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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城 (慶州) 東北쪽 唐恩浦 방면을 상주(尙州)라 하다
○ 「우리의 역사서(歷史書), 삼국시대(三國時代) 역사서(歷史書)」라고 말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는, 「혹자(或者)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식민사관(植民史觀) 또는 사대사상(事大思想)등으로 만들어져 있고, 또는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흔적(痕迹)들이 있다.」고 하면서 폄하(貶下)한다.
혹자(或者)들의 머릿속에는 지금 우리 책상(冊床)앞에 놓여있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원본(原本)이다”라는 가정(假定)속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사서(史書)가 원본(原本)인지, 아니면 왜곡(歪曲), 조작(造作)된 것인지 조차 분별(分別)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비판(批判)할 수가 있는가? 하는 거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일제(日帝)식민지(植民地)때에 교열(校閱)과 검열(檢閱)등을 거쳐 재편찬(再編纂)된 것이다. 이러한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記錄)속에,「반도(半島) 땅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많은 사건(事件)들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이런 것들을 간파(看破)하지 않으려하는, 의식적(意識的)으로 피해버리는, 고의적(故意的)으로 특정(特定)한 곳으로 몰아넣는, 이 시대(時代)의 역사학자(歷史學者)들은, 언젠가 그 행위(行爲)에 대한 책임(責任)을 면치 못할 것이다.〉
오늘의 주제(主題)는, 초등학생(初等學生)들도 훤하게 꿰뚫고 있는 신라(新羅)얘기다. 지리지(地理志) 신라(新羅)편 한 구절(句節)을 논해보기로 보자.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신라(新羅)의 ‘도성(都城)=왕성(王城)’은, 반도(半島) 경주(慶州)다.〉
【반도(半島) 동남(東南)쪽에 있는 옛 신라(新羅) 왕성(王城)을, 고려(高麗) 때엔 “동경(東京)”이라 했고, 북북서(北北西)에 있는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이라 하였다고 한다. 수천(數千)년 변함이 없는 반도(半島)의 지세(地勢)로 볼 때, 동경(東京)은 남경(南京)이어야 맞는 말이고, 서경(西京)은 북경(北京)이어야 올바른 표현(表現)이다.】
○ 三國史記34 雜志3 地理1 : 《新羅疆界,古傳記不同.杜佑通典云:其先本辰韓種,其國在百濟.高麗二國東南,東濱大海.中略. : 신라의 국토 경계에 대하여는 옛날 기록들의 내용이 동일하지 않다. 두우의 통전에는 “그 선조는 원래 진한의 종족인데, 그 나라가 백제, 고구려 두 나라의 동남쪽에 있으며 동쪽은 큰 바다에 닿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략(中略). 新羅崔致遠曰: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此諸說,可謂近似焉.中略. : 신라의 최치원은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여러 설이 모두 유사하다고 할 만하다. 중략(中略). 本國界內,置三州:王城東北,當唐恩浦路曰尙州,王城南曰良州,西曰康州. : 본국 경계 내에 3주를 설치하였다. 왕성 동북쪽의 당은포(唐恩浦) 방면을 상주(尙州)라 하고, 왕성 남쪽을 양주(良州)라 하고, 서쪽을 강주(康州)라 하였다. 於故百濟國界,置三州:百濟故城北熊津口曰熊州,次西南曰全州,次南曰武州. : 이전의 백제 경내에 3주를 설치하였다. 백제의 옛 성 북쪽 웅진 어구를 웅주(熊州)라 하고, 그 다음 서남(西南)쪽을 전주(全州), 그 다음 남쪽을 무주(武州)라고 하였다. 於故高句麗南界,置三州:從西第一曰漢州,次東曰朔州,又次東曰溟州.中略. : 이전의 고구려 남쪽 지역에 3주를 설치하였다. 서쪽으로부터 첫째를 한주, 그 다음 동쪽을 삭주, 그 다음 동쪽을 명주라고 하였다. 중략(中略).》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 지세(地勢)를 논한다는 것은, 첫 번째 방위(方位)와 관계(關係)된다.
(1)《新羅疆界,古傳記不同.杜佑通典云:其先本辰韓種,其國在百濟.高麗二國東南,東濱大海.中略. : 신라(新羅) 강계(疆界)는, 옛날 기록들의 내용이 동일하지 않다.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서 이르기를 : 그 선조는 원래 진한(辰韓)의 종족인데, 그 나라가 백제, 고구려 두 나라의 동남(東南)쪽에 있으며, 동(東)쪽은 큰 바다에 닿았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위의 기록(記錄)을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해설에 따라 지세(地勢)를 살펴보자.
➊ 삼국사기(三國史記)가 통전(通典) 기록(記錄)을 인용(引用)하고 있다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編纂)할 그때에, 타당성(妥當性)이 있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고구려(高句驪)측에서 바라볼 때, 신라(新羅) 땅의 위치(位置)는 분명(分明) 동남(東南)쪽이 맞다.
그러나 백제(百濟)의 동남(東南)쪽이 경상도(慶尙道) 땅인가? 하는 데는 이견(異見)이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충청(忠淸)·전라(全羅) 땅은 경상도(慶尙道) 땅의 서(西)쪽에 맞대고 있으므로, 동(東)쪽에 있는 옳다. 동남(東南)쪽은 될 수 없다.」
➋ 또 〈동(東)쪽은 바다에 닿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경상도(慶尙道) 남(南)쪽은 육지(陸地)로 연접(連接)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와 같다. 왜냐하면 “동(東)”쪽만이 바다에 닿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마한(馬韓)은 서(西)쪽에 있고, 마한(馬韓)의 남(南)쪽은 왜(倭)와 연접(連接)했다. 진한(辰韓)은 마한의 동(東)쪽에 있으며, 남(南)쪽은 변진(弁辰)이 있고, 변진(弁辰)의 남(南)쪽은 왜(倭)와 연접(連接)하고 있다.〉는 기록(記錄)과 상통(相通)하는 설명(說明)이다.
오늘날의 한국사(韓國史) 역사통설(歷史通說)【필자(筆者)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이라고 칭한다.】의 허구(虛構性)라는 것을 확실(確實)하게 밝혀주는 것이다.
아래의 한반도(韓半島) 지도(地圖)를 보아도, 북(北)쪽만이 대륙(大陸)으로 진출할 수 있다. 반도(半島)라는 특이지형(特異地形)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감안(勘案)하지 않은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조작(造作)은, 탄로(綻露)날 수밖에 운명(運命)을 가졌다.
* 韓半島 地圖(한반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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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三國史記34 雜志3 地理1〉에서 말씀하시기를 : 「왕성(王城) 동북(東北)쪽의 당은포(唐恩浦) 방면을 상주(尙州)라 하고…」하였는데 …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에서 이를 바라 볼 때, 이건 정말 어이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신라(新羅) 왕성(王城)은, 곧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를 말하는 것이니, “왕성(王城) 동북방(東北方) 당은포(唐恩浦)” 방면(方面)은 : 곧 울릉도(鬱陵島) 남쪽지대 동해(東海) 바다 한 가운데(東海中)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은포(唐恩浦)가 화성(華城)의 남양(南陽) 또는 충청도(忠淸道) 장항(獐項)등등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이건 동서남북(東西南北)도 모르는 정말 무지(無知), 무지(無智)한 자(者)들의 헛소리다. 이곳은 신라(新羅) 도성(都城)에서, 서북방(西北方)이기 때문이다.
【간혹(間或) 혹자(或者)들은, 이런 설명(說明)을 첨가(添加)하기도 한다. 즉(卽) “本國界內,置三州:王城東北,當唐恩浦路曰尙州,王城南曰良州,西曰康州.”라는 원문(原文) 한자(漢字)중에서, 「“王城東北”에서 “東”자는 “西”자의 오류(誤謬)다.」라고 말이다. “東”자가 “西”자의 잘못이란 증거(證據)는 가지고 있는가? 반도(半島) 동남(東南)쪽 손바닥만 한 경상도(慶尙道) 땅에, 신라(新羅)를 만들다보니 생기는 해프닝(happening)이 아니냐!】
※ 참고(參考) (1) /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마한(馬韓)에서 ‘월지(月支)를 목지(目支)’의 잘못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사안(事案)으로, 사가(史家)들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삼국지(三國志) 30 위서(魏書)30, 한(韓)」 편에서 : 마한(馬韓) 54개 나라 중에서 〈“월지국(月支國)”을 보고, 이는 “목지국(目支國)”의 오류(誤謬)다. 목지국(目支國)은, 오늘날의 “직산(稷山)”이다.〉라고 하는 자(者)들의 어리석음을 보라.
이 자(者)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서력(西曆:AD) 300년 이전(以前)으로 되돌아가 삼국지(三國志) 저자(著者)인 서진(西晉)의 진수(陳壽)를 만나 “월(月)자는 목(目)자의 오류(誤謬)입니까? 하고 물어보고 왔다는 얘길까? 이건 아니다. 반도(半島) 땅에 마한(馬韓)의 54개 나라를 만들다보니, 어처구니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校勘記 : 二 八 一 八 頁 一 三 行 / 都 目 支 國 魏 志 作 「治 月 支 國」. 校 補 謂 魏 志 及 通 志「目」均 作「月」,附 載 五 十 餘 國 亦 作 「月 支 國」,則 此 作「目 支」誤 也。 今 按: 月 支 乃 西 域 國 名, 魏 志 及 通 志 之 作「月 支」,或 後 人 習 見「月 支」之 名 而 臆 改 與? 當 考。: 교감기(校勘記) : 도(都 : 서울) 목지국(目支國)은, 위지(魏志)에는 「월지국(月支國)에서 다스렸다.」고 하였다. 교보(校補)에서 이르길, 위지(魏志)와 통지(通志)까지 『목(目)』이 『월(月)』이다. 부재(附載) 50여국 또한 『월지국(月支國)』이라 하였으니, 곧 이것은 『목지(目支)』의 잘못(誤)이다. 지금 이를 살펴보면(今按) : 월지(月支)는 서역(西域)의 나라이름이며, 위지(魏志)에서 통지(通志)까지 『월지(月支)』로 기록(記錄)하니, 혹 후인(後人)들이 월지(月支)라는 이름을 보고 고친 것이 아닐까? 마땅히 고려해야 한다.】고 하였다.
※ 참고(參考) (2) / 【北史. 百濟 : 自晉,宋,齊,梁據江左,亦遣使稱藩,兼受拜封.亦與魏不絕. : 注:自晉宋齊梁據江左,諸本左,下衍右字,據周書刪. : 진(晉), 송(宋), 제(齊), 양(梁)이 강좌(江左)에서 일어났는데, 역시 사신을 보내어 번(藩)이라 칭하면서, 봉함을 받았고, 위(魏)와도 끊어지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그 주석(註釋)에서 말하기를 : 「진(晉)·송(宋)·제(齊)·양(梁)나라가 강좌(江左)에서 일어났는데… …여러 본(諸本)에서 “좌(左)”는, 아래(下)에 “우(右)”라고 쓸데없는 자(字)가 달려있는데, 주서(周書)에 의거하여 삭제(削除)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즉(卽) 강우(江右)라고도 하였는데, 〈주서(周書)에 의거하여 “우(右)”를 삭제(削除)하고, “좌(左)”로 고쳤다〉는 이야기다.
〈강좌(江左) : 장강(長江)의 하류지방(下流地方) : 백제(百濟)가 있었다.〉는 이야기고, 〈강우(江右) : 장강(長江)의 상류지방(上流地方) : 진(晉)·송(宋)·제(齊)·양(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호남성(湖南省)과 호북성(湖北省)의 서(西)쪽은 강우지방(江右地方)이요, 호남성(湖南省)과 호북성(湖北省)을 포함(包含)한 그 동(東)쪽은 강좌지방(江左地方)이란 이야기가 된다.
백제(百濟)가 바로 ‘강좌지방(江左地方)’에 있었으면서, 위(魏)나라에게 조공(朝貢)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고, 위(魏)나라 기마(騎馬) 수십만(數十萬)이 백제(百濟)영토(領土)로 쳐들어갔다가 “개죽음”을 당했다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이 성립(成立)될 수 있는 것이다.
➊ 海東繹史 속집 7 / 地理考 7 / 新羅 / 疆域總論 / 唐恩郡ㆍ長口鎭
《신당서(新唐書) 지리지(地理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바닷길로 갈 경우, 바닷가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오골강(烏骨江)에 이르며, 이어 남쪽으로 바닷가를 따라가면 오목도(烏牧島), 패강(貝江) 입구, 초도(椒島)를 지나서 신라 서북쪽에 있는 장구진에 도달한다. 또 마전도(麻田島), 고사도(古寺島), 득물도(得勿島)를 지나 1,000 리를 가면 압록강의 당은포(唐恩浦) 입구에 이르고, 이어 동남(東南)쪽으로 육로를 통해 700 리를 가면 신라(新羅)의 왕성(王城)에 이른다.》고 하였다.
반도(半島)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말해보면 : 이 설명(說明)은 정말 웃기는 이야기로 변질(變質)되어 버린다.
등주(登州)에서 무엇 때문에 동북(東北)쪽으로 가지? 동북(東北)쪽의 바닷길로 갈 경우에는, “바닷가를 따라”라는 말은 “해안선(海岸線)을 따라 가라”는 말인데, “바닷가를 따라 동(東)쪽으로 가라”고 하였다. 등주(登州)에서 배를 타고, 곧장 반도(半島) 땅의 경기도(京畿道) 또는 충청도(忠淸道) 해안(海安) 포구(浦口)에 닻을 내리면 되는 일을 무엇 때문에 돌고 돌아, 어디로 간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또 마전도(麻田島), 고사도(古寺島), 득물도(得勿島)를 지나 1000 리를 가면 압록강의 당은포(唐恩浦) 입구에 이르고〉하였는데, 〈이곳으로부터 동남(東南)쪽 700 리에 신라(新羅) 왕성(王城)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압록강(鴨綠江) 입구(入口)로부터 경주(慶州)까지 직선거리(直線距離)는 624km로, 700리의 거의 두 배에 이르는 1,500 리에 이른다.
○ 해동역사(海東繹史) / 당항성(棠項城) : 《舊唐書 百濟傳 : 정관(貞觀) 16년(642)에,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해서, 당항성을 탈취해, 신라에서 당나라에 입조(入朝)하는 길을 끊으려고 하였다.【舊唐書百濟傳,貞觀十六年,百濟與高麗通謀,欲取棠項城,以絶新羅入朝之路】》
《대청일통지 : 당항성(棠項城)은, 조선(朝鮮)의 전주(全州) 동북(東北)쪽에 있다.【大淸一統志,棠項城在,朝鮮全州東北】》고 하였다.
전주(全州)는 전라도 전주(全州)를 말하는 것이니, 이곳의 동북(東北)쪽에 당항성(棠項城)이 있는데, “당항성(棠項城)은, 신라(新羅)가 당(唐)나라 조정(朝庭)에 들어가는 길목이다.” 라는 얘기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를 믿는다면 : 여기에 또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을 믿는다면 : 당항성(棠項城)은 경상도 상주(尙州) 쯤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곳은 내륙지방(內陸地方)으로, 이곳에서 북(北)쪽에는 ‘고려(高麗)=고구려(高駒驪)’가, 서(西)쪽에는 백제(百濟)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당(唐)나라로 갈 수 없다.
이런 이야기는, 반도(半島)라는 특이지형(特異地形), 동서(東西)는 짧고, 남북(南北)은 긴 형태(形態)의 땅에, 옛 기록(記錄)을 배치(配置)하다 보니 생기는 어설픈 이야기다. 신라(新羅)와 백제(百濟), 고구려(高駒驪)는 : 동서(東西)는 길고, 남북(南北) 또한 긴 땅에 있었다는 것을, 오늘의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Message)’라고 할 수 있다.
➋ 新唐書 43 下 / 志 第 33 下 / 地理 7 下 / 羈縻州 / 入四夷之路與關戍走集:唐置羈縻諸州,中略.其入四夷之路與關戍走集最要者七:《二曰登州海行入高麗渤海道:登州東北海行,過大謝島,龜歆島,末島,烏湖島三百里.北渡烏湖海,至馬石山東之都里鎮二百里. : 두 번째는 등주(登州)에서 배를 타고 고려(高麗)발해(渤海)길로 들어간다. : 등주(登州) 동북(東北)으로 바다로 가면, 대사도를 지나, 구흠(龜歆)도, 말도, 오호도 300 리이다. 북쪽의 오호해(烏湖海)를 건너면, 마석산에 이르고, 동(東)으로 도리진 200리에 이른다. 東傍海壖,過青泥浦,桃花浦,杏花浦,石人汪,橐駝灣,烏骨江八百里. : 동(東)쪽 해안에 의지해 붙어있는데, 청니포를 지나 도화포, 행화포, 석인왕(汪). ( )타만, 오골강 800 리이다. 乃南傍海壖,過烏牧島,貝江口,椒島,得新羅西北之長口鎮. 남(南)쪽에 의지해 붙어있는데 오목도를 지나. 패강구, 초도에 이르며, 이 초도는 신라가 획득 했으며, 서북의 장구진이다. 又過秦王石橋,麻田島,古寺島,得物島,千里至鴨淥江唐恩浦口.乃東南陸行.七百里至新羅王城. : 또 진왕석교를 지나면 마전도, 고사도, 득물도이며, 1,000 리 이르면 압록강 당은포구(唐恩浦口)이다. 이에 동남(東南)쪽 육로(陸路)로 700 리를 가면 신라(新羅) 왕성(王城)에 이른다. 중략(中略).》고 하였는데,
위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말하는 내용(內容)과 같은 것들이다. 지세(地勢)로 볼 때, 반도(半島) 경상도(慶尙道) 신라(新羅)이야기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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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於故百濟國界,置三州:百濟故城北熊津口曰熊州,次西南曰全州,次南曰武州. : 이전의 백제 경내에 3주를 설치하였다. : 백제의 옛 성 북쪽 웅진 어구를 웅주(熊州)라 하고, 그 다음 서남(西南)쪽을 전주(全州), 그 다음 남쪽을 무주(武州)라고 하였다.》고 한다.
➊ 「백제(百濟)의 고성(故城) 북(北)쪽 웅진(熊津)입구를 웅주(熊州)라 했다. 그 서남(西南)을 전주(全州)라 하였다.」고 하였는데,
“웅주(熊州)는, 곧 웅진(熊津)이고, 웅진성(熊津城)”을 말하는 것이고, ‘고마나리’를 말하며, 즉(卽) 오늘날의 충청도(忠淸道) 내륙지방(內陸地方) “공주(公州)”를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논해보고자 하면 의아(疑訝)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오늘날의 방위(方位)와 8세기 때의 방위(方位)와는 많은 차이(差異)가 있었는가? 하고 말이다.
➋ 지도(地圖)를 놓고 보면, 충청도(忠淸道) 공주(公州)의 정남(正南)쪽에 전주(全州)가 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서남(西南)”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공주(公州)에서 정(正) 남(南)쪽으로 70km 정도 떨어진 곳에 전주(全州)가 있다. 서남(西南)쪽이라면, 군산(群山)【군산(群山)이라는 지명(地名)도 이해할 수 없다. 군산(群山)은 여러 산(山)들이 함께 모여 있는 많은 산(山)이란 뜻이기 때문이다.】방향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땅(地)을 잘못 짚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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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지명(地名)이나 산의 이름, 하천(河川)의 이름, 산맥(山脈)등을, 반도(半島)라는 땅에 맞춰 배치(配置)하다 보니,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잘못된 역사교육(歷史敎育)의 반복학습(反復學習)은, 각각 인간(人間)의 사고(思考)에 크나큰 영향(影響)을 미친다.
‘회흘(回紇)=회골(回鶻)’족(族)이니, ‘결골(結骨)’이니 하는 부족(部族)들은, 역사서(歷史書)에 의하면 : 철륵(鐵勒)의 많은 부족(部族)중에서 한 부족(部族)일 뿐이다. 이들은 색목인(色目人)들이다.
장안(長安)에서 무려 “16,900 리 또는 19,900 리”는 어딘가? 「이곳은 우랄산맥(Ural 山脈) 서(西)쪽 땅이다. 당시(當時)의 북구라파(北歐羅巴)의 산하(山河)를 누볐던 자(者)들이 바로 이 부족(部族)들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북 구라파(北 歐羅巴) : 스웨덴·아이슬란드·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영국·아일랜드·네덜란드·독일·러시아·폴란드 등의 나라 땅이다.】
※ 참고(參考) : 唐會要【송(宋) 왕부(王溥) A. D 961】結骨國 /《結骨在迴紇西北三千里.勝兵八萬.口數十萬. : 결골국(結骨國) / 결골(結骨)은 회흘(迴紇) 서북(西北) 삼천리(三千里)에 있다.【필자(筆者) 주(注) : 장안(長安) 서북(西北) 19,900리다.】뛰어난 병사가 8만이며, 수십만(數十萬)의 백성(百姓)들이 있다. 南阻貪漫山.有水從迴紇北流.踰山經其國.人並依水而居. : 남쪽에 험한 탐만산(貪漫山)이, 회흘(迴紇)의 북쪽으로 흘러가는데, 그 나라의 산을 지나간다. 사람들은 나란히 물에 의지하여 산다. 身悉長大.皙面綠睛朱髮.有黑髮以為不祥.人皆勁勇.鄰國憚之.其大與突厥同. : 사람들의 신체(身體)는 모두 장대(長大)하며, 얼굴이 희고 녹안(綠眼)이며 붉은 머리털이다. 검은 머리를 가진 자도 있으나 자세하게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굳세고 용감하여, 이웃나라가 꺼려한다. 그들은 크게 돌궐(突闕)과 같다.》고 하였다.
● ‘회흘(回紇)’은 장안(長安)에서 : 16,900리 ∼ 폴란드(Poland), 헝가리(Hungary), 핀란드(Finland)등까지를 넘나들며,
● ‘결골(結骨)’은 장안(長安)에서 : 19,900리 –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n)반도(半島), 독일(Germany)까지를 넘나든다.
오늘날 신강성(新疆省)에 살고 있는 회회(回回)족들은, 회교(回敎)를 신봉(信奉)한다고 해서 회회(回回)라고 할 뿐,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철륵(鐵勒)의 회흘(回紇)”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들은 “색목인(色目人)”이었고, 이들에 대해 잘 알 수 있었던 당(唐)나라의 두우(杜佑)가 저술(著述)한 통전(通典)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철륵(鐵勒)의 한 부족(部族)인 결골(結骨)은, 오늘날의 독일(Germany)이나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n)반도(半島)에 있었던 자(者)들일 수 있다. 거리(距離)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또 외모(外貌)로 보아도 똑같다.
➨➨➨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서구(西歐)=구라파(歐羅巴)’ 인종(人種)의 선대(先代)가 누구였는가에 대해, 심사숙고(深思熟考)해야 할 필요(必要)가 있는 것이다. 바로 동방(東方)의 조선왕조(朝鮮王朝)로부터 패(敗)하여 밀려난 자(者)들의 후손(後孫)들이다. 이걸 잊고 있다면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을, 영구(永久)히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斷言)한다.
※ 참고(參考) : 통전(通典) 서융(西戎) : 車師 高昌附 :《文字亦同華夏,兼用胡書.有毛詩,論語,孝經,歷代子史,集學官弟子,以相教授.雖習讀之,而皆為胡語.賦稅則計田輸銀,無者輸麻布.其刑法,風俗,婚姻,喪葬與華夏大同.其人面貌類高麗,辮髮施之於背女子頭髮辮而垂. 》이라고 하였다.
●《문자(文字)는 또한 화하(華夏)와 같았으며(同), 오랑캐(胡)의 문자(書)도 함께 사용하였다. 모시(毛詩). 논어(論語). 효경(孝經)등이 있었으며, (중략). 그 형법. 풍속. 혼인. 장례 등 모두 화하(華夏)와 두루 같다. 그 사람들의 얼굴 모양은 고려(高麗=高句麗)의 무리(一族)이며, 변발이 널리 퍼지기 전에 여자들은 두발을 땋아 등허리 아래로 드리웠다.》고 설명해 주고 있는데,
반도(半島)로부터 일만 리 쯤 떨어져 있는 거사(車師)의 백성들의 풍속(風俗)이나 의복(衣服), 혼인(婚姻)이나 장례(葬禮) 등의 모든 생활 습관이 대부분 중화(中華=華夏)와 같았으며, 「이곳에 살고 있는 백성(百姓)들은 모두 고려(高麗)인의 모습을 하고 있고, 특히 부녀자들은 머리를 땋아 등 뒤로 드리웠다.」는 말은, 〈이 땅은 당(唐)에 의해 고구려(高句麗)가 망하기 전의 고구려(高句驪) 땅이었다.〉는 것을 증명(證明)하고도 남는 기록(記錄)이다.
● 고구려(高駒驪) 망후(亡後), 그곳에 살고 있었던 많은 고려인(高麗人)들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가(史家)들의 붓장난에 의해 기록(記錄)으로만 없어졌을 뿐, 실제(實際) 그 땅엔 예전이나 지금(只今)이나 똑같은 무리들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반도(半島) 땅은, 그 지세(地勢)로 인하여 “동(東)·서(西)·남(南)”쪽으로 바다에 닿기 때문에, 동서(東西)는 : 7-8백리 이내(以內)에 한계(限界)하고, 남북(南北)은 : 삼천리(三千里)이상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限界)가 있다.
이런 좁은 땅에,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광대(廣大)한 땅에 있었던 많은 “땅의 이름이나, 산(山)과 산맥(山脈), 하천(河川), 호수(湖水), 특이지형(特異地形)”등을 만들려하다 보니, 해괴망측(駭怪罔測)한 판타지(fantasy)와 같은 전설(傳說)의 고향(故鄕)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2018년 12월 1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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