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이배사(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까페에서 이것저것 뒤져보다가...조방장 배즙(배설 장군 후손)이란 닉네임을 쓰는 분의 덧글(칠전도해전과 원균의 책임에 대한 )을 보고 선조실록을 클릭해서 뒤져보았다.아랫글을 보면 선조는 원균의 칠전도 해전의 패전 원인이 절영도를 지나서 부산포 앞바다로 무리한 출병을 강요한 도원수 권율 때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이것이 나중에 8월5일자 선조실록에 도원수 권율이 따로 조사하여 올린 장계에서는 배설과 배흥립이 패전의 책임이 있다고 나온다.
아래 8.5일자 기사에서 보듯이 당시 배설은 경상우수사로서 바다에서 12척의 배를 갖고 왜적의 추적을 피해서 여기저기를 옮겨다니고 있었다. 원균의 부대가 칠전도해전에서 전멸하자 한산도 운주당(제승당은 원래 운주당이었다)으로 가서 피난중의 백성들을 안전한 곳으로 소개하고 실을 수 있는 병장기와 식량등을 배에 실은 후 청야작전淸野作戰을 펴서 한산도 해영을 왜군이 못쓰도록 작전을 실행했다.그리고 이순신은 당시 백의종군상태였으므로 다음 수군지휘자(심도수군통제사)는 자신이 될 것으로 생각도 하였으리라(추측).그래서 이순신 장군에게 12척을 인수해줄 때도 교서에 숙배도 않았으리라(추측)
바다가운데 있는 수군지휘자에게 책임을 지워 도륙낼 (군율을 시행)생각들을 했다니(8.5일자 기사)...필자의 마음에도 만약 당시에 같은 경우를 당했다면 ...전쟁(책임을 다하여 전투에 임할)할 마음 안생기겠다.
나중에 난이 평정된 후 배설은 권율에 의해 붙잡혀 군율이 시행되지만 ,나중에 선조는 잘못된 것을 알고 선무원종공신에 책록하고 관작을 복권시켜 준다. 필자가 보기에 배설 장군은 12척의 판옥선을 보존한 공은 있어도 패전에 대한 책임은 없다고 본다.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다지만 참으로 안타깝다!
군에서도 작전의 실패는 있다.작전의 실패는 용서하지만,경계의 실패는 사형이라고 알고 있다.6.25 때 남침을 당했다고 장군들 20명을 처단했다면 여러분과 필자는 현재 인터넷을 할 시간과 자유도 없겠고,전 세계를 적화시킬려는 혁명의 전위도구로 활동하고 있지 않을까?
서울과 임진강,한강이 뚫리고 있을 때 춘천에 있던 6사단의 김종오장군(다른 부대는 비상경계를 해제하고 병사들을 휴가보내고 외출보낼 때 6사단의 김종오사단장만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과 포병대는 춘천시민과 학생들의 도움으로 포탄을 옮기고 작전에 도움을 받았고, 김용배장군(당시 대대장)과 심일소령(당시 소위.혼자서 적 자주포 2대와 탱크한대를 박살냈다)등의 활약으로 3일간 춘천전투를 승리로 이끌엇고 ,결국 낙동강 방어선을 펼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낙동강 방어선을 펼 시간을 벌었기에 미군과 UN군이 부산에 상륙할 시간을 벌어준 6사단과 포병대 ,춘천시민들의 피땀흘린 '춘천대첩'에 그래서 필자는 감동하는 것이다.
원균의 죄는 칠전도에서 전초나 보초를 두지 않은 것이다.경계에 실패햇기 때문에 죄과를 물을 수 있다.하여간 리더십의 문제다.같은 조건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리더십을 발휘하여 난국을 타개했으리라.
아래 자료중 칠병포만 쏘았다고 하는데,과연 칠병포는 무엇일까?왜 역사학자들과 군사전문가들은 이것을 추적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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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597 .7.22 세번째 기사
상이 별전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행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우의정 김응남(金應南), 행 지중추부사 정탁(鄭琢), 행 형조 판서 김명원(金命元),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병조 참판 유영경(柳永慶), 행 상호군 노직(盧稷), 좌승지 정광적(鄭光績), 주서 박승업(朴承業), 가주서 이성(李惺), 검열 임수정(任守正), 이필영(李必榮)이 입시하였다. 상이 김식(金軾)의 서계를 대신들에게 내보이면서 이르기를,
“주사(舟師)가 전군이 대패하였으니 이제는 어찌 할 도리가 없다. 대신이 도독과 안찰(按察)의 아문에 가서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충청과 전라 두 도에 남은 배가 있는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핑계만 대고 그대로 둘 수 있는가. 지금으로서는 남은 배로 수습하여 방어할 계책을 세우는 길뿐이다.”
하였다. 좌우가 모두 한 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니, 상이 소리 높여 이르기를,
“대신들은 어찌하여 대답하지 않는가? 이대로 방치한 채 아무런 방책도 세우지 않을 셈인가? 대답을 않는다고 왜적이 물러나고 군사가 무사하게 될 것인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감히 대답을 드리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고 너무도 민박한 나머지 계책을 생각지 못하여 미처 주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사 전군이 대패한 것은 천운이니 어찌하겠는가. 원균은 죽었더라도 어찌 사람이 없겠는가. 다만 각도의 배를 수습하여 속히 방비해야 할 뿐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척후병도 설치하지 않았단 말인가? 왜 후퇴하여 한산(閑山)이라도 지키지 못했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한산에 거의 이르러서 칠천도(七川島)에 도달했을 때가 밤 2경이었는데 왜적은 어둠을 이용하여 잠입하였다가 불의에 방포하여 우리 전선 4척을 불태우니 너무도 창졸간이라 추격하여 포획하지도 못하였고,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에는 이미 적선이 사면으로 포위하여 아군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육지에 내려보니 왜적이 먼저 하륙하여 이미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사는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산을 고수하여 호표(虎豹)가 버티고 있는 듯한 형세를 만들었어야 했는데도 반드시 출병을 독촉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말해도 소용이 없지만 어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방치한 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은 배만이라도 수습하여 양호(兩湖) 지방을 방수(防守)해야 한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통제사와 수사(水使)를 차출하여 계책을 세워 방수하게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하고, 또 이르기를,
“적의 수가 매우 많았으니 당초에 풍파에 쓸려 죽었다는 설은 헛소리였다.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한산으로 후퇴했더라면 형세가 극히 좋고 막아 지키기에도 편리하였을 것인데 이런 요새를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니 매우 잘못된 계책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絶影島) 앞바다에는 나가기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전에도 말했거니와 저 왜적들이 6년간을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한 장의 을 받기 위해서였겠는가. 대체로 적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크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포와 화전(火箭)도 배에 싣고 왔는가?”
“이는 알 수 없고 김식(金軾)의 말에 의하면 왜적이 우리 배에 접근하여 올라오자 우리 장사들은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패몰되었다고 합니다.”
“아군은 칠병포(七柄砲)만을 쏘았다고 하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수길(平秀吉)이 항상 말하기를 ‘먼저 주사를 격파한 다음에야 육군을 노획할 수 있다.’고 했다 하더니 이제 과연 그렇게 되었다.”
“9일의 싸움에서는 군졸들이 겁을 먹어 화살 하나도 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미 지난 일을 논의하면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일변으로 통제사를 차출하여 남은 배를 수습하면서 일변으로는 도독부에 알리고, 또 일변으로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해야 할 것이다.”
“전군이 모두 패몰되었는가, 혹 도망하여 살아남은 자도 있는가?”
“넓은 바다라면 패전하였더라도 혹 도망하여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렇지 않아 비좁은 지역에 정박하였다가 갑자기 적선을 만나 궁지에 몰려 하륙하였으니 대체로 전군이 패몰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해도(海圖)를 살펴보며 항복에게 가리켜 보이면서 이르기를,
“후퇴해 나올 때, 견내량(見乃梁)에 이르기 전에 고성에서 적병을 만나 이와 같이 패배를 당했단 말인가? 저쪽을 경유하였다면 한산으로 쉽게 퇴진하였을 것인데 이곳을 경유하여 패배를 당하였는가?”
“그렇습니다.”
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한산을 잃는다면 남해는 요충지대인데 지금 이곳도 필시 적의 점거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도 남해를 근심하고 있는가?”
하자, 성룡이 아뢰기를,
“어찌 남해만 근심이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어찌 사람의 지혜만 잘못이겠는가. 천명이니 어찌하겠는가.”
“장수를 보낸다면 누가 적임자가 되겠습니까?”
“오늘날의 할 일은 단지 적절한 인재 선발에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균은 처음부터 가려고 하지 않았으나 남이공의 말을 들으면 배설도 ‘비록 군법에 의하여 나 홀로 죽음을 당할지언정 군졸들을 어떻게 사지에 들여 보내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대체로 모든 일은 사세를 살펴보고 시행하되 요해처는 고수해야 옳은 것이다. 이번 일은 도원수가 원균을 독촉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패배가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지금까지 적세를 알지 못하고 입으로만 늘 당병(唐兵) 당병이라고 하였는데, 만약 왜적이 움직인다면 수천에 불과한 중국 군사가 방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반드시 나를 겁장이라 여겨 그들의 조소를 받을 것이나 마 도독의 군사는 만 명도 채 못 되고 양원(楊元)의 군사도 3천 명 정도이니 어떻게 남원을 지킬 수 있겠는가. 만약 적이 돌아서 호남 연해에 정박한다면 남원 지방 정도는 마치 큰길 가운데 손가마를 놓아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양원이 홀로 방어할 수 있겠는가. 만약 중국의 군사가 많이 집결되면 서로(西路)는 그런대로 보존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하삼도(下三道)는 수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왜적이 혹 광양·순천으로 향하면 양원이 혼자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지금은 중국의 군사를 믿을 만하지 못하니, 마땅히 남은 배로 강화(江華) 등지를 수비해야 합니다.”
“비록 잔여 선박이 있다 하더라도 군졸을 충당하기가 어려우니 아직은 통제사를 차출하지 말고 각도의 수사로 하여금 우선 그 지방의 군졸을 수습하여 각기 지방을 지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산동(山東)의 수군이 나온다 하더라도 풍랑이 점점 높아질 때이니 그들이 반드시 온다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군이 온다 해도 왜적이 어찌 두려워할 리가 있겠는가. 많은 사람이, 중국군이 나오기만 하면 왜군은 저절로 물러갈 것이라 하지만 이 말은 틀린 말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한담을 아무리 늘어놓는다 해도 국가의 성패에는 도움이 안 된다. 대신이 먼저 도독과 안찰에게 가서 알리는 한편 일변으로 주사(舟師)를 수습해야지 그밖에 다른 선책은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말이 지나친 염려인 듯하지만, 중국 장수들은 늘 우리 주사를 믿는다고 했는데 지금 이같은 패보를 들으면 혹 물러갈 염려가 있으니, 만약 그렇게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마도 경솔하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산은 왜적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외로운 군사로는 지킬 수 없을 것이니 조금 후퇴하여 전라우도를 지키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그렇게 하면 결국 남해를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확실히 알지는 못하나 지금 주사가 패몰되었다는 소문이 전파되었다면 남방 인심이 이미 놀라 흔들릴 것이니 다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아무런 계책도 세우지 않을 것인가. 어찌 죽기만을 기다리고 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지 ‘민박’ 두 글자만 부르짖는다고 왜적이 물러나 도망하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남해와 진도를 지키다가 감당하지 못하면 물러나서 다른 요새지를 택하여 지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위로 중국이 있으니 왜적의 소유가 될 리는 없다. 그러하니 모든 일에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8책 90권 14장 B면
【영인본】 23책 267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