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인사를 보면 검찰출신, 이명박 정부관리가 대거 등장했다. 인사로 보면 그가 이야기하는 자유·인권·법치와는 거리가 멀다. 이동관 방통위원장을 임명함으로써 외통수 인사임을 쉬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윤 대통령이 임명 재가를 함으로써, 국회 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장관금 인사가 임명된 건 이번이 16번째이다. 그게 다 정치공학이다.
이명박 정부 말기 때 ‘죽은 권력’ ‘살아있는 권력이 많이 회자되었다. 대한민국 검찰 조직에서 자유·인권·법치를 찾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게 대한민국 검찰의 모습이다. 노무현 정부 말기이다. 박연차 회장은 “노무현 정권 시절 검찰 간부들과 유착관계에 있었으며, 검찰인사까지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라고 했다.(이명진·류정, 2009. 03. 23.) 그는 “대검 중수부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고검장급을 포함해 전․ 현직 검찰 간부 7명에게 돈을 줬다고 진술한 것은 이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한다.”라고 했다.
검찰은 ‘죽은 권력’에게는 용감했다. 그러나 ‘살아있는 권력’ 앞에서 검찰은 침묵했다. ‘검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박래용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2007년 8월 13일 검찰의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경선 후보의 도곡동 땅 브리핑이 그랬다. 김홍일(金洪一) 당시 서울중앙지검 3차장(현 대검 중수부장)은 도곡동 땅 차명의혹사건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문제의 땅 중 이상은 씨(이명박 대통령의 형) 지분은 이 씨 본인이 아닌 제3자의 차명재산인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라고 했다.(박래용, 2009. 12. 01)
박 위원은 “며칠 전 김 중수부장을 만났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제3자가 누굽니까. 검찰은 알고 있죠?’ 김 중수부장이 대답했다. ‘그 때 일은...하나도 기억이 안 납니다.’ 내가 웃었다. 그도 소리 내어 웃었다.”라고 했다.(박래용, 2009. 12. 01)
또 다른 검찰의 수사에 허점이 드러났다. 이명박 대통령과 관련된 BBK특검이 ‘삼청각 꼬리곰탕 값’으로 끝났다. 정호영(鄭鎬瑛) 특검팀은 “‘필요하다면 이 대통령 당선인을 소환조사하겠다. 이 당선인이 소환에 불응하는 사태는 오지 않길 바란다.’며 강력한 수사의지를 밝혔다.”라고 했다.
물론 그렇게 했다. 특검팀은 이 당선인을 삼청각 한정식집에서 꼬리곰탕을 먹으며 3시간 동안 조사하고 수사를 마무리 지었다. 특검팀은 이후 ‘특검이 규명한 것은 삼청각 꼬리곰탕 가격(3만2000원), 꼬리 하나 못 건진 수사‘라는 비판을 받았다.(조현철·장은교· 박영흠, 2008. 12. 29)
검찰은 이명박 정부에게 면허증을 준 것이다. 그 후 경향신문 기자는 “시사저널이 2009년 4월 7일 2007년 말 대선 직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형 건평 씨와 이상득 의원이 만나 ‘검찰의 BBK 수사’와 ‘노 대통령의 로열패밀리 보호’를 주고받는 ‘빅딜’을 벌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라고 보도했다.(장관순, 2009. 04. 09) 검찰의 양편을 가르고, ‘죽은 권력’(박진석, 2009. 04. 13)에 대해 냉혹하고, ‘살아있는 권력’의 칼날은 무뎌지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이상득 의원에 대한 ‘박연차 구하기’ 로비 의혹이 증폭되는데도 관련자 소환을 하지 않고 있고, 이명박 대통령 측근인 천신일 세종나모여행사 회장에 대한 수사도 전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박진석, 2009. 04. 13) 이명박 정권은 시작 때부터 국회, 검찰과 법원, 감사원, 국정원 등 정부 견제기관의 수난시대가 예고되었다. 한쪽은 밀어붙이고, 다른 쪽은 죽은 듯이 조용하였다. 견제기관은 균형을 잃게 되었고, 한쪽 방향으로 정국은 운영될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게 권력을 통한 권력의 사유화이다. 윤석열 정부가 이를 모를 이유가 없다. 그런 검찰출신을 잔뜩 기용하고 자유·인권·법치를 이야기한다. 그 다음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명박 맨이다. 그들은 뉴라이트 출신이다. 그들은 집권 내내 사유화를 공정성·객관화를 시키지 못했다. 즉, 이명박(李明博) 정부의 키워드는 ‘사유화(私有化)’이다. 자신의 ‘기호’(말)가 곧 국가의 정책이었다. 주관적 목적(subjektive Zwecke)을 객관화(Objektivierung)시키지 못함으로써, 처음부터 정부가 세운 ‘중도실용주의’가 난할을 겪었다. 그 대신 이명박 정부 이름도 사유화이다. 사적 소유의 강조는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모든 영역에서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빈자는 더욱 궁핍하게 되었다. 사회의 다양한 가치는 점점 자본과 권력에 의해 침식당했다.
사적 이익이 모든 사회영역을 지배했다. 사유화는 고정관념의 기득권의 보존으로 이전된다. 노무현 정부는 개혁을 ‘절제’로 가능하다고 봤는데 절제는 기득권 포기를 의미했다. 그런데 사유화는 절제는 뒤로 하고, 고정관념만 부추긴다.
이명박 정부가 고정관념만을 주장함으로써, 집권 3년이 지나도록 독자적인 정치논리를 바로 세우지 못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2011년 대통령 신년 연설에서조차 핵심은 또 다시 경제와 안보였다.(장덕진, 2011.01.06) 같은 칼럼에서 장덕진(張德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공공의 영역에 존재해야 할 권력이 스스로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사익의 영역인 경제논리만 반복하는 것은 시민을 위해서나 스스로를 위해서나 재앙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고정관념을 타파시킬 이념이 있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뉴 라이트의 힘을 얻어 정권을 얻게 되었다. 뉴 라이트 구성원은 “2004년 중반 이후 중도 보수성향의 지식인들이 제3의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으로서 ‘자유주의 연대’가 출범, 뉴 라이트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라고 한다.
뉴 라이트 구성원은 “80년대 주사파로 지칭되는 사회주의 성향 운동권에 몸담았다가 변신한 지식인들이 중심이되, 그들은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뉴라이트 싱크넷, 교과서 포럼,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 등과 뉴라이트 네트워크를 형성, ‘연대’조직으로서 활동 폭을 넓히게 된다. 2006년 4월 26일 뉴라이트운동의 싱크탱크로서 뉴라이트 재단을 설립, 서울대 명예교수이며 1980년대 운동권의 이론적 대부이자 좌파 경제학자였다가 시장경제학자로 변신, 안병직 이사장을 맡아 주도하게 되었다.”라고 했다(정대수, 상게서: 322)
그들은 한국정치의 우익보수 선회를 상징했지만, 그 실체는 뉴 라이트란 명칭이 시사하듯, 절충형이다. 다시 말해 뭔가 다른 우익이었고 좀 모호한 보수이다.(홍준형, 2009. 08. 11) 노무현 전 대통령 세력이 운동권 좌익이라면, 뉴 라이트는 운동권 우익이다.
‘
강부자’와 ‘고소영’ 정부의 오명을 뒤집어쓰면서도 그 기조를 굽히지 않고, 운동권 논리로 정부를 운영했다. 이것은 이명박 정부의 민생 캠페인을 벌이며 ‘중도실용’을 내세운 것과 같은 논리이다. 물론 그에게 필요한 명제는 중도실용과 친서민 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쌓는 일이었을 것이다.
중도실용주의가 갑자기 등장한 이유가 설명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이후 이 대통령은 낮은 지지율로 고민해야 했다. 특히 광우병 정국 이후 이명박 대통령은 10%대까지 지지율의 추락을 경험해야 했다. 하지만 중도실용정책을 포방하며 친서민 정책을 가시화하자 상황은 변화하기 시작했다.(신율, 2010: 70) 예를 들어 대학생들의 학자금 대출 상환기간을 25년으로 대폭 늘리고, 서민들을 위한 대출기관인 미소금융 설립 등 친서민 행보가 본격화되자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40%를 훌쩍 넘어 50%대까지 다다르게 된 것이다.
국가의 이익이 개인으로 흘러들었다. 돈으로 정부는 친서민 정책을 편 것이고, ‘퍼주기’ 정책을 고수했다. 더욱이 한 칼럼은 “이 대통령의 실용주의는 “경험을 앞세운 실용주의가 ‘일사분란’과 결합하면 ‘잘못된 만난’ 된다. 지도자가 그렇게 하면 전횡이 된다. 제 시각만 강요해 자신의 복사판만 양산한다.”라고 했다.(여현호, 2008. 03. 14) 그의 실용주의, 친서민 정책에 절제가 있었던 정책이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은 이명박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인사스타일이 전혀 달랐다. 철지난 실패한 인사를 국민들에게 내 놓지 않은 것이다. 밀어 붙인다고 능사는 아니다. 국회는 개혁을 해야 하지만, 있는 동안은 국회를 설득해야 한다. 원래 궁즉통이 맞는 말이다. 그게 박 대통령의 색깔이고, 신의 한 수이다.
중앙SUNDAY 신동식 인터뷰 기사(2023.08.26.), 〈박정희는 왜 '경제 모르는' 엔지니어를 경제수석 임명했나〉, 그는 신의 한수를 둔 것이다. “1965년 5월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린든 존슨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국빈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미국 체류중이던 조선 전문가 신동식을 불러 독대했다. 그는 서른 세 살의 젊은 엔지니어에게 “함께 대한민국 조선을 키우고 나아가 한국 경제를 살리자”고 설득했다. 신 회장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선급협회(ABS)에서 검사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5·16 직후 대한조선공사 기술고문과 경제기획원 장관 고문으로 2년간 일하다 더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한지 2년이 지난 때였다...경제를 모르는 경제수석, 그것도 신설된 대한민국의 초대 경제수석 자리는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탄생했다. 외자 유치를 통한 산업화가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지상 과제로 믿었던 박 대통령의 결단이었다. 66년 경제수석 임명장을 받은 신 회장은 중장기 과제를 고민했다. 당시의 1차산업과 경공업 중심의 경제 구조로는 장기적 발전이 어렵다고 봤다. 고용과 기술 축적, 수출 증진 등의 시너지를 달성하려면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재편이 필요했다. 당시 내수용 경공업은 처음부터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고품질 제품을 생산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신 회장은 중화학공업 중에서도 조선을 주목했다. 자신의 전문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