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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의 기억 그리고, 귀천歸天>
다만 흘렀기에
거기 소중하게 버렸던 기억 찾으러
터벅터벅 피마골(종로)엘, 인사동엘,
그리고 歸天귀천엘 간다.
거긴, 내 유년,
석 달의 한 번씩 깎던 까까중 머리,
바리캉이 훌치고 지난 민머리에
얼룩얼룩 디디티(d.d.t)묻은 기계충 헌 데처럼,
파이고 으깨진 도로의 옆으로
여기 저기 흠집나 생겨나는
생기가 다한 어정쩡한 도시의 산물.
그렇게 피맛골은 죽어가고,
난삽한 개발시대의 미성숙과 착란.
오래된 과거의 정겹던 기억은
주체도 없는 얇은 상술만 늘어서서
겨우 추수린 추억하나 잃어 싫어진다.
사라진 너(記憶)를 찾음이
내 한 껸 고이 접어 간직했던
천 개의 종이배를 마음바다에 띄워
그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너에게 닿아
소중히 숨겨왔던 비밀을 풀어
응어리로 곪아 사는 상처 도려내고
새 살 돋게 하는 일.
그리하여 내가 버티어 살
충분한 이유를 만드는 일.
그래 가자! 너를 찾으러.
단성사와 피카디리가 있던 종로3가를 걸어서
네가 기억하는, 간직한
그 찌루륵 대며 억지로 돌던 영사기와
빗살 내리는 흰 세로줄이 더욱 선명했던
흑백영화가 상영되던 단성사 그리고,
피카디리는 이젠 잊어야 겠다.
이미 헐리어 역사속으로 사라졌을테지만,
파고다공원과 낙원 상가를 거치면
거기 인사동이 있다.
(밍밍해져 떫은 감상 야기케하는 인사동 거리)
고풍의 멋스런 향기로
예藝 스러움에 꾸벅 절하고 싶던 거리.
지금은 화장하고 분장하고 변장으로
마침내 밍밍해져
떫은 감상을 야기케 하는
변해진 모습이 실망스럽더라도
골목의 속으로 들자.
아직은 옛이 남은, 침침하고 얼키어진 미로.
조붓한 골목과 골목 연쇄, 휘어짐과 꺽임이
관능의여인 성감대 속살 같아,
참을 수 없는 왕성한 에너지순환을 느끼며,
마침내 끝에 이르러
오감이 긴장하는 희열을 맛보겠지.
그래서, 나는 오밀조밀 골목이 연이어진
도회의 후미진 옆구리를 좋아한다.
골목이 없는 도시는
성감대 없는 여인과 같아
아무리 껴안아 봐야
온기 다한 송장처럼
퍼석거릴 뿐일 테니까.
거기 끝에 아무곳이나 들어
탁배기 두주불사斗酒不辭
바람벽에 낙서라도 하면,
어! 자네 웬일인가?
대낮부터 술의 절은 지우知友가,
중광(中光:걸레스님)이,
손 내밀어 반길지 모르잖나.
요상한 거대 공룡도시 서울의 한복판.
개발이라는 굴레에서 용케도 마지막 남아있는
후미진 이 모롱이에서 뜬금없이 쓰윽 나타난
막연한 벗과의 해후이면 술독의 빠지는 일 말고
도대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낮술이면 어떤가
얼큰해지면 느릿느릿 산보하듯,
피맛골 온 통을 헤집고 다녀보자.
(피맛골 모롱이를 날새도록 헤매이자)
피맛골 들어본 적이 있겠지.
인사동에서 종묘까지가 동 피마골이고
종로1가일대(청진동,수송동쪽)가 서 피마골이다.
조선시대 때 종로는 원래 말탄 고관대작들이
위세를 부리며 다니던 거리였다.
해서 서민들은 주로 말을 피해
옆댕이 샛길을 이용했고. 그래서 "말을 피한다"
즉 피마避馬라는 명패가 붙게 되었단다.
조선조 600여년 동안 주로 민초들이 돌아다닌,
사는일이 매양 고달팠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애환과 숨결이 스민.
기왕 온 김에 歸天귀천엘 꼭 들러
아름다운세상 소풍 나왔다 돌아간
천상병 님을 만나자.
(귀천은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4월28일이 11주기(1930∼1993)
부인 목순옥 여사가
귀천과 쌍벽될 만한 미 발표작
달빛을 공개했다.(매스컴인용)
달빛(全文)
"봄이 오는 계절의 밤에
뜰에 나가 달빛에 젖는다.
왜 그런지 섭섭하다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왜 일 까.
10년이 지난 지금,
일전에 내가 주창한 순수純粹는
또 퇴색되고 있는 걸까?
버티기 어려워 호구의 밀려나고 있는 건가.
아닐 꺼다.
내가 본 카페 귀천은
멋모르고 들러서 지껄이는 젊은이들이
꽤나 많아 장사가 잘되고,
위쪽 안국동 쪽에 분점도 열지 않았던가.
물론 돈을 벌어 시인의 박물관도 건립 해
그 체취를 맡음도 좋겠지.
하지만, 무언가 깽겨 옴은??!!
어쨌거나
한 동안 난 귀천엘 가지 못했다.
아린 기억의 저 편
내가 몹쓸 병 걸려 들숨날숨 몰아쉴 때
난 거기서 나보다 4년이나 연상의
한 수녀님을 알게 되었고,
(병든 나의 동정 이였겠지만)
병이 나아가며 우린 많이 가까워 졌었지.
매일 입시공부 한답시고
YMCA로, 뒷골목 종로학원, 제일학원
그리고 인사동과 정독도서관으로 헤매며
정이 익던 시간과 시절
우린 곁에 있음을 감사했고,
지척 손 다음에 있어도
그리워 눈물 글썽였지.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부산 어느 수녀원으로 발령 났다며,
결국, 누구에게도 올 수 갈 수 없음을.
성모의 예속된 영어의 몸임을-
도미노스 데꿈(라틴어)이란
이상한 문구가 적힌 시집 한 권을
내게 건네고 황망이 돌아서던 모습.
그 이별을 맞은 곳이 귀천 이였으니까.
(도미노스 데꿈: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란 의미:
최근에서야 뜻을 알았음.)
청승맞게 내리는 빗물 주렴 너머
베일이 흥건히 젖어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방울이, 빗물방울이
모데스틴(하얀칼라)까지
번짐을 나는 보았지.
비는 더 세게 내렸고,
그 빗속으로 아련히
사라지던 비련의 신비를_
나뉘어 가는 길.
어쩔 수 없음에 시간이 다해도
지금껏 잊지 못하고 찾지 못하고
그것이 지고 지순한
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으로 알아,
빨간 단풍잎 하나 시집 갈피에
고이 개켜 접어 간직하고
한 삶 비밀로 여지 것 살아왔지.
누구나 버릴 수 없는
소중한 비밀 한, 둘
심연 저 밑 앙금으로 간직하고
천연덕스럽게 사는 법.
덤덤함은 먹는 나이의 비례로 더해지고_
아웅다웅 설키어 살다가
문득 고개 돌려 돌아본 시간
선 자리가 하도 낯설어
눈물을 글썽여 본적이 있을 터.
잠시 고개 꺽어 돌아본 과거가
너무 소중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돌아가고 싶다고
소리 치고싶었던 경험도 있을 터.
하지만 살 같이 지나간 시간은
다시는 올 수 없는 평범한 진리에
꺽은 고개 돌려
눈앞에 펼쳐진 희미한 길들을
망연히 찾아 걸어 보지만,
아리게 기억되는 아픈 편린만
심장의 화살촉으로 박혀
뚝뚝 눈물되는 버릇 습관되고
더 이상 사랑은
그 이별의 정점에서 막을 내려,
결국,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_
귀천은 그리 쉽게 찾지 못했다.
중간쯤에 여튼 사각 아크릴간판
검은 붓글씨로 새겨진 귀천歸天은
다른 간판들에 가려 잘 보이질 않아
지나쳐 한참을 가다
"저 여기 귀천이 없어졌나요?"
거의 안국동쪽 다가 한 골동품가게에
물어서 다시 중간으로 내려와
찾을 수 있었다.
(간판과 간판에 가려 찾는데 애먹은 귀천)
(호롱불 지금도 흐릿하고, 어깨 비비고 앉아 무릎 맞대고..)
무심히 들른 귀천엔
호롱불 지금도 흐릿하고,
무릎과 무릎 맞닿고 앉아
차 잔 두 손 바치고
"까르르" 발랄한 웃음 흘리는 젊음이
아름다운 세상 소풍나왔다 간다는
그 님의 심오함을 언감생심焉感生心
행여 근처라도 닿겠냐만
찡그린 님의 흉상 더 미간 찌푸린다.
(찡그린 님, 미간 더 찌푸리고)
여기저기 기웃이며
행여 님 자리
자욱이라도 찾을까
열심히 둘러보지만,
이슥한 하오 여린 봄비 맞고
문지방 넘어와 우산을 접는 젊음만
어깨 부딪쳐 비벼 자리하고,
그 대 없음에 빈 마음.
맥없이 나오는 등뒤로
휑한 바람 한줄기,
부슬부슬 청승떠는 봄비에
소침해진 마음 의탁해 본다.
내 친 걸음,
좀더 거슬러 올라
한 때 지식의 고뇌, 풍류, 기행의 나날들을
쓱쓱 쓸어안았던 "허무"그 가난한 지식인
프로레탈리아의 아지트였던 "시인통신"에도 들러
아주 강한 독설로 "먹물들아 다 와라"라고 외치며,
아직도 남아있을 호기와 객기를 시험해 보는 거다.
거침없이 뱉어내던 시대의 반항적 자유를,
그리고 고뇌와 부질없음의 득도得道를...
그 모든 난해, 난망한 화두에 목숨을 걸던 중생들을
잘도 보듬어 다독이던 쥔장 한귀남(59)여사도
대면해 옛 일화라도 한 수 듣고,
("간 큰 남자 길들이기"라는 책도 펴냄)
(시인통신 여장부와 그 고뇌의 아지트,그리고 바람벽)
다닥다닥 형광 빛 앉은뱅이 간판과
문설주를 밀치며,
천천히 옛 구석구석들을 느리게 애무하자,
메모리가 다할 때까지 피맛골 내부를 저장하는 거다
그리하여 내 풍성하고 아름다웠던 지난날의 과거를
내 후배에게 자식에게 들려주며
하찮은 경제논리와 개발이라는 허울을 쓴 반달리즘,
곧 사라질 정신문화의 거리를 지켜낼 빌미를 주자.
가장 근본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곳의 가면 내 어미 젖무덤 같아
마냥 포근해서 내내 묻혀
기웃 기웃 부벼대고 비벼대고
닿는 곳 들러 편하게 흔들리며,
차 마시고 술에 젖던,
고풍과 품위가 넘쳐 추억되고 싶던 거리
누가 개발이라는 이름 빌어
난삽의 칼질을 해 국적도, 특징도 없는
얼치기 해적의 거리로 만들었나
피맛골(종로통) 온 통이 몸살이다
청진동이, 수송동이, 그리고 인사동 일대가
결코 내가 해결할 수 없는_
추억은 구천을 들고,
시인통신에서 마신 술기가
격하게 역류한다.
비척대는 내가, 비척대는 거리가_
구겨져 난파된 마음바다의 종이배
무심히 빗물에 잠기고,
(멀쩡하던 날씨가 비 뿌리고, 내가 젖고 비척대고...)
난,
기억의 덫 안에서
가만히 잃음의 業報업보와,
잊음의 運命운명을 생각해 본다.
다시는 찾지 않음을_
(무얼고를까 ? 미인은 거리에 넘쳐나고)
(국적 불명의 물건들은 거리를 덮고, 양심은 얼마에 팔까)
<봄비가 나리던 어느날, 인사동의 기억>_ 백암.(2004.4.22)
첫댓글 흩어졌던 기억들이 한없이 모아진다. 인사동. 귀천. 시인통신. 그리고 많은 문우들의 얼굴이 스치운다. 다음주엔 인사동에도 나가봐야 할듯...박씨물고 온 제비에서 인삼 동동주라도 한잔 하고 ...시인통신에 들려 한귀남씨의 구수한 목소리도 듣고 싶고 귀천에서 문여사의 대추차나 유자차도 마시고. 누구와 함께 할까?
시인통신 - 2층 다락방같은 곳에서 맥주 마시던 생각이 납니다. 거기서 형이 <겨울장미>를 멋지게 불렀었는데. 그때 함께 했던 여류 시인들과 소설가들 그리고 다도를 하시거나 도자기를 굽는다는 분들과의 만남에서 형의 화려한 인맥을 느낄수 있었는데. 벌써 3년전 어느 겨울의 일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 인사동 거리가 전혀 낮설지 않고 친근하게 와닿는군요. 많은 추억이 있는 거리지요. 귀천에서 따뜻한 대추차도 마셨고 미술관 가는 뒷골목에서 사찰음식도 먹었었고. 시인을 선배로 둔 덕에 한때 호강하고 다니던 거리로 기억이 됩니다. 화려했던 과거~~~귀국하면 반드시 다시 가고 싶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