.
“서로 부딪힐 경우 사람들은 자기를 망친 상대방에게 깊이 머리 숙여 인사했다.”
결국 “군중 속의 행인이 받게 되는 충격 체험에 상응하는 것이 기계를 다루는 노동자의 ‘체험’이다.”(p.218).
그렇다면 이런 느닷없는 충격의 반복 속에서 살아가는 근대인에게 시간과 기억은 무엇일까.
벤야민은 고대적 제의에서의 ‘만물조응’과 근대의 아우라가 사라진 세계에서의 미적 체험을 대조한다.
그는 만물조응의 체험이란 “단지 제의적인 것에서만 가능”하고, “이 경험이 제의적인 것을 벗어나게 될 경우, 그것은
‘미’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미속에서 제의적 가치는 예술의 가치로서 나타난다.”고 말한다.(p.238).
그가 아우라의 붕괴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대목은 바로 사진에 대한 분석에서이다.
으젠느 앗제(Eugene Atget)의 사진을 연상하면 알 수 있듯이 산보객은 사진가의 체험과 다르지 않다.
“카메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받아들이기만 할 뿐 그에게 시선을 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시선에는 그 시선이 향하는 대상에게서 응답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내재해 있다.
이 기대가 응답되는 곳에서는 아우라의 경험이 충만하게 이뤄진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붕괴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산보객의 시인인 보들레르를 빌어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근대의 센세이션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 즉 충격체험 속에서의 아우라의 붕괴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아우라의 붕괴에 동의한 데 대해 그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시의 법칙이다.
그의 시는 프랑스 제2제정의 하늘에 ‘분위기 없는 하나의 별’로 떠있다.”
참고문헌
게오르그 짐멜, “대도시와 정신적 삶”, “다리와 문”,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김덕영, 윤미애 옮김, 새물결, 2005.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1983.
공간의 현상학, 공간의 비판: 이-푸 투안과 에드워드 렐프
우리 시대의 공간에 대한 미적, 정치적 사유, 기획, 실천을 압도하는 경향은 단연 현상학적 공간 비판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또 그러한 사유의 씨앗을 뿌린 인물들로 이-푸 투안과 에드워드 렐프라는 현상학적인 인문지리학자들을 꼽을 수 있다.
사제지간이기도 한 이 저자들은 1980년대 이후 폭발하게 될 새로운 장소의 정치학을 선구하면서 동시에 차이, 다양성,
정체성, 체험, 정동 등의 규범적인 이상(理想)을 쫓으며 진행된 새로운 장소의 개발과 착취의 예언자들이 되었다.
물론 오늘날 그들의 생각을 비아냥거리고 조롱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추상적인 거부에 그치기 십상이다. 그들이 집요하게 옹호하였던 체험과 구체성의 원리, 일종의 공간을
사유하기 위한 선험이 되어버린 그들의 생각을 넘어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공간에 관한 새로운 사유는, 현상학적 공간 비판에서 찾아볼 수 있듯, 공간을 체험하고 사유하게 하는 조건과 대질함으
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터무니없이 들릴 수 도 있겠지만 공간에 관한 사유는 곧 사유 자체에 대한 사유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푸안과 렐프를 정독해야 할 여전한 이유가 아닐 수 없다.
추상적인 공간으로부터 의미로 가득 찬 장소로 : 투안의 장소론
“우리는 도시의 낯선 지역에 살고 있다. 즉 미지의 공간이 우리에게 펼쳐져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나름대로 몇몇 이정표와 그것들을 연결하는 경로를 알게 된다.
마침내 낯선 도시이며 미지의 공간이었던 것은 낯익은 장소가 된다.
낯설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는 ‘추상적 공간’은 의미로 가득 찬 ‘구체적 장소’가 된다.
많은 것을 배우지만 공식적 교육에 의해서는 아니다.”(p.318)
“분석적 사유는 자연적 사회적 환경을 변형시켜 왔다.
분석적 사유의 힘을 나타내는 증거는 도처에 있다.
‘아는 것’은 실제로는 ‘(무엇에) 대하여 아는 것’과 동일하다고 우리는 마음 속 깊이 생각한다.…… 지리학자는 지식이
오로지 책, 지도, 항공사진, 그리고 조직적인 현장조사에서 비롯된 것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지리학자는, 사람들이 정신과 전망을 부여받았지만 세상을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는 감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서술한다.
지리학자와 건축계획가는 ‘세상의 존재(being-in-the world)’가 진실로 어떠한지를 기술하고 이해하고자 하기 보다는,
낯익음(familiarity)-우리가 공간 안에서 방향감을 가지고 장소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가정하는 경향을
보인다.”(p.319)
인용한 부분은 투안의 공간에 관한 사유를 요약하는 부분이라 여겨도 좋을 대목이다.
투안은 장소가 우리에게 어떻게 현상하고, 우리는 그것을 분석하기보다 어떻게 ‘이해’하며, 또 그에 대해 어떤 감각을
통해 의미를 찾아내는지 들춰내고자 한다.
그것은 장소를 이해하고 그것의 의미를 발견하는 숱한 사례들을 발견하고 제시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의 글쓰기에서 분석적인 구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푸안을 좇을 때, 우리는 종합하고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초월화할 수 없는 장소적 감각과 의미의 다양체들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라고 상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푸안은, 그가 언급하는 것 가운데 몇 가지만 언급해 본다면, 개인적 장소(개인적 자아에게 세계는 집이고, 집단
적 자아에게 세계는 사원, 시청 또는 시민센터와 같은 공공환경이다), 신화적 장소, 상징적 장소(도시, 국가, 고향 등),
광활/과밀한 장소 등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그는 장소의 환원할 수 없는 복수성을 역설한다.
따라서 우리는 장소를 의미와 이해, 감각으로 분별하는, 그리고 공간이 어떻게 우리에게 현상하고 주체화되는가를
통해 인식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이제는 더 이상 계시적인 주장처럼 들리지 않는다.
푸안의 생각은 다양한 형태로 번안되어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장소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국토라는 상징적 장소에 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자.
푸안은 “하늘에서 보면, 산과 강은 단지 자연지리적 요소일 뿐이며 울타리나 철책과 같은 인공적인 표지는 보이지 않는다. 역사책에서 항공사진은 쓸모가 없다.”고 말한다.(p.286)
푸안의 말처럼 국가의 영토에 관한 세부적 지리적 지식(위도나 경도, 지리적 면적, 지층 구조 등)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
은 거의 없다.
“지리부도에서 전 세계의 국가들은 부조화스러운 색깔로 된 모자이크처럼 보인다.
연분홍색의 캐나다는 미색의 미국에 비해 크게 보인다.
즉 한 국가가 어디에서 끝나고 또 다른 국가가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지만, 국가 간의 정체성은 뚜렷
하게 구분되지 않는다.”(ibid.)
그렇지만 “인간의 장소는 극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생생한 실재가 된다. 장소의 정체성은 개인적, 집단적 삶의 열망, 필요,
기능적인 리듬을 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소감을 통해 창안되고 재현되며 유지되고 옹호받는 장소의 대표적인 예가 국토 혹은 대지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따라서 국가의 지리적 신체로서의 국토라는 장소가 상상되고 실현되어야 한다.
국가는 자신을 가시화시키는 독특한 장소를 통해 실존하게 된다.
혹은 푸안 식으로 말하자면 “국민이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장소로 보이도록” 만들어내고 이를 위해 “상징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다.(p.279) 결국, 푸안에게 “장소는 조직된 의미세계이다.”(p.287)
장소상실(placeless)에서 장소의 생활세계로 나아가기
푸안의 생각을 연장하면서도 온건하게(?) 공간과 장소의 변증법적 사유를 주문하는 그와 달리, 렐프는 장소상실이라는
개념을 통해 장소의 근대성이라고 부를 만한 것에 대한 비판을 구축한다.
아마 지금 가장 신용을 잃은 철학적 개념 혹은 문화적 통념들을 열거하자면, 이성, 계몽, 보편성, 형이상학, 탈맥락성,
동일성 따위일 것이다.
한때 포스트모더니즘이 저주를 퍼붓고 조롱했던 이 측은한 범죄목록들은 공간과 장소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 생생하게
극화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싼 논쟁을 점화하고 추문의 수준으로 끌고 간 곳이 건축이론 분야였던 것도 새삼스럽지 않은 일
이다.(‘광란의 뉴욕’의 렘 쿨하스, ‘라스베거스로부터 배우자’의 로버트 벤츄리 등)
이러한 사유의 저변에는 공간으로부터 장소, 장소상실에서 생활세계로의 복귀를 역설했던 렐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따라서 인문지리학 연구자들을 제외하곤 그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렐프의 독자였고, 또 암암리에 그가 생산
하고 유포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를 확인하고 싶으면 그저 어느 날치의 신문을 펼쳐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
렐프는 현상학을 자신의 장소연구를 이끄는 철학적 기반으로 분명히 드러낸다.
“장소와 무장소에 대한 이 연구의 철학적 기초는 현상학”이며, 그가 생각하기에 현상학이란 “직접 경험으로 이뤄진
생활 세계의 현상을 출발점으로 하여, 주의 깊은 관찰과 기술이라는 엄밀한 방식으로 이러한 현상들을 밝히려는 철학
전통”이다.(p.13)
그리고 “공간은 형태가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고 또 직접 묘사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공간을 느끼고, 알고 또 설명하더라도, 거기에는 항상 장소감이나 장소개념이 관련되어 있다.”(p.39)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장소의 현상학을 간략히 요약한다.
그렇다면 그의 장소의 정치학을 이끄는 핵심 개념인 장소상실 혹은 무장소성이란 것에 유의하도록 하자.
그는 장소상실이란 개념을 하이데거의 세계없음(worldless-ness) 그리고 비진정성이란 개념들을 참조하여 제안한다.
그는 “산업시대 이전의 무의식적이고 수공업적인 문화의 특징이었던 지방색이나 다양한 장소와 경관이 사라지고 있으며
이미 소멸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제 보편적이고 익숙한 것이 되었다”고 말하며 그러한 “문화적이고 지리적인 획일화”가 비단 오늘날의 현상인 것만은 아니라 거의 어느 시대에서나 확인될 수 있는 경향이었다고 말한다.(p.178)
그렇지만 “약간의 무장소성은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 존재”하지만, 그것이 “일종의 태도이며, 이러한 태도가 점점 지배
적인 현상이 됨에 따라 깊이 있는 장소감을 가지거나 장소를 진정하게 창출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p.179).
그리고 그러한 태도를 일컬어 ‘비진정성’이라고 부른다.
렐프는 하이데거의 정의에 의지하면서 “진정성이 세계에 대한 개방성 그리고 인간 조건에 대한 자각으로 이루어져 있
듯이, 비진정성은 세계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폐쇄적인 태도”라고 정의한다.(p.179).
그리고 이러한 비진정성은 “실증주의와 같은 철학적 접근과 물리적이고 사회 공학적인 기술적 접근의 특징인, 어디에
도 얽매이지 않은, ‘냉정하고 탐색적인 사고”를 통해 나타나고, “그 초연함과 편협함 때문에 진정하지 못하다”고 단언
한다.(p.181).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장소에 대한 태도에도 연장되어 비진정한 장소에 대한 태도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장소상실이다.
“장소에 대한 진정하지 못한 태도는 본질적으로 장소감이 아니다.
그것은 장소의 심오하고도 상징적인 의미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장소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편의주의적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즉,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스테레오 타입이며, 진실한 관심 없이도 채택될 수 있는 지적 미학적 유행이다.
진정하지 못한 경험에서 장소는 유용성의 측면이나 아니면 추상적인 선험적 모델이나 인습적 사고의 행위를 통해서만
보여진다. 결국 모든 경험들은 우연적이고 피상적이며 편파적이다.”(p.182).
이렇게 요약된 장소상실, 장소에 대한 진정하지 못한 태도, 장소감 없는 장소를 향한 태도는 어떻게 나타날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 렐프는 푸안과 유사한 방식으로 다양한 사례들을 목록화한다.
먼저 그는 장소에 대한 진정하지 못한 태도를 추동하는 두 가지를 분류한다.
하나는 ‘키치’이고 다른 하나는 ‘테크닉과 계획’(다양한 형태의 계획을 통해 장소에 적용된 기술, 거주 기계라는 르코르
뷔지에의 플랜 등)(pp.182-197).
한편 그는 이러한 장소에 대한 진정하지 못한 태도를 생산하는 ‘매체’를 해부한다.
그리고 “매스컴, 대중문화, 대기업, 강력한 중앙권력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경제 체제가 바로 이러한 매체들이다.”
라고 말한다.
먼저 ① 매스커뮤니케이션은 도로, 철도, 공항 같은 것으로 이는 경관을 위압하고 가로질러 그것을 토막내기에 그 자체로
‘무장소성의 표현’이다.(p.198),
특히 이와 더불어 나타나게 되는 관광은 “관심을 끌 만한 모든 장소에 자신의 가치와 형식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이 모두는 장소에 기반한 공동체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이끈다.
② 대중문화는 획일적인 욕구와 취향을 만들어내고 역시 획일적인 장소를 형성한다.
그것을 압축해서 말하자면 “타자지향장소”란 것이 렐프의 주장이다. 그리고 “타자지향장소의 극치”는 “환상적인 디즈니
랜드, 가공적인 역사공원, 미래지향적인 박람회 같은 ‘엄청나게 거대한 오락 공원’”이다.
따라서 타자지향장소는
⒜ 디즈니화(“세계 곳곳에서 모아온 역사와 모험을 가장 상상력이 풍부하고 조형적으로 만들어
내보이며, 이것들을 암시적이든 명시적으로 기술공학적인 유토피아 전망과 결합”시키는 것.(p.214)),
⒝ 박물관화(“과거에 대한 우리의 낭만적인 이미지에 맞추어서 완전히 고안된 개발”(p.217)),
⒞ 미래화(“새로운 스타일과 테크닉을 지속적으로 추구함으로써 계속해서 장소를 파괴하며, 마침내 시간과 전통이
장소에 부여한 진정성까지 부인해” 버리는 것(p.221)),
⒟ 서브토피아 subtopia(“목적이나 관계에 어떤 패턴도 가지지 않고 인위적 구조물을 아무 생각 없이 섞어 놓은 것”(p.223)).
③ 대기업: 한편 위의 매체들을 작동시키는 것은 대기업들이다.
“이윤추구가 목적인 상품을 창조할 때에는 생산, 관리, 판매의 과정에서든, 그 상품이 경관상에 이용될 때든, 장소 자체는
거의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p. 225).
④ 중앙권력: 국가로 대표되는 중앙권력 역시 장소상실에 기여한다.
국가의 법률은 “직간접적으로 토지 이용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개발과 입법을 통제”하지 않는가.
이처럼 여러 분야에서 “국가는 근대 사회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기술과 산업, 경제체제에 보조적 존재로서, 기술
산업, 경제체제 역시 무장소성에 대해 적잖은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pp.235-6).
⑤ 경제체제: 이윤중심의 경제는 “질의 문제, 혹은 각 개인이나 특정 장소의 욕구와 미묘함은 고려에서” 제외시킨다.
그것은 오직 효율적이라고 생각되는 것 만에 몰두하고 장소를 잃게 만든다(p.237).
그렇다면 “무장소의 지리”가 압도하는 세계에서 “인간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가 융합”되어 있고, “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의미 깊은 중심”으로서의 장소를 회복하는 것(p.287), 하이데거가 말한 “집-없음(homelsessness)”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는 하이데거를 반향하며 “기술”이라는 형이상학에서 벗어나 “장소의 생활세계”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필요한 것은, 우리의 생활환경을 잘 이해되지 않는 거대한 기계처럼 보고 이를 다루는 수학적 절차가 아니다.
오히려 생활세계의 일상적 경험과 예외적인 경험 양자를 모두 설계하려는 접근이 필요하다.
즉, 사람에게 꼭 맞게 환경을 완벽하게 창조하려는 전체적으로 의식적 접근이다.
이런 접근은 지역의 의미와 경험의 구조, 특별한 상황과 다양한 수준의 장소 의미에 대한 반응이다.
이런 접근은 또한 장소의 실존적 중요성, 많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장소에 대한 심오한 애착, 하이데거가 밝힌 거주와
아낌의 존재론적 원리에서 영감을 얻은 접근이기도 하다.
이런 접근은 어떤 구체적 문제에 대한 정확한 해결책을 제공할 수는 없지만, 장소의 의미와 특별한 활동, 지역적 상황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면서, 주요 방향과 가능성을 개관하는 방법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개인이나 집단이 장소를 만들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고, 그런 장소들을 개조하고 그 안에 거주함으로써 장소
에 진정성과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p.297)
그렇다면 렐프의 장소의 생활세계를 구성하자는 1975년의 제안은 이제 어떤 처지에 놓여있을까.
실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공간에 관한 사유를 개시하는 충격적인 선언처럼 들리지 않는다.
아니 짓궂게 말하자면 따분하게 들릴 지경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푸안과 렐프의 주문(注文)은 이제 장소에 관한 담론이 스며나오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강박적이고 자동
적인 주문(呪文)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를 굳이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추상적인 공간이 아니라 역사적이거나 문화적으로 특색 있는 장소로서 공간을 문화적으로 손질하는 기획들에 대한
흥미로운 논평을 하나 꼽자면 할 포스터의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는 장소라는 범주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동시대 미술의 사례들을 염두에 둔다.
이를테면 모더니즘의 추상적 공간 상상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비롯된 장소-특정적 미술을 비롯하여 공동체 미술에
이르는 일련의 예술적 실천을 상대한다. 그에 대한 그의 언급 하나는 이렇다.
“지역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은 문화로서는 살해되었으면서도, 시뮬라크럼으로서는, 즉 어떤 공원의 ‘테마’나 쇼핑센터의
이야기로는 되살아날 수 있으며, 장소-특정적인 작업은 징소-특정적인 것의 디즈니 판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의 이러한 좀비화 속으로 끌려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 금기시되는, 진품성, 독창성, 특이성 같은 가치들도 미술사가들에게 정의나 장식이 의뢰되는
장소들의 속성들로서 복귀할 수 있다.
이러한 복귀 그 자체는 잘못된 구석이 전혀 없다.
하지만 후원자들은 이런 속성들을 바로 개발을 위해 장소화된 가치로 간주하곤 한다.”
너무 냉소적이고 잔인한 말일까.
그렇지만 조금만 따져보면 우리는 그의 주장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적 국가는 장소감의 회복을 원하는 듯 보인다.
적어도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는 상실된 장소를 되찾기 위해 분주하다.
또한 장소성과 지역성은 제품기획과 마케팅을 위한 새로운 상품미학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스펙터클을 비판하는 ‘깨알 같은’ 생활세계의 경관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장소의 규범이자 표본인 듯 보인다.
그렇다면 생활세계의 장소를 대신할 새로운 공간의 형상은 무엇인가.
참고문헌
이-푸 투안, [공간과 장소], 구동회, 심승희 옮김, 대윤, 2007.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 김덕현 외 옮김, 논형,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