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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8 시간은 언제나 앞을 향해 흐르는 법.
“그때 ‘그래야 피리아씨 답죠.’라뇨. 대체 그동안 절 어떻게 보셨던 거에요?”
“그야 당연히 다혈질에 폭력 드래곤으로…”
“뭘 보시고 그런 소릴 하시는 거냐니까요?!”
꼬리가 삐죽 올라오고, 모닝스타마저 서서히 부상하는 피리아의 외침에 제로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바로 그거 아닙니까.’라는 입모양을 했다.
“아, 차 한잔 더 주시겠어요, 피리아씨?”
“벌써 다 마신 거에요?”
피리아는 아까의 외침은 다 잊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선 부엌에 따뜻하게 해둔 차포트를 가져온다.
“이 차를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찻잎이 좋아서죠. 아, 물론 피리아씨 실력도 좋아졌고요.”
장난기 있게 웃으며 덧붙이는 제로스의 말에 피리아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잔에도 차를 더 따른다.
“그거 아십니까, 피리아씨? 그때 그 말을 하고서야 저에게 처음으로 웃어주셨다는 거.”
“그동안 당신이 계속 놀래대기만 했었잖아요.”
“그러는 피리아씨는요. 처음 단 둘이 있게 됐을 때, ‘부엌 쓰레기’라며 말뚝박고 철조망을 두른 뒤 도망가시질 않나…”
호르륵 차를 마시며 제로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장면은 벌써 삼 년 전 일인데도 너무나 명확하게 제로스의 기억에 박혀있던 것이다.
“그…그건 아까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그런 캐캐묵은 얘기는 하지 말자고요.”
“‘그런 캐캐묵은 얘기’로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던 드래곤은 누구더라요?”
“……그게… 당신이 너무 풀이 죽어있으니 그런 거잖아요. 솔직히 그땐 정말 싫었는데…”
피리아는 마지막의 문장을 스스로에게 작게 웅얼거리며 차를 마셨다.
“흠… 지금 생각해보면 저도 그때는 싫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로스의 말에 피리아는 눈이 동그래져서 제로스를 쳐다본다.
“말을 할 때마다 신경을 건드리시질 않나, 부엌 쓰레기니 얼음 마왕 말단 부하니 같은 소리만 하시는데 기분 좋을 리가 없잖습니까.”
생글생글 웃으면서 제로스가 비꼬듯 말하자 피리아의 볼은 부어오른다.
“하하, 또 그렇게 쉽게 삐지시는 건가요?”
“첫 인상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는데 기분 좋을 리가 있나요?”
피리아가 고개를 돌리고 통통하게 부어오른 볼만 보여주자 제로스는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서 피리아에게로 다가간다.
허리를 숙여 이마에 키스를 해주고는 얼굴이 붉어진 피리아를 보며 입을 연다.
“저 같은 마족에는 ‘싫어한다’는 감정도 생소한 거였다고요. 그게 그렇게 쉽게 ‘사랑한다’로 넘어갈 줄은 저도 몰랐지 뭡니까.”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 제로스의 말에 피리아의 얼굴은 살짝 더 붉어졌다.
“저…저도…”
“네?”
“저도…그렇다고요.”
붉어질 대로 붉어지면서 고개를 푹 숙이는 피리아의 말에 제로스는 이번엔 피리아의 눈가에 키스를 해주었다.
그러자 피리아는 여전히 쑥쓰러웠는지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찾는 듯 당황해 하다가 결국 창가에 시선이 머무른다.
그녀가 하룻밤 내내 시선을 피해왔던 곳이었기에 오히려 더 눈을 못 떼는 것 같았다.
“벌써 날이… 밝았네요.”
한숨을 쉬듯 말하는 피리아.
전날 저녁부터 오늘 아침 일을 잊기 위해 밤 새워 옛날이야기만 했던 것도 차차 시야가 밝아지면서 효력을 잃어갔다.
아직 아침이 아니라고 믿으려 해봤자 창을 통해 줄기차게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과 이미 산중턱까지 올라온 태양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여전히… 마음을 안 바꾸시겠습니까?”
제로스의 물음에 피리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던 루사도 그냥 놔두고, 바르가브 알까지도 내버려둔 채 그렇게 가시고 싶으십니까?”
“루사는 여기 있으면 괜찮을 거에요.”
‘당신이 기억을 잃으면… 마족이 이곳에 들어올 수 없을 테니까…’
[결계를 넘어갈 수 있는 주문을 듣는 특정 존재에게 통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레이오스씨가 말한 것을 기억해낸 피리아는 특정 존재의 ‘이름’이나 그 주문을 ‘들었다’는 사실이 주문의 결정 요소라는 것을 되새겼다.
그렇다면 둘 중 한 가지가 없는 걸로도 결계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제로스가 그 주문을 들었을 당시의 기억도 사라진다는 가정 하에 피리아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바르가브의 알도 른씨한테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으니까… 루사가 소식을 전하면 돌봐주시겠죠.”
“아니, ‘른씨’는 돌봐주실 거라 믿으시면서 저에겐 부탁도 안 하십니다.”
제로스에겐 금기어인 ‘른’이란 이름이 나오자 제로스는 단박에 삐져선 툴툴댄다.
“당신께 바르가브를 부탁했다간 마족으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지금 부탁해도 잊어버릴 거니까…’
조용히 생각을 정리한 뒤 말하는 피리아였다.
“마족을 사랑하시면서 마족으로 만드는 게 싫으시다니 모순이군요.”
“이제 슬픈 기억을 잊고 용족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텐데 다시 나쁜 일을 기억나게 할 필요는 없다고요.”
“마족으로써 새 인생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이제는 놀리는 투가 역력한 제로스의 말에 피리아는 눈살을 찌푸린다.
“계속 그러시면 저 화낼 거에요!”
이미 화가 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삐져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제로스는 슬프게 웃는다.
“차라리… 화를 내시고… 계속 여기 계시면 안 되겠습니까?”
피리아를 꼭 껴안으며 부탁조로 말하는 제로스.
“왜… 왜 그렇게 포기를 못해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그러고 몇 분이 흘렀을까…
피리아가 조용히 품속에서 나와 까치발을 들고 살며시 제로스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춘다.
피리아 쪽에서 키스를 해온 건 처음이었기에 크게 떠진 제로스의 두 눈은 아쉬운 듯 여운을 남기고 뒤로 물러서는 피리아의 모습을 담았다.
밝게 웃는 웃음 끝에 눈물을 한 방울씩 달고 그에게 손을 내미는 피리아.
“자~ 이제… 가요.”
“……네.”
‘…… 그것이 정말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당신의 최후까지… 같이 있어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내민 손을 굳게 잡고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 슈우욱.
“이제야 왔나.”
텔레포트로 이동해오자마자 커다란 궁 안에 냉랭한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네… 데리고… 왔습니다. 수왕님.”
제로스가 상석에 앉은 여인에게 고개를 조아린다.
“와~아. 여기가 수왕궁이에요?”
“루사!!!”
뜬금없이 뒤쪽에서 나오는 감상에 제로스와 피리아는 놀라 동시에 합창했다.
“어떻게 온 거에요?”
피리아의 물음에 루사는 태연하게 피리아의 옷자락을 붙잡은 한 손을 보여준다.
예전에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유유히 그들을 따라온 루사는 빙긋 웃는다.
“언제부터 거기에 계셨습니까?”
이제까지 피리아에 관련된 문제에만 집중하다가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한 제로스가 땀방울을 뒤통수에 달며 묻는다.
“른 아저씨 얘기할 때부터일 거에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는 루사.
언제나 힘을 봉인해오다보니 ‘인간’이란 존재감마저 손쉽게 지워버린 루사는 태연하게 그 둘 옆에서 인기척 없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제 제가 루사는 여기에 오면 안 된다고 말했잖아요.”
피리아가 무릎을 굽히며 루사에게 눈을 맞추고 타이르듯 말하자 루사는 고개를 숙이고 발끝으로 땅을 톡톡 찬다.
원하는 게 있을 때 하는 루사 특유의 행동.
“하지만… 엄마, 아빠가 선택한 걸 저도 보고 싶었단 말에요.”
“그럼 그렇게 해줄까~”
싸늘하지만 밝은 제라스의 목소리가 들리고 손가락을 탁 튕김과 동시에 루사는 동그란 공 안에 갇혀 두둥실 떠올랐다.
“루사!!!”
피리아가 놀라서 불렀지만 루사의 목소리는 공 밖으로 나가지 않는지 공바닥에 쭈그려 앉아 자신들을 보는 루사의 입이 움직이는 것만을 볼 수 있었다.
“방해꾼이 있어서 늦어졌지만… 제로스. 저 아이를 죽이도록.”
예상했던 명령.
하지만 제로스가 이를 꽉 물고 피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에 역시 미세하게 떨고 있었지만 자신은 괜찮다는 듯 웃는 피리아의 모습에 제로스의 입에선 한숨 섞인 답이 새어 나왔다.
“네… 수왕님.”
서서히 커지는 검은 마력구를 생성하는 제로스.
석장으로 찌르거나 검은 송곳을 이동시켜 명령을 시행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금방 끝내고 싶지 않다는…
조금이라도 더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아두고 싶다는 소망이 담긴 행동이었다.
「이렇게… 제 고집만 부려서 미안해요.」
『이렇게… 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더 오래… 같이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더 오래… 당신을 소중히 여기고 싶었는데…』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당신만을…』
「사랑할 거에요.」
『사랑하겠습니다.』
「당신이 기억을 잃더라도 제가 기억할게요. 제가… 간직하고 갈게요.」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로 인해 당신이 살라고 했던 제가 소멸하더라도…』
「이제 곧 당신과 이별할테니…」
『이제 곧 당신을 보내드릴테니…』
「마지막으로… 웃어줄래요.」
『마지막으로… 웃어주시겠습니까.』
제로스의 손에 생성된 거대한 마력구에도 아랑곳 않고 그 둘은 동시에 웃었다.
그것을 신호로, 한사람(?)을 처리하기엔 지나치게 큰 마력구는 제로스의 손을 떠났고 서서히 피리아를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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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번 편이랑 저번 편은 쓰면서 중학교때 도덕 숙제가 생각났습니다;;
만약 다음 날 죽는다면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주로 그런거는 '평소처럼 보낸다'랑 '추억을 회상한다'같은 게 주를 이루잖아요ㅎㅎㅎ
그리고........
이번 편 예전에 써논 걸 보면서 옮기는데....
'이건 내가 썼을 리가 없어!!!!!!'라고 절규를 했다죠;;
닭살 돋아서 완전 닭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여름에 썼었다면 냉방 효과라도 있었을 텐데...ㅠㅠ
게다가 연애 경험이라곤 눈꼽빼기도 없는 인간이 썼다는게....
무지나게 찔리네요 ^^;;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시길~
아~
저 삽화는 다음 카페에서 '레오니스'님께서 그리신 걸 보고 '앗! 저거다!'라고 외치며
'결혼식'에서 멈추려고 했던 후속편을 올리는데 불타올랐다는 걸.....
지금에와서야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후회가 늦는 인간;;;;)
마지막 부분은 마력구 생성되는 동안 피리아와 제로스가 하는 생각인데요.
머릿속에서 상상한 영상만큼 묘사가 안 되더라고요~(퍽!)
다른 사람(?)이 하는 생각이 저렇게 비슷한건.....
그냥 쟤네니까 그러려니 해주세요~(염치없다;;)
ps. 방화든 합선이든 어의없는(제가 보기엔;;) 이유로
불에 희생당해 무너지고 있는 남대문(혹은 숭례문)에게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부디 극락왕생하기를....(응?)
첫댓글 흑흑........... 슬퍼서 우는거라기보다 온몸에 닭살이 돋아서 가려워서, 솔로의 염장을 자꾸 질러서 미칠거같아 울고 있어요....;; 이것들아, 닭털 그만날려!! 난 동물 터래기에 알레르기가 있단말이다~!!!!!!!!!!!! ㅠ.ㅠ
ㅋㅋㅋㅋ 저도... 써놓고 후회했어요.... 닭살땜에 얼어죽는 줄...(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