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베트남에 들어 오기 시작한 시기는 1986 년에 도이 머이(쇄신. 바꾸자)라는 정책을 내 놓은
1990 년 부터 본격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부터 한국에서 도저히 버티기 힘든 열악한 작은 기업들이 들어 오기 시작했다. 섬유업. 염색업. 봉제업 등이 경쟁하듯이 베트남에 들어 왔다. 지금은 동창들도 다 알고 있겠지만 삼성을 비롯한 대 기업들이 많이 들어와 베트남 경제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러다보니 우리 교민들도 하루가 다르게 숫자가 늘었다. 하노이. 다낭. 사이공에는 한인타운도 생겼다. 하기야 사업과는 관련이 없는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코로나 발생 전 교민 수가 20 여 만 명 쯤 되리라 본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기업인, 주재원 외에는 거의 귀국하여 반 이상 줄어 들었다. 다낭 같은 경우는 관광지역이라 2-3 백명도 안 남은 것 같다.
달랏에는 Package 관광이 시작되기 전 까지는 우리 한국인 발길이 다른 지역에 비해 뜸한 곳이었다.
한국식당 2 개. 피자(스파게티. 떡뽁이)식당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달랏에는 골프장이 두 곳인데 그 골프장 손님을 상대로 한 장사라 겨우 겨우 장사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작년 봄 부터 한국 단체관광 바람이 불면서 식당. 마사지. 한인 호텔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는 식당 13. 마사지 2. 호텔 3. 이발소 1.
특히 이발소는 간판 등 모든 준비를 끝내고 주인이 잠시 한국 간 사이에 코로나 사태로 베트남에 오지도 못하고 있다. 이발소는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 제 2 별장 정문 쪽 바로 아래에 있는 데 나는 지나칠 때마다 쳐다 보고는 한다. 그 지역은 소나무가 울창하며 아주 조용한 지역이다. 길을 가다 대형버스 앞 부분에 한글로 가이드 이름. 여행사 이름을 표기한 안내판이 눈에 들어 오면 괜히 반갑기도 했다. 초 저녁이면 한국 식당 앞에 광관버스 1-2 대가 정차해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어떤 때는 같이 어울려 한 잔 하고픈 마음도 든다.
그런데 지금은 피자 ( 베트남인 상대- 장사가 잘 됨.) 점. 식당 2곳 외는 몇 달째 폐점 상태다. 어느 식당은 아예 간판을 내리고 베트남 간판으로 바뀌었다. 한창 장사가 될 무렵에 벼락을 맞고 귀국하고 말았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극 소수만 남아서 앞을 내다 보고 힘든 날을 보내고 있다. 좀 살아 보려고 먼 낮선 곳 까지 왔는 데 나도 마음이 착잡함을 지을 수가 없다. 코로나인지 카로나인지 하루 빨리 떠나 주기를 바랄 뿐이다.
첫댓글 이제 이나이에 돌이켜 보면 내일 죽을지 모르면서 인생전부를 걸고 살아온 인생이 아니던가~~
한국에서 경쟁에서 밀려 살아보려고 낮선 베트남 그곳까지가서 형편상 패업하고 물러서는
그사람들의 마음을 위로 하고 싶다
나는 이제 모든걸 접고 집에 있는지 이제 4년
미국에 이민한지 올해로 만 40년
이민와 첨 학교다니며 공부하던 3년을 빼고는 참 열심히 살아왔다
Aircraft Hydroforming에서 4년 더글러스 아파치 헬리콥터 생산라인에서 6년
그리고 Liquor Store에서 23년을 나름되로 잘 살아온것 같다
큰돈은 벌지 못했지만 사나이로서 한국인으로서 자존심 꺽지 않고 살아온것을
그나마 큰위로로 삼고 살아왔다.
" 마음이 착찹함을 지울 수가 없다. "
이 곳이나 그 곳에서나 살아 가는 길, 어느 누가 마음 깝깝. 답답. 착찹함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
민철씨가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듯 슬슬 써 내려가는 글을 몇차례 읽으면서 학창시설 글짓기 점수는 A++ 틀림이 없을 터.(이야기할매)
두드려도 앞 문이 꽉 막힌 벽이면, 뒤돌아 뒷문으로,,,,,앞 문을 막으면 뒷 문은 꼭 열어 준다고하더이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