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제가를 실천한 선비, 서거정
조선 사관, 대쪽처럼 바른 인물로 평가
中 문인도 인정한 시인, 6500여 수 남겨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편찬 참여
기사사진과 설명 서거정 초상화. (사진=네이버 카페 ‘사가공파 제주사람들’) |
재조명되는 천재 시인 서거정
세조는 조선에서 최초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반정(反正)으로 국왕에 즉위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곱지 않다. 따라서 그를 받들어 조선왕조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했던 인물들도 지난 세기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최근 사정이 달라졌다.
1984년 서거정의 호(號) ‘사가정(四佳亭: 네 가지 아름다움의 정자)’에서 이름을 딴 ‘사가정 길’이 서울에 생기더니, 1996년에는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이 개통됐다. 또한 2006년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사가정 공원’이 조성됐고, 송파구 방이동의 공원에도 2001년 서거정의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그가 사후 500년 만에 이렇게 새롭게 조명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서거정은 대구 서씨(大丘 徐氏) 가계의 위상을 높인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6세에 벌써 천재로 소문났던 그는 어린 시절을 서울 (노원구) 불암동에 살았고, 나이가 들어서는 몽촌토성에 거주했다고 한다.
조선의 사관(史官)은 서거정의 성품을 “따뜻하고 선량하며 대쪽처럼 바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그의 학식에 대해서는 “보지 않은 글이 없을 정도로 공부벌레였고, 글을 쓰는 데 옛사람이 하던 정형화된 격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문체를 이루었으며, 불교의 글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나아가 풍수와 사주에 정통했다고도 소개했다.
서거정은 대단한 문장가였다.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편찬에 참여했으며, ‘사가집’, ‘역대연표’, ‘동인시화’, ‘태평한화골계전(해학집)’, ‘필원잡기’ 등을 펴냈다. 특히 시(詩)를 매우 잘 지어서, 중국 문인들도 그의 시에 찬탄을 금하지 못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가 남긴 시는 무려 6500여 수나 된다.
기사사진과 설명 사가정 공원의 정자. (사진=다음카페 ‘동촌마당’) |
가정적인 너무도 가정적인…
서거정은 고려시대의 이규보처럼 당대의 문장가이자 권세가였다. 둘의 공통점은 술은 즐겼으나, 여자문제는 깨끗했고 매우 가정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개국공신 권근의 외손자인 서거정은 정실과의 사이에 딸아이를 낳았으나 요절하고, 소실과의 사이에 늦둥이 아들 하나를 두었을 뿐이다.
서거정의 문집 사가집(四佳集,)에는 가족애가 물씬 풍기는 여러 편의 시가 실렸는데, 그중 하나를 감상해보기로 하자. 바쁜 직무 때문에 아내와 가족만을 광진나루 남쪽의 촌락(村落)으로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몽촌의 시골집은 달팽이보다 자그마한데,
그곳에 아내를 보내는 내 마음 오죽하랴?
동산엔 이미 푸짐하게 배와 밤이 수확됐고,
강호엔 게와 고기 많아서 또다시 반갑겠지.
돛을 펴고 포구에 드는 꿈을 많이 꾸는데,
언제 나막신 신고 산에 오를 수 있을까?
벼슬자리에 앉아 있자니 자유롭지 못하여,
순채와 농어 못 먹고 국화주도 못 마시네.
위의 시에서 서거정은 ‘아내’를 옛날 중국인 부부가 서로 친근하게 불렀던 ‘卿卿(경경)’이라고 표기했다. 한편, 순채(蓴菜)란 연꽃잎을 연상시키는 타원형의 식물이다. 청정한 연못에서만 자라고 생육조건이 까다로운 순채는 현재 멸종위기 2급의 희귀한 식물이 됐으나, 조선 시대에는 임금님 진수성찬에도 오를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위 시는 중국의 시를 일부 인용했지만, 아내와 가정에 대한 애틋한 사랑, 자기 마을의 정취에 관한 정겨운 마음이 돋보인다.
기사사진과 설명 서거정의 시문집 사가집. (사진=국립중앙도서관) |
젊은 날을 그리며
서거정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이며, 45년 동안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등 여섯 국왕을 모시고 새 왕조의 기틀을 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종1품에 이르렀으며, 1471년 어린 임금인 성종을 잘 보필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공신이 되고 달성군(達城君)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노년에는 퍽이나 외로웠던 가보다.
젊어선 귀밑머리 날리며 당당히 말했으나,
이젠 칼날 거둬 남이 싫은 말을 멀리하네.
옛날 벼슬길엔 일 많고 우여곡절 심하더니,
늙으니 재주·명성이 쥐꼬리처럼 부질없네.
시로 남에게 감동을 못 주니 읊고 또 고치고,
술로 자신을 잊고자 마시고 또 마시네.
편지 써서 바둑 상대할 벗을 부르려 해도,
붓이 송곳처럼 얼어서 잡고 쓰질 못하네.
조선왕조실록은 역사적 인물의 사망 날짜에 졸기(卒記)라는 삶의 기록을 실었는데, 졸기의 끝에는 비판적인 내용이 감초처럼 따라붙는다. 서거정의 타계 일인 1488년 12월 24일(음력)에도 장문의 졸기가 실렸는데, 그 말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지 못하고, 또 후배를 육성하지 않아서 세상이 이를 부족하게 여긴다.”
그러나 이런 평가를 거꾸로 생각하면, 서거정이 계파를 만들지 않고, 공평·청렴·정직·근면이라는 신조로 공직 생활에 충실했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서거정의 ‘수직론(守職論: 직분을 지킬 것을 논함)’에는 세상의 비판에 대한 그의 대답이 등장하는데, 그 일부를 소개한다.
“만물은 각기 직분이 있다. 소의 직분은 경작하는 것이고, 말은 사람을 태우는 것이 직분이다. 닭의 직분은 새벽에 우는 것이고, 개는 밤에 짖는 것이 직분이다. 직분을 지키는 것을 수직이라 하고, 지키지 않는 것을 월직(越職)이라 한다. 월직은 이치에 어긋나고, 이치에 어긋나면 화를 입게 된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첫댓글 세월 흘러 빛 발한 당대의 문장가이자
권세가인 서거정은 만물은 각기 직분이 있다고 했다.
공부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