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사 복잡 무쌍해 보이지만 한 판 바둑과 신통히도 닮았다.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란 말에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 바둑 동네에서 회자되는 무수한 격언, 명구(名句)들이다. 반상(盤上)의 ‘공자말씀’들은 실제 사회에서도 삶의 지표로 훌륭히 적용된다. 강의 준비를 못한 인생 카운슬러 선생님들은 급한 대로 ‘바둑 격언집’ 들고 강의실 들어가도 절대 망신당하지 않는다.
일수불퇴 (一手不退)
바둑 헌법 1조 1항은 ‘일수불퇴’부터 시작된다. 이건 격언이라기보다는 규정이지만, 거역 못할 엄격함을 담고 있다. 무를 수 없는 건 인생도 마찬가지란 점에서 둘은 시작부터 닮아있다. 수상전이 벌어졌을 때 딱 한 차례만 두 번 착점을 허용해준다면 백골난망이겠는데 어림도 없다.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가 입단 결정국에서 한 수를 딱 한 줄 옆으로만 두었더라면 그는 프로기사가 돼 전혀 다른 청년기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어떤 길이 더 좋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일수불퇴’는 바둑에서나 인간사에서나 변치 않는 제1조다.
프로를 목표로 하는 입단지망생들에게 입단대회는 한판한판이 살얼음 위를 걷는 긴장의 연속이다. 일수불퇴의 바둑에서 한 수 삐끗해 나락으로 떨어진 경험을 입단지망생 누구나 한두 번은 가지고 있다.
필자가 항상 가장 감탄하는 바둑 격언은 ‘선작오십가자필패(先作五十家者必敗)’다. 50집을 먼저 짓는 사람이 진다는 뜻이다. 형세가 유리하게 되면 심리적으로 방심하게 되어 지기 쉽다는 것을 일깨우는 격언이다.
바둑에서 50집은 전국(全局)의 절반에 육박하는 거대한 땅이다. 이런 부동산 거부(巨富)가 종당엔 필히 망하게 돼 있다는 건 분명 악담인데, 대신 반상의 유랑민이나 무주택자들에겐 엄청난 위로가 된다. 우세할수록 마음의 이완을 경계하란 게 본래의 뜻이겠지만 아무튼 통쾌하다. 떵떵거리던 고관 또는 재벌 2세들의 급전직하 모습에서 선작오십가자의 교훈이 떠오른다. ‘필패’까지는 아니어도 ‘망신’은 충분했다. 이쯤 되면 바둑은 분명한 인생의 축소판이다.
남의 집이 커 보이면 바둑 진다
난데없는 시력(視力) 타령처럼 보이지만 승부에 임하는 자의 바람직한 자세를 포괄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정확한 형세 판단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충분히 둘만 한 형세임에도 몇 칸 안 되는 남의 집을 깨러 들어갔다가 몽땅 죽이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이 격언을 마주할 때면 갑자기 온몸에 힘이 쫙 빠지고 정신까지 혼미해져 온다. 내가 먼저 산 뒤 남을 죽이라니. 바둑용어가 아니었다면 무슨 조폭(組暴)들의 행동강령을 떠올리게 하는 격문(檄文)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바둑이란 게임은 상대를 멸(滅)하지 않으면 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무시로 발생한다. 아생연후 ‘살타(殺他)’ 대신 ‘봉타(奉他 남을 떠받들어 봉양하기)’는 종교 세계에서나 있을 꿈같은 일이다. 다시 한 번 원문을 읽어보자. 내가 일단 살아야 총이건 칼이건 손에 쥐고 상대를 요리할 수 있단다. 이 무서운 결의를 대체 무슨 수로 말리겠는가.
적의 급소는 나의 급소
한마디로 너무도 지당하신 지적이어서 격언이랄 것까지도 없어 보인다. 속세에서 일부 속물들은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란 행동강령 아래 움직이는데, 이것은 ‘나(我)’와 ‘적(敵)’이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대치할 경우를 말함이니 긴 말이 필요 없다.
내 무기고(武器庫)는 적에겐 최적의 공격목표이고, 적과 관련된 스캔들은 내입으로 폭로해야 직성이 풀릴 터이다. 제갈량이 형주(荊州)에 그토록 집착한 것은 그 땅이 위(魏)나라로 넘어갈 경우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댄 것만큼이나 위협적인 요충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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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잘못된 급소. 좌하귀 백을 잡기 위해 흑1로 궁도를 줄여가는 것은 백2로 쉽게 두집을 내고 살 수 있다. 2 적의 급소는 나의 급소: 백이 둬서 쉽게 살 수 있는 자리가 흑에게도 중요한 자리다. 흑1로 치중하면 백을 잡을 수 있다. |
대마에 가일수(加一手)
‘대마에 가일수(加一手)’도 음미할 가치가 충분하다. 잡은 대마에 또 한 수 메우는 것은 체면상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가일수에 인색한 사람일수록 ‘하수지수(下手指數)’가 높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 대마만 확실히 잡으면 끝난 바둑일 경우 고수들은 주저 없이 말뚝을 박는다. 시체에 대한 못질이요 확인 사살이지만 이것이야 말로 승리를 다지는 가장 확실하고도 현명한 수법이다. 야구 감독이 큰 점차로 이기고 있는데도 가장 아끼는 마무리 투수를 등판시키는 것은 바보라서가 아니다. 단, 가일수(加一手) 전략을 지하 방내기 바둑 세계에까지 들고 나오는 사람은 바보 맞다.
기자절야(棋者切也)
본격적으로 전문 바둑격언 탐험에 들어간다. 우선 기자절야(棋者切也). 바둑의 맛은 역시 끊음에 있다. 돌들이 양단되면 쫓고 쫓기는 공방 속에 무궁한 변화가 생성되고 박진감이 증폭된다. 이 격언은 승부에 도움을 준다는 다른 격언들과는 달리 대국에 임하는 바람직한 자세를 권하고 있다. 하긴 싸움 없는 집바둑처럼 싱거운 건 세상에 없다. 바둑 둘 때는 토지업자, 측량사, 경매상보다는 투사, 파이터, 용사(勇士)가 되라. 수백, 수천 년 전 선현이 이런 세밀한 부분에 대해 격언으로 남겼다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제19회 LG배 준결승1국 (백: 박정환 9단, 흑: 박영훈 9단)흑1로 막았을 때 백5로 단수치는 대신 백4, 6, 10 등으로 흑을 끊어가면서 앞을 알기 힘든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미생마는 동행하라’, ’단곤마는 몰지 마라’, ’양곤마를 만들지 마라’. 이 3개는 말만 다를 뿐 서로 일맥상통하는 동일 주제다. 적의 곤마(困馬)가 하나일 때 직선 공격을 가하는 것은 성공 확률이 매우 낮다. 하지만 두 개의 미생마가 뜨면 대마 하나가 잡히거나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단곤마도 홀로 떠다니면 피곤한데, 상대 곤마와 같이 움직이면 공동부담이 돼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진다.
상대가 강한 곳에선 가볍게 두라
불리한 곳에서 싸우지 않는 것이 싸움이 강한 비결이라는 김지석 9단. 2014년 말 삼성화재배를 우승하며 2년 만에 한국의 세계대회 무관 설움을 깨끗이 씻어 내렸다.
바둑 격언을 들추다 보면 너무도 당연하다고 무릎을 치면서도 막상 실행으로 옮기지 못한 것이 후회되는 작품들이 여럿 나온다. ‘상대가 강한 곳에선 가볍게 두라’, ‘내 세력 쪽으로 상대를 몰아라’ 따위가 그렇다.
아군 병력 수가 많은 곳에서 싸움을 벌여야 유리하다는 건 바둑 문외한도 아는 상식이다. 그럼에도 격언이란 말에 새삼 무릎을 치고 감격하는 우리의 행동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김지석 9단에게 얼마 전 우문을 날렸다. “김사범은 굉장히 싸움이 강한데 비결이 뭘까?” 미소에 실려 돌아온 현답은 이랬다. “저는 절대 불리한 곳에선 싸우지 않아요. 불리한 곳이란 내 병력이 적보다 적은 곳이죠.”
과감하게 버려라
‘과감하게 버려라’, ‘죽은 돌 끌고 다니지 마라’, ‘상대가 버리는 돌은 잡지마라’. 이 격언을 새삼 음미하고 실행하자. 이들 격언의 요체는 돌의 효율성이다. 100명이 넘는 내 병사들도 저마다 청운의 큰 뜻을 품고 태어나 곡절 끝에 내 바둑돌 통까지 왔을 텐데, 기껏 상대 폐석이나 잡고 생을 끝내게 만든다면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대업(大業)을 이루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러려면 지휘관인 내가 대소와 경중을 잘 가려야 한다. 병사들은 충직해서 비록 버림돌 역할이더라도 작전에 도움이 되면 기쁘게 바둑판을 떠난다. 아깝다고 질질 끌고 다니다 더 크게 죽인 사람, 상대가 버리는 쓰레기나 줍게 만든 지휘관은 자기 손을 거쳐간 기석(棋石)들을 위해 합동 위령제라도 지내줘야 한다.
고저장단을 맞춰 포진하라
바둑은 비주얼 측면에서도 훌륭한 예술적 가치를 품고 있다. 흑백의 돌들이 촘촘히 자리잡은 바둑판은 수(手)의 현묘함을 떠나 그 자체로 작품이다. 바둑은 또 수(手)의 축적 과정에서도 예술성을 추구한다.
‘고저장단을 맞춰 포진하라’, ‘자신의 돌들을 한쪽으로 쏠리게 하지 마라’, ‘중복을 피하라’…등이 그것이다. 3선과 4선을 병행함으로써 실리와 세력의 하모니를 이루는 모습은 유명 화가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 뺨치게 조형미가 넘친다. 흑백의 돌들이 어울려 움직이는 모습은 어떤 동영상보다도 역동적이다. 좌우동형의 중앙에 멋진 수가 많이 숨어있는 것은 바둑의 미학(美學) 속성과 무관치 않다.
고저장단. 백a와 b가 3선이므로 백3의 지킴은 4선으로 고저장단을 맞춰주는 것이 좋다. 한눈에 보기에도 균형과 조화가 잘 맞는 모양이다.
바둑은 병법(兵法)의 보고(寶庫)다. ‘요소(要所)를 선점하라’, ‘상대의 등 뒤를 밀어주지 마라’, ‘공격은 최선의 수비’, ‘상대 근거를 박탈하라’ 등 이런 구호들을 이 글 아닌 다른 칼럼에 나열했어도 이들을 바둑 격언으로 눈치 챘을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지 궁금하다. 모두가 일반 전쟁의 교범(敎範)들이기 때문이다.
‘쌈지뜨면 지나니 대해(大海)로 나가라’는 격언은 초중학생들 급훈으로 교실에 걸어놓아도 썩 어울릴 만한 작품이다. 헨리 키신저가 바둑을 ‘쉽사리 끝나지 않는 작전의 게임’이라고 갈파한데서 그의 깊은 성찰력이 확인된다. 14억 중국을 이끄는 시진핑도 방한해 이창호 앞에서 “바둑에 인생과 세계의 전략이 들어있다”고 천기(?)를 누설하지 않던가.
바둑인들의 바이블로 통하는 위기십결(圍棋十訣)은 아예 군대식 구호 일색이다. 부득탐승(不得貪勝), 사소취대(捨小就大), 신물경속(愼勿輕速), 기자쟁선(棄子爭先), 세고취화(勢孤取和)까지는 별 설명이 필요치 않다. 입계의완(入計宜緩, 적의 세력권에 들어갈 때 무모하게 서둘지 말라), 공피고아(功彼顧我, 적을 공격할 때 자신의 능력과 결점을 먼저 살펴라), 봉위수기(逢危須棄, 위험에 처할 경우 버려라), 동수상응(動須相應, 행마를 할 때 서로 유기적으로 전개하라), 피강자보(彼强自保, 주위의 적세가 강한 경우에 내 돌부터 보호하라)까지가 전체 내용이다. 하지만 위기십결은 너무 원론적이고 상식적이어서 오히려 바둑만의 격언으로서의 가치가 느껴지지 않는다. 일부 항목들은 내용마저 중복된다.
하수가 생각하는 시간은 노는 시간이다
바둑 격언 중 가장 해학적이고 유머러스한 격언일 것이다. 이 격언이 그냥 웃어넘길 목적으로만 만든 것은 아닌 것 같다. 접바둑을 관전할 때마다 정곡을 찔렀다고 감탄하게 만드는 격언이다.
바둑 7급은 7급까지의 수만 보이고, 3급은 3급까지의 수만 보인다. 7급이 2박3일 꼬박 잠 안 자고 다음 수를 연구한다고 해도 결코 3급 수준의 수가 보이지 않는 게 바둑이다. 그러니 우리 아마추어들은 대국 때 필요 이상의 장고로 상수의 체력과 인내력을 시험하는 결례를 피하도록 하자. 상수 입장에선 얼마나 답답하고 짜증이 나겠는가. 필자 역시 그런 경험이 없지 않다.
하지만 무턱대고 상수에게 주눅 들어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자는 뜻은 물론 아니다. 지나친 장고만 피하자는 뜻이지 근성과 투지는 최대한 발휘해야 옳다. 격언집에도 ‘바둑엔 져도 패(覇)엔 지지마라’는 격발(激發)성 조항이 등장한다.
물론 접바둑 아닌 맞바둑에서도 적용되는 주문이다. 패는 바둑게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형태로 무한한 영속성(永續性)이 본질이다. 바둑은 패배가 결정됐는데 작은 패싸움에선 이기란 주문은 어찌 보면 비웃음이나 조롱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패는 악착같이 이기자. 상대를 만약 질리게 만들 수 있다면 다음 판에 효과가 나타난다. ‘바둑엔 져도 패(覇)엔 지지마라’는 이런 이치가 담겨 있다.
바둑 격언의 8할 이상은 실전적 구호들이다. 인생교훈 겸용이 아닌 바둑 전문(專門), 예컨대 ‘붙이면 젖혀라’, ‘빈삼각은 두지 마라’, ‘두점머리는 두들겨라’, ‘날일자는 건너붙여라’, ‘넓은 쪽에서 걸쳐라’ 같은 것들이다. 물론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로선 외계어에 해당할 것이다. ‘빵때림30집’을 그들이 어찌 이해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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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빵때림 허용 말아야: 백1의 단수에 흑2로 살리는 것은 필수이다. 2 빵때림 30집: 흑2로 단수쳐서 흑 한점을 버리고 백a를 취하는 것은 좋지 않다. 백3으로 빵때림 한 백 모양의 위력이 커서 흑의 손해이기 때문. 당장 늘어난 백집은 별 것 없어 보이지만 상변과 중앙 방면으로 백이 집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에 백의 빵때림은 30집에 육박하는 가치를 가진다. |
이런 ‘전문용어’식 격언들은 바둑 애호가들에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금언들이다. 필자는 바둑 둘 때 거의 무조건 두점머리는 두들기고, 날일자는 건너붙여 왔는데 낭패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바둑 격언은 인생의 지혜에 보탬을 주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기술적 측면에서도 이토록 유용하다. ‘격언만 알아도 1급’이란 바둑 격언이 있다. 속는 셈치고 이 격언에 한 번쯤 매달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첫댓글 짧은 구절에 담긴 깊은 뜻에 인생을 담은 바둑의 격언과 명구을
공부 잘했습니다. 바둑은 두뇌싸움으로 전쟁이다.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되세요.^^*
오늘 또 꿈속에 바둑 두게 생겼네요 !
지고나면 밤새 그 바둑 다시 두ㅡ느라
바둑을 잊고 살았는디.....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