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약수동을 떠나온지 30년이 넘었다. 20년을 그곳에서 자랐으니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몇 년 전 억지로 시간을 빼서 어릴 적 뛰어놀던 동네와 골목을 다시 걸어 본적이 있다. 이럴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간직한 추억들보다 내 앞에 펼쳐진 공간들이 너무 작고 초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작았나? 혹시 내가 잘못 온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지며 옛날 추억을 더듬어가며 그 길을 걸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었다. 90년대 초반에 읽어보고 25년만에 다시 제대로 읽어보는 책이다. 그렇다고 어거스틴을 멀리하며 산 것은 아니다. 여러 많은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사실 신학을 한다면 어거스틴과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비유적으로 표현한다면 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 먹는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만큼 어거스틴은 중세신학에서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상당한 영향력을 막강하게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업적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기독교 신앙(종교)을 헬라철학으로 체계화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종교를 철학체계에 가깝게 형상화한 인물이라고도 평가한다. 특히 플라톤 철학과 로마제국의 국교로서의 기독교를 조화롭게 하나의 사상으로 묶어내고 완성시킨 사람이 어거스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을 ‘BC’와 ‘AD’라고 표현한다. 기독교 신학은 어거스틴 이전과 어거스틴 이후로 정리될 수 있다.
특히 세계 3대 참회록이라고 평가를 받는 어거스틴의 ‘고백록’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가치는 독특하다. 단순한 일기도 전기도 자서전도 아니다. 그런 것을 기대하고 책을 읽었다면 단번에 실망하고 말 것이다. 이 책의 역자 성한용도 지적했듯이 고백록은 ‘이야기 신학’에 가깝다. 아니 최초의 이야기 신학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더듬어 이야기 하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죄와 구원과 은총과 더불어 창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신학이라고 하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혹은 소요리 문답과 같이 체계화되고 조직화된 개념을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법전과 같이 일목요연(一目瞭然) 하게 몇 장 몇 절로 정리되어 있는 규범집을 떠올린다. 고백록은 그런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버린다. 단순히 자신의 삶을 변호하거나 변증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안에서 역사하시고 일하신 하나님과 어거스틴 자신의 신앙적이고 철학적인 고뇌와 질문들에 대해서 어떻게 기독교(성경) 안에서 답을 찾아 갔는지를 기록한 책이다.
이것이 고백록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모던 시대를 지나 포스트모던 혹은 그 포스트모던 중에서도 후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모던 시대의 특징이 표준화와 규범화, 정확한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포스트모던의 특징은 해체이다. 진리라고 주장했던 거의 모든 것이 해체되고 상대화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가진 신앙을 드러내는 방법 중의 하나가 이야기 신학이라고 생각한다.
고리타분하고 대답해야할 정답이 정해져 있는, 그래서 그 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정죄와 비난을 받는 법전과 같은 교리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삶의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의 사람들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원죄’이다. 사실 초기 기독교에서 원죄 개념은 전무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정립한 사람이 어거스틴이다.
우리는 보통 어거스틴이 회심 하기 이전에 매우 문란한 삶을 살았다고만 알고 있다. 하지만 고백록을 읽어보면 진리와 철학에 관심이 있었고,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들에 나름대로 답을 찾고 있었다. 그런 고민과 갈등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는 발견하지 못하고 이원론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마니교의 교리에서 답을 찾았던 것이다. 회심 이후 어거스틴은 이런 문제들을 원죄론으로 정리한다. 즉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타락했다는 이론을 통해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아픔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이 어거스틴의 탁월함이지만 동시에 한계로도 작용한다. 그의 삶의 여정 가운데 가진 많은 질문들을 신앙과 이성, 철학과 신학으로 정리한 것은 그의 놀라운 업적이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고개를 갸우뚱 할 수 밖에 없다. 어릴 적 놀던 골목이 매우 작아보이는 것처럼, 25년 전 어린 신학생에게 비쳐진 어거스틴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맥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으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여러 루트들이 보인다.
아니 어거스틴을 넘어야 한다. 더 이상 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어거스틴이 그의 시대에서 신학함을 통해서 답을 찾아갔다면, 우리도 동일하게 우리의 시대에서 신학함을 통해서 우리들의 답을 찾아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신학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신학은 그 시대의 물음에 답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통해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우리 자신들만의 답을 찾아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책 ‘하나의 아이’이다. 특히 이 책의 부제가 마음에 든다.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 저자는 자신의 삶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기술한다. 특히 정신 질환을 앓았던 부인과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 그런 고통 속에서 신학자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고백한다. 신학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삶으로 풀어내야 하고 찾아야 하는 고백록인 것이다. 이제 우리들 각자가 그 고백록을 써내려 가야할 때가 되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