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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시조평]
알을 깨면 세상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박희곤
콘크리트로 지은 문화원은 우리 전통 가옥을 표방한다. 팔작지붕이 멋들어진 문화원은 어디에도 나무향이나 한지(韓紙), 황토흙내라곤 없다. 그러나 아무도 양옥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무엇으로 지었는가 보다는 어떤 형식을 주장하는가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이 다른가 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조평(감히 평이라 함을 아끼며)은 ‘알을 깨고 세상을 처음 보는 어린 새’와 같았다.
가까운 곳에 광산김씨 집성촌이 있다.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흩어져 있던 광산김씨 문중의 옛집들을 고향이 보이는 산자락 한 곳에 모아두면서 집성촌, 군락을 이루게 되었다. 몇몇 정자며 재사(齋舍), 고가옥이 남(南)으로 열려 있는 모습은 먼 곳에서 봐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특히 탁청정(濯凊亭)을 좋아하여 가끔씩 찾는다.
흔히들 말하는 대로 영남지방에서 가장 화려한 개인 정자라는 말을 들어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팔작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마다 숨어있던 솔 향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에 스며든 수많은 이들의 지문이 켜켜로 새겨진 흔적이 좋다. 때 되면 작은 연못에는 연(蓮)이 피었다 지고, 바람 피어오를 때마다 자목련 시들어가는 가슴 진한 향이 아프다. 그 언저리에 응어리를 내려놓을 수 있어 좋다.
옅은 봄 백매(白梅)가 피고 홍매(紅梅)가 올 즈음 자목(紫木)은 스스로 꽃잎을 툭툭 던지듯 버리고 잎을 달기 시작한다. 등 하나 달지 않아도 달빛이며 별빛이 스며들어 아릿한 아카시아 꽃향기와 더불어 눈물샘을 자극한다.
‘거절의 미학’이라는 책도 있다는데 한번쯤 봤으면 좋았을 법도 하다. 살면서 돈빚보다 무서운 것이 글 빚이라고, 글 빚은 지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원고 마감기한에 임박해서야 글을 쓴다.
한 줄 글쓰기가 어려워 서점을 찾아 도움이라도 받을까 하며 반나절을 시조에 관한 책을 찾았다. 부러 안내원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시집코너 문학코너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목만 읽어 내려가기를 몇 번, 수많은 시집 속에서 이렇다 할 시조집 한 권 찾지 못하고 애매한 책 두어 권 골라 지불하고 서점을 나섰다.
아무렇게나 펼친 시집 속에서 산문시 하나를 골라본다.
비탈을 돈다 은행나무 가로수들 급히 양쪽으로 물러선다 저만치 보이는 중년사내 하나, 지팡이를 앞세우고 더듬더듬 걸어오고 있다 자전거를 탄 한 무리의 아이들, 바퀴 자국 어지럽게 휙, 사내 앞을 스친다 잠시 휘청대는 사내 순간, 놀란 은행나무들이 주위를 둘러싼다 와르르 쏟아지는 놀란 한숨들 사내가 지팡이를 더 힘껏 붙든다 긴장한 사내의 손 움켜지고 앞장서 걷는 지팡이 탁, 탁, 탁,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 힘차다 탁, 탁, 탁, 다시 튀어나오는 소리 쫓아 조심조심 걸어가는 사내, 온몸으로 배웅하는 은행나무 가로수 들, 사내의 등위가 오랫동안 환하다 정말 환하다
이은림(1997년 영남일보 신춘문예와 2001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인의 첫 시집 “태양중독자” 중에서 “환하다”의 전문이다. 지팡이 마디마디에 오감을 실어 익숙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중년의 시각장애인의 모습을 참으로 절묘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여겨지며 갑자기 눈이 환해진 듯하다.
비탈을 돈다
은행나무 가로수들
급히 양쪽으로 물러선다 저만치 보이는 중년사내 하나, 지팡이를 앞세우고 더듬더듬 걸어오고 있다// 중략 // 조심조심 걸어가는 사내, 온몸으로 배웅하는 은행나무 가로수 들,
사내의
등위가 오랫동안
환하다
정말 환하다
원작자에게 양해도 구하지 못하고 평자가 억지로 행간을 나누어 시조의 옷을 입혀 보았다. 다소간 무리가 있지만(행간을 나눌 필요도 없지만) 현대시와 현대시조의 거리감을 좁혀보겠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단지 행간을 나누는 것만으로 시가 시조가 되진 않는다.
그러나 서점에서 몇 시간을 투자해 시조집을 찾았으나 수많은 시집 속에 변변한 시조집 하나 찾지 못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워 억지를 쓴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보다 많은 시인들이 시조에도 관심을 가져주길 희망한다.
1
자동차 위로 추락한 꽃받침
생애 가장 화려한 시절을 보내고 놓아버린 기억, 꽃술이 촉수가 되어 말을 걸어온다 꽃술 끝에 매달린 화분(花粉)이 미처 말하지 못한 단어가 되어 흔들린다 그녀에게 건넨 모든 말도 꽃받침만 남아 눈물샘 같이 말라가지는 않았을까?
바람이 일자 날아오르는 무수한 수식어와 생각들
2
그녀에게 건넨 말이 비상(飛翔)을 꿈꾼다
정물(靜物)의 몸을 버리고 점점이 나비가 되고 구름이 되고, 혹 새가 되어 선회하듯 맴돌다 사라진다 떨어져 나간 대화는 쌓여 있기를 거부한다 그녀와 나눈 모든 언어가 머릿속만 헝클어 놓고, 돌아와 몸뚱이에 박혀버리진 않았을까?
일제히 날아오르며 꽃받침이 건넨 안녕
졸시 비상(飛翔)의 전문이다. 여기서 억지를 한 번 더 부려본다. 차이가 보이는가?
사람이 살아가는 집이라는 것이 그렇다. 죽은 자의 안식처인 곳도 그렇다. 양택(陽宅)이니 음택(陰宅)이니 하는 말도 그렇다. 아파트니, 한옥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는가? 사람이 사는 곳은 똑같다. 그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차이 정도일 뿐 차이는 없다.
나무에 매달려 있던 꽃이 떨어지면 꽃이 아니지 않는가? 다만 꽃잎을 버리고 꽃술도 버리고 꽃받침만 남았다 하여 ‘더 이상 꽃이 아니다’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 않는가? 꽃을 보고 대화를 나눴다면, 꽃잎 버리고 꽃술까지 내놓은 꽃받침이라고 하여 대화가 단절되는가?
언어라는 것이 입 밖을 벗어나 상대의 머릿속을 지난다하여 사라지는가? 단지 생각으로만 남아 있다면 언어인가? ‘사랑한다’ 수 만 번의 생각이 입 밖을 튀어나왔다. 돌아와 내 몸에 생채기를 낼지라도 후회는 없다. 생각에서‘비상(날기)’를 꿈꾸는 것이라면 굳이 추락을 겁내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두려워하고 있다. 굳이 한자어로 표기까지 하고서도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끝이 보이는 사랑을 하면서도 겁 없이 달려들고, 그 끝을 두려워하고 있다. ‘안녕’이라는 시어는 그 결말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지만, 이처럼 혼자 생각하고 어리석게 혼자 주장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단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시어를 선택하는 것도 피해야 할 일, 저자는 지금 스스로 만족하는 시를 쓰고는 ‘남들이 이해하지 않는다’ 떼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얇은 홑이불이
마당을 독차지 한다
삐걱거리며 열려진 대문 틈으로
바람이 들락거리고
빈 마루
쓸쓸한 햇살
한 줌 먼지 날린다.
<중략>
왔구나, 훑어 내리는 손
싸리나무 마른 가지
서투른 듯 익숙한 듯
안겨보는 가슴이여
메아리
되돌아오고
여운만이 남는다.
(김민성 시인의 ‘친정나들이’의 전문)
친정 나들이의 풍경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저자는 친정나들이를 하면서 어느새 손님이 된 듯한 마음이라고 시작노트에서 고백하고 있다. 모처럼의 친정나들이가 얼마나 반갑고 고맙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손님처럼 여겨졌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는가? 어머니 또는 친정어머니는 굳이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슴을 울리는 소재일 것이다. 아리고 아픈 소재일수록 눈물을 아껴야 할 것이다.
부탁하자면 시인이 시작노트에서 고백한 것과 같이 ‘손님’의 입장이 부각되고 강조되었다면(마치 영화를 보는 관객 같은 제 3자의 입장) 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훨씬 가슴 아린 영화를 시를 통해 보게 될 것이며, 독자도 함께 가슴 아린 마음을 공유하고 함께 울어주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음음한 산기운
한숨 칭칭 목을 감다
뻐꾹뻐꾹 휘어진 소리
사랑방 나들다가
엿듣자
문고리 잡고
허리 굽은 메아리
(김숙이 시인의 산촌 뻐꾸기 전문)
산촌의 짧은 해가 지고 뻐꾸기가 둥지를 찾아 울음을 운다. 사랑방에서 듣는 뻐꾸기 울음이 기다리던 손 같아 문 열어 보는 이의 마음이 보인다. 아마 시인은 산촌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스스로 뻐꾸기가 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허리 굽은 어머니가 자식을 그리는 마음을 시조의 미학을 살려 단수로 표현한 이 작품은, 보이는 풍경 속에 어머니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느낌이다. 그러나 너무 관념에 치우치다 보면 자칫 어려워 질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면 좋겠다.
귀 열어 봐
비 오는 날 초록숲은
야외 음악당이 되지
또다닥 투두둑
나뭇잎 건반을 두들기는 빗방울
바람은 또
신나는 지휘자가 되지
눈 떠 봐
비 오는 날 초록숲은
새떼를 청중으로 모시지
아주 고운 음까지 연주하는
보슬비 이슬비 가랑비
가지마다 웅크리고 듣느라
조심조심 숨을 죽이지
(박영식 시인의 비와 숲 전문)
굳이 비가 오지 않아도 숲속에 서면 귀가 간지러워 미치겠다. 어찌나 말들이 많은지, 도무지 해석하지 못하는 단어들을 숲은 연신 온몸을 흔들며 이야기 한다. 함부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햇빛을 받은 자연이 토하는 것은, 인간의 오케스트라보다 뛰어난 음악일 것이다.
자연의 향연을 섣부르게 해석하려들다간 자연과의 동질감은 이미 사라지고 만다. 시인은 비오는 숲속에서 자연과 동화됨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젠 웅크리고 함께 들어주는 일만 남았다.
시조시인 박영식의 작품이라 ‘비와 숲’도 함께 감상해 보았다.
금간 벽을 잡고
잠긴 문을 두드리다
체온을 잃어버린
문고리 잡고 울고 있다
파리한 햇살 한 줌 속
떨고 있는 잎 잎들
문에 귀를 붙이고
까치발로 서서 듣는
누구도 대답 없는
세상 밖 끊긴 소식들
문틈에 잠깐 머물던 바람 앞에 무너지는,
밖에 누구 없어요 여기 누가 있어요
밖에 누구 없어요 여기 누가 있어요
똑똑똑,
다시 어둠이 와요
여기 누가 있어요
(손상철 시인의 폐가 안에 사는 담쟁이 전문)
시인은 동화(同化)되는 법을 알고 있다. 같아진다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철저하게 자신을 버리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경지, 그래야 비로소 열리는 것이 동화라고 보면, 첫수와 둘째 수는 철저한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한다. 물론 동화되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마침내 담쟁이가 되었다.
맑은 물에 발 담그고
푸른 노래 부른다
불어오는 바람에
하르르 꽃잎 떨며
겨운 듯 고개 갸웃이
흔들리며 서있다
(임수정 시인의 ‘연꽃’ 전문)
제목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 맑은 개울 징검다리에 걸터앉아 발을 담그고 사색에 잠겨 있는 소녀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제목이 연꽃이라 하고 나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머리맡에 두고 읽던 시집이 불현듯 생각이 나서 온 서가를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연(蓮)인지 연꽃인지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연꽃에 대한 시(詩)만 있었다. 연꽃은 많은 시인들이 찾는 소재이다. 풀어내는 방식도 가지가지다. 종장에서와 같이 ‘겨운 듯 고개 갸웃이 흔들리며 서있다’ 로 맺었다는 것은 독자에게 상상할 수 있는 틈을 남겨둔 것으로 보여 진다. ‘겨운 듯’ 이라는 시어 하나가 간당거리는 맛을 살려내고 있다.
알을 깨고 나서야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 형식보다 틀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가 죽었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의 지번을 찾는다면 해답이 무엇일가? 두레문학에 실린 여러 시조 작품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내 행복했다.
나는 세상을 어렵게 살아가는 것 같다. 꿩이 알을 깨고 나면 안경을 씌운다. 앞과 아래만 보고 옆이나 위를 보지 말라는 뜻에서다. 괜히 어설프게 하늘을 보고 날아오르려다 날개나 머리만 상할 뿐, 내 눈을 가린 안경을 난 아직 벗지 못했다.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
박희곤 ▷ http://myhome.naver.com/bhg5646 「시조와비평」등단. 다울문학 동인. 「두레문학」회원.
(2008 두레문학 상반기호)
첫댓글 시조평 감사한 마음으로 읽어 봅니다. 박희곤 선생님, 건안하십시오.
계간시조평, 읽다가 제이름도 나와서 눈이 좀 커졌답니다, 보고 다시보고 귀한평 모셔갑니다,박희곤샌생님 감사합니다, 건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