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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일 [사순 제1주일]
창세기 2,7-9; 3,1-7
로마 5,12-19
마태오 4,1-11
성경공부를 좋아하면 이단에 빠질 확률이 크다
지금 신천지 교인이 20만 명이 넘고 신천지에 들어오려고 교육받는 학생이 7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신천지에 빠지는 많은 사람들이 젊은 지식층이라는 데도 놀랐습니다.
이는 신천지가 명단을 내놓지 않았으면 누구도 모를 숫자입니다.
신천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지 않으면 됩니다.
모든 이단은 다 성경공부로 시작하고 성경공부로 끝납니다.
따라서 저는 통계는 보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 개신교 신도들이
신천지에 훨씬 잘 넘어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천지에 빠지는 이들이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럴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전에 가졌던 ‘교리’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자신이 가진 교리지식을 확인하고 타인에게 그 교리를 전수하는 수단입니다.
성경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사람의 교리를
자신도 모르게 흡수하여 그 사람 교리에 빠지게 됩니다.
신천지가 성경을 통해 가르치는 교리 중 하나는 ‘거짓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을 허용합니다.
그래야 새 교육생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생들은 자신들이 이미 헤어 나오지 못하게 신천지에 빠졌을 때 쯤 자신들이 신천지에 입문한 것을 알게 됩니다.
이 포섭방법을 쓰기 위해 거짓말의 교리가 허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거짓말의 교리를 그들은 성경으로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려 할 때 “너희나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라. 나는 이번 축제에는 올라가지 않겠다.
나의 때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8)라고 말씀하시고는 갈릴래아에 남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요한 7,10)라고 합니다.
얼핏 보면 거짓말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좋은 의도를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에서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람은 이런 가르침에 바로 빠져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도 예수님을 성경말씀을 통해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마귀가 이렇게 성경을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성경구절을 수긍하시면서도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라는 말씀으로 반박하십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도, 저런 말도 있어서 누구든 그 말씀으로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근거를
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도 있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부모를 미워하라고 하십니다(루카 14,26 참조).
도대체 무슨 말씀이 진리일까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쓰신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때 성경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교회를 믿는다.”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기본교리에서 벗어나 성경을 믿으려한다면 그것을 통해 잘못된 교리를 주입시키려는 마귀의 소행에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가톨릭교리를 믿는 종교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진리이신 주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1381항)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신다고 하셨다가 다시 올라가신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다는 가정 하에서 해석해야합니다.
교리서는 또
“선한 의향(예를 들어, 이웃을 돕는 것)은 그 자체로 무질서한 행동(거짓말이나 비방)을
선하게 하거나 정당화하지 않는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1573항)고 말합니다.
선한 의도에서 하더라도 거짓말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거짓말은 (정직의 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가한 명백한 폭력이다.”라고 합니다.
신천지는 이런 교리가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교리를 성경을 근거로 주입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신자이고 교리를 배웠다고 하면서도 ‘선한 거짓말’은 해도 된다는 식으로 말하면 그 사람 역시 교리를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성경공부를 하면 잘못된 교리에 빠지고 맙니다.
문제는 가톨릭교회 안에도 성경으로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강의하다가 신자들에게 불붙는 영원한 지옥이 반드시 있음을 믿는 사람 손을 들어보라고 하면 10%도 안 듭니다.
지식층으로 갈수록 더 심합니다.
심지어 신학박사학위를 지니신 분들도 장소적인 개념의 ‘불붙는 지옥’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신학생들이 배우고 신자들이 배웁니다.
그렇게 배운 지식으로 성경까지 공부한 선생님들은 성경공부를 통해 자신들의 믿음을
다른 신자들에게 전해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비를 뿌려주시는 분이시라는 성경구절을 제시합니다(마태 5,45 참조).
결국 하느님은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으시는 분이고 그래서 심판도 지옥도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공부를 통해 잘못된 진리가 계속 주입됩니다.
천국과 지옥의 심판 교리는 교리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만약 지옥이 없다고 말하면 지옥에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비웃는 사람이 됩니다.
지옥도 없는데 왜 괜한 고생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교리를 믿으면 가톨릭신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루카 18,8)라고 하신 것처럼, 지금은 교회의 가르침인 「가톨릭교회교리」가
너무도 힘을 쓰지 못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신부님들이 그렇겠지만 저도 책이나 글을 통해 「가톨릭교회교리서」의 내용을
전파하려 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교리서에 있는 내용도 제대로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책에 “우리도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썼다고 많은 이들이 반박을 합니다.
성경에 그런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근거를 교리서에서 찾아야 하겠지만, 물론 성경에도 있습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요한 10,34-36 참조)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으니 본성상 ‘신’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성체는 하느님이라고 하면서 성체를 모신 하느님의 자녀는 인간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이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신학박사들까지도 인간이 본성상 하느님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을 보아야합니다.
교리서는 구원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과 친교를 맺고, 자녀 됨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셨다.’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가톨릭교회교리서」 460)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우리도 하느님 신성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리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일 [사순 제1주일]
창세기 2,7-9; 3,1-7
로마 5,12-19
마태오 4,1-11
알다가도 모를 나
이제는 벌써 흘러간 옛 노래가 되었네요.
젊은 시절 영화 ‘건축학 개론’ 주인공들처럼 ‘마이마이’나 CD 플레이어를 끼고 많이 듣고 부르던 노래 중에 ‘가시나무새’(하덕규 작사·작곡, 조성모 노래)라는 가요가 있었습니다.
‘그때가 아니고 그 이후인가?’
노래가사 내용이 상당히 시적이고 철학적이어서
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려 있습니다.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당신이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당신이 편할 곳 없네
내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당신에 쉴 자리를 뺏고
내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음미할수록 수긍이 가는 가사구절입니다
헤아려보니 참 그렇습니다.
내속에 뭐가 그리 내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때로 태평양보다 더 넓은 마음의 내가 있는가 하면, 때로 송곳 하나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속 좁은 내가 있습니다.
때로 시속 500킬로의 테제베같이 성급한 성격의 내가 있는가하면, 때로 나무늘보보다 더 느긋한 내가 있습니다.
때로 비단결보다 더 고운 너그러운 천사 같은 내가 있는가 하면, 눈빛이며 얼굴이 무섭고 기괴한 사탄 같은 내가 있습니다.
오늘 비록 내가 천사로 산다할지라도 내일 사탄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우리네 삶입니다.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나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인내 또 인내입니다.
심호흡하고 또 심호흡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것입니다.
비우고 또 비우는 것입니다.
수시로 내안의 사탄을 몰아내는 작업입니다
‘엑소시스트’ 비슷한 영화들을 보면 라스트신에서는 언제나 연세 지긋하신 노사제가 사탄과의 최후 대결을 위해 마늘과 성수 그리고 십자가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끔찍한 최후의 일전을 벌입니다.
우리도 내안에 사탄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를 대비해서 늘 준비하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런데 그 준비는 다름 아닌 깨어있음입니다.
말씀 안에 늘 살아있음입니다.
보다 자주 성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안에는 내 평소 모습과는
다른 너무나 다른 또 다른 내가 많이 들어있습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나, 결국 사탄과도 같은 내가 뱀 또아리 틀듯이 틀고 앉아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내 안의 사탄’입니다.
형제적인 진솔한 대화나 부드러운 소통을 통한 문제 해결보다는 극단적 감정 대립을 통해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싶은 폭력성이
내 안의 악령입니다.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룰이 아니라 편법이나 부정적인 방법을 이용한 지름길 역시 악령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모두에게 선익이 되며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공동체 의식보다는 나 홀로 빛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 곧 악령의 얼굴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그저 퍼질러 앉아 울적한 얼굴로 아까운 인생 허송세월하려는 게으른 마음이 곧 또 다른 악령입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이 들 때 마다 수시로 외쳐야겠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마태오복음 4장 11절)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월1일 [사순 제1주일]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된 사순절은 파스카를 향해 정향되어 있다. 이 사순절의 긴 여정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다. 40이란 숫자는 성서에서 볼 때, 하느님과의 만남에 앞서 갖게 되는 특별한 긴장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간 광야에서 헤맨 것(신명 8,2-4), 모세가 산 위에서 보낸 40주야(탈출 34,28; 신명 9,9), 엘리야가 호렙산을 향해 밤낮으로 걸어간 40일(1열왕 19,8)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 다다르는 길이 어느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자신의 주위와 자신의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것이 사순절 동안 우리를 내적 순례를 통해 ‘우리의 과월절 양’(1코린 5,7)이신 그리스도와의 기쁜 만남에로 초대하는 것이다.
복음: 마태 4,1-11: 예수께서는 40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셨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40일 간의’ 체험에 우리의 깊은 관심과 믿음의 눈을 돌리는 것이 좋겠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 ‘비둘기 모양으로’(3,16) 내려오셨던 ‘성령’께서 그분을 광야로 ‘인도하시어’ ‘유혹을 받게 하신다.’ 그런데 이 유혹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17)는 말씀 후에 나오는 것으로 ‘메시아적’ 유혹이다.
사탄은 두 번이나 이것을 확인하려고 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3.5절)이라고 하지 않는가?
당시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명예와 품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무력도 불사하는 강력한 메시아를 꿈꾸고 있었다. 아마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언급한 고통 받는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에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마태 16,22). 그 때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16,23).
이것은 광야의 유혹 장면을 연상케 하고 있다. 베드로가 사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유혹사화는 그리스도의 일생 전체를 압축시켜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까지 계속된 유혹이었다(마태 27,42 참조).
예수님의 유혹은 오랜 단식 후에 빵을 얻는 것과 같은 단순하고 순수한 일로부터 우상을 숭배하도록 종용하는 본격적인 충동적 권유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려고 애쓰는 사람 누구에게나 던지는 유혹적인 발언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특히 사탄이 권력과 부라는 매력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는 완전히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묘한 유혹들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일치로써 이기신다. 그 말씀은 당신이 하시는 모든 결정의 근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정확히 세 번 ‘성경에’(4.7.10절)라는 표현을 하시면서 당신의 결정은 이미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있음을 뜻하고자 한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인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빵’보다도 더 갚진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가 물질적 차원만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메시아사상의 참된 의미에 대한 유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 지금도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빵’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과 나눌 수 있도록 마음을 ‘회개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즉 자신을 나누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배고픔을 없애기 위해 돌을 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제1독서: 창세 2,7-9; 3,1-7: 인간들의 창조와 범죄
1독서는 인간창조 설화와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충실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 그래서 죄를 범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끝까지 충실했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있다. 여기서 구원이냐 파멸이냐에 대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창세 3,3 참조). 그러나 결과가 불행하다. 사탄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하여 그 말씀을 어기도록 하는데 성공한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4-5절). 정말 그들은 그 열매를 먹은 후 눈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그들이 ‘알몸인 것’(7절)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 이상의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꿈꾸었던 ‘하느님과 같이’ 되려는 것은 사탄의 말을 들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의 행동은 죄를 낳게 되었고, 모든 세상을 파멸에로 이끌었다.
제2독서: 로마 5,12-19: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원조들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대립적인 상태를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19절). 이제 하느님의 말씀에 절대 순명하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분이 회복시켜주신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부지런히 이루어 가는 것이 사순절을 잘 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신 장면을 다시 묵상해 본다면, 그 유혹은 예수님께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기까지 계속 괴롭혔던 유혹이었다. 바로 그 유혹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느님의 ‘말씀’에 확고하게 근거하고 신뢰하며 그 유혹을 이기셨듯이 우리도 하느님 앞에 온전히 서 있으려 노력한다면 우리도 능히 그 유혹들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에 합당한 힘을 주실 것이다. 기도 중에 이러한 삶의 용기와 도우심을 청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