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 한 수] 늦게 찾아온 맑음
깊은 거처에서 성곽을 굽어보니,
봄 가고 여름인데도 맑고 서늘하다.
하늘은 그늘진 풀을 가엾이 여기고,
세상은 늦게 갠 하늘을 더욱 귀히 여기네.
높은 누각 또한 한층 아득해 보이고,
작은 창엔 은은한 저녁빛 스며드네.
남방의 새는 젖었던 둥지가 다 마르자,
돌아가는 날갯짓이 한결 가볍구나.
深居俯夾城(심거부협성)
春去夏猶淸(춘거하유청)
天意憐幽草(천의련유초)
人間重晩晴(인간중만청)
幷添高閣逈(병첨고각형)
微注小窗明(미주소총명)
越鳥巢幹後(월조소간후)
歸飛體更輕(귀비체경갱)
―‘늦게 갠 하늘(만청·晚晴)’ 이상은(李商隱·812∼858)
*夹城(협성):성문 밖의 곡성(曲城).
*幽草(유초):어두운 지방의 작은 풀.
*高阁(고각):시인이 거주하는 누각을 가리킨다.
*迥(형):높고 심원(深遠)하다.
*微注(미주):어두워질 무렵의 경치. 빛이 미약하고 부드럽기에 “微注”이라고 했다.
*越鸟(월조):남방의 새.
【譯文】
머물던 곳에서 맑은 날 나와 협성(夾城)을 내려다보니
봄은 이미 지나갔고 여름은 맑고 시원하다.
작은 풀이 비를 맞고 물에 잠겼는데,
마침내 하늘이 어여삐 여겨 비가 그치자 맑아졌다.
높은 누각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니 하늘은 높고 땅은 먼데,
석양의 부드러운 저녁 빛이 창살을 통해 들어온다.
월(越)나라 새의 둥지가 이미 햇빛에 마르니
그들의 자태도 경쾌함을 회복했다.
긴 장마 끝의 햇빛은 평소와 다르다. 늘 있던 빛인데도 새삼 반갑고, 축축하던 풀잎이 반짝이는 모습까지 눈에 들어온다. 이상은은 바로 그런 순간을 붙잡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하늘은 그늘진 풀을 가엾이 여긴다’는 구절이다. 오랜 비에 젖은 외진 곳의 풀이 저녁 햇살을 받는다. 시인은 그 변화를 지나치지 않았다. 오랫동안 불운과 정치적 갈등에 시달렸던 자신의 처지가 그 풀과 겹쳐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늦게 갠 하늘’은 단순한 날씨가 아니다. 오래 흐렸기에 귀해진 맑음이다. 창으로 저녁빛이 스며들고, 젖었던 둥지는 마르며, 돌아가는 새의 날갯짓도 가벼워진다. 달라진 것은 몇 줄기 햇빛뿐인데, 세상을 보는 마음은 전과 같지 않다.
삶의 문제도 한꺼번에 걷히지는 않는다. 다만 오래 내리던 비가 문득 그치듯, 뜻밖의 평온이 잠시 찾아올 때가 있다. 그 순간까지 짧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늦게 찾아온 맑음은 그냥 맑음이 아니다. 오래 흐린 날을 견딘 사람만이 알아보는 빛이다.
✵이상은(李商隱, 812-858) : 자字·는 의산義山 호號는 옥계생玉溪生, 번남생樊南生. 형양滎陽(현 중국 하남성河南省 형양滎陽). 시와 중국의 육조와 당나라 때 성행한 한문 문체인 변려문騈儷文에 모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으나, 당쟁黨爭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일생의 상당 기간 동안 막부幕府를 전전하다 47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시인이 활약한 만당晩唐 시기는 당쟁으로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환관宦官과 번진蕃鎭이 발호하면서 국세가 크게 기울던 때였다. 이렇게 어려운 정치사회적 환경에서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시인은 600수에 달하는 시를 통해 우국憂國의 정서를 드러내기도 하고 자신의 불우한 운명을 하소연하기도 했다. 또 변려문에 특출한 재주를 보여 800편 넘는 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성취를 인정받아 두목杜牧과 함께 성당盛唐 시기의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에서 이름을 따 만당晩唐의 ‘이두李杜’로 일컬어진다. 주요저작은 《이의산문집李義山文集》, 《번남갑집樊南甲集》, 《번남을집樊南乙集》 등. 그의 산문집은 간본刊本이 전해지지 않다가 청淸대에 이르러 서수곡徐樹穀 형제의 《이의산문집전주李義山文集箋注》 10권과 풍호馮浩의 《번남문집상주樊南文集詳注》 8권 등이 간행되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변려문(騈儷文) : 문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로 이루어져 수사적修辭的으로 미감美感을 주는 문체이다. 변려체騈儷體·변문騈文·사륙문四六文·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라고도 한다. 유래는 변騈은 한 쌍의 말이 마차를 끈다는 뜻이고, 여儷는 부부라는 뜻으로 명칭은 당송唐宋 8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의 '걸교문乞巧文' 중 “변사려륙금심수구騈四儷六錦心繡口”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 〈이준식의 漢詩 한 首(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6년 07월 24일(금)〉, Daum∙Naver 지식백과/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