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는 말.
유식(唯識)이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원효대사의 해골 물 이야기다.
신라 진덕여왕 4년(650)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 현장(玄奘 : 602~664)에게
유식학(唯識學)을 배우려고 요동에까지 갔다가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갇혀 있다가 돌아왔다가
661년(문무왕 1) 의상과 함께 다시 바닷길로
당나라에 가기 위해 당항성(黨項城)으로 가는 도중
비 오는 밤길인지라 어느 토굴(土龕)에서 자게 되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바가지에 담긴 물을 달게 마셨는데,
이튿날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닌 오래된 무덤이었고,
마신 물은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
이를 알고 나서는 그 역겨움에 구토하다가
홀연히 깨달은 것이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모든 것이 사라진다.”라는 것이다.
그때 깨달음을 송(誦)한 것이 바로 유식에서 회자하는 이 게송이다.
心生則 種種法生 (심생즉 종종법생)
心滅則 龕墳不二 (심멸즉 감분불이)
三界唯心 萬法唯識(삼계유심 만법유식)
心外無法 胡用別求(심외무법 호용별구)
사물을 인식하고, 분별하며,
선악을 가리는 그 주체가 바로 이 마음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의 실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참구하는 것이 불교 공부의 핵심이다.
다만 참구해 가는 방법에 따라서 소승과 대승이 다를 뿐
그 목적은 오로지 이 마음을 탐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승은 사성제(四聖諦)를 중심으로
일체 번뇌를 벗어나 열반을 추구하는
아공(我空)이 목적이라면
대승은 팔정도(八正道)를 중심으로
만물의 실체인 진여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를 법공(法空)이라 하는데, 그 탐구의 주체가
이 마음인 것은 동일한 것이다.
대승은 또한 불조(佛祖)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교문(敎門)과 조사들의 가르침인 선(禪) 수행을 나아가는
선문(禪門)으로 구분하지만,
구경의 목적은 수행 방법만 다를 뿐 또한 동일한 것이다.
대승(大乘)의 교의는 법(法)과 의(義)로써 설명한다.
법(法)이란 중생심을 말함이니
이는 체대(體大)와 상대(相大)와 용대(用大)가 그것이다.
풀이하면 중생심에 진여의 본성인 진여는 체대(體大)요,
인간의 마음에 한량없는 성공덕(性功德)이 갖추어져 있음에
이것을 완전히 드러낸 이를 불타(佛陀)라고 하나니
불타가 갖추고 있는 성공덕(性功德)을 상대(相大)라 하는 것이요,
인간의 마음에 한량없는 활용이 있음에
이것을 완전히 발현하면 불타라 하나니
불타가 중생을 구제하는 모든 작용을
용대(用大)라 하는 것이다.
승(乘)이란 말은 인간의 본성은
진여(眞如)인데 탐(貪), 진(瞋), 치(痴) 등
번뇌에 가려져 있어 나타나 있지 못하니
이것을 미(迷)리 하고 이 미(迷)에서
오(悟)에 나아가는 힘을 승(乘)이라고 하는 것이다.
선문(禪門)에서는 별도 교학을 들지 않지만
선문의 5가 종의 하나인 위앙종(潙仰宗)의 조사는
삼종생(三種生)으로 학인(學人)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삼종생은 위앙종(潙仰宗)의 영우(靈祐) 선사가
능엄경(楞嚴經)의 교리에 의하여 말한 것인데
삼종성은 상생(想生), 상생(相生), 유주생(流注生)이다.
이를 간략히 풀이하면
①상생(想生)은 진경(塵境)에 대하여
망상(妄想)의 能思心을 말하고,
②상생(相生)은 識情이 생각하는 일체 경계의 相을 말한다.
③유주생(流注生)은 識과 塵이 화합하고
念念이 상속하는 일체의 번뇌를 말한다.
중생심은 무시 이래로 이러한 삼생 때문에
청정한 거울과 같은 지혜(鏡智)를 오염시킨다는 것이다.
선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위산스님이 어느날 앙상스님에 말하기를
<나는 鏡智를 宗要로 삼아 삼종을 내니
想生과 相生과 流注生이다.
능엄경 말하기를 想生은 塵이 되고 識情은 垢가 되어
二俱를 멀리 여의면 너의 법안이 청명해지리라>라고 하니
어찌하여 無上知覺을 성취하지 못하는가.
想生은 能思의 마음이 잡란하고
相生은 곧 所思하는 경계가 역력하고
微細가 유주하여 塵垢가 된다.
만약 능히 淨이 다하면 자유를 얻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을 풀어보면 想, 相 二字로 六境을 시현하고
識, 情 二字로 六識 六根을 示現한다고 볼 수 있다.
<기신론>의 삼세육추의 교리와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능엄경>에서는 「相生은 집착하는 장애요,
想生은 망상이요, 流注生이란 이런 허망한 인연을 좇아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선사들은 반야의 힘을 들이지 않는
무공용지에 도달하여도 아직은 유주생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반드시 세 번째 유주생 상을 벗어나야만 비로소 쾌활 자제한다.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급료수를 잔잔한 물 보듯 한다고 하였으니,
아이의 6識이 비록 하는 것(功用)은 없으나
생각 생각이 흘러감이 급류와 같음을 어찌하리오.」라고 했다.
중생심을 말할 때 교문(敎門)에서는 두 가지 문으로 설명한다.
하나는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의 모습(心眞如門)이고
둘은 움직이는 마음의 모습(心生滅門)이다.
심진여문은 구경의 심성을 밝히는 것이며,
생멸문은 그 마음이 무명에 가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생멸문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
바로 <대승기신론>에서 밝힌 삼세(三細) 육추(六麤) 설이다.
삼세(三細)란 것은 근본무명(根本無明)의 상(相)이니,
무명업상(無明業相) 능견상(能見相), 경계상(境界相)을 말하고,
육추(六麤)란 지말무명(枝末無明)의 상을 말하는데
지상(智相), 상속상(相續相), 집취상(執取相),
계명자상(計名字相). 기업상(起業相),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다.
곧 근본불각(根本不覺)으로부터 생겨난 세 가지 미세한 상과
다시 경계를 연(緣)으로 하여 일어나는
여섯 가지 추(麤)한 상을 말하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해골 물을 마시고 송(誦)한 위의 게송은
이 생멸문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진여문(眞如門)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진여는 경(經)이나 조사들에 따라서 여러 이름을 불린다.
여래(如來), 열반(涅槃), 불성(佛性), 총지(總持),
원각(圓覺) 등으로도 불리며,
조사들은 진심, 정안(正眼), 묘심(妙心),
주인공, 취모검(吹毛劒) 등 다양하게 명명하고 있다.
그 이름이 어떠하듯 간에 그 목적은
모두 삼세 육추의 모든 망념에서 벗어나
변함없이 항상 한 진여 본심 즉 내 마음의 실체를 깨달아
구경 무심, 즉 견성을 성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 마음의 심성(心性)을 증득하는 것을
선문에서 이를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 하고
또 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는 깨달음 경계를 말하는 것이 미오(迷悟)니,
범성(凡聖)이니 하는 이름조차 없는 경지로
말이 끊어진 당체(當體)를 말함이니
공겁(空劫) 이전의 소식이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소식을 형용한 말이다.
선가(禪家)에서는
「안팎이 비어 고요하고 엉기듯 밝게 비추어
한 생각도 나지 않은 깊은 뜻에 도달하여
근원을 철저히 뚫어서 당장에 스스로 깨치면
그 자체가 허공과 같아서 범위와 크기를 다 헤아리지 못한다.
고금에 뻗쳐서 온갖 모양이 가두지 못하고
범인과 성인이 얽어매지 못하여 아무 걸림이 없으니
이를 本來面目이라 하고 本地風光이라 한다.
한 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서 미래가 다하도록 잃지 않으니,
여기에 무슨 걸리고 막힐 생각이 있겠는가?
이 무심한 경계와 무념의 참된 종취는
몹시 날카로운 사람이라야 실제로 깨칠 수 있다.」라고 설한다.
선어에 회자하는 「시심마(是甚麽)」 <이 뭐꼬?>의 화두가
바로 「본지풍광(本地風光)」을 참구하는 화두이다.
<본지풍광>을 참구하는 큰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선사들은 평상심(平常心)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평상심(平常心)이란 망념과 습성,
지견과 알음알이가 모두 없어진 크게 무심한 자리다.
미혹하고 눈먼 사람은 중생이 본래 가지
번뇌 망상 등의 생멸심을 평상심으로 착각하나
참으로 남쪽을 북쪽으로 우기는 미친 짓이라고 하는 것이다.
조주선사가 「차나 마시고 가라」는
<끽다거(喫茶去)>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화두다.
선사들은 이를 풀이하기를
「지극히 실답고 평상적인 편안한 곳에 다다르면
티끌이나 겨자씨만큼도 얻을 것이 없고
그저 그렇게 가는 곳마다 자유롭고 편안하니
진실로 무심한 도인이다. 이 무심함을 보임하여
결국에는 부처도 존재하지 않는데
무엇을 중생이라 부르며,
보리도 성립되지 않는데 무엇을 번뇌라 부르겠는가?
한순간에 영원히 벗어나며 때에 따라
자유로워 밥을 보면 밥을 먹고, 차를 보면 차 마신다.
시끄러운 저잣거리에 있더라도
고요한 숲속과 같아서 처음부터 두 가지 생각이 없다.
설사 연화대 위에 모셔도 기뻐하지 않으며
깊은 지옥에 가두어도 싫어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선문에서는 열반을 무상(無相), 무위(無爲),
무주(無住), 무원(無願)이라고 말한다.
맑고 때 묻지 않은 밝은 거울을 보자.
아름다운 공작이 비치듯, 사악한 뱀이 비치듯
거울은 가리지 않는다. 무상(無相)이다.
거울은 바라는 것이 없으니(無願) 지을 바도 없고(無作),
집착할 것도 없다(無住). 이 마음이 거울 같으면
진여니, 생멸이니 논할 것도 없다.
본래풍광을 참구함도 이 모두가 의심이요
미망이요, 무명이다. 空寂한 이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
달리 무엇을 참구하겠는가?
단지 해를 가리는 구름이 미울뿐이다.
@사진: 단양 대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