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앞의 불의를 대처하는 용기가 대한민국을 유지한다. 안팎으로 인류의 공동적과 싸우는 것도 결국은 ‘눈앞의 불의’에 맞서 싸우는 자세에서 온다. 자신을 지키고, 공동체를 지키는 일도 사소한 일에서 시작하여, 큰 불의와 싸우게 된다. 과연 KBS와 민주당은 ‘눈앞의 불의’에 대해 어떤 현대사를 쓰고 있는지 궁금하다.
조선일보 정철환 특파원(2023.06.27.) 〈‘눈앞의 불의에 중립일 순 없어. 푸틴 정권 뿌린 대로 거둘 것’〉, 〈“작은 것에 굴복하면 더 큰 위협, 그게 러·중에 맞서는 이유”〉, “‘눈앞의 불의(不義)를 보고 어떻게 중립적일 수 있습니까. 불의를 보면 반드시 대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국이 또다시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기타나스 나우세다(59) 리투아니아 대통령 말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21일(현지 시각) 수도 빌뉴스의 대통령궁에서 “어떻게 러시아와 중국에 그리 당당하게 맞설 수 있나”라고 묻자 나온 대답이었다. 리투아니아는 인구 280만명, 국토 면적은 남한의 3분의 2 정도인 유럽 발트해 연안 작은 나라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 등 강대국을 상대할 때 소국(小國)답지 않은 의연한 외교정책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유럽연합(EU) 27국 중 가장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러시아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에 나선 나라가 리투아니아였다. 2021년에는 중국의 경제 보복 위협에도 대만 대표부를 개설했다. 다음 달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가 빌뉴스에서 열린다.”
KBS와 민주당의 ‘업무협약’은 대단한 약속이었다. 알박이도 그렇게 생겼다. 국민의 명령이 어떻든 민주당만 상전으로 모시면 된다. 최근 역사, 즉 광우병 파동, 세월호 사건, 사드 배치, 박대통령의 탄핵 등은 KBS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수혜자는 민주당이다.
KBS 안에도 균열을 보인다. 자유언론국민연합 성명서(06.26), 〈KBS 남영진 이사장, 김의철 사장, 윤석년 이사와 EBS 정미정 이사의 즉각 사퇴를 촉구한다.〉, “오늘 실시된 김의철 KBS 사장 퇴진 문제에 관한 KBS기자협회 협회원 모바일 투표 결과, 재적 협회원 504명 중 418명(82.9%)이 투표에 참여했다. 투표 결과 ‘현 상황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장과 경영진은 물러나라’는 내용을 기자협회 입장문에 담을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220명(52.6%)이 반대하고 198명(47.3%)이 찬성한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기자협회를 탈퇴한 KBS 본사 기자들 42명이 별도로 투표한 결과는 38명이 투표에 참가해 38명 전원이 사장퇴진에 찬성했다. 사장 퇴진에 찬성한 198명에 이 숫자를 합산하면 본사기자 236명이 사장 퇴진에 찬성한 결과다. 사실상 본사 기자들도 과반수가 사장 퇴진을 찬성한 것이다.”
결국 기자가 끝까지 김의철 사장을 옹립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언론사(言論社)의 역사는 긴 족적을 갖고 있다. 청나라 심기를 살피면서 일본행을 단행한다. 한편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일본에 파견된 3차 ‘수신사(修信使)’가 1882년 8월 8일 일본으로부터 1883년 1월 6일 돌아왔다. 3차 수신사는 개화파가 주동이 되어, 금능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 1861∼1939)를 정사(正使)로 김만식(金晩植)을 부사로, 서광범(徐光範)을 종사관으로 파견되었다. 이 때 홍문관 교리(敎理) 김옥균(金玉均)과 민 씨일파의 실세 민영익(閔泳翊)은 별객으로 함께 떠났다. 돌아온 그들은 국정개혁안을 상주(上奏)하였는데, 그 내용은 ①청년들의 교육을 장려할 것, ②한성에서 신문을 발행할 것, ③한성에서 군대를 조련할 것 등이었다.(최준, 1993: 15)
금능위 박영효은 신문창간에 적극적이었다. 그전 1차에서 수신사 김기수는 신문의 모습을 묘사했다.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 체결된 고종 13년(1876년 4월 23일), 조선 정부는 제1차 수신사 김기수(金綺秀)와 그 일행 75명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한성을 출발하여, 부산포로 가서, 일본 기선 고오류우호(黃龍丸)로 도일, 임무를 마치고 6월 28일 부산포에 귀환, 7월 21일 귀국 보고를 했다. 김기수는 『일동기유(日東記遊)라는 3권의 일본 기행문을 써서 당시 일본의 근대적 문물제도를 조선에 소개했다. 3권 중의 「속상조(俗尙條」)에서 “신문은 날마다 조판된 글자를 인쇄해서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공사의 소식과 거리의 담설을 즉시 사방에 전한다. 그것을 만드는 자는 사업으로 간주하고, 신문에 난 사람은 영욕으로 여긴다. 글자는 깨알 같아 정교함이 비교할 데가 없다. 대개 신문을 만드는 사람은 활동을 좋아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싫어하여 일이 없으면 초조해 하고, 일이 있으면 기뻐 날뛴다. 그러므로 작은 일을 보고도 눈썹을 치켜뜨고 몸을 흔들며 열손가락으로 굵되 어디가 가려운지 알지 못하니 이것이 그들의 본성이라 하겠다(所謂新聞紙, 日築字搨印, 無處無之, 公私見聞, 街巷談說, 口津未乾, 飛傳四方, 爲之者看作事業, 當之者視以榮辱, 亦必字如荏細, 精工無比, 蓋其喜動而惡靜, 無事懆懆, 有事則跳, 所以見小事, 眉飛而肉舞, 十指爬搔, 不知癢在何處, 是其素性然也)”로 일본을 알렸다.(국사편찬위원회 편, 「수신사기록(修信使記錄)」[한국사총서 제9권], 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58: 66; 차배근, 「개화기일본유학생들의 언론출판활동연구」(1),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05)”
당시 박영효는 대단한 용기였다. 지금도 판박이니 말이다. 스카이데일리 조우석 평론가·전KBS 이사(06.27), 〈친중사대주의 DNA의 역사적 뿌리〉, “조선은 ‘어버이 나라 중국’ 섬기다 종친 나라. 치욕의 유산을 반복하려는 민주당 세력이 문제...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만나며 “역사적으로 한국은 오랫동안 중국의 일부였다”는 망언을 버젓이 내뱉은 것이다. 그 말에 문재인정부가 중국에 공식 항의를 했던가? 한국 지식사회가 뭐라고 이의제기를 했던가? 모두 아니었다. 어쨌거나 바로 그게 민주당 세력을 역사 퇴행세력으로, 대한민국에 어울리지 않는 정치세력으로 낙인찍어야 하는 이유다...우리의 성공은 중국 중심의 유교 문명에서 벗어나 미국 중심의 해양상업문명으로의 결정적 전환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19세기의 세계를 설명할 길 없는 불임(不姙)의 도그마였던 성리학과 굿바이한 것이다. 이영훈 교수의 말대로 조선조는 동굴에 갇힌 사회였다. 믿어지시는가? 조선 500년 동안 이웃 중국이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한 명의 학자도, 상인도 없었다. 동남아나 인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1876년 나라의 문호가 열린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스카이데일리 오정근 자유시장연구원장·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06.26), 〈식을 줄 모르는 좌파정당의 친중본색〉, “18일 바른언론시민행동이 한국여론평판연구소(KOPRA)에 의뢰해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16·17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전략적 동반자로서 중국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76%를 기록했다. 앞서 8일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미국과 중국 간 경쟁에서 미국이 승리하고 중국이 패배하는 쪽에 배팅하면 후회할 것”이라는 내정간섭 협박에 가까운 발언을 한 뒤에 나온 여론조사여서 중국대사의 발언이 한국 국민에게 미친 파장을 짐작케 하는 여론조사였다. 이날 발언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74%는 부적절했다고 평가하고 우리 정부는 싱 대사에 대해 ‘강력한 주의를 촉구해야 한다’는 응답이 43%, 심지어 ‘추방해야 한다’는 의견이 22%나 나왔다. 중국의 국장급인 주한 중국대사가 무려 15분 이상 한국을 성토하고 대한민국 국회 제1당 대표는 손깎지를 끼고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경청하는 장면이 민주당 유튜브로 생중계돼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중국 국민이 일치단결해서 시진핑 주석의 지도하에 중국몽(中國夢)을 진행하는 결심을 (한국인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그걸 모르면 그저 탁상공론일 뿐”이라고 중국몽에 협조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에 이어 “한·중관계의 악화책임은 중국에 있지 않다. 탈중국화 추진을 시도한 때문”이라고 한·중관계 냉각의 책임을 모두 한국에 돌리기도 했다. 일부 언론은 140여 년 전 “위안스카이가 환생한 것 같다”는 표현으로 이를 비판했다. 위안스카이는 구한말 청나라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조선에 부임하여 일본·러시아를 견제하는 등 조선의 내정에 간섭했던 청나라의 외교관이었다.”
민주당이 이런 논리를 펼 때 KBS가 동조해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금능위 박영효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한편 박영효는 실리론과 정치적 야망을 실현할 급진적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한성판윤(漢城判尹) 박영효는 신문국을 한성부 산하에 둘 것을 구상하고, 한성부 신문국장정을 신문 창간에 관한 취의서(趣意書)를 각계각층에 올렸다. KBS 공영언론은 눈여겨 볼 일이다. 그는 언론의 기능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민주당에 경도된 KBS가 이런 선전된 언론관을 갖고 있는자...“신문지는 나라 안팎의 정치 사항을 작고 크고 가림 없이 실어 논하고 민간 사정을 멀고 가까운 것 가림 없이 주어 퍼뜨리는 고로 선을 권하고 악을 징하는 풍조가 저절로 유행하여 또 인민이 항상 정치의 득실을 따져 알게 하여 그 해로움을 없애고 그 옹졸함을 없애길 바라며 정부도 또한 시세의 옮김새와 민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정치를 알맞게 개량하는 일을 얻으며 (……).(이규태, 1968: 38 재인용)
지금과 같은 나라 만들고자 엄청난 노력을 했다. 민주당은 386운동권을 무얼 한 것일까? 스카이데일리 정창옥 길위의학교·긍정의힘 단장(06.26), 〈대를 이어 죽음으로 지킨 인류애〉, ”일본 3대 탄광인 지쿠호 탄전마을은 활기에 넘쳐 있었다. 반면 강제징용에 끌려온 10만 명 넘는 조선인의 삶은 비참했다. 매일 숨진 조선인을 화장하는 연기가 온 마을을 덮었다. 신사에서 의식을 집전하는 일본인 하야시 도라지는 어렸을 때부터 반전(反戰) 의식을 가진 학자였다. 그는 탄광에서 산맥을 넘어 탈출한 조선인들을 숨겨 주고 치료해 주었다. 신사 마루 밑에 숨겼다가 밤이 되면 집으로 데려와 옷과 음식은 물론 여비까지 마련해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심지어 조선인을 탈출시키기 위해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부관연락선(부산~시모노세키)에 오르기도 했다. 조선인 탈출자들을 돕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하야시는 1943년 일본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고문 후유증으로 48세에 사망하고 만다. 일본은 천황을 배신한 국적(國賊)이라며 장례식도 취소하고, 겨우 아홉 살 소년이었던 아들 에이다이에게 아버지가 했던 역할을 떠맡겼다. 일본이 패망하자 한 조선인이 아버지가 건네준 돈이라며 10엔을 에이다이의 손에 쥐어 줬다. 에이다이는 그 10엔을 평생 가보처럼 간직했다. 그리고 일본은 물론 한국·중국·러시아·타이완·인도네시아·뉴기니에서 일본인에게 강제 동원된 사람들에 관한 피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그는 ‘아리랑문고’를 설립해 51권의 저서와 4권의 자료집·9권의 공저를 남겼다. 그의 아버지가 구한 조선인 징용자는 400명에 이른다. 1950년 8월15일 6·25전쟁에 동반 입대한 3명의 군인이 있었다. 이민건 육군하사는 38선 최전방인 금화지구 전투에 참가한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재배하고 유언장을 가슴 깊숙이 넣었다. 전투가 끝나자 유언장만 부모에게 전달되었다. 이태건 육군상병은 철원지구 전투에 참가한다. 중공군 20병단 12개 사단 병력의 공격으로 그는 전투에서 전사한다. 그리고 육군상병 이영건은 이름 모를 산하에서 적과 교전하다 산화하고 만다. 광복절 5주년을 기념해 한날한시에 동반 입대한 이들은 모두 형제였다. 그러자 막내 이승건은 형들의 비보를 듣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으나 꽝나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이재양·류분기 부부의 자녀 6형제 중 장남 이민건 하사는 울산 울주의 선산에, 막내 이승건 해병 중사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치되어 있다. 차남 이태건 상병과 삼남 이영건 상병의 유골은 아직도 발견되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며 대한민국 산하를 움켜쥐고 있으리라.”
금능위 박영효의 꿈은 그렇게 순탄치 않고, 한국현대사를 가로 지른다. 한국의 근대사는 KBS, 민주당 구성원들 생각하는 만큼 간단치 않다. 그러나 다시 ‘한국은 오랫동안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라고 한다. 다시 역사를 기록해야 할 판이다. 기타나스 나우세다 리투아니아 대통령 말은 ‘’작은 것에 굴북하면 더 큰 위협 닥쳐‘라고 했다. 하봉규교수(부경대학교) 교수(06.27)가 카톡에 올린 글이다. 〈워커장군천도제〉, “부산 해운대 청사포에는 해월정사가 있다. 청사포는 아름다운 해변풍광으로 일찌기 지역 관광명소로 알려진 곳으로 큰 스님이셨던 성철대종사께서 부산에 오시면 들러셨던 사찰이 바로 스님의 맏 상좌이셨던 천제스님(대종사)이 주지로 계셨던 해월정사이다. 한달전 해월정사에서 워커장군등이 초파일에 맞추어 걸리게 되었고 6.25(일) 천도제가 열린다는 연락을 받고 감격했었다. 사정으로 조금 늦게 도착하였더니 워커장군연극(7월 8일 오후 3시/영화의 전당-하늘연극장)을 준비중 박창화감독이 맞이한다. 대법당에서 거행중인 워커장군천도제는 신도들의 49제와 함께 거행중이었다. 처음에 불교에서 워커장군을 모신다는 말에 당황하기도 했었다. 독실한 기독교인 이셨던 워커장군집안의 내력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불교는 원효대사, 사명대사를 위시하여 호국불교의 전통이 강하기에 한편으로 이해가 되었다. 년전 워커굿즈로 워커(감)와인을 만들었던 추억도 상기되었다. 30여인들의 회중을 거느린 천도제는 격식과 무게감이 있었다. 천도제 마지막 부분은 워커장군 부자(Gen. Walton H. Walker & Gen. Sam S. Walker)의 영정앞에 국화를 헌화하고 절하는 것으로 끝났다. 오랫동안 '워커스토리(영화시나리오)'를 비롯하여 70주기추모제(2020.12.23), 추모음악회(2021.10.10), 워커장군진혼제(2022.5.17) 를 주관했던 사람으로서 감회가 새로웠다. 무엇보다 신도회장님 등 많은 보살님, 처사님들이 장군에 영정앞에 헌화하고 절을 하고 있었다. 천도제를 주관하신 천제대종사께선 직접 워커장군천도제도 매주 일요일마다 거행하신다고 알려주셨다. 너무나 고맙고 멋진 일이었다. 실지로 워커장군은 70년전 낙동강전선의 대승리로 6.25의 전환을 가져왔고 한미동맹의 근간이 되었었다. 낙동강전선은 미군이 아시아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이자 마지막 대승리였다. 3년전 유엔연구소를 설립하고 첫 사업으로 워커장군 추모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시작은 '워커스토리"란 영화시나리오로 출발했다. 워커스토리는 1부로 낙동강전선을 중심으로 워커장군의 마지막 모습을 담게 되었고, 2부는 워커장군 사후 아들(샘 워커)과 이승만, 박정희대통령, 김영옥대령 등 여러 인물들이 겪는 6.25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사실 6.25는 전후 첫 대규모 국제전이었고 한국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한국은 6.25를 통해 한미동맹을 확보했다. 한국은 한미동맹으로 북한의 무력도발로 부터 안보를 확보할 수 있었고, 후일 월남전참전과 한일국교정상화(1965)로 조국근대화에 성공했던 것이다...(그 용기는 어디에서 왔을까?) 모든 것은 3년을 지속한 처절한 전쟁에서 출발해야하고 그곳에 미 장병앞에서 "나는 한국을 죽을 때까지 지키기위해 왔다"는 사자후를 토하고, "stand or die"란 최후명령을 내렸던 워커장군은 한국을 구한 용기, 전략, 리더십의 영웅인 것이다.”
|
첫댓글
무언의 침묵하는 자들도
모두 공범이라고 봐야합니다
쏘라님.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