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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일본 최초의 불교통사
-코칸 시렌 저, 정천구 역주, 『원형석서』
정희경
이 책은 일본의 승려 코칸 시렌(虎關師鍊, 1278-1346)이 1322년에 완성했던 『원형석서(元亨釋書)』 전 30권을 정천구(丁天求) 선생님이 2010년에 상·하 두 권으로 나누어 번역하고 ‘일본 최초의 불교 문화사’라는 부제를 붙여 출판한(도서출판 씨아이알) 한국어 번역서이다.
번역자인 정천구 선생님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중심축으로 삼아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문학과 사상을 연구하는 분이다. 「『삼국유사』와 중·일 불교전기문학의 비교연구」(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000)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원형석서』를 여러 번 완독했다고 한다. 이 책을 출판하기 전에도 관련 소논문으로서 「『삼국유사』와 『겐코오샤쿠쇼(元亨釋書)』의 역사인식 비교」(『동양한문학연구』제23집, 2006) 와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과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의 비교-『불조통기』·『삼국유사』·『원형석서』를 중심으로」(「정신문화연구』 봄호 제31권 제1호, 2008)를 발표했었다. 또한 『원형석서』와 비슷한 시기에 저술되었던 일본의 중세불교설화집인 무주 이치엔(無住一円, 1226-1312)의 『사석집(沙石集)』을 한국어로 번역한 『모래와 돌』(소명출판, 2008)을 펴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번역자가 해당 분야의 전문 연구자인 만큼 독자들은 충실한 번역과 친절한 각주 및 해제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저자인 코칸 시렌은 가마쿠라(膁瘡) 막부시대의 임제종 승려로서 어려서부터 불교, 유교, 신서(神書) 등 다양한 전적을 읽고 배워 문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가 이 책을 쓴 동기는 송나라 승려 일산일녕(一山一寧, 1247-1317)의 질책 때문이었다. “그대는 박학하여 이역의 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이야기하면서도 자국의 일에 이르러서는 대답하는 데 자못 힘들어 하니, 이 어찌된 일인가?” 이 말에 자극을 받아 여러 해 동안 일본의 불교 관련 사료를 모으면서 작성하였기 때문에 그는 일본불교 사서(史書)를 최초로 저술하되 완성도가 높아야 한다는 의식이 매우 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의식은 이 책의 체재를 구성하는 방식과 서술 방식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체재와 서술방식
이 책은 <전(傳)> · <표(表)> · <지(志)>, 세 가지 틀로 구성되어 있다. 『사기(史記)』의 기전체(紀傳體)를 본받은 사서(史書) 형식이다. <전>은 권1-19까지 19권, <자치표(資治表)>는 권20-26까지 7권. <지>는 권27-30까지 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에는 승려와 불교 관련 인물들의 전기 및 일화를 10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였고, <자치표>는 일본 왕의 연대표로서 킨메이황제(欽明皇帝) 540년부터 켄랴쿠황제(建曆皇帝) 1221년까지 682년간 불교와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여 기록하고 설명을 붙였으며, <지>는 불교와 관련된 중요한 사항을 기록한 것으로서 10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기재하였다. <전>은 「전지(傳智)」, 「혜해(慧解)」, 「정선(淨禪)」, 「감진(感進)」, 「인행(忍行)」, 「명계(明戒)」, 「단흥(檀興)」, 「방응(方應)」, 「역유(力遊)」, 「원잡(願雜)」의 10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잡」은 다시 고덕(古德), 왕신(王臣), 사서(士庶), 니녀(尼女), 신선(神仙), 영괴(靈怪)의 6항목으로 분류하여 기술하였다. <지>는 「학수(學修)」, 「도수(度受)」, 「제종(諸宗)」, 「회의(會儀)」, 「봉직(封職)」, 「사상(寺像)」, 「음예(音藝)」, 「습이(拾異)」, 「출쟁(黜爭)」, 「서설(序說)」의 10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은 『고승전』의 체제와 비슷하지만, 몇몇 항목명을 바꾸어 ‘십도(十度)’로 구성하였고, <전>이 끝나는 부분에 「도총론(度摠論)」을 두어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부처가 있은 뒤에야 가르침이 생겼다. 그 가르침이 명백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서 지혜로워진다.(전지) 지혜란 앎이다. 사물을 알려면 반드시 분별을 해야 하므로 그것을 받아서 사리에 밝아진다.(혜해) 사물을 분별할 때는 반드시 헤아려야 하지만, 고요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그것을 받아서 선을 닦는다.(정선) 고요함이 그윽해지면 바로 움직임을 그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서 나아간다.(감진) 나아가다보면 높고 가파른 데를 만나서 굽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서 참아낸다.(인행) 오래 참다가 보면 마음이 거칠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서 삼가고 잡도리한다.(명계) 지나치게 삼가고 잡도리하다보면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서 베풀어 준다.(단흥) 베풀 때는 교묘하게 하려고 하므로 그것을 받아서 방편을 쓴다.(방응) 방편이 많으면 느슨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서 힘을 쓴다.(역유) 세차게 힘을 써서 사물에 들어가서는 하나가 되어야 하므로 그것을 받아서 바람을 세우고 마무리 한다.(원잡)
- 「도총론」 中
<지>는 위의 십전(十傳)에 대응하여 십지(十志)로 구성하였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사람이 태어나서 어리석으면서도 배우지 않는다면 밝아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배우기만 하면 가벼이 행동하니, 잘 닦아서 지혜를 이루어야 한다. 이 두 길 외에 도에 다른 행법은 없으므로 이를 처음에 두어서 저울이 되고 이정표가 되게 하였다. 이리하여 「학수」를 세웠다. 불도에 들어가는 것을 도(度)라 하고, 계율을 받는 것을 수(受)라고 한다. 도는 불도의 우듬지고, 계는 불도를 지키는 일이다. 그래서 「도수」를 다음에 두었다. 우리 불문에서는 갖가지 길이 다르지만 그 돌아가 이르는 곳은 하나다. 하나에 이르기 위해서는 길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불도는 무너진다. 그래서 「제종」을 다음에 두었다. 우리 불법의 유위는 모여서 예의가 되며, 임금과 신하들이 삼가서 행동하면 사람들이 넉넉해지고 나라는 다스려진다. 그래서 「회의」를 다음에 두었다. 도가 갖추어지고 덕이 채워지며 봉토를 받고 직위에 머무니, 안으로는 종문과 조정이 영화롭고 밖으로는 많은 복이 이른다. 그래서 「봉직」을 다음에 두었다. 혼자 바르면 머물 데가 없고 혼자 기대면 주인이 없는데, 기댐과 바름이 서로 호응하면 우상과 집이 마련되고, 우상과 집이 지어지면 우리 불문의 온갖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사상」을 다음에 두었다. 오로지 이 세계는 소리로 불사를 하니, 징이 울고 경쇠가 울려야 의궤가 온전하게 갖추어진다. 그래서 「음예」를 다음에 두었다. 우리 부처는 감응을 드리우나 뜻이 커서 어디에도 매이지 않으니, 한 조각 기이한 일이나 하찮은 괴이함도 다 거두어서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습이」를 다음에 두었다. 다스림으로 일어남을 비추고 어지러움으로 기울어짐을 비추니, 어긋나거나 거스르는 일이 나타나면 우리는 거울로서 비추어 안다. 그래서 「출쟁」을 다음에 두었다. 물건에는 반드시 머리가 있고 사건에도 까닭이 있으니, 그 시말을 자세히 하려고 「서설」을 두면서 마무리하였다.
-「서설」 中
코칸 시렌은 가운데에 <표>를 두어 이를 중심으로 <전>에서는 인물을 십바라밀행에 배대시키고, <지>에서는 그와 관련되는 구체적인 사상(事象)의 모습을 10가지 항목에 배대시킴으로써 대칭적 구조를 이루게 하였다. 한마디로 코칸 시렌은 기존 『고승전』의 체재였던 <열전>에, 『사기』의 체재인 <표>와 <지>를 첨가하여 구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코칸 시렌은 <지> 「서설」에서 이 책을 다섯 가지의 틀로 구성했다고 역설한다. 전기 뒤에 붙이는 ‘찬(贊)’과 ‘논(論)’을 따로 끌어내어, <전> · <찬> · <논> · <표> · <지>의 다섯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찬>이나 <논>은 각 인물의 전기 혹은 여러 인물의 전기에 대해 평을 붙여 저자의 견해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독립적인 하나의 체재 요소로 분류하진 않는다. 그런데도 코칸 시렌이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유는 이 책이 모든 불법을 아우르고 있음을 ‘수(數)’로써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불교에는 만수(滿數)가 있다. 대표적으로 10이다. 만수의 상대적 수(數)는 반수(半數)이다. 2에서 9까지이다. 만수는 대승(大乘)이지만 반수는 소승(小乘)이다. 하지만 서로 뒤섞여 있으면서 나누어지고 나누어지면서 뒤섞여 있으며, 가득하면서 반쪽이고 반쪽이면서 가득하다. 이것이 불교의 지극한 경지에 담긴 미묘한 뜻이다.
코칸 시렌은 이와 같이 해석한 불교의 뜻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에 의하면, 다섯 가지의 큰 틀과 <찬>의 2가지(하나의 전기에 붙인 것과 여러 전기에 붙인 것) 및 <논>의 2가지(됨됨이를 평가하는 통(通)과 의혹을 풀어주는 별(別))는 반수이고, <전>과 <지>는 각각 10가지 항목으로서 만수이며, 가운데 <표>는 1로서 <전>과 <지>의 각각 10가지 항목이 마땅히 돌아가는 곳이다. 따라서 <표>는 국사(國史)와는 구분될지라도 이는 실로 석씨(釋氏)의 통표(通表)가 된다. 뒤섞여서 가득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1이 되고 10으로 가며, 가득하면서 뒤섞이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10이 되고 1로 돌아간다. 이것이 이 책의 긴요한 수(數)이자 지극한 경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대로 이 책의 체재를 도표로 나타낸다면 다음과 같다.
<그림> 『원형석서』의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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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 |
二 |
二 |
一 |
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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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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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
<찬> |
<논> |
<표> |
<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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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傳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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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수(學修)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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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해(慧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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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수(度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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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淨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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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종(諸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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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感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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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會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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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행(忍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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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직(封職)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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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明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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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寺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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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흥(檀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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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예(音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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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응(方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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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이(拾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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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유(力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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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쟁(黜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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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잡(願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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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序說) |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으로 정리해 보았다. 그런데 그의 ‘수(數)’ 논리대로 적용해 보자면, 굳이 다섯 가지 틀이라 하지 않고 <전> · <표> · <지>의 세 가지 틀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3이라는 반수가 되니 그의 취지를 벗어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찬>과 <논>을 이 책의 형식 요소로서 강조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아마도 그 자신이 객관적인 비판과 예리한 통찰을 가지고 정통적인 기전체로써 불교사서를 저술했음을 보여주어, 다른 불교 전기류와의 차별성을 드러내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이유는 「서설」에서 이 책의 전체 구성을 설명한 뒤에 이어서 그가 기존의 승사(僧史)인 양(梁)·당(唐)·송(宋)의 『고승전(高僧傳)』을 강도 높게 비판하기 때문이다.
『(양)고승전』은 전국시대의 문장으로 체재에 병통이 있다. 『속고승전』은 일을 서술함에 있어 문장이 난삽하고 <전기>와 <논>의 문체가 동일하여 마치 명문과 같다. 『송고승전』은 사실이 잡다하게 뒤섞여 있어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데, 오래된 비갈문(碑碣文)을 그대로 기재하고 전혀 필삭(筆削)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들은 ‘사서(史書)’라 하기에는 정밀하지 못하고, 승려들의 전기에만 치중하였기 때문에 ‘편전(偏傳)’일 뿐이라고 한다. 비록 세 전을 지은 도선(道宣, 596-667), 찬녕(贊寧, 919-1002) 등의 스님들이 터득한 도(道)와 덕(德)은 넓고 커서 그러한 면에 대해서는 코칸 시렌도 흠모하지만, 그들의 사서(史書) 짓는 재주는 대단치 못하다고 평가하였다.
이에 반해, 지금 그 자신이 쓰는 책은 ‘通史’이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를 본받아 <표>와 <지>를 첨가하였기 때문에 ‘사법(史法)’을 갖추었다고 한다. 책 제목에 ‘석서(釋書)’라는 이름도 한나라 이래로 사서에는 ‘서(書)’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이른바 한서(漢書), 진서(晉書), 당서(唐書) 등이 그렇듯이 ‘석서(釋書)’라 붙인 것이라 하였다. 또한 그는 <표>에서 『춘추』의 법대로 썼다는 설명을 곳곳에 붙이고, 『춘추』의 법에 어긋나서 쓴 경우에는 그렇게 쓴 이유를 대고 있다. 정통적인 역사 서술의 방식대로 이 책을 지었기에 그만큼 이 책이 불교의 역사서로서 완성도가 높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정통적인 역사 서술이라 여기는 춘추필법은 유교식 세계관에서 형성된 ‘예(禮)’라는 잣대로써 가치를 평가하며 기록하는 방식이다. 유교적 역사 기록 방식에 있어 ‘예’라는 구체적인 평가 기준을 적용한다는 것은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지극히 타당한 방법일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의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참으로 애매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불교사서에 있어서 기전체 형식의 사법은 코칸 시렌이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 아니다. 송대(宋代) 1062년부터 1084년에 걸쳐 사마광(司馬光, 1019-1086)에 의해 『자치통감(資治痛鑑)』이 간행되고 여러 역사서들이 활발히 편찬됨에 따라 중국 불교계도 이에 자극 받아 일반 역사서와 같은 체재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석문정통(釋門正統)』과 『불조통기(佛祖統紀)』가 그것이다.
『석문정통』은 1237년에 종감(宗鑑)이 편찬하였고, 사서의 편년체와 기전체를 도입하여 <본기> · <세가> · <전> · <지> · <재기(載記)>의 체재로 구성하였다. 『불조통기』는 1269년에 지반(志磐)이 편찬하였고, 역시 사법에 따라 <본기> · <세가> · <열전> · <표> · <지>의 체계로 구성하였다. 이 책들은 코칸 시렌이 『원형석서』를 완성하기 80-50여 년 전에 이미 간행된 책들이다. 코칸 시렌이 『불조통기』를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석문정통』을 보았던 것은 확실하다. 권27 <지> 「제종」 ‘밀교’ 부분에서 『석문정통』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석문정통』의 체재는 익히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코칸 시렌은 그 체재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았다.
자의적 역사 해석 – 일본불교의 완전성
체재와 서술 방식의 완전성을 통하여 일본 최초 불교통사의 가치를 드높이고자 했던 코칸 시렌은 그 구체적인 내용면에서도 인도불교와 중국불교를 일본과 비교하면서 일본불교의 우월성과 완전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나라(일본)는 천축이나 지나(支那, 중국)에 견주어서 볼 때 좁다. 인도는 진단(震旦, 중국)보다 넓고 진단은 일본보다 넓다. 그런데 인도에는 소승이 많고 대승이 적다. 게다가 95종의 바라문이 있다. 인도에서 대승은 우모쌍각(牛毛雙角)이다. 진단에서는 대승이 많고 소승이 적다. 거기에 유자·묵자·노자·장자 등이 있어서 때를 타고 불교를 업신여기는 자가 많다. 지나에서 대승은 세 발 달린 솥의 한 발이다. 우리 일본은 순수하게 대승이고 소승은 없다. 구사(俱舍)와 성실(成實)은 학문적으로 갖추었을 분이고, 종파를 세우지는 않았다. 유가는 있으나 노자와 장자는 없다. 노자와 장자의 책 또한 학문적으로 갖추었을 따름이고 학파를 세우지는 않았다. 다만 유가에는 여러 학파가 있었는데, 우리 불교와 다투지 않았다. 또 마구니나 마구니를 좇는 백성들 모두 불법을 보호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인도는 땅이 넓으나 대승은 적고, 지나는 땅은 좁으나 대승이 많았다. 이로써 보건대, 우리나라가 작으면서도 대법(大法)의 오묘한 기틀을 순전하게 갖춘 것은 이치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 불도(佛道)에서 근기와 법은 땅이 넓으냐 좁으냐에 따라 정해지지 않는다. 훌륭하구나, 동방의 우리나라는 순수하고 맑은 대승의 땅이로다!
- 「서설」 中
그에 의하면, 인도는 소승이 많아 큰 흠이 있고, 중국은 대승이 많긴 하지만 유교와 도교라는 작은 흠이 있으며, 일본은 대승만 있기에 순수하고도 순수한 곳이다. 일본이 대승의 땅이 된 이유를 그는 『대반야경』의 문구로써 증명하고자 했다. “부처 입멸 후 매우 깊은 반야가 동북방에서 크게 불사(佛事)를 일으킨다”는 문구에서 ‘동북방’이란 바로 일본이고, 이것을 부처가 일찍이 설해 놓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전>에서 승려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을 십도(十度)의 항목으로 구분한 것도 모든 일본인의 근기가 출중하기 때문이고, 이 책에서 나열한 일본 승려들은 모두 보살이 된다는 것이다.
코칸 시렌은 ‘대승’의 교리만 오롯이 존재하는 상태를 불도(佛道)의 순수성이 완전해진 상태로 이해하면서 일본불교의 우월함을 강조하였다. 대승을 최상의 불도로 여기는 입장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소승을 폄하하던 시각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니 이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그의 역사 기술 방식에 있어서 일관성의 결여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위 인용문에서 ‘일본은 순수하게 대승이고 소승은 없다. 구사와 성실은 학문적으로 갖추었을 뿐이고, 종파를 세우지는 않았다’는 총평은 권27 <지> 「제종」의 내용과 모순된다. 본문에서는 구사종과 성실종을 모두 나름의 종지(宗旨)를 가지고 있고 학원(學員)도 있었던 종파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땅의 순수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코칸 시렌의 자의적 해석이 드러난 일례가 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코칸 시렌의 자의적 역사 해석 태도는 <전>의 「전지」에서 그가 보리달마(菩提達磨)와 선무외(善無畏)를 포함시키며 <찬>과 <논>을 덧붙이는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전>에 해당하는 부분은 보리달마가 604년에 일본에 와서 쇼오토쿠 태자(聖德太子)를 만났고 일본에서 죽었다는 내용과, 선무외가 717-724년간에 일본에 왔으나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아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듣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보리달마와 관련된 내용은 『일본서기』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쇼오토쿠 태자와 보리달마가 만나 주고받은 와카(和歌)는 『일본서기』 「스이코기(推古紀)」)에 남아 있으며, 태자가 만들어준 보리달마의 무덤이 코칸 시렌 당시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선무외의 자취에 대해서는 엔랴쿠 24년(805)에 어떤 내시가 “옛날 천축의 스님이 강림하였으나, (사람들이) 가르침을 청하지 않아 한갓 골짜기에 배를 숨겨둔 꼴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윽고 진언(眞言)의 비법이 끊어지고 전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천축의 스님’은 바로 ‘선무외’를 가리켜 한 말이라는 것이다.
보리달마와 관련된 내용은 『일본서기』 자체가 객관적 사실성을 갖추지 못한 책인데다가, 중국의 다른 기록과 비교해 보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임을 우리는 잘 안다. 일본에서 쇼오토쿠 태자가 선종의 시조인 보리달마와 만났다는 전설은 나라(奈良) 시대(710-794)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의 문헌인 『성덕태자전역(聖德太子傳曆)』에 집대성되었다. 쇼오토쿠 태자에 대한 신앙화는 가마쿠라(鎌倉) 시대에서도 계속되었고, 코칸 시렌 또한 이 일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코칸 시렌이 살던 당시 13-14세기 일본에서는 선무외의 일본 방문 진위여부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코칸 시렌은 보리달마와 선무외의 전기 밑에 <찬>을 붙였다. ‘보리달마가 죽은 지 577년이 지나 켄큐우 연간(1190-1198)에 선종이 발흥하였고, 칸겐(1243-1246) 이후로 조사선의 기풍이 크게 일어나 군왕과 신하가 덩달아 호응하고 관리와 백성들이 메아리가 울리듯이 하였다.’ 선무외의 경우, ‘그 자취를 기록한 것이 없어졌지만 내시의 말로 그나마 이어지고 있으며, 엔랴쿠와 다이도오(806-810년) 사이에 밀교가 널리 퍼졌고, 그 후에 여러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가서 불법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 반면, 중국에서는 회창(會昌) 연간(841-846)에 불교 탄압이 극심해 밀교가 흥하지 못하였고 오대(五代, 907-959) 시절에는 거의 사라질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오직 우리 해 뜨는 땅에서는 그 광휘가 더욱 찬란하였다. 그러므로 선무외가 정말로 이 땅에 오지 않았는지를 달마와 더불어 생각해 본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코칸 시렌은 일본에서 선종과 밀종이 흥하게 되었던 원인이 조사인 보리달마와 선무외가 일본에 직접 왔었기 때문이라는 이해방식을 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그는 <논>을 붙여서 답한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선무외가 『비로자나경(毘盧遮那經)』을 갖고 일본에 왔을 때 아직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일 만한 자질과 품성이 부족해서 와슈우(和州)의 쿠메데라(久米寺)에 감추어 두고 떠났고, 그 후 70년이 지나 쿠우카이(空海)가 이 경전을 얻었다”고 한다. 만약 선무외가 가지고 온 적이 없다면, 이 나라에 어찌 이 경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먼저 가지고 왔다는 말인가? 나에게 분명히 말해보라.
- 「전지」 中
이런 식의 역사기술 태도는 확실히 사서를 집필하는 측면에서 볼 때 문제가 있다. 한 나라에서 불교의 한 종파가 흥했으니, 조사가 방문했음에 틀림없다는 논증은 무슨 논리인가. 또한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준거로 삼으면서 그 반대되는 증거를 대라고 한다면, 무슨 얘기인들 증거로 받아들이겠는가. 이쯤 되면 왜 이 책의 저자가 사법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차라리 그가 선종 승려의 입장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법을 전한다는 전등(傳燈)의 방식을 가지고 저술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코칸 시렌은 계속해서 권27 <지> 「제종」의 내용 끝 부분에서도 일본과 중국 불교 종파의 흥망성쇠를 비교하며 다시 정리한다.
중국에서는 삼론종과 밀종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고 유식종과 현수종도 거의 끊어졌으므로 부처를 말하는 자는 오로지 율종·천태종·선종을 전부라고 여긴다. 일본에서는 처음부터 다 전래되었고 아직까지 기울거나 무너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 쇠약해진 적은 있으나, 그것은 그 종파의 무리들 탓이다. 내가 ‘이 땅은 순수하고 맑은 대승의 땅이다’라고 한 것은 결코 꾸며서 한 말이 아니다.
- 「제종」 中
일본불교의 성격을 ‘순수성’ 및 ‘완전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어 했던 코칸 시렌의 태도는 이미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근대 일본불교학자들이 ‘인도는 원시불교, 중국은 각론불교, 일본은 완성불교’라는 도식을 만들어 낸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불교가 인도에서부터 중국을 거쳐 일본에서 완성되었다는 삼국전통사관은 코칸 시렌과 동시대에 살았던 교넨(凝然, 1240-1321)의 『삼국불법전통연기(三國佛法傳統緣起)』에 의해서 성립되었다. 코칸 시렌도 교넨과 같은 불교역사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이 책 『원형석서』를 통해 보여준다. 왜 두 인물에게서 같은 사관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은 가마쿠라 시대상에서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 원(元)의 1274년과 1281년에 걸친 두 차례의 일본 공격은 일본을 대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가, 태풍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극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가마쿠라 막부는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국가가 큰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는 정치·사회·제도 면에서 각종 모순점이 드러나면서도 그 시대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의식이 고취되기 마련이다. 국가와 국민에 대한 정체성이 주안점으로 대두되는 것이다. 그와 발맞추어 이 시대 일본에서는 신도(神道)가 처음으로 이론화되기 시작하였고, 불교에서도 역사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일본불교는 남송이 멸망하면서 더 이상 송의 불교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원의 침략을 오직 일본만 이겨냈다는 자부심도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넨과 코칸 시렌의 자국 중심적 불교사관이 형성되었고, 그것을 그들의 저서를 통해 표출시킨 것이라 생각된다.
인도·중국·일본 중심의 불교사관이 형성된 배경에는 당시 권위 있는 관찬(官撰) 사서였던 『일본서기(日本書紀)』(720)의 영향도 컸다. 근대에 와서 내용조작이 이루어진 부분들이 밝혀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일본 내에서는 비교적 객관성을 갖춘 대표적인 사서로서의 위치에 있다.
『일본서기』에는 한국을 정벌했다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코칸 시렌은 『원형석서』를 저술하면서 <자치표>를 중심에 두었는데, <자치표>는 『일본서기』에서 불교관련 항목을 발췌하여 기록하면서 코칸 시렌이 설명을 붙인 것이다. 그에 따라 한국을 일본보다 낮은 수준의 국가로 표현하는 내용이 <자치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킨메이 황제 13년(552) 10월 13일에 백제의 성왕이 석가모니의 동상과 경전, 논서 등을 보낸 일을 기록하면서 ‘백제의 왕인 신(臣) 명(明)은 삼가 신하인 노리사치를 보내어 황제의 나라에 이 법을 받들어 전하는 것이며, 온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바랄 따름입니다’라는 내용, 츄우아이(仲哀) 8년(199)에 신(神)이 황후에게 신탁을 내려 신라국을 정벌하게 하였고, 츄우아이(仲哀) 9년(200)에 신라의 왕이 소복 차림을 하고 두 손을 등 뒤로 묶고 항복하자, 고구려와 백제의 두 나라 임금도 스스로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였다는 내용, 비다츠황제 6년(577)에 백제왕이 경전과 논서 및 선사 6명을 황제에게 바쳤다는 내용 등이다. 대부분 한국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일본에 예속되어 있었고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불법 전래의 측면도 이러한 맥락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원형석서』의 <자치표>는 도대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신뢰할 수 없는 기록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문제는 가마쿠라 시대에서는 『일본서기』가 권위 있는 역사서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 불교사 편찬자의 입장에서는 그와 같은 역사의식을 그대로 이어 받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일본서기』에서 받은 영향으로 인해, 『원형석서』의 <전>에서도 한국 승려의 전기를 기록할 때,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은 나라로 묘사된다. 예를 들면, <전> 「감진」에서 첫 번째 인물인 백제의 의각(義覺)을 소개할 때, 의각은 ‘일본이 백제를 정벌했을 때 군대를 따라서 일본에 왔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찬>에서 코칸 시렌은 백제의 의각, 도녕(道寧), 도장(道藏)을 함께 묶으면서 조금 상이한 태도를 보인다. <찬>에서는 ‘이 나라에 불법이 처음 전해질 때, 이역의 빼어난 이들이 건너와서 교화를 행하였으니, 전법(傳法)과 혜해(慧解)의 재주를 지녔을 것이다. 대개 엔랴큐(782-805) 이전의 스님들은 시대가 너무 멀어서 자취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겨우 감응한 일이 남아 있어 좀이 먹은 책이나 남은 책에서 간신히 볼 수 있을 뿐이다. 애석하구나, 겨우 이 정도만 남았으니!’라고 하였다. 이 내용으로 보면, 그는 국가에 대한 입장과 불도에 의거한 승려에 대한 평가를 다루는 데 있어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있었던 듯 한 태도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도·중국·일본 중심의 불교사관을 가지고 저술된 『원형석서』에는 여전히 한국불교 수준을 폄하하는 태도가 주를 이룬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의적(義寂, 919-987)대사는 고려와 우리나라(일본)에서 유실된 글을 구하였는데, 먼저 고려에서 그 책들을 보냈으나 여전히 완비되지 못하였다. 초오호오 2년(1000)에 쟈큐쇼오(寂照) 법사가 겐신(源信)스님의 「문장(問章)」을 갖고 송나라에 들어가면서 천태종의 여러 서적들도 지니고 가서 그 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 이때부터 그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에 천태종이 흥성하고 있음을 흠모하였다. 옛날 천축에서 꽤 오래전에 『기신론(起信論)』을 잃어버렸었다. 현장삼장은 당나라 말을 범어로 번역하여 인도에 퍼뜨렸다. 저 고려의 서책들은 온전하게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송나라 사람들은 고려에서 반쯤 감추고 빠뜨린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러다 우리나라의 서책이 이르자 비로소 도수(道邃) 법사가 빠뜨린 게 없음을 알고 놀랐다. 게다가 「문장」을 보고는 이 땅에 사람이 있음을 알고 더욱더 존중하였다. 그 뒤에 법지(法智, 960-1028)는 비구를 우리에게 보내어 많이 필사하게 하였다.
-「제종」 中
중국 천태종에서 회창폐불 사건으로 문헌들이 흩어지자, 잃어버린 서책을 구하고자 고려와 일본에 요청했는데, 고려에서 보낸 책들로는 갖출 수 없었으나, 일본에서 책을 보내자 비로소 완비되었다는 내용이다.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상대적으로 일본불교의 우수성을 드러내고 있다.
코칸 시렌은 일본의 불교통사를 최초로 저술하면서 ‘통사’로서의 완전성을 구비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형식의 완전성을 강조하는데 그치지 않고, 일본불교 자체의 완전성까지 이루어 내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믿음직한 사료로 쓴 『일본서기』의 불완전성과 그 자신의 자의적인 역사해석 및 국가의식으로 뒷받침된 일본불교의 완전성은 일본 불교학자들의 의식세계에서만 유효할 뿐이다. 독자들은 일본인의 자국 불교에 대한 일관성 있는 경향을 일본 최초의 불교통사인 『원형석서』를 통해 재차 확인하는 셈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중세 일본인이 인식하고 있던 불교사에 대한 이해, 일본과 중국·한국 간의 불교 교류, 중세 일본의 불교문화 및 사회풍속 등에 대한 정보를 얻는데 있어서 여전히 의미 있는 자료임에 틀림없다. 특히 문헌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연구하기에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보이는 한국불교사의 측면에서 보면, 한국 도래승의 기록이 남겨진 일본의 옛 문헌들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정천구 선생님의 번역 작업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일본불교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한국불교학계에서 이와 같은 양질의 번역서 등장은 정말 큰 도움이 된다. 번역 작업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지 잘 알기에 정천구 선생님의 노고에 다시 한번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본 원고는 [문학 사학 철학] 2012년 봄,여름 제28,29호에 게재된 것을
약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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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우리 "공부방"은 사실 새로운 글을 싣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이미 다른 잡지나 매체에 실린 글을 재수록하는 것(그 당시에는 그렇게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이 좋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런 글이 자주 있지는 못합니다. 원형석서 서평은 다행히 문학사학철학에서 실린 것을 보았기에 부탁드렸습니다. 원고료도 드려야 하는데, 우리 연구소에 기증해주신다는 뜻을 전했다고 하더군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