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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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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석 및 시 맛있게 읽기 스크랩 망해사(望海寺)에서 처용가를/ 김태수
은하수 추천 0 조회 23 13.11.10 00: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망해사(望海寺)에서 처용가를/ 김태수

 

 

울산 망해사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바람 몇 바다 쪽에서 와서는

잠시 머물다 옹아리 한 타래 풀어놓고는

대웅전을 한 바퀴 돌아 나간다 무심코

푸른 솔바람과 몸 섞고 바다로 간다

 

아직도 동해 바다를 희망이라고 했는가

보지 않아도 안다 적조와 폐유 뒤엉켜 누운 바다

검붉게 시든 돌미역과 이름 모를 바다풀을

아직도 닦아내고 있을 늙은 어부의

굵은 눈 주름을 타고 눈물이 흐를 것이다

 

그 옛날 아련했을 안개와 구름은 어디 갔을까

처용이여 그대의 땅은 온통 공장 굴뚝만 무성하고

매운 연기 지천에 가득하다 병든 들판은 불임 중

저녁답 소슬바람에도 눈을 감는다

미국자리공*의 붉은 대궁에 황혼이 내린다

 

그래, 서울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닐다가

돌아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은 빼앗긴 것은 어찌할거나

 

망해사에서는 끝끝내 바다를 볼 수 없다.

 

*미국자리공-북아메리카 원산의 대표적 공해 식물

 

- 시집『황토마당의 집』(실천문학,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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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태평성대 49대 헌강왕이 울산 앞바다로 행차해 놀다가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지는 바람에 길을 잃어 버렸다. 기상을 담당하는 신하가 동해용의 조화라 좋은 일을 행해 풀어야 한다고 아뢰니 왕이 곧바로 용왕을 위해 그 근처에 절을 짓도록 명하여 세워진 절이 망해사이다. 어명이 떨어지자마자 즉시 먹구름과 안개가 걷혀 이곳의 지명을 개운포(開雲浦)라 하였다. 그런데 그때 절을 세우라는 왕명을 들은 용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그의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헌강왕 앞에 나타나 왕의 성덕을 찬양하였고, 그 중 한 아들은 왕을 따라 서라벌에 들어와서 정사를 도왔는데 그가 바로 처용이었다.

 

 처용은 임금의 배려로 아름다운 아내도 맞고 벼슬에도 올랐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아름다운 아내를 역신이 탐하고 있었다. 그런 현장을 빤히 보고도 노여워하기는커녕 ‘본래 내 것이지만은 빼앗긴 것은 어찌할거나’라며 오히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으니 역신이 처용 앞에 엎드려 다시는 얼씬 않겠노라며 맹세를 했다. 물론 삼국유사가 전하는 설화에 지나지 않지만 그때 처용이 부른 노래가 처용가이고 처용이 춘 춤이 처용무이다.

 

 망해사(望海寺)는 바다를 바라본다는 이름대로라면 온산 앞 바다가 훤히 보여야 마땅한 일인데, 석유화학공단이 조성된 이후 ‘온통 공장 굴뚝만 무성하고’ 매운 연기만 지천에 가득하여 바다경관은 다 잃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폐유와 중금속 등 오염물질이 바다로 유입되어 바다색깔은 탁하기 그지없고,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폐기물과 바다 위를 떠다니는 부유물로 ‘그 옛날 아련했을’ 동해바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재작년 울산 화진초등학교 교장 재직중 정년을 맞아 지금은 고향인 경북 성주로 거처를 옮긴 김태수 시인은 울산에서만 내리 16년 이상 살았다. 시인은 현실적 삶과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하는 꿈들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시 속에 녹아들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는 문단에서의 지난 35년간 한 순간도 민주와 민족을 뇌리에서 지워본 적이 없으며, 시와 시적 자아가 일치하는 체험적 글쓰기로 일관해 왔다. 기교보다는 삶의 진실에 착근해 미래를 지향하는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품이 넓고 따뜻한 시인이기에 공해로 인해 보이지 않는 바다 앞에서도 처용이 그랬듯이 다만 처용가를 불러 역신을 물리고 꿈과 희망을 머금는 것이다.

 

 

권순진

 

 

천년학(대금) - 김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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