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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시는 결혼(창24장 1- 9;24장16-20)
성경본문: 창세기24: 1-9;24:16-20
24: 1-9;
1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2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3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4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5 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6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8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9 그 종이 이에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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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6-20
16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로 내려가서 물을 그 물동이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
17 종이 마주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네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18 그가 이르되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동이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19 마시게 하기를 다하고 이르되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20 급히 물동이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낙타를 위하여 긷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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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가정과 결혼에 관한 말씀을 전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제가 임의로 정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매주 순서에 따라 설교 본문을 잡는데 이번 주에는 창24장의 이삭의 결혼 이야기를 택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점에서 우리가 우리들의 가정과 결혼에 대해 다시 점검해보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오는 토요일부터 2주간에 걸쳐 우리 교회에서 아버지 학교가 열립니다.
많은 분들이 봉사자로 섬기고, 학생으로 등록하고 기도로 준비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들 중에 아직 마음의 결정을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리고 아버지 학교를 통해 우리의 결혼 생활과 가정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우리의 가정들이 새로워졌으면 합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늙은 종(엘리에셀)을 불러 어떻게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해 주어야 하는지 그 치침을 주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특이한 점 중의 하나는, 결혼 당사자인 이삭이 나이가 40세인데, 배우자를 찾는 일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삭의 신붓감을 찾는 일에 전권을 그의 종에게 맡겼다는 점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중요한 지침을 주긴 했지만, 중요한 결정을 그 종이 다 알아서 해야 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옛날에 한국에서 양가 어른들의 결정으로 자녀들이 결혼하는 예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대사를 당사자나 부모가 직접 관여하지 않고 종에게 맡겨서 처리하는 경우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중대사를 종에게 맡기고, 이삭은 아버지와 종이 하는 일에 전적으로 내어 맡기고 잠잠히 기다리는 모습 속에서 이들의 신앙의 깊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종을 믿었다기 보다는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 이레>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시켜 주심’을 체험했습니다.(창22장)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그에게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대신에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을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 대신에 하나님이 친히 준비해 주신 숫양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127세에 죽었을 때, 매장지를 구입하는 과정에서도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체험했습니다.
헤브론의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을 은 400세겔에 사서 사라와 가족들의 매장지로 정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 갈대에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왔고, 다시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온 이후에 언제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인도해 주시고 필요한 것을 준비시켜 주심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한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일에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삭도 아버지가 하는 일에 전적으로 신뢰하실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그 어떤 문제도 다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체험하며 사십니니까?
결혼 문제를 비롯하여 인생의 중대사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신뢰할 수 있습니까?
저는 감사하게도 지난 날의 인생을 뒤돌아 보면,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참으로 많이 체험하였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회심, 신학교에 가게 된 것, 결혼, 선교사가 된 것,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것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최선의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고 중간 중간에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려움이 오히려 복이 되는 체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것이죠.
잠3:5-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최선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가정과 결혼에 관한 말씀을 나누면서, 가장 먼저 생각해 봐야 할 점은, 결혼은 사람의 일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이요,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배우자를 만나게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란 점입니다.
제자반 성경공부 시간에 어떤 자매님의 고백입니다.
살면서 어떤 기적을 체험했는가라고 제가 물었더니, ‘남편을 만난 것이 기적입니다. 믿음 없던 남편이 믿음을 갖고, 그 남편의 믿음이 자라가는 것이 기적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믿으세요?
부부끼리 앉은 분들은 서로 말해 보세요.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이미 결혼하신 분들-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장 좋은 짝을 찾게 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창세기 24장은 이삭의 결혼에 관한 굉장히 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이삭은 자신의 결혼에 관해 제3자의 입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은 주인공인데 숨은 주인공인 것입니다.
제일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사람은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이었습니다.
창24장은 연극에 비유해 보면, 전부 4막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제1막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종과의 대화로 이뤄져 있습니다. 아직 종이 여행을 떠나기 전입니다. 집안의 어머니였던 사라가 죽은 후, 아들 이삭에게 하루 빨리 아내를 맞이하게 해야 하겠다고 아브라함이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안의 모든 책임을 맡고 있었던 늙은 종(엘리에셀)을 불러서 이 중차대한 사명을 맡겼습니다.
아브라함은 종을 불러 허벅지 밑에 손을 넣고,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까지 시키면서 한 가지 조건을 말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허벅지 아래에 손은 넣고 맹세한 것은 ‘생명 걸고 약속을 지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이죠?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들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이 말을 듣고 종이 질문합니다.
만약에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지 아니하려 하면 어떻게 합니까?
주인의 아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가야 합니까?
아브라함은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고향을 떠날 때에, 친히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 땅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천사)를 네 앞서 보내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시 여겨야 할 결혼의 조건 한 가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믿음의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요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딸은 안되고 자기 고향 자기 친족에게 가서 이삭의 배우자를 데려오라는 것은 단순히 혈통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족속은 심각한 우상 숭배자들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가나안 사람들과의 결혼을 금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7:3-4절입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신약 성경에서도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후6:14절a에 의하면, “너희는 믿지 않은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결혼 전 아직 믿지 않는 상태에서 결혼을 한 분들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결혼 당시 본인은 크리스천이었지만 안 믿는 배우자와 이미 결혼하여 사는 분들도 어쩔 수 없습니다.
신앙 때문에 이제 갈라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가 함께 살기를 원하는 한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자녀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미혼인 분들은 배우자의 최우선적인 조건을 신앙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또는 며느리감이나 사윗감을 구할 때)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제가 사귀고 있는 분은 신앙 한 가지만 빼놓고 완벽합니다. 흠잡을 데 없이 잘 맞습니다.”
맞는 말같이 보이지만,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취미 생활이 아닙니다.
여러 요소들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신앙은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가치관이고, 세계관입니다. 삶입니다.
신앙은 혈관과 같아서 온 몸에 퍼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없다는 것은 가장 본질적인 것이 없는 것이요, 신앙이 다르다는 것은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조건을 뒤로 미루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의 조건이 예전 사람들과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이동원 목사님의 설교집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예전에는 결혼 조건 <ABC>가 있었는데, A - age(나이), B - beauty(외모), C - character(성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같은 <ABC>인데, 전혀 다른 <ABC>라고 합니다.
A - apartment(아파트에 사느냐?), B - bank(은행에 예금이 얼마나 있느냐?), C - cash(현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맨 돈에 관한 것들입니다.
신성한 결혼에 얼마나 황금만능주의가 침투에 들어왔는지를 보여주는 우스운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건강한 가정을 위해, 결혼을 위해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볼 점은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하고 헌신적이냐 하는 점인 것입니다.
이 신앙의 요소를 제외하고 다른 요소를 앞세우는 것은 곧 불신앙이요, 가정에 엄청난 불행의 씨앗을 안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창24장 이야기의 제2막은 아브라함의 종이 열 필의 낙타에 각종 선물을 싣고 주인의 고향 친척이 살고 있는 하란에 도착하여 어느 우물 가에서 이삭의 아내가 될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야곱과 라헬처럼 청춘 남녀의 만남이었다면 그 우물가의 만남이 굉장히 로멘틱한 장면을 연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늙은 종과 리브가의 만남이기 때문에 그런 면은 전혀 없는 만남이었습니다.
나홀성이란 이름의 성 밖 우물 가에 도착한 종은 우선 기도로 준비하였습니다. 주인의 아들의 신붓감을 구하는 이 중차대한 사명을 잘 완수하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어떻게 중대한 일을 앞두고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의 기도 제목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하는 기도였습니다.
다른 내용은 구체적인 기도인데, 만나는 여자에게 한 가지 시험하여 보아서, 하나님이 정하신 신붓감인 것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즉 “성 중의 딸들이 물을 길으러 올 텐데, 우물 가에 서있다가 물을 길어 오는 한 소녀에게 ‘아가씨, 그 물동이를 기울려 그 물을 마시게 해주세요’라고 했을 때, 거절하지 않고 응할 뿐 아니라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겠다’라고 하면, 주님께서 주인 이삭의 아내로 정하여 주신 자로 알겠습니다”하는 기도였습니다.
여러분,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 기도한 대로 이뤄졌습니다.
종이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어깨에 물동이를 메고 나타났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딸이었습니다.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였습니다.
종이 다가가서 ‘아가씨, 그 물동이에 있는 물을 좀 마실 수 있을까’ 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소녀는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물동이를 내려놓고 마시도록 했습니다.
다 마셨을 때, 그는 또 말했습니다. “당신의 낙타들을 위해서도 물을 길어 배불리 마시게 하겠습니다” 말만 한 것이 아니라 행동에 옮겼습니다.
급히 물동이를 구유에 붓고 다시 물을 길으러 우물로 달려가서 물을 길어다가 낙타들에게 주었습니다.
그 장면을 말없이 바라보던 종은 과연 하나님께서 바로 인도해 주시고 기도를 들어주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이제 종은 금 코걸이와 금팔찌를 선물로 주고 “누구의 딸이요?” 물어보니, 역시 아브라함의 친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이었던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정확하게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두 번째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의 종이 기도했고 그 기도에 응답되었다는 멧세지도 중요하지만, 제가 볼 때, 그 종이 리브가의 성품을 테스트해보았다는 점입니다.
주인 이삭의 신붓감으로 아브라함은 신앙의 요소를 강조했다면, 그의 종은 하나를 추가했는데, 바로 성품의 요소입니다.
이것은 단지 외모가 예쁘고, 건강하고, 집안이 좋고, 하는 요소가 아닌 결혼 당사자의 성품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임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어떤 성품의 여자였나요?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이 뭔지 아는 여자였습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라기 보다는 주는 것이요, 자신의 입장보다는 다른 이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보세요. 아브라함의 종이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힘들게 떠온 그 물을 좀 마실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요구에 웃으면서 응했을 뿐 아니라, 더 나가 사람이 목마르다면 짐승도 목이 마를 것이라 생각하여 낙타들에게도 물을 길어다 주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한 두 마리가 아닌 낙타 열 마리에게 물을 길어다 주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양일까요?
낙타는 굉장히 큰 짐승입니다.
열 마리 낙타가 얼마나 많은 물을 마셨는지 알 수 없지만, 리브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최소한 한 시간 이상 물을 길어 날랐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남자도 힘든 수고를 여자가 기꺼이 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리브가가 보여준 사랑은 굉장히 터프(tuff)한 억센 사랑이었습니다.
애교 섞인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땀 흘리는 수고가 있는 사랑을 한 것입니다.
잠언31장에서는 현숙한 여인에 대해 묘사하는데, 외모에 대한 묘사는 없고, 부지런한 손과 성실한 성품에 대해 언급합니다.
땀 흘려 일하는 여인에 관한 묘사를 합니다.
이어서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담31:30)
베드로 사도는 믿는 자매님들에게 권면합니다.
벧전3:3-4절,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니라”
성경에서는 성품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격과 성품은 다릅니다.
성격은 타고나는 것입니다. 바꾸지 않고,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외향적이고 주도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내성적이고 항상 화평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성격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성격을 주셨고, 모든 성격의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성품은 다릅니다.
성품은 인격적인 품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리브가가 보여준 것처럼 친절하고, 낙타의 필요까지 채워주려는 섬기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품은 타고난다기 보다는 후천적으로 개발되는 것입니다. 훈련을 통해 성숙되는 것입니다.
기도와 자기 성찰과 고통에 대한 인내와 성령의 역사로 성품이 향상되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외모나 성품만 빼어났던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깨끗했습니다.
16절에서 리브가를 묘사하면서 “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고 했습니다. 당연한 말 같지만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리브가는 결혼할 몸으로써, 성적으로 순결했던 처녀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적인 순결도 행복한 결혼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배우자에게 떳떳하기 위해 순결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실수했거나 이 문제에 있어서 떳떳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여 씻음 받고 깨끗하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는 사람은 누구나 흰 눈과 같이 깨끗이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와 같이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외모나, 학력이나, 직업이나 경제력과 같은 외적인 요소가 아닌 신앙, 성품이나 도덕성과 같은 내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이삭의 결혼 이야기의 3막은 종이 리브가의 집에 도착하여 자신이 온 목적을 설명하고 결혼 승락을 받는 장면입니다.
종은 리브가의 가족들에게 자신이 누군지, 주인 아브라함은 누군지,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나홀 성까지 오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이어서 우물 가에서 리브가를 만난 이야기, 이 만남 속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하심이 있었음을 생생하게 간증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녁을 먹기 전에 당장 중요한 결정, 즉 결혼 승낙을 속히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중요한 결정을 리브가의 오라버니 라반과 아버지 브두엘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결정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였습니다.
창24:50-51절,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드디어 리브가가 이삭의 신붓감으로 결정이 된 것입니다.
일이 잘 끝났으니 종은 가지고 온 선물 보따리를 풀어서 식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
이삭의 결혼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종이 신붓감인 리브가를 데리고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약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종이 다음날 일어나자 마자 리브가를 데리고 떠나야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라버니 라반과 어머니가 나서서 며칠 또는 열흘 정도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떠났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도 종은 그날 바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저를 만류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제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저를 보내어 주인에게 속히 돌아가게 해 주세요.”
그러자 이제 최종 결정권이 당사자인 리브가에게 넘겨졌습니다.
리브가가 어떻게 했을까요?
어머니의 뜻대로 며칠 혹은 열흘 후에 떠났을까요?
아니면 당장 떠나겠다고 말했을까요?
창24:58-60절입니다.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말미암아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의 특징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혈육의 정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더 우선시하고 더 중시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귀히 쓰십니다.
내 감정이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 옛날 다른 나라로 시집을 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때입니다.
평생 다시 못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친정 엄마와 며칠, 또는 열흘 정도 같이 보내면서 이별의 정을 나누고 싶다고 한 것은 참을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충성스런 종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신붓감을 데리고 하루 속히 주인에게 돌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리브가도 정보다는 사명, 비전을 택하여 함께 떠나게 된 것입니다.
리브가가 받은 비전은 한 사람의 아내가 되는 것, 더 나가 자녀의 어머니,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비전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는 것,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은 위대한 비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떤 비전과 사명을 받았습니까?
“저는 특별한 비전을 받지 못했는데요. 애 키우며 집안 일을 하는데요”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다시 말씀 드리지만,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는 것, 아버지가 되는 것도 이삭이나 리브가가 받은 비전처럼 위대한 비전인 것입니다.
복음성가 중에 <파송의 노래>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너의 가는 길에 주의 평강 있으리, 평강의 왕 함께 가시니,
너의 걸음 걸음 주 인도하시리 주의 강한 손 널 이끄시리
너희 가는 길에 주의 축복 있으리
영광의 주 함께 가시니
네 밟는 모든 땅 주님 다스리리
너는 주의 길 예비케 되리.
주님 나라 위하여 길 떠나는 나의 형제여
주께서 가라시니 너는 가라
주의 이름으로 거칠은 광야 위에 꽃은 피어나고 세상은
네 안에서 주님의 영광 보리라
강하고 담대하라
세상 이기신 주 늘 함께 너와 동행 하시며
네게 새 힘을 늘 주시리.”
리브가가 이 찬양을 알았다면 길을 떠나면서 꼭 불렀을 것 같습니다.
마치 19세기 선교사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 길을 떠났듯이 리브가는 믿음으로 미지의 땅을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리브가를 여자 아브라함이라 불렀습니다.
75세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 땅을 간 아브라함처럼 리브가는 하나님의 인도를 확신하며 남편 얼굴도 모른 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비전을 붙잡고 떠났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정과 결혼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가정도 교회와 마찬 가지로 우리의 헌신의 영역입니다.
가정도 교회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건강한 결혼의 조건 중에 제일은 신앙의 요소입니다.
그 다음이 인격의 요소, 즉 성품입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건강한 가정을 세우고 지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에서는 이혼율이 50% 정도이고, 한국에서도 30%정도 되고 있습니다.
즉 세 쌍이 결혼하면 그 중에 한 쌍이 이혼하는 추세인 것입니다.
며칠 전 어떤 미국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고민 섞인 얘기입니다.
애틀란타에 사는 60세가 넘은 자기 동생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의 동생은 의사(메디칼 탁터)인데, 수십 년 결혼 생활을 했는데 현재 이혼 수속 중이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남편이 병원 일에만 매달리고 가정에서 아내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자 측 변호사는 오히려 이혼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황혼 이혼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가정을 세우고 지키는 것은 이 시대의 중요한 사명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가정을 세우는 일은 인간적인 노력만 가지고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 했습니다.
항상 신앙 중심으로 사시고,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으로 변화되도록 성품을 훈련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비전을 붙잡고 전진하시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가정을 축복해 주시고 지켜 주시길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