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노동을 사회적 과정으로 보고, 자본을 노동의 역사로 봤다. 결국 노동의 착취로 인하여 사회적 과정에서 불평등이 생기고, 자본가가 생겼다. 그에 의하면 자본가는 절대적 착취로 노동 시간을 늘리고, 노동강도를 높여 상대적 착취를 강화시킨다. 그렇다면 자본가에게 시간의 중요성은 기업의 승패를 좌우한다. 폭력과 테러 수준의 국정운영을 일삼은 문재인은 주 52시간 노동제로 묶었다. 국가사회주의가 자본가 대신으로 들어선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악으로 본 것이지만, 그것도 잘 개선하면 북한과 같은 국가 사회주의보다는 백배, 천배 젊은 청춘들에게 이롭다.
국회가 동조하고, 법원이 이를 통해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그렇다면 법원의 권한을 뺴앗은 것은 이젠 좋은 파운드리 반도체를 만들어 1948년 7월 이후 법원이 판결을 한 내용을 전부 데이터 베이스화하여, 전 국민에게 보급하면 법원도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법복 입은 청부업자’가 운신의 폭이 좁아지게 마련이다.
법조의 권력이 하늘을 찌른다. 조선일보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2023.10.09.), 〈법치 국가 판사들은 한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기자는 기사로 말하고, 학자는 논문으로 말하고,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 기자의 기사는 데스크가 검토하고, 학자의 논문은 동료 심사를 거치지만 판사의 판결문은 사전 검증 절차가 없다. 오보를 낸 기자는 소송당하고, 자료를 조작한 학자는 매장당하는데, 잘못된 판결문을 쓴 판사는 사후 처벌을 받지 않는다. 모든 문명국 재판은 3심제로 운영되나 상급심 판결로 하급심의 오류가 드러나도 판사는 문책당하지 않는다. 헌법은 판사들에게만 왜 그토록 커다란 특권을 보장하는가? 판사들이 고귀한 선민(選民)이거나 특출한 인재라서가 아니다. 단지 그들이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해야 하는 막중한 사법의 책무를 지기 때문이다. 만약 판사가 그 막중한 책무를 저버리고 법의 정신에 반하는 부당한 판결을 내놓는다면,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은 어떻게 법관의 독재에 맞설 것인가? 불과 몇 년 전 법원은 전직 대통령 두 명을 위시한 고위 공직자들을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며 무더기로 구속했다. 당시 영장판사들이 휘두른 법의 칼날은 사무라이 진검보다도 서슬이 퍼렜다. 무죄 추정이나 불구속 재판 원칙은 거론되지도 않았다. 법원은 전직 대통령을 잡아넣고선 반년 후 다시 반년 구속을 연장했고, 매주 4차례씩 공판을 이어갔다. 그랬던 법원이 특대형 비리 혐의에 휘말려 제 입으로 50년 형을 운운하는 야당 대표를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며 풀어주었다. 피의자가 경기도지사 당시 위증을 교사한 혐의는 이미 소명됐다면서도 동일 인물이 야당 대표 신분이라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판사의 결정문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법치 국가 사법부의 모든 결정은 형평성과 일관성을 갖춰야 한다. 어느 사회나 법의 생명은 진실성(integrity)에 있다...지난 6년간 특정 정치 세력에 장악된 대법원이 스스로 사법 독립을 포기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대법원장은 파벌의 수장처럼 처신했고, 법관들은 편파적 판결을 남발해서 여론의 뭇매를 맞아왔다. 지난 5년간 재판 지연의 사례가 민사, 형사 각각 65%, 68%나 급증했다. 청와대나 집권당 인사들 관련 재판은 끝도 없이 미뤄졌으며, 특히 선거소송에선 180일 이내에 신속히 처리하라는 법의 엄명이 아예 무시됐다. 법관들이 정치에 빠져서 재판을 사보타주한 혐의가 짙다.”
머리 좋은 법조가 꼼수를 부린 것이다. 머리 좋은 x들은 폭력과 테러에는 약하다. 더욱이 그들은 긴 역사를 보는 역사가에게는 더욱 약하다. 역사는 단순한 꼼수로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의 폭력과 테러는 꼼수의 법조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됨은 틀림이 없다. 매일경제신문 김병호 기자(09.25), 〈푸틴의 잘못된 북한 선택〉, “최근 한국과 러시아 관계는 일반인들도 걱정할 만큼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양국 정상과 당국자들이 날 선 발언을 쏟아내면서 종전 후 상처 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지 우려가 커지고 있다. 1998년 7월 초유의 한·러 외교관 맞추방 사건 이후 양국 관계가 역대 최악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하지만 1998년 때와 달리 지금의 강대강 대치는 한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의식해 러시아가 북한을 끌어들이면서 판이 커졌다. 러시아는 7월 말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의 방북과 지난 13일 보스토치니 정상회담에 이어 다음달에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까지 평양을 찾아간다고 한다. 그 의도는 예상보다 단순하다. 전쟁 상대국인 우크라이나의 뒷배인 미국과 그에 동조하는 한국의 안보 아킬레스건을 건드려 압박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것이다. 북한과 협력을 미끼로 한미의 대북 정책에 혼선을 주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수위를 낮추는 협상력을 가질 수 있다. 어쩌면 지금과 유사했던 장면이 23년 전 평양에서 있었다. 2000년 3월 대선 승리로 장기 집권의 서막을 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그해 7월 19~20일 평양에 나타났다. 푸틴은 오키나와 G8 정상회의 참석에 앞서 중국과 북한을 첫 순방지로 골랐다. 소련과 러시아의 최고지도자가 북한에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당시 푸틴의 동선에서 한국이 빠진 것은 특유의 '본때 보여주기'였다.”
조선일보 사설(10.04), 〈아웅산 테러 40년, 하나도 안 달라진 ‘깡패 국가’ 북한〉, “6일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열린 아웅산 순국 사절 추모비 제막식에서 지난 1983년 북한의 폭탄 테러로 숨진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부인 이순자씨가 아들 김한회씨와 함께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2014년 6월 6일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열린 아웅산 순국 사절 추모비 제막식에서 북한 폭탄 테러로 숨진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부인 이순자씨가 아들 김한회씨와 함께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이번 9일은 아웅산 테러가 일어난 지 40년이 되는 날로 보훈처와 주미얀마 한국대사관 주재로 국립현충원과 아웅산 묘역에서 추모식이 열린다. 1983년 미얀마 아웅산 묘역에서 북한 공작원의 폭탄 테러로 우리 정부 사절 17명이 희생된 지 40년을 맞았다...그때나 지금이나 ‘테러 국가’라는 북한의 실체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1968년 1·21 청와대 습격, 1974년 문세광의 대통령 부인 저격, 1986년 김포공항 테러, 1987년 KAL기 폭파 등이 줄줄이 이어졌다. 2001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금강산 관광객 사살, 김정남 암살 등 무도하기 짝이 없는 테러와 도발을 일삼고 있다. 그러고도 사과는커녕 범행 자체를 부인하며 온갖 극언으로 협박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좌파 진영과 야권 일부는 북한 소행이란 증거가 없다며 오히려 북을 두둔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북한은 앞으로도 깡패 국가의 본성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걸핏하면 국방 장관에게 테러 협박을 하고 대통령을 향해 막말을 서슴지 않는다. 사이버 테러와 해킹은 일상사가 됐다.”
북한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탈북자들이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전단의 정보이다. 그들은 ‘자유로운 정보 유통’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온갖 특혜를 갖고 있는 국회와 법원의 정보를 낱낱이 국민에게 공개할 때 카르텔과 폭력과 테러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이젠 국들에게 국회의 특권와 그들이 쓰는 돈, 국가예산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국민에게 소상히 밝히는 것이다. 또한 법원의 판결문을 전국민에게 알리는 일이다. 삼성전자가 데이터 베이스로 처리하여 국민 누구도 알수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일이다. 삼성반도체의 수율과 그 노동생산성 향상은 노동강도에서 온다. 그런데 문재인은 주 52시간 노동제로 삼성의 생명을 끊고 싶었다. 그들의 카르텔은 자본주의 역사를 종결시키고자 한 것이다.
매일경제신문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10.08), 〈'24-7' TSMC와 '52' 삼성전자의 반도체전쟁〉, 자본가 대신 시간의 통제를 문재인 일당과 국회, 법원이 갖고 있었다. 기업이 경쟁력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필자가 삼성전자, 하이테크 전문 유튜브 아시아노메트리(Asianometry)의 존 와이가 TSMC, 미국의 윌리엄 라조닉 교수가 인텔에 관해 발표하고 토론이 이어졌다. 존 와이의 발표에서 흥미로운 발언이 나왔다. TSMC 관계자들에게 삼성에 비해 경쟁력이 있는 이유를 물어보니 자세한 설명 없이 '문화의 중요성'이라는 말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토론 시간에 그게 무슨 뜻인지 부연해줄 수 있는지 질문했다. 답변은 개략 다음과 같았다. "TSMC는 연구개발(R&D)팀이 하루 24시간, 주 7일간 가동된다. 2교대나 3교대로 연구가 끊기지 않도록 한다. 위계가 강한 삼성보다 상하 구분 없이 비판과 토론이 활발하다. 주요 공급망 업체들이 근거리에 포진해서 TSMC에 문제가 발생하면 3시간 안에 해결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그가 얘기한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는 문화는 과거 동아시아와 서양 기업을 구분하는 차이였다. 대만과 한국 기업은 같은 문화권이었다. 그러나 반도체 전쟁에서는 이제 다른 문화권이 되어 있다. 대만도 경제가 성숙하면서 '워라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TSMC와 같이 '혹독한(brutal) 업무 문화'를 가진 직장을 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단 TSMC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 문화를 받아들이고 전력을 다한다. 이 차이를 만들어낸 데는 지난 정부에서 도입한 경직적 주 52시간 제도가 결정적이다. 반도체와 같은 하이테크에는 스피드 경영이 필요하다. 작은 속도 차이가 누적되면서 큰 경쟁력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규제 상황에서는 아무리 의욕이 넘치는 직원이라도 중간에 업무를 접고 퇴근할 수밖에 없다. 삼성이 설혹 '24-7' R&D 시스템을 구축하려 해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TSMC는 초과근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래서 2교대를 주로 사용하고 필요하면 3교대도 투입한다. 하지만 삼성은 최소한 3교대를 하고 4교대도 동원해야 한다. 반도체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이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TSMC보다 훨씬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일이다.”
젊은 대졸자의 실업이 심각하고, 경제가 폭망 단계에 있다. 그러나 국회, 법조 카르텔은 이들을 보지 않고, 폭력과 테러의 북한 문화에 기웃거린다. 동아일보 사설(10.08), 〈[사설]경기 즐기되 포기 않고 승리 이끈 당찬 MZ 선수들〉, ‘불쌍타 우리 아들 딸들’! 그들의 구김살 없는 삶을 꾸리지도 못하고, 자녀를 낳을 수 없는 국가사회주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코로나 사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정상적으로 열린 첫 국제 종합스포츠대회라고 할 수 있는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어제 폐막했다. 한국의 MZ세대 선수들은 경기를 경기로 즐기는 데는 과거 세대보다 확연히 성숙해져 있었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패배해도 웃을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념을 보여줬다. 승리한 후에는 기쁨을 만끽하며 자기 개성을 표출할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